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든 포레스트 국가의 두 장로와 마주치다
어느덧 해가 저물기 시작한 시각.
밤이 되기 전에 마력의 골짜기를 빠져나온 그들은 드넓게 펼쳐진 초원 속 커다란 바위 위에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한 묘인족 소녀를 발견했다.
"이런 곳에 아인이 있다니 무슨 일이지?"
"뭔가 사정이 있는 것처럼 보여.."
고양이 귀와 꼬리를 가진 검정색 단발 머리의 소녀는 머지않아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서 황급히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마치 자신들을 두려워하는 것 같은 소녀의 행동에 더욱 이상함을 느낀 마나는 천천히 바위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괜찮아. 무슨 일이라도 있니?"
"..인간은 전부 거짓말쟁이야! 난 봤어..! 인간이 우리 수인들을 납치해 노예시장으로 데려가는 걸!"
인간과 아인은 분명히 우호적인 관계였다. 이는 알 포드 왕국과 엘든 포레스트 국가가 동맹을 맺게 된 것이 가장 큰 계기였지만 당연히 그 동맹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인간들도 존재했다.
자신들이 가장 최상위 포식자라 믿어 의심치 않고 아인들을 납치해 돈벌이로 삼는 악질적인 인간. 소녀는 그 인간들의 모습을 목격하고 결국에는 신뢰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타케루.. 나.."
"물론 나도 도울거야. 마나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함께 하겠다는 그의 대답에 마나는 안도하며 미소지었다.
"우리가 잡혀간 너희 동족들을 구해줄게. 그러니 그 사람들이 어디로 향했는지 가르쳐 주지 않을래?"
"..정말..? 정말로 도와줄 거야..?"
마나의 자상함에 얼굴을 빼꼼 내밀며 물어오는 소녀의 모습은 타케루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너무나 순진하게 느껴졌다.
만일 이 자리에 있는 게 마나가 아닌 아인들을 납치한 놈들과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었다면 소녀는 또 다시 인간에게 속아 상처를 받고 납치를 당했으리라.
"좋아! 우선 너! 이름이 뭐야?"
"..진짜로 저런 인간이 도와줄 수 있어..? 엄청 약해보이는데..?"
여기선 자칭 인생의 선배로서 따끔한 조언을 해주려던 타케루는 미심쩍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의 가시가 박힌 한 마디에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어린 수인족 소녀에게까지 약해보인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굉장한 수치였지만 막상 틀린 말은 아닌 게 더욱 분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마나는 본인조차 인정해버린 소녀의 의심을 주저없이 부정했다.
"그렇지 않아! 타케루는 굉장히 상냥하고 한다면 해내는 사람인걸! 나도 타케루에게 여러번 도움을 받았어!"
마나의 진심이 느껴지는 대답에 소녀는 바위 뒤에서 천천히 걸어나와 선뜻 고개숙여 사과했다.
"의심해서 미안해.. 나는 아야라고 해. 호시노 아야. 빛의 대정령 님의 축복을 받은 엘든 포레스트 국가 다섯 장로중의 한 명이야."
""..뭐..?""
자신을 엘든 포레스트 국가의 장로 중 한 명이라고 밝힌 아야의 이야기에 두 사람은 순간 사고가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오로지 대정령의 축복을 받은 자만이 장로가 될 수 있는 엘든 포레스트 국가의 규율상 아야같은 어린 소녀가 장로가 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째서 장로가 직접 이런 곳에..?"
장로는 곧 국가의 기둥이 되는 중요한 존재. 전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 장로들은 어지간해선 외부로 나가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에 우물쭈물 망설이던 아야는 조심스럽게 자신이 직접 이번 일을 맡게된 이유를 설명했다.
"실은.. 내가 빛의 대정령 님께 축복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대정령 님의 힘을 빌려올 수가 없어서.. 동족들을 구해낼 겸 실전을 경험하면 대정령 님의 힘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라는 의견이 나오는 바람에.."
