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걱정하며 숙인다고 하여 나아지진 않는다
119화 걱정하며 숙인다고 하여 나아지진 않는다
“뭔가 부산스러운데?”
윤휴는 한양에 들어설 때는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궁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변한 걸 느꼈다.
본디 궁이라는 곳이 평범한 거리와 비교를 불허하는 곳이긴 하나 그를 감안하여도 지금 상황은 뭔가 달랐다.
“오, 희중이 아닌가.”
아는 체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거기에는 이미 송시열을 통해 알게 된 김경여가 있었다.
이미 몇 번이고 신세를 졌기에 나름대로 교분이라 할 것도 있는 사이인 그를 본 윤휴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
“그간 잘 계셨습니까.”
“나야 별거 없지. 하지만 자네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지?”
다 안다는 듯이 김경여가 말하니 윤휴는 속내를 찔려 살짝 부끄러움을 드러냈다.
“흠흠.”
“하하, 그렇게 할 거 없네. 외지에 다녀와서 오늘 궁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네와 다르지 않을 거야.”
달래듯 말한 김경여는 문득 지금 제물포에서 있을 일에 윤휴가 상당히 흥미를 느낄 거라 여겼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전에 영보와 같이 상소를 올렸었지?”
“그렇습니다.”
김경여가 묻는 말에 윤휴의 머릿속에서는 그 상소의 시험장이자 본이 되어야 할 영변부 일이 떠올랐다.
그 일을 떠올리니 못내 속이 쓰린 기분이 든 그는 애써 그 기분을 다스렸는데, 이러한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김경여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지금 제물포에 상인이 하나 찾아와있네.”
고작 상인 하나 오는 일이 무에 대순가 싶었던 윤휴였으나 이어진 말은 그 생각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듣자 하니 명도 청도 왜도 아닌 나라 출신이라고 하더군. 배도 우리가 쓰는 것과 많이 다르다고 하고.”
“그거 진짭니까?”
“내가 자네에게 이런 걸로 거짓말해서 무엇하겠나? 이 일로 상께서 좌승지 영감을 보내셨네.”
이미 그런 이를 보긴 했으나 이번에는 아예 나라 바깥에서 찾아온 이가 있다고 하니 윤휴는 흥미가 크게 솟는 걸 느꼈다.
“서둘러야겠습니다.”
“서둘러?”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서두른다는 말에 되물으니 윤휴는 답도 하지 않고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최대한 빨리 걸음을 놀렸다.
그 모습을 남아서 지켜보던 김경여는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 따름이었다.
***
“전하, 제물포에 외인이 찾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소. 그 사정을 자세히 캐기 위해 좌승지를 보낸 참이오.”
찾아와 묻는 대제학 이식의 물음에 나는 숨길 것이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사실 나는 이 일을 어떻게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어디 나라에서 정식으로 찾아온 것이라면 정식으로 대신들과 논해서 수교여부를 가리겠지만 이 시대 서역, 유럽은 이른바 대항해시대다.
이 시대에 이곳까지 찾아온 놈이 국가의 대표일 리는 없다. 대표를 사칭한 상인이라면 모를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찾아온 자는 자신이 어느 나라를 대표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래도 조금은 봐줄 면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소신이 듣자 하니 그자가 흉흉한 화물을 실어 왔다고 들었습니다.”
저들이 어떠한 화물을 싣고 있는지는 이미 제주 목사 이시방이 올린 장계로 알고 있었다.
당상관에 해당하는 이들에게는 이미 이를 알려주었기에 이식이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가 보이는 반응은 좀 이상하게 보였다.
“흉흉한 화물? 화포를 이름인가?”
“조총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글쎄? 내 생각이 맞다면 아마 그건 조총이 아니라 다른 것일 거 같은데.
“그것이 무엇이 흉흉하다고 하는 것인가? 들으니 그자는 전에 일본이 소란할 때 오가던 이라고 하였다. 물론 그들이 이제는 난을 일으킴이 없다고 하나 본디 싸우기를 좋아하는 이들이니 그런 것을 탐내어 가지고자 하여도 이상한 일인 아니지.”
