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무인에게 나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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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군의 무공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선문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사자림은 선문의 분파로, 도군은 가장 중요한 태허일기공과 천둔검결만은 전수받지 못했던 것이다.
기예만으로 따지자면 한 수 밑지는 바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도군이라는 '무인'이 한 수 밑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 세월동안 도군이 쌓아온 내공이 얼마겠으며, 무공의 깊이는 또 얼마나 깊겠는가. 제아무리 천무지체라고 해도 백여 년간의 시간 동안 무공을 연마한 강호의 절대고수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비무를 하자고요? 여기 특실이잖아요. 부서지면 어떻게 물어내려고… 그리고 저 어깨를 다친데다가 되게 피곤한데요. 오늘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시잖아요.”
장현민이 떨떠름한 어조로 대답했다.
도군이 무심하리만치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건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적이 어디 사정 봐 주고 찾아온답니까? 피곤할 때 적을 맞이하신다면 오늘은 말고 다음에 싸우자고 말할 생각이십니까?”
“…….”
장현민은 물끄러미 도군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째서인지, 도군이 평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엄숙하고 자애롭지만, 동시에 차갑도록 냉랭하다. 무인이 무공을 대하는 마음가짐은 본래 이처럼 무거운 법인 것이다.
“다만 제가 한 수 무르기로 하지요. 이는 어깨의 상처와 피로를 감안해서가 아니라 무공의 고하가 나뉘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가 한 손을 쓰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아니, 그것만으로는 안 되겠군요.”
말을 마친 도군이 뭐가 못마땅한지 미간을 찌푸렸다가, 발로 크게 한 차례 원을 그렸다.
“보법에도 제한을 두겠습니다. 저는 이 반경을 벗어나지 않지요. 다만 말씀하신 대로 이곳은 특실이니, 아무것도 상케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장현민의 표정이 조금씩 딱딱하게 굳어갔다.
물론 상대가 사질이다 보니 흉성이 일어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장현민의 마음에 찾아든 것은 오히려 호승심에 가까웠다.
‘이건…….’
장현민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왠지 무시당하는 기분인데.’
장현민 본인도 자신의 마음 속에 이런 기질이 있는 줄은 알지 못했다.
호승심이라니. 자신이 이렇게 무공에 대해 자신감이 있었던가?
무공을 그저 적의 손에서 나를 구해줄 무기이자, 남에게 건넬 수 있는 도움의 손길, 그리고 나를 돌아보는 명상의 방편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나를 돌아보는 명상의 방편이라…….’
장현민의 머릿속에 문득 주화입마에서 벗어날 때의 상황이 떠올랐다.
그때만큼은 무공보다 마음의 검을 먼저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주화입마에 대한 생각은 이내 사라져버렸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바로 호승심이었다.
“…….”
침대에 앉아있던 장현민이 물끄러미 도군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장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강천일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혀를 끌끌 찰 뿐이었고, 제갈경은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상황을 바라볼 뿐이었다. 서일중은 ‘천무지체의 무공을 직접 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쿵.
장현민의 신형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작은 충격음이 들려왔다.
장현민이 침대에서 쇄도하여 벽운장의 반선수(半仙手)를 펼친 것이다.
뒷짐을 진 도군이 느긋하게 수도(手刀)를 세워 장현민의 반선수를 대응해갔다.
쾅, 콰쾅!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이십여 초가 흘러갔다.
언뜻 보기에는 그다지 치열해보이지 않았을지 모르겠으나 사정권 내의 공기는 그야말로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도군은 말할 것도 없고, 장현민의 무공 역시 상승의 경지에 접어들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마지막 한 수에는 도군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공력이 실려 있었다.
“흡?”
장현민의 내력을 짐작한 도군이 팔할의 공력을 끌어올려 그의 벽운장을 막았다.
바닥이 가볍게 울리더니, 근처에 있던 화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장현민은 떨어지는 화병을 발로 받아내는 동시에 또다시 반선수를 펼쳐내었다.
사자십팔도를 수도로 펼쳐 반선수를 막아낸 도군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무슨 내공이 이렇게…….’
정말로 밥 대신 영약이라도 먹고 산 건가.
도군의 미간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장현민은 장현민대로 깜짝 놀라고 있었다.
‘그야말로 철벽이구나.’
사람이 아니라 산을 상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군에게서 설악산이나 지리산처럼, 온유하면서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묵직함이 느껴졌다.
도군의 모습이 문득 거인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떤 공격을 가해도 너끈히 받아낼 것 같은…….
‘그렇다면 반대로!’
장현민이 이를 질끈 깨물고는 태허일기공을 한가득 끌어올렸다. 여덟 갈래로 나뉜 기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장현민의 장심으로 향했다.
한가득 실린 공력과 달리, 장현민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도군의 공력을 받은 후, 자신의 공력을 거기에 더해 내뻗는다.
“헛! 이건…….”
대경한 도군이 눈을 부릅떴다.
도군 대신, 팔짱을 끼고 비무를 관전하고 있던 강천일이 입을 쩍 벌리며 외쳤다.
“태청산수?!”
태청산수는 무당의 절학으로, 그 무리(武理)가 깊어 장로들도 쉬이 펼치지 못한다는 고절한 공부였다. 고작 19살 소년이 펼칠 수 있을 만한 무공이 아닌 것이다.
아니, 무엇보다 선문의 무인이 어찌 무당의 비전을 펼친단 말인가!
“태청산수가 아니오, 영감.”
