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기 시작한 이교도
불행 중 다행이라면 마나가 마신 포콘 열매주의 부작용은 포콘 열매보다 그 위력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부작용과 취기가 더해지면서 감당하기 힘든 것은 분명 사실이었지만 차가운 물을 마시고 취기라도 조금 가신다면 타케루는 그녀가 스스로 절제를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왜.. 같이 안 있어 준 거야.."
"어..?"
막무가내로 옷을 벗으려던 마나는 이번엔 갑자기 뾰루퉁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옷을 벗으려는 행동을 멈춘 것은 다행이지만 그녀가 뱉는 이야기를 듣고 타케루는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나도 어떻게 해야 될 지 모르겠단 말이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서 갑자기 침대 위로 뻗은 마나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그제야 안심하고 방을 빠져나온 타케루는 그녀의 술주정을 듣고 카즈마와 무언가 잘 되지 않은 것 같다는 확신을 해버렸다.
'뭐, 무리도 아닌가.. 저주때문에 누군가랑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을 텐데 갑자기 둘만 있게 해준 건..'
베로티아의 풍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밖을 바라보며 타케루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던 그 때였다.
"잠이 잘 안오는 모양이네?"
이곳에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던 카즈마가 평소와 같은 미소로 말을 걸어오면서 그는 처음으로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물었다.
"소이치 경을 죽인 녀석에 대해서 뭔가 알아낸 거라도 있어?"
"아니. 안타깝지만 전혀 진전이 없었어. 마나도 너랑 떨어지고 나서부터는 자주 멍한 모습을 보여서 오히려 나도 집중이 안됐다고 할까."
"아아, 그러냐. 모처럼 자리를 비켜줬는데 너도 남자로서 영 미덥지 못하구만."
자리를 비켜줬다는 말에 살짝 소스라친 카즈마는 이내 그의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서서 말했다.
"그러는 넌 어떤데?"
"나는.. 뭐.. 어떻든 상관없잖아.. 어차피 마나가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니까.."
"푸흡! 아니아니, 뭔가 막히는 느낌이라고 말했던 그 단서 건 말이야!"
혼자서 착각을 하고 민망한 말을 꺼내버린 타케루는 화악 얼굴을 붉히며 일부러 큰 목소리로 얼버무렸다.
"아, 아아..!! 아직까지는 딱히.."
그리고 이어진 침묵.
카즈마는 그가 자신에게 아주 작은 가시를 세우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 원인이 오기노 마나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굳이 그 사실을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타케루 넌 원래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면서? 처음 봤을 때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길래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너희 세계는 마력이라는 게 없는 세계야?"
"맞아. 마력은 커녕 검 같은 무기도 함부로 갖고다니지 못해."
"그건 불안하지 않아? 만약 마물이라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하려고.."
자신이 이세계의 모든 것을 신기하게 여기는 것처럼 그 또한 자신이 살던 세계를 신기하게 여기는 모습에 타케루는 절로 웃음이 나와버렸다.
"믿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마물도 존재하지 않아. 도시에는 높은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고 사람들은 마차가 아닌 자동차라는 이동수단을 사용해."
"마물이 없는 세계라.. 꼭 꿈만 같은 세계네."
카즈마와 함께 원래 자신이 살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원래 세계의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과연 누군가가 알아차려줄까라는 것을.
꿈으로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 아유미의 사고를 되뇌이며 그는 굉장히 쓸쓸해보이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좋아! 있잖아, 타케루! 괜찮다면 내일 영주회의에 같이 가지 않을래?"
"영주회의?"
갑자기 텐션을 높이며 카즈마가 제안한 영주회의는 '라스트 퀘스트'를 플레이한 그조차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하하하! 별 건 아니고 알 포드 왕국에 속한 영지를 다스리는 모든 영주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자리야.
당연히 목적은 소이치 님을 죽인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아내기 위함이지만 혹시 모르잖아?
네가 막힌다고 했던 단서가 영주회의에서 나온 이야기를 통해 알 게 될 수도 있고 말이야."
확실히 영주회의에서 나오는 이야기나 단서를 통해 무언가 막힌듯한 답답함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은 그 역시 공감했다.
다만-
"혹시나 해서 묻는건데.. 소니아 마을의 영주는 아직도 시노부가 맡고 있는 거야..?"