“저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자가 조선에 들어와서 거래하고자 하는 자체가 위험함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위험하다고?”
이식이 하는 말에 되물으니 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 나라는 전쟁이 끝나고 불과 오 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황제국이라 말하며 자신들을 높이는 이들 또한 여전히 이 나라에 얼마간 있음을 기억하여 주십쇼.”
이식이 하고자 하는 말,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쉬이 알아챈 나는 슬쩍 그에게 물었다.
“그건 대제학 본인의 생각이오, 아니면 대간이 모은 생각이오?”
“대간들은 물론이고 몇몇 신료들과 함께 논하여 우려한 일입니다.”
간단히 말해 대표로 총대 메고 왔다는 말이었다.
잠시 동안 나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나 한편으로는 너무 과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나는 그대들이 청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상께서 이르신 것처럼 소신들은 언제고 그들을 물리치고 내어 보낼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잠시 듣는 이가 없는지 걱정하듯 주변을 살핀 이식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국방을 강하게 하고자 하는 일은 좋으며 바라 마지 않는 일입니다. 허나 소신은 그것이 저들의 눈을 나라에서 내어 보낸 다음에 할 일이라 여깁니다.”
내게는 굳이 감출 것이 없다고 하듯 이식의 말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솔직함이 마냥 좋은 일은 아니라고 하듯 이어진 말에는 숨길 수 없는 걱정과 두려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 섣불리 군사를 준비하는 일을 하면 저들의 눈에 보이며 청에 전해지며 결국은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다시 전쟁을 벌여보아야 정묘년과 병자년의 일이 다시 한번 벌어질 뿐입니다.”
그렇게 말한 그는 주저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내었다.
“이리 말하는 것은 정녕 불충하고 부정한 일이나 어쩌면 이번에는 그보다 나쁜 결과가 있을 수도 있다 여깁니다.”
“정말 전쟁이 다시 벌어진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너무 과한 우려가 아닌가 싶소만.”
“화기를 늘리고 국방을 단단하게 함을 저들이 곡해함이 두려울 따름입니다. 혹은 적당한 구실로 사용될지도 모릅니다.”
누가 들으면 이식이 척화가 아니라 주화에 가까운 인물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대제학.”
“예, 전하.”
“걱정하며 숙인다고 하여 나아질 것은 없소.”
“......”
내 말에 이식은 대번 입을 다물었다.
물끄러미 그를 보던 나는 그에게 다시 말했다.
“그리하여 안녕을 취한다? 분명 그 또한 길이라 하겠지. 누군가는 평화를 위한 훌륭한 처신이라 하고 누군가는 와신상담하니 당연히 감내할 일이라고 할 수도 있소. 허나 그래서는 끝에 뭐가 남겠소?”
“......나라가, 종묘와 사직이 남지 않겠습니까.”
“틀렸소이다.”
숙이는 것을 나쁘다고 할 생각은 없다. 분명히 말해서 그러한 일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저 강한 자의 아량에만 기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영원히 강자와 약자가 변하지 않는 현실만 남을 뿐이오. 옛부터 말하듯 상대와 말로서 통하고 논하기 위해서는 나만이 아니라 상대도 그러한 생각을 품어야 하는 법. 그러나 무도한 자들은 언제고 강함을, 만만치 않음을 보이지 않으면 말이 아니라 창칼로 인사하고 대화하려는 이들뿐이오.”
잠시 말을 멈춘 나는 이식을 보면서 물었다.
“대제학은 설마하니 청나라, 아니 명나라나 일본에서 지금 우리와 이렇게 교제하는 것이 대화의 결과라고 생각하시오? 임진년의 도움은 감사한 일이나 국초부터 명은 우리 조선을 쉬도 없이 흔들었소. 그리고 왜? 지금 그들과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은 칼을 들고자 하던 이들이 패망하였기 때문이오.”
“......송구합니다. 그러나 소신의 생각을 부디 흘리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연이은 말에도 이식은 그다지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저 과한 걱정이지만 그는 물론이고 그를 앞세운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이 간극을 메울 방법은 없다 여긴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음에는 남겨두지. 이만 물러가시오. 허나 내 생각은 여전하오. 고작 배 한 척, 거기에 조총이 있으면 얼마나 있고 화포가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그러시오? 그런 것으로 청나라가 우리를 위협으로 여긴다? 하, 그러면 이번이야말로 그들은 그릇된 판단으로 우리와 공멸할 것이오.”
