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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ㅁㄴㅇㄹㅇㄴㄹ

천창무신(天窓武神)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매지컬백정
작품등록일 :
2024.01.31 02:41
최근연재일 :
2024.04.14 14:15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3,993
추천수 :
42
글자수 :
215,581

작성
24.03.31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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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6쪽

일장(一章) – 5

DUMMY

먹먹한 눈을 문지르며 주인장을 불렀다.


“주인장.”

“예예, 무슨 일이십니까요?”

“저기 손님들한테 술 한 동이 내어주고, 혹시 삶은 닭이랑 돼지고기조림 있으면 그것 좀 가져오쇼.”

“없습니다만, 근처에 가서 금방 사 오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나 가져올깝쇼?”

“다들 먹게 넉넉히.”

“공자님, 그럼 그게···.”


허리를 굽실대는 주인장이 난감한 기색을 내비쳤다. 점창산의 할아버지는 주인장의 얼굴을 살피고는 내게 들으라는 것처럼 넌지시 말을 꺼냈다.


“술 두 말에 닭에 돼지까지 하면, 지금껏 대충 은으로 넉 냥은 되겠구먼?”

“아이고, 정확하십니다.”


이리 거하게 먹어놓고 나중에 돈 없다 발뺌할까 걱정하는 주인장을 위해, 또 나를 위해 노인장이 먼저 말을 꺼낸 것이었다.


배낭을 뒤져 작은 금조각을 내밀었다. 주인장이 화들짝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이거면 넉 냥은 돼요?”

“세상에, 차고 넘칩니다요. 당연히 금이 좋지만서두, 혹시 은으로는 없으십니까요?”


다시 가방을 뒤져 작은 은조각을 내밀었다.


“이건 충분해요?”

“아이고, 그러믄입쇼. 되고 말고요. 아들놈 보내서 후딱 준비하겠습니다.”


배낭을 꽉 여며 옆에 두었다. 자그락 거리는 금붙이 소리에 다른 이들이 나를 흘끗 쳐다봤다. 마주 앉은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쯔쯧, 황금을 아무데서나 꺼내면 어찌하누. 다 큰 총각이 세상 물정 모르는 티를 내도 너무 내고 다니잖어?”

“···그런가요.”


방금은 정신이 온통 다른 곳에 팔려 그랬는데, 몹시도 경솔한 행동이었다. 그 말대로 함부로 황금을 꺼내는 바람에 이목이 내 배낭으로 쏠려버렸다.


“총각, 앞으로는 돈자랑하고 다니지 말아. 알겠어?”

“옙.”

“그리고 말 나온 김에 어처구니없는 말 하나만 할게.”

“네?”


노인은 고개를 앞으로 쭉 내밀며 은근하게 속삭였다.


“나 좀 도와주.”

“···뭘요?”

“나한테 돈 좀 대줘.”


어처구니없다더니 정말 상상 이상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눈에는 장난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울먹임도 웃음기도 없이 굉장히 매서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설마 노상강도 돌변인가?


방금까지 나를 채웠던 슬픔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잔뜩 긴장하여 경계하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재차 말했다.


“돈 넉넉하게 대줘. 집 짓고 수발들 제자 좀 들이게. 그럼 언젠가 반드시 총각한테 보답할 거야. 부탁할게.”


갑자기 뭔 돈을 대줘, 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노괴가 떨어지지 않을 듯하여 걱정이 치솟는 찰나, 익숙한 알림음이 울렸다.


띠링! 촤라락.

【돌발임무 발생.】

「사일검객(射日劍客)이 도움을 청합니다. 임무를 완료하면 경험치와 함께 뭔가 좋은 걸 줄지도? 수락하시겠습니까?」


임무창의 설명을 보고 정수리에 벼락을 맞은 듯이 놀라버렸다.


사일검객 임용대!


구주십걸(九州十傑)의 일원으로 신풍노사처럼 가렴주구를 일삼는 고관을 징벌한 노협객이며 고대의 검법을 전승하는 이로 해를 쏘아 떨어뜨린다는 허풍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쾌검을 자랑하는 고수였다고 들었다.


구주십걸, 사일검객···.


노역장에서 강호무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적에 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지겹도록 들었기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물론 이 오랑캐의 땅에서 뜬금없이 구주십걸을 만나리라는 생각은 못 했으니 상태창 대협이 이름을 귀띔해 주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음···.”

