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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려은 님의 서재입니다.

라포르리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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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려은
작품등록일 :
2011.07.03 01:44
최근연재일 :
2011.07.03 01:44
연재수 :
20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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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08.05.21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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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La~port Liarta - 16장 불신과 오해 #01

DUMMY

제 16장 불신과 오해 #01



어느덧 하얀 호수마을에도 가을이 찾아왔다. 낙엽이 떨어지고, 산은 온통 노랗고 붉은 빛으로 가득찼다. 날씨도 제법 쌀쌀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땡볕에 피부가 탈정도로 햇살이 따가웠으나, 이제는 외투를 챙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싸늘해졌다. 리리스는 발목위로 떨어지는 붉은 낙엽을 발로 툭하고 찼다. 낙엽은 약간 톡하고 떠서는 그 옆으로 떨어졌다.

리리스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넘어가 이카로스산맥에 노을을 드리우고 있었다. 반대편 하늘도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하아…."

리리스는 한숨을 내쉰다. 연녹색 소녀는 마녀의 집 앞 현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있었다. 소녀는 발밑에 굴러다니던 돌을 팍 하고 걷어찬다. 작은 돌맹이는 소녀의 발에 차여 저기까지 데굴데굴 굴러간다. 소녀는 기다림에 지친 표정이다.

"왜 안와. 아란…."

리리스가 기다리는 이는 바로 아란이었다. 최근 들어 리리스는 아란이 자신과 같이 다니는 시간이 뜸해지자 괜스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요즈음 아란은 리리스보다 루치야와 주로 함께 다녔다. 물론, 취미가 비슷한 둘은 예전부터 붙어 다니긴 했지만, 리리스가 느끼기로는 그것이 오히려 아란과 자신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드는 게 아닌가하고 고민하게 되었다. 확실히 아란의 태도가 예전과는 달라진 것 같았다.

자신을 귀찮아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달까.

"에이…."

리리스는 인상을 썼다. 소녀의 고운 아미가 찡그려졌다. 일부러 나쁜 생각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으니까.

리리스는 현관 난간에 기대어 발을 동동 굴러본다. 그러나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는다. 소녀의 마음이 답답해졌다.

그때,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노파가 불쑥 나왔다.

"흥, 뭐냐. 아직까지 안 온 거냐? 그 망할 꼬맹이는?"

"……."

노파의 투덜거림에 리리스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리리스는 아까 아침에 노파의 집으로 오며 아란에게 말했던 대화를 회상한다. 그땐 분명 꼭 데러 오기로 했었다. 오후에 리리스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갈 때, 그때 와서 꼭 집까지 바래다준다고 확답까지 했었다. 헌데, 해가 산 너머에 걸리는 이 시간까지 소식이 없다.

"허이구~ 내가 예전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지만, 그 녀석이랑 너는 안 어울려. 녀석의 얼굴이 잘생긴 것도 아니고, 덩치가 좋은 것도 아니고, 성격은 완전 소심해 빠져가지고는…. 재목이 못돼. 네가 백번 아깝지…."

마녀가 날카로운 눈을 흘기며 빈정댄다. 객관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란을 깎아내리는 말을 듣자, 리리스는 괜스레 심통이 났다. 안 그래도 아란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마녀가 이죽거리자 기분이 상했던 것이다.

"흐음~ 그럼 자알~생긴 시리우스님이라면 만족하시겠어요?"

그러나 마녀는 눈을 흘기는 리리스를 향해 비웃음을 흘린다.

"흥! 널 가장 빠르고 완벽하게 파멸시킬 남자를 꼽으라면 내가 주저 않고 단연 첫 번째 손가락으로 꼽을 녀석이 그 놈이다. 아, 물론 두 번째는 지금 너의 남자친구인 꼬맹이고…."

"……."

말이나 못하면, 저 확신에 차다 못해 위풍당당함으로 무장한 마녀의 발언에 리리스는 할 말을 잃었다. '시리우스'란 인물에 대해서 저렇게 강한 적대감을 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아니면 원래 그와는 철천지원수라던가.

리리스도 예전에 시리우스를 본적이 있었다. 마녀와의 마법수업때 '참관'이라는 명목을 이용해서 소녀에게 재목이 된다느니, 같이 살자느니, 멋진 여자로 키워주겠다느니 하며 추근덕거리던 이였다.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었다. 노파와 티격태격하는 게 웃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은근히 앙숙인 것 같았다. 올리 할머니와 시리우스는…….

"재수 없는 생각을 하고 있군…."