신안(神眼)이라고 불리는 서일중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턱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만무자 홍개의 전서에 없는 무공을 보는 것은 그의 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태극권의 무리도 섞인 것 같고, 어? 저 보법은 화산(華山)의 공부 같은데? 남파(南派) 도가의 흔적… 아니, 북파(北派)인가? 모르겠다, 모르겠어…….”
혼잣말을 주워섬기던 서일중이 침을 꿀꺽 삼켰다.
불현듯 날선 파동이 덮친 탓이었다.
드드드-
그저 춤을 추듯 가볍게 받고 밀쳐내는 것 뿐인데 장내가 부르르 떨려온다.
경력이 더해지고 더해진 끝에 이제는 거력(巨力)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후우우-”
길게 한숨을 내쉰 도군이 사자십팔도 중, 섬전도은의 초식을 펼쳐나갔다.
말하자면 장현민의 초식의 빈틈을 찌르는 것인데, 흐름을 망가트리지는 못해도 그간 쌓인 공력만은 해소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도군의 의도대로 되었다.
“엇?!”
장현민이 다급히 경호성을 토해내었다. 공력의 흐름이 끊어지며 그 절반가량이 자신에게로 쏟아진 탓이었다.
흘려내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그랬다가는 주변의 기물이 박살이 나게 생겼다.
장현민은 검결지를 맺은 후, 유검세를 펼쳐 공력을 해소해나갔다. 운리미풍보를 역으로 펼쳐 떨어지는 화병이나 벽걸이 시계 등을 받아낸 장현민이 가볍게 진각을 밟더니 강맹할 정도로 매서운 보법을 밟아나갔다.
강천일과 제갈경이 눈을 부릅떴다. 서일중 역시 마찬가지, 버릇처럼 담배를 한 대 꺼내어 만지작거리던 그는 깜짝 놀라 담배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마왕퇴, 섬광첨…….”
한때 컨테이너 트럭에서 겨루었던 하회탈의 무공.
마운수(魔雲手)!
서일중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변해갔다.
“마교의 무공!”
정파의 무공과 마교의 무공은 그 근본 무리부터 다르거니와, 내공의 운용법에도 어마어마한 차이가 난다. 그 두 개를 동시에 펼칠 수 있다니, 도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정마의 무공을 어찌 한 몸에 지닌단 말이야?”
하지만 눈으로 보고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심지어 장현민은 사자십팔도까지 흉내내고 있었다.
“무영도뢰(無影刀雷)? 으하하! 과연, 과연!”
도군이 껄껄 웃으며 똑같은 초식, 즉, 사자십팔도의 무영도뢰를 펼쳐나갔다.
쿠웅-
두 개의 수도가 마주치자 거대하다기보다는 둔중한 충격이 일어났다.
장내에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방금의 일격으로 비무가 끝난 것이다.
“컥, 커억!”
장현민이 이내 허리를 숙이고 쿨럭쿨럭 기침을 토해냈다. 도군의 손속에는 자비가 숨어있어 내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경력의 여파가 장기에 파고드는 것만은 막지 못했던 탓이었다.
도군이 눈을 지그시 감고는 뒷짐을 졌다.
“후우우-”
“졌… 졌습니다.”
장현민이 힘겨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내상을 입은 것은 아니니 재차 공격을 가해볼 수 있겠지만, 더 이상은 싸울 이유가 없었다. 도군의 수도는 하나의 사물도 망가트리지 않았으나, 자신의 수도는 화병에 꽂혀 있던 꽃망울을 꺾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자신의 패배였다.
도군이 나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직 부족하십니다, 막내 사숙.”
천천히 눈을 뜬 도군이 위로하듯 장현민을 바라보았다.
장현민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도군 사질은 강호의 절대 고수로, 당장 무공을 익혀 온 시간부터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난다. 어찌 보면 자신의 패배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부족하다’ 라는 말이 가슴 아프게 다가올까.
장현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예, 제가 졌어요.”
“허허, 이런. 제 말뜻이 잘못 전해졌군요. 막내 사숙께서는 무공에서 진 것이 아닙니다.”
도군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예?”
의외의 말에 장현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군이 뒷짐을 진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허! 말재주가 없으니, 원. 저는 사숙과 비슷한 내공만을 사용했고, 한 손은 쓰지도 않았으며, 보법에도 제한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이기고 사숙께서 패하셨겠습니까?”
“그거야 제가 부족해서…….”
“아닙니다. 막내 사숙께서는 오직 저만을 보셨고, 저는 이 방 전체를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막내 사숙은 무공만을 보셨고, 저는 세상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방 전체를 보지 못해서 꽃을 꺾고 만 것이라는 뜻일까?
장현민은 도무지 도군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도군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자기만의 방식대로 마교와 맞서겠다고 하셨지요? 좋습니다. 사숙께서 가볍게 생각하신 끝에 결론을 내린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저 역시 막아 설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그 길을 걷는 방법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것이 많겠군요.”
“그 길을 걷는 방법?”
“어찌 그리 조급하십니까?”
도군이 마치 스승님처럼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장현민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천지만물에는 흐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낱 인간의 몸으로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것을 따르는 것을 순리라 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역리라 합니다. 막내 사숙께서는 순리를 좇으려 하나, 동시에 그것을 통제하려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시간에 쫓기는 것처럼…”
"……."
장현민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도군이 진지한 얼굴로 재차 질문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어찌 그리 조급하십니까?”
장현민의 마음에 한 가지 화두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 작가의말
때로는 여유가 필요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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