“총각, 솔깃하지?”


신풍노사와 춘석삼촌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세상에 나가게 된다면 강호무림의 인사들과 친분을 쌓고 조정에 반기를 든 협객과 교류하라 당부했었다.


어느 개인이 천하제일의 무력을 지녔다 한들 성난 짐승처럼 홀로 날뛰면 산봉우리 하나의 패자가 될지는 몰라도 번천(飜天)의 대업을 도모할 그릇이 될 수 없는 법, 내가 어려울 때에 도와줄 이가 하나라도 있어야 복수의 뜻을 수월히 펼칠 수 있으리라.


망설임은 짧았다.


“임무수락.”

“응? 뭘 수락해?”

“아뇨, 혼잣말이니 신경 쓰지 마시죠.”


언젠가 황제의 대갈통을 쪼개 죽일 생각이었으니 이런 기회를 내다 버릴 수는 없었다.


그런고로 아는 척도 조금 해봤다.


“노인장, 하나 묻겠습니다.”

“그래, 맘껏 물어봐.”

“구주십걸의 사일검객이 이런 곳에서 뭘 하고 계십니까?”


그 순간이었다.


귓가에 바람이 스치고, 일대의 공기가 짜부라지는 괴음이 울렸다.


부우욱!


주변을 둘러보니 사발을 엎어놓은 형태의 뿌연 막이 우리의 주변을 휘돌며 바깥과 안쪽을 나누고 있었다.


기막(氣幕)에 놀랄 여유도 없이 사일검객이 육척대검을 뽑아들었다.


검신 전체에서 물에 풀린 머리카락처럼 아주 가느다란 기운이 휘몰아치더니 뾰족한 검첨을 향해 모든 가닥이 나사송곳처럼 꼬였다. 이윽고 하나의 덩어리가 된 검기가 치밀하게 압축됐다.


“노오옴!!”


우렁찬 기합과 함께, 단 한 번의 찌르기로 내 발치에 아홉 개의 칼자국이 생겼다. 각진 송곳으로 나무를 깊게 후벼 파낸 것처럼 땅바닥에 깊은 자상(刺傷)이 남아있었다.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로 신속한 자천검(刺穿劍)이었다.


이어 길게 뻗은 검기가 내 가랑이에서부터 미간까지 올라오며 서슬퍼런 빛을 뿜어냈다.


“자네 누군가? 대답 여부에 따라서 곱게 못 보내줄지도 몰라.”


내가 싫어하는 게 창칼 겨누고 사람 겁박하는 짓거리인데, 지금은 싫고 나발이고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우선 살고 봐야지.


입속에선 말라붙은 혀를 열심히 굴렸고, 눈으로는 사일검객의 미간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거 노인장 성격 지독하시네, 누군지도 모르면서 칼부터 겨눕니까?”

“외딴곳에서 만난 일면식도 없는 놈이 나를 알아보는 것만큼 기분 나쁜 일도 없는 법이야. 그래서 총각은 누군가? 의천맹의 자객인가 전령인가?”

“의천맹의 개새끼는 아니고, 그냥 어떤 어르신께 노인장에 대한 이야기 좀 들었수다.”

“그게 누군가? 내가 아는 사람인가? 나 없는 곳에서 내 이야기하는 것도 참 기분 나쁜데 말이야.”


아마도 당장 죽일 생각은 없으리라, 곡괭이로 사일검객의 검을 슬쩍 치우며 말했다.


“성격이 옹졸하고 성급한 면이 있다더니 그게 정말이군.”

“뭐라!!”


사일검객이 눈을 부릅떴다.


“누가 그딴 망발을 지껄여! 어떤 빌어먹을 놈이냐!”

“신풍도귀.”

“···뭐라, 신풍도귀? 도귀가 그랬다고?”


노사와 견원처럼 지내는 맞수이자 절친한 벗이라 하더니, 그 말대로 사일검객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린 여파가 검에 다다르며 검기가 눈에 띌 정도로 흔들렸다.


“그 염병할 노인네를 어디서 만났는지 말해라.”


나를 의천맹의 끄나풀이라 의심하는지 경계하는 기색이 영 가시질 않았다. 그럼 두 사람만이 알 법한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신풍노사로부터 여러 일화를 좀 들었습니다. 화산에 숨어서 다섯 번을 겨뤘는데 세 번을 패배하셨다죠? 비밀로 해달라고 술도 거하게 사셨다고 들었는데.”