노파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리리스를 쏘아본다. 이미 소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꿰뚫고 있다는 표정. 거기에 리리스는 당황해하며 시치미를 뚝 떼고 모르는 척 저쪽 하늘을 응시한다. 그러나 드러난 표정을 어쩔 수는 없었다. 노파는 흉측한 얼굴을 더욱 일그러뜨리며 그런 리리스를 다그친다.

"…네가 기다리는 그놈은 아예 안 올 모양인데? 그냥 집으로 돌아가! 내일아침에 족치던지……."

그 마녀의 말을 듣자 리리스는 갑자기 마음속에서 울컥하는 게 있었다. 기다리는 아란은 아직까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괜스레 아란을 향해 그걸 쏟아낸다.

"아~! 증말! 왜 아란은 안 오는 거야! 대체!!"

"흥, 그놈이 그렇지 뭐. 설마 너, 남자라는 한심한 종족을 믿는 거냐?"

리리스는 불안해졌다. 예전부터 몇 번 엄청 늦게 온 적은 있었는데, 약속을 깬 일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안 올 것 같달까.

리리스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그런 생각을 불식시켰다. 사정이 생겨서 조금 늦는 것일 뿐이다. 그래, 오늘도 그런 것일 뿐이다. 애써 그렇게 좋게 생각을 가져간다.

"그건 그렇고 너 정말 생각조차 안 해볼 테냐. 학교 말이다."

문득, 노파가 그런 말을 내뱉었다. 헌데, 소녀의 표정은 그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

"이런 기회 흔치않다. 마도사 '마르가트'의 추천으로 세인트 마리안느 마법학원을 들어간다는 거, 말이다."

'학교….' 오래전부터 마녀가 리리스에게 주기로 했었던, 한 가지 특권.

"…싫어요."

"흥…."

"그럼 아란이랑, 헤어져야 되잖아요."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눈빛은 한참 망설이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도의 세인트 마리안느 학원이라면 제국 최고의 학원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곳의 마법학부는 제국의 마법학원 중에서 확고부동, 최고의 자리에 위치한 학원이었던 것이다.

수많은 제국의 젊은이들이 들어가지 못해 안달하고 있다는 그곳, 그곳에 지금 마녀는 리리스를 넣어주려 하고 있었다.

그곳을 무사히 졸업만 한다면, 소녀의 앞길은 탄탄대로일 터였다. 잃어버린 리리노 남작의 권위까지도 단숨에 되찾아 올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그녀는 그러한 곳을 지금 '아란'때문에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멍청한 것, 고작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런 기회를 발로 차 버리는 게야?"

"……."

"천천히 생각해봐. 간다고 해도, 등록기간은 겨울부터니까. 고작 남자애하나에 네 인생을 염가처분 할 순 없지 않느냐?"

"그, 그래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녀의 말에 리리스의 눈동자는 고민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저 너머에서 아란이 휘적휘적 뚱한 표정으로 그녀를 데리러 왔다.

그 모습에 한참, 학교와 아란사이에서 소녀는 갈등한다. 리리스는 요즘의 그런 아란의 태도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아….'

소녀는 마을로 돌아가는 아란을 따라나서며 그렇게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날 이후로 아란은 리리스가 좀 이상해졌다고 느꼈다. 뭘 해도 잘 웃지 않았고 별 것 아닌 일에도 투덜대는 일이 잦아졌다. 아침에 소녀를 노파의 집까지 데려다 줄때에도 대화한마디 꺼내는 법이 없었다. 아란의 생일날도 그냥 지나갔다. 그냥 '생일 축하해.'한마디로 끝났다.

아란은 황당했다. 왜 갑자기 리리스가 그런 행동을 보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분 좋게 말을 걸어도 시큰둥했다. 그래서 하루는 리리스에게 자신이 뭘 잘못한 게 있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연녹색소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소년은 답답했다.

그러는 동안에 슬슬 겨울이 오고 있었다.


-후아..

입김을 내뿜어본다. 하얀 김이 허공으로 퍼져나갔다.

"꽤 추워졌군."

금발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옷깃을 여몄다. 휘날리는 금발에 푸른 눈동자, 얼굴선이 굵은 준수하게 생긴 소년이다. 훤칠한 큰 키에 흰색코트를 멋지게 차려입은 그 모습이, 뭇 소녀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 만한 인상이다. 소년은 허리춤에 까만 목도를 차고 있었는데,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목도였다. 그런 차림의 소년이 초겨울을 바라보는 날씨에 영주성 문 앞을 나서고 있었다.