"헤에- 시노부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는 거야? 굉장한데!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믿겨지지가 않을만큼 많은 정보를 알고 있네!"
그가 타케루의 광범위한 지식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이내 그는 뺨을 긁적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네 말대로 소니아 마을의 영주는 여전히 츠키카게 가문의 시노부가 맡고 있어.
성격이 좀 제멋대로에 자주 소란을 일으키긴해도 워낙에 타고난 재능이 뛰어나서 여왕님도 통제하에 두고 지켜보는 게 나을거라 판단하셨거든."
츠키카게 시노부. 검정색 긴 생머리에 독특한 붉은 눈을 갖고 태어난 그녀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미치광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이었다.
그림자의 성질이 깃든 마력을 가진 그녀는 '라스트 퀘스트'의 게임 속에서도 생명을 죽이는 것에 쾌락을 느끼는 탓에 정당한 처벌을 앞둔 범죄자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인물이었다.
"아아.. 그 여자만큼은 만나고 싶지 않은데.."
"뭐, 별 일 없을거야! 영주회의에는 미카 여왕님도 계시니까 제아무리 시노부라도 멋대로 날뛰지는 않겠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신세 좀 질게."
불안한 마음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는 모처럼 영주회의 같은 귀한 자리에 자신을 초대해 준 카즈마의 성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어느정도 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 되어가던 그 때.
"영주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야?"
"아무래도 저희 종업원 중 한 명이 영주님께 달빛의 꽃을 선물하고 싶어서 혼자 도시를 벗어나 숲속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오로지 밤에만 지상위로 올라와 꽃을 피운다는 달빛의 꽃. 그 꽃을 찾으려고 종업원이 혼자서 도시 밖의 숲속으로 향했다는 소식에 카즈마는 당장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미안, 타케루! 내일 오전 중으로 데리러 올 테니 푹 자둬!"
그 말을 끝으로 관리자와 함께 떠나버린 카즈마.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덕분에 잠이 오지 않았던 그는 조금 더 베로티아의 경치를 보다가 방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엘·마기아"
갑자기 들려온 가속마법의 주문과 함께 순식간에 눈앞까지 다가온 검은 로브의 사람들. 수수께끼의 집단인 그들은 타케루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 빠른 속도로 단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세계의 위험한 상황에 어느정도 적응이 된 영향인지 타케루는 주문을 듣는 순간부터 반사적으로 품안에 있던 단검을 꺼내 그들이 휘두르는 공격을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뿐.
"오드·실러!"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인물이 주문을 영창하자 타케루의 밑에서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이내 그의 팔 다리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꽁꽁 얼어붙었다.
"제길..!! 너희는 뭐야!!"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이 어째서 이곳에 나타나 자신을 공격하는지 타케루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검은 로브의 무리들 사이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사내를 보고 그는 큰 충격에 빠져버렸다.
"설마 이런 식을 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그렇지? 코바시가와 타케루."
"타카노부..? 네가 왜.."
영주의 시험에서 아라크네에게 겁을 먹고 시험을 포기했던 그가 이곳에 나타나면서 타케루는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야~ 그 때는 엄청 놀랐다니까? 설마 마력도 갖고 있지 않은 네가 아라크네를 쓰러뜨릴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안 그래?"
"그게 무슨 말이야.."
"아직도 모르겠냐? 전부 내가 계획한 일이었다고! 아라크네를 그곳에 유인한 것도, 오기노 마나와 마츠이 노리에가 둘이서 동굴 안으로 들어가도록 만든 것도!"
이윽고 마나가 잠들어있는 방의 문을 여는 검은 로브의 집단. 그 안에서 편히 잠을 자고 있는 마나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타카노부는 갑자기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이렇게 쉽게 계획대로 될 줄이야. 어이, 타케루!! 네 녀석은 몰랐겠지만 널 이 방으로 안내한 것도 우리 신도였다!! 저기에 있는 모든 열매주에는 강력한 수면제를 넣어두었거든!"
"신도..? 자, 잠깐만.. 타카노부..! 너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머리가 상황을 따라가지 않는 탓에 혼란스러워 하는 타케루를 바라보며 그는 괴상하게 혀를 내밀고는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이교도라고 들어봤겠지?!"
이교도. 그 한마디에 타케루의 안색은 곧 창백하게 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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