“허, 이런 썩을 허풍쟁이가? 비밀 지키라고 술을 샀더니 죄다 떠들고 다녔어?”


미간으로 뻗었던 서슬퍼런 검기가 일순에 흩어지며 자취를 감췄다. 허탈해진 얼굴의 사일검객은 주변의 놀라 자빠진 사람들을 훑고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막을 쳐놔서 다행이지. 소문날 뻔했군.”

“···주도면밀하시군요.”


나를 째려본 사일검객이 대검을 정리하고 걸상에 앉았다. 손을 휘둘러 기막을 흩어버리고는 목청을 돋웠다.


“다들 신경 쓰지 말고 술이나 자시구려! 잠깐 서로 실력 좀 확인한 거외다! 그리고 주인장은 빨리 닭이랑 돼지조림 좀 내오시게!”

“지, 지금 갑니다요. 어르신.”


식탁에 뜨끈한 닭과 돼지조림이 놓였다. 사일검객은 두툼한 닭다리를 주욱 찢으며 말했다.


“자네도 빨리 앉어. 자네 때문에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옙.”

“그래서 그 염병할 노인네는 지금 어디에 있어? 그놈 내가 무서워서 꽁무니 뺀 게 맞지?”

“노사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그래, 그 노인네 나이가 나랑 동갑이라 언제 뒈져도 이상하지 않을···.”


사일검객은 입으로 가져갔던 닭다리를 그대로 내려놨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 친구가 죽기는 왜 죽어. 내가 이렇게 팔팔한데 나보다 더한 노인네가 죽을 리가 없지.”

“진짜로 돌아가셨습니다.”


손가락으로 술을 찍어 탁자 위에 세 글자를 적었다.


정위천(鄭衛天).


“흠차사신, 이 요사스런 충견이···.”


갑작스레 넋이 나가 눈만 껌뻑이던 사일검객은 급기야 울먹이기 시작했다. 주름진 입술을 꽉 깨물고 내가 글자를 적은 부분을 손아귀로 움켜쥐어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옌장, 빌어먹을,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니니 자리 옮기지.”



***



사일검객을 따라 다시 점창산의 중턱으로 올랐다. 그리 높지도 않으며 사람 살기 적당한 곳에서 사일검객이 멈춰 섰다.


“총각, 여기가 내 집이야.”

“···와아, 진짜 무너졌네.”

“여기 온 몇 년 동안 집을 짓는 족족 무너져서 수가 없어.”


볕이 잘 드는 완만한 비탈에 모옥을 세우고 사당 비스무리한 것도 만들었는데, 그게 죄다 무너져서 엉망진창이었다.


“대충 아무데나 앉아.”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대충 판판한 곳에 앉아 아래에서 가져온 닭과 돼지고기를 깔았다. 사일검객도 술동이를 내려놓으며 엉덩이를 붙였다.


“그래서 도귀 그놈이 대체 어떻게 됐길래 정위천에게 죽은 거야. 정위천이 암만 구주십걸의 일석(一席)을 차지했다고 해도 쉬이 당할 노인네가 아니란 말이야.”


믿지 않는 사일검객에게 그간 겪었던 일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노역장의 일상과 죄수들, 의천맹의 간수들, 마교와 결탁한 황실과 정위천, 그리고 백수십 년을 살아온 요승 강천승통에 대한 이야기들.


물론 갱도가 무너진 후의 일은 천운으로 균열을 통해 탈출하여 은거기인을 만나 신공을 사사했노라 둘러댔다.


한 말 들이 술동이가 절반은 비워졌을 무렵 이야기가 끝을 고했다.


“······그 친구가 그렇게 갔구먼. 그놈 다운 최후였네.”


사일검객이 닭다리와 닭모가지를 뜯어 높이 치켜들고는 술잔과 함께 멀리 집어던졌다.


“옜다, 네놈 좋아하는 닭이나 실컷 처먹어라! 다섯 번을 겨뤄서 세 번을 이기고 가버리면 나는 평생 패배자로 살란 말이더냐, 예잇 더러운 새끼야!”


그 후로 한참이나 돌아가신 신풍노사를 향해 악다구니를 실컷 치고 술을 퍼부었다. 눈물이 스며든 사일검객의 주름은 매우 깊었다.