"…거의 2년만인가. 마을로 내려가 보는 건…."

그랬다. 금발소년은 다름 아닌 이얀이었다. 예전에 아란과 루치야를 마을소년들에게서 구한 뒤 영주에게 벌로 근신처분을 받았던 그 이얀이었다.

그동안, 이얀은 영주성에 틀어박혀서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검술을 갈고 닦았다. 그 덕분일까? 이제는 웬만한 상급기사와 겨뤄도 지지 않을만한 실력에까지 올랐다.

형들을 훨씬 뛰어넘는 발전 속도였다.

그리고, 이얀 그 자신을 짧은 시간 안에 그 정도수준까지 끌어올린데에는 그 재수 없는 파란 광대 녀석과 그의 제자이자 자신의 '친우'인 아란의 공이 컸다.

"잘 있을까. 그 자식은……."

아란을 떠올리는 이얀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푸른 검사에 대한 분노와 아란에 대한 배신감이 이얀을 급속도로 성장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게다가 지금 이얀은 아란에 대한 호승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잘난 스승에게 배운 아란 녀석은 얼마큼 강해졌는지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었다.

"…잘 있지 않으면, 곤란해. 아란, 네 녀석의 잘난 콧대를 꺾어버리려고 내가 이때까지 미친 듯이 검술을 갈고닦은 거니까 말야."

이얀은 그렇게 혼자서 중얼거리다가 영주성문을 나서 사냥길 쪽으로 향했다. 곧장 마을로 내려갈 셈이다. 금발머리소년은 흰 코트자락을 휘날리며 그렇게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루치야는 시위를 놓았다.

-피잉~!

-팍!

활을 떠난 화살은 과녁의 정중앙에 박혔다. 과녁이 파르르 떨린다. 루치야는 재차 화살을 재어 활에 걸고 시위를 당겼다. 루치야는 오랜만에 마을 뒷산에 있는 공터에서 활 연습을 하고 있었다. 매일 저택의 수련장만 이용하다가 이렇게 가끔 밖으로 나오니 기분은 좋았다.

요즘의 루치야의 생활은 오전의 수련, 오후의 독서, 저녁의 수련 이런 식으로 한 번의 휴식과 두 번의 수련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혼자 훈련량을 조절해서 하는 것이었지만,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스승님에게서 편지가 왔다. 편지를 보니 스승님은 잘 지내고 계신것 같았다. 급한 일이 생겨 제도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던 스승님, 일이 곧 끝나시면 다시 오니까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그런 내용이었다.

사실, 성실한 루치야는 웬만해선 수련을 빼먹는 일이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 지금도 연사를 연습 중이었다.

다시 시위를 놓는다.

-피융~!

-팍!

그리고 다시 순식간에 재장전. 발사..

-피잉~! 팍!

-피잉~! 팍!

-피잉~! 팍!

모두다 과녁 한가운데를 관통한다. 깔끔한 실력, 커다란 활을 다루는데도 군더더기 없는 매끈한 자세다. 스승님이 보셨다면 훨씬 나아졌다고 칭찬해 주실만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루치야 자신이 생각하기로는 아직 많이 모자란 것 같았다.

문득, 아란생각이 났다. 자신과 같이 기사의 꿈을 꾸고 있는 아란, 요즘 그 아란이 검술 연습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기사가 되기로 약속까지 했는데, 수련에 박차를 가해도 모자를 판에 검을 놓다니, 그러나 물어봐도 아란은 괜찮다는 대답만 반복했다.

그러자, 루치야는 반신반의 하면서도 '뭔가 방법이 있겠지.'하며,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루치야는 아란을 믿었으니까. 아란이 이유 없이 검을 놓았을 리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요즈음 아란은, 리리스와 함께, 공부를 하는 것 같았다. 뭔가 그쪽으로 방법을 찾은 건가.

그러고 보니, 요즘 아란이 무던히 리리스를 쫓아다니는 것 같기도 했다. 잘 안 되고 있는 걸까. 아란과 리리스.

저번에 보니 리리스가 많이 힘들어 하는 것 같던데, 언제한번 리리스와 진솔한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가슴 아프지만, 루치야는 기왕 둘이 사귀는 거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흑발의 소녀는 다시 활을 당긴다.

-부스럭

그때, 공터 한쪽에서 수풀이 움직인다. 루치야는 반사적으로 화살 끝을 그쪽으로 돌렸다.


"아름다워…."