내가 공멸이라는 말을 입에 담아서 그런가 이식은 어두운 안색을 좀처럼 밝게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님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말을 입에 담았다.
“또한 그들은 내어 보냄보다 곁에 둠이 더 가림에 적당하오. 사람이 대낮을 당당히 도끼를 들고 다니면 나무를 패러 가는 것이라 여기나 야밤에 그러하면 이상하다 여기며 의심하는 법. 저들을 내어 보낸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으니 경계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소이다.”
내가 이르는 말에 주저하던 이식은 잠시 고민하더니 일단 물러날 생각인지 사죄하는 말을 입에 담았다.
“부족한 말로 상의 심기를 어지럽혔나이다. 부디 이 어리석은 자를 용서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대의 말은 분명히 말해 내 심기를 어지럽혔으나 그 또한 나라를 위한 것이었으니 담아두지 않을 것이오. 이만 물러가시오.”
“예, 전하.”
이식이 물러나 나가니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사람이 찾아왔음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외조에서 좌랑 윤휴가 뵙기를 청하였나이다.”
“외조에서라. 그러고 보니 벌써 그런 시기로구나. 들라 하라.”
내 말에 몇 차례인가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는 윤휴가 들어와서 예를 갖추었다.
“전하, 외조에서 하는 일을 보고하러 찾아뵈었습니다.”
“먼 길을 매번 오가느라 고생이 많다. 무언가 특별한 일이 있었는가?”
별다른 기대나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의례적으로 물은 물음에 불과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청나라 친왕 가운데 하나가 전날 전장에서 전사하였다고 합니다.”
“친왕이 죽었다?”
그러고 보니 이즈음 명나라와 전쟁으로 몇인가 청나라에서도 이름 있는 사람들이 죽었음이 떠올랐다.
당장 조선에 머물고 있는 요토도 원 역사에서 이 시기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고 보니 요토는 조선에 머문 덕에 살았구나.
“애신각라 호격, 저들의 말로 아이신기오로 호오거라 하는 숙친왕이 명나라와 전쟁하던 중에 죽었다고 합니다.”
호오거가 죽었다.
그 말에 나는 무언가 뒤틀렸음을 직감했다.
본디 호오거는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도르곤과 섭정왕으로 힘겨루기를 하나가 정치적으로 패배, 실각과 죽음을 맞이하는 운명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몇 년 일찍 전장에서 죽었다고 하니 이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 잠시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서 한 가지 가정이 떠오르며 이 일이 크게 갈릴 수 있음을 깨달았다.
산해관을 청나라가 넘어서 모든 걸 얻으면 나쁜 일이 되기 쉽고, 그렇지 못하면 좋은 일이 될 터였다.
당장은 모르지만 동시에 마침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세자가 이미 조문을 하여 도리를 다했으리라고 생각 하나 이런 것은 직접 표현하는 것이 좋은 법이다. 돌아가면 따로 사람을 보내겠노라 일러라.”
“예, 전하.”
언제나와 같은 대답을 들으며 잠시 생각하던 나는 문득 윤휴를 보며 다른 생각이 들었다.
“......가만있자. 그대는 본디 송시열과 함께 내게 교역에 대한 상소를 올렸었지.”
“그러합니다.”
“말은 누구나 전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미욱한 소신은 상께서 어떠한 말씀을 하시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정말로 모를까?
하긴, 그가 정말로 모르든 아니든 상관은 없다.
어차피 난 생각을 정했고 윤휴는 내가 내미는 시험을 봐야 한다.
딱히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고 그에게 무언가 불이익을 줄 생각은 없다.
하지만 만약 통과한다면, 혹은 기대 이상이라면......
“그대는 혹여 제물포에 대한 소문을 들었는가?”
제대로 갈아, 아니 기용해야지.
- 작가의말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kkatnip님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후원하신 기대에 응해 더욱 좋은 글을 쓰도록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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