“강천종이라, 그 옛날의 마교가 황실에서 암약하고 있었을 줄이야. 잔당도 아니고 강천승통이라는 요승이 살아있으니 보통 큰일이 아니네.”

“반드시 제 손으로 죽여버릴 겁니다. 마교와 노역장에 관련된 놈들 모두. 황제고 나발이고 싹 다 죽여버릴 겁니다”


사일검객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황제는 씹새끼였어. 확 죽여버릴걸.”

“···예??”

“죽어도 싼 놈이라고. 제 형과 동생을 모조리 죽이고서 형수제수와 조카딸을 마누라로 삼은 것도 지탄받을 일인데 제놈이 오래 살자고 마교의 사술을 빌려?”


사일검객은 답답한지 술을 들이켰다.


“태조께옵서 조정의 곳간과 백성의 곳간을 그득하게 채워 백 년을 대비하셨거늘, 그 아들이라는 놈이 죄다 말아먹고 있으니 어찌 눈을 감으실까. 어쩌다가 범 같은 아비에게서 개 같은 아들이 나왔누?”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딱히 부인하진 않았다.


“총각, 십 년 동안 강산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아?”

“대충 외부의 소식을 듣긴 했습니다만, 정확하게는 모르죠.”

“경사(京師)인 장안 외에 배도(陪都)를 지었어. 금릉에 아방궁에 버금가는 궁궐을 올리고 녹대를 세웠으니 백성이 얼마나 고달프겠냐.”

“그랬군요···.”

“게다가 동쪽의 바다에서는 삼신산을 찾기 위해 대함을 건조하는 동안 백성의 다리가 물에 썩어 죽어가고, 북쪽의 광야에 장성을 다시 쌓으며 백성의 뼛가루로 회반죽을 만들어 돌을 얹었고, 남쪽의 논밭에 호수를 팠으니 노역에 시달리는 백성이 굶어죽어 그 원망이 하늘을 찌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심지어 커다란 물길을 만들기 위해 부역을 지우니, 땅을 파다 죽은 백성들이 무수하여 그 주검으로 보를 쌓아도 될 만큼이라던가.


“아주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 이해한다고 치자, 북방의 오랑캐를 막아야 하니 장성은 대보수를 해야 했었고 남쪽의 논밭에 호수를 판 것도 큰 가뭄에 대비했다고 쳐. 남북을 잇는 커다란 물길도 남부의 양곡을 북부로 수송하는 일이니 언젠가는 치렀어야 할 일이야.”


하지만 다음 대목에서 사일검객이 노갈을 터뜨렸다.


“그런데 동쪽 바다로 배를 타고 나간들 뭐가 있어. 천일을 가도 사람 사는 육지 하나 섬 하나, 심지어 암초 하나가 없는 게 동방이거늘, 북구로주 세상에 무슨 삼신산이 있다고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좇아 대함을 줄줄이 띄우냐 이 말이야!”


봉래산, 영주산, 방장산.


수평선만 보이는 동방의 망망대해 너머에 신선이 살아가는 삼신산이 있다는 전설, 이곳에는 불로불사를 이루어주는 불로초가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동쪽바다는 신선이 살아가는 별세계가 아니라 죽음의 바다다.


사일검객의 말대로 암초 한 뼘조차 찾을 수 없는 허무한 곳이다. 이곳으로 배를 띄워 사람을 보내는 것은 끝없는 바다를 떠돌다가 죽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벌써 사방의 대사업이 그렇게나 진행됐군요.”

“그래, 염병할 일이지. 대체 정신머리가 있어 없어, 무슨 연유로 천지사방의 대사업을 일시에 벌여 백성을 괴롭히는 게야! 왜 충언을 올리는 신하들을 죄다 죽이고 간신들로 조정을 채우는 게야.”


동서남북 사방이 천자의 뜻에 따라 고통에 신음하고 있으니 조만간 강천종의 기원이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


천자가 혹정으로 백성을 괴롭히는 현세가 지옥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충언을 올리는 우리 아빠 같은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버렸으니까.


사일검객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조곤한 투로 말했다.


“총각, 이름이 도백연이라 했지?”

“예, 맞습니다.”

“어린 나이에 멸문을 당하고 노역장에 끌려가 그런 일을 겪은 건 참 안타깝고 슬퍼.”

“옙.”

“그런데···.”


뜸을 들인 사일검객은 내 손등을 다독였다.