수풀뒤쪽에서 검은머리소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소년이 자기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렸다. 그 소년은 금발에 푸른 눈, 하얀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바로, 영주성에서 방금 내려온 이얀이었다.

금발소년은 우연찮게 소녀가 활을 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맨 처음에는 누가 이 외진 숲 속까지 와서 난리를 치고 있는 건지 호기심에 슬쩍 훔쳐봤다. 하지만, 소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자기의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허리까지 찰랑거리는 흑단 같은 머리카락, 새하얀 피부와 부드러운 눈매, 오똑한 콧날과 조그마한 분홍빛입술은 소녀를 아름다움을 넘어 신비스러워 보이게까지 했다. 그리고 딱 몸에 달라붙은 용병슈트가 소녀의 풍만한 몸매를 여과 없이 드러내주고 있었다. 그야말로 너무도 완벽한 소녀였다.

-핑~ 핑~ 핑~

그렇게 넋을 잃고 소녀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소녀가 화살 3발을 연달아 쏜다. 이얀은 깜짝 놀랐다. 활에 조예가 없는 이얀이 봐도 그건 보통실력이 아니었다. 게다가 모두 과녁의 중심을 꿰뚫는다. 정말 멋지다고 속으로 생각해버렸다.

이얀은 갑자기 소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졌다. 소녀의 정체가 누군지 궁금했다. 외부인 인가? 아니면 용병슈트를 입고 있으니 용병? 자신이 알기로, 저렇게 아름다운소녀는 하얀 호수마을에는 없었다.

딱 보니 자신과 비슷한 또래다. 그중에 저 정도의 예쁜 외모를 가진 이는 손가락으로 꼽아봐도 없었다. 그렇다고, 리리스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얀은 직접 알아보기로 했다. 소년은 조심스레 수풀을 헤치고 공터로 나왔다.

-부스럭

-처억!

소녀의 화살 끝이 반사적으로 이얀을 향해 겨누어진다. 그러자, 이얀은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런이런, 결례가 많았군요. 레이디의 모습을 수풀 속에서 훔쳐보다니, 그대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그런 것이니 양해를 바랍니다."

느끼한 말투. 하지만, 재수 없게도 금발벽안의 잘생긴 이얀이 그런 말을 하자 은근히 어울렸다. 수풀 속에서 나온 게 사람이란 걸 인지한 검은머리소녀는 이 눈앞의 훤칠한 소년에게서 활을 거둔다.

"……."

"여기 자주 나오시나요?"

"……."

이얀이 눈웃음을 치면서 말을 건네어 보지만, 묵묵부답. 대답이 없다. 이얀은 고개를 갸웃한다. 과묵한 소녀라고 생각되었다. 이얀이 널려있는 화살들과 소녀의 가방을 보면서 묻는다.

"어여쁜 레이디, 여기서 활 연습을 하시나보죠?"

"……."

소녀는 이얀의 물음에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뎅 뎅..

그때 마침, 정오를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온다. 그러자, 소녀는 이얀을 무시하고 주섬주섬 널려진 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무안해진 이얀이 다시 한 번 물어본다.

"…저…."

"아뇨…."

그제서야 한마디 하는 소녀, 눈앞의 소녀가 늦게나마 반응을 보이자 신이 난 이얀 다시 말을 건다.

"호오, 그럼 혹시 이 근처에 사십니까?"

"…네…."

화살을 챙기던 소녀는 그렇게 대답하며, 가방과 활대를 어깨에 울러 멘다. 이 근처에 산다고? 이얀은 그 의외의 대답에 의아해진다. 이 주변에 저런 미녀가 있었던가. 금발소년은 속으로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

"…그럼 전 이만, 바빠서…."

"에?"

소녀는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이얀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가버린다. 그러자 당황스러워진 이얀.

"…아, 저! 자, 잠깐만요."

소녀를 불러 세워본다.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다.

"……."

그러나 소녀는 관심 없다는 듯, 그대로 수풀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아, 가버렸다…."

이얀은 그 소녀의 싸늘한 태도에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투덜거린다.

"쳇, 뭐야. 비싸게 굴기는…."

그러면서도, 금발소년은 그 검은머리소녀가 누군지 매우 궁금해졌다. 누구지? 저 정도의 미모를 가진 여자라면 자신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분위기가 비슷한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설마… 루치야…!?"

이얀은 그렇게 나직이 읊조리며 소녀가 사라진 수풀 쪽을 돌아본다. 그러나 그녀는 가고 없다.

"에이,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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