“그런데 말이야, 자네 아버지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유사로서 응당해야 할 일을 했던 대장부라 이 말이야. 혹여라도 멸문의 책임이 아버지께 있다고 원망은 말어.”

“······.”


황제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아빠, 내게 항상 유학을 가르치던 아빠의 말이 떠올랐다.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는 것은 천륜을 거스르는 일이나, 백성을 해치는 군주는 천자가 아니라 필부에 불과하다. 민심이 천심이니 민심이 떠난 임금은 더 이상 천명이 따르지 않는 법이라, 백성에게 버림받고 하늘에게 버림받은 자를 어찌 천자라 부르겠는가. 그가 면류관을 쓰고 용상에서 칼을 맞는다 하더라도 이는 필부가 죽은 것이지 천자가 죽은 것이 아니다.’


이리 가르쳤던 아빠였으니 황제에게 무슨 상소를 올렸을지는 뻔한 노릇, 대체 왜 그런 짓을 해서 화를 자초해야 했던 걸까? 가족들의 목숨보다도 유학자로서의 뜻을 펼치는 게 더 중요했단 말인가?


상념에 잠긴 내게 사일검객이 말했다.


“천자가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 부덕과 원한을 쌓았으니 곧 난세가 열려 더욱 많은 목숨이 희생될 게야. 어떻게든 이를 막고자 죽음도 불사했던 아버지이니 존경해 마땅하다.”

“···알겠습니다.”

“정 마음이 풀리지 않거들랑 충언을 올린 신하에게 상을 내리지는 못할망정 그 일가족을 도륙한 황제라는 놈을 원망해.”

“이미 충분히 원망하고 있거든요.”

“그래, 잘했어 총각.”


내 어깨를 다독인 사일검객이 술잔을 들고 일어섰다. 나도 함께 몸을 일으켜 점창산 아래의 풍경으로 시선을 던졌다.


석양의 끝물이 이해호에 깊게 잠겨 마지막 붉은빛을 태우고 있었다.


진한 술기운이 오른 내 숨결만큼이나 뜨거운 빛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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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일장(一章) – 18 24.04.13 39 1 14쪽
30 일장(一章) – 17 24.04.12 41 1 17쪽
29 일장(一章) – 16 24.04.11 43 1 15쪽
28 일장(一章) – 15 24.04.10 50 1 16쪽
27 일장(一章) – 14 24.04.09 49 1 16쪽
26 일장(一章) – 13 24.04.08 47 1 17쪽
25 일장(一章) – 12 24.04.07 50 1 16쪽
24 일장(一章) – 11 24.04.06 51 1 16쪽
23 일장(一章) – 10 24.04.05 50 1 14쪽
22 일장(一章) – 9 24.04.04 60 1 19쪽
21 일장(一章) – 8 24.04.03 61 1 17쪽
20 일장(一章) – 7 24.04.02 61 1 17쪽
19 일장(一章) – 6 24.04.01 68 1 17쪽
» 일장(一章) – 5 24.03.31 70 1 16쪽
17 일장(一章) – 4 24.03.30 77 1 14쪽
16 일장(一章) – 3 24.03.29 75 1 16쪽
15 일장(一章) – 2 24.03.28 89 1 13쪽
14 일장(一章) – 1 24.03.27 110 1 14쪽
13 상태창 대협을 주웠다 - 3 24.03.26 120 1 14쪽
12 상태창 대협을 주웠다 - 2 24.03.25 120 1 14쪽
11 상태창 대협을 주웠다 - 1 24.03.24 144 1 12쪽
10 나락굴(奈落窟) – 10 24.03.23 123 1 15쪽
9 나락굴(奈落窟) – 9 24.03.22 131 1 13쪽
8 나락굴(奈落窟) – 8 24.03.21 138 1 16쪽
7 나락굴(奈落窟) – 7 24.03.20 143 1 13쪽
6 나락굴(奈落窟) – 6 24.03.19 162 1 14쪽
5 나락굴(奈落窟) – 5 24.03.18 180 2 11쪽
4 나락굴(奈落窟) – 4 24.02.02 306 4 14쪽
3 나락굴(奈落窟) – 3 24.02.01 348 3 12쪽
2 나락굴(奈落窟) – 2 24.02.01 389 3 17쪽
1 나락굴(奈落窟) – 1 24.02.01 560 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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