대정령들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갖고 있기에 축복을 내려주는 기준 또한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기준이 어떻든 축복을 내려준 자에게 힘을 빌려주지 않는 경우는 어쩌면 그녀가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직 인정을 받은 자만이 대정령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기에 무사히 축복을 받기만 한다면 숨을 쉬듯 자연스레 대정령의 힘을 빌리는 것이 가능해야 했다.
"뭔가 착오가 있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그 가능성은 없을 거야. 엘든 포레스트 국가에서 장로가 탄생하는 순간에는 반드시 다른 장로들도 함께 그 자리에서 지켜보는 게 원칙이니까. 아야 혼자만이 아닌 다른 장로들까지 있는 자리에서 착오가 있었다면 알아차리지 못 할 이유가 없어."
'라스트 퀘스트'라는 게임을 플레이하며 직접 장로가 탄생하는 이벤트를 목격한 적이 있던 타케루가 그렇게 자세한 근거를 이유로 마나의 의견을 부정하자 아야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네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거야..? 장로의 의식은 절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도 보여준 적도 없는데.."
다소의 차이는 있을 지 몰라도 '라스트 퀘스트'의 지식을 갖고 있는 타케루에게 각 국가의 전통이나 문화는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타케루는 잠시 후 아무렇지 않게 그 정보를 발설한 자신의 무신경함을 후회했다.
"본·사이러스!"
어디선가 들려온 영창과 동시에 지면 위로 수십개의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그 안에서 전신이 불꽃으로 뒤덮인 불꽃의 군대가 올라와 두 사람을 포위했다.
"영 불안해서 따라오길 잘했는걸! 설마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우리의 장로 의식을 알고 있는 인간이 있을 줄이야!"
"호무라 언니..!!"
처음 아야가 앉아있던 바위 위로 모습을 드러낸 호무라라는 여성은 대장부 느낌이 물씬 나는 호탕한 성격에 붉은색 긴 생머리와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호인족 여성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타케루는 이미 그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불의 대정령에게 축복을 받아 장로의 자리에 앉게 된 그녀는 현존하는 장로들 중에서 가장 교감능력이 뛰어나 유일하게 직접 대정령을 불러내는 것이 가능한 인물이었다.
"잘했어, 아야!! 저 인간 녀석을 심문하면 의외로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위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상황에서도 타케루는 전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다가오는 불꽃의 군대로부터 타케루를 지켜내기 위해 마나는 레이피어를 뽑아 자세를 잡았지만 그녀의 앞을 등지고 선 타케루는 이내 예상치 못한 말을 큰 소리로 외쳤다.
"호무라라고 했던가? 너 꽤 귀엽네!"
"..타케루..?"
당장 싸움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갑자기 아부를 하는 타케루를 보며 마나는 당황한 얼굴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대장부처럼 느껴지는 호무라가 사실은 귀엽다는 칭찬에 굉장히 약하다는 사실을.
타케루는 공략하지 않았지만 '라스트 퀘스트'에서는 호무라와 야한 이벤트를 발생시키기 위한 조건은 그저 지금처럼 칭찬을 몇 번 건네주면 되는 아주 쉬운 조건이었다.
설마 칭찬 몇 번으로 그런 이벤트가 발생할 줄 몰랐던 타케루는 마나를 두고 호무라와 이어질 뻔 했던 자신의 과거에 식은땀을 흘렸지만 그 정보가 지금만큼은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시, 시끄러워..!! 지금 날 놀리는 거냐!? 내 어디가 귀.. 귀엽.."
빨갛게 물든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갑자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호무라는 그렇게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공략은 쉽지만 그녀가 가진 이런 갭차이가 '라스트 퀘스트'를 플레이하는 많은 남성들의 심장을 저격해 실제로 호무라는 게임 속 인기투표에서도 당당히 2위의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었다.
덕분에 집중력이 흐트러진 호무라는 자신이 소환했던 불꽃의 군대를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무서운 인간이네.. 설마 호무라 언니의 약점까지 알고 있다니.."
"약점이라니..!! 내게 약점같은 건 없어!!"
부끄러움을 참아가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호무라는 그가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생각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직접 불의 정령을 불러냈다.
"어이, 나와!! 셀러맨더!!"
호무라의 부름에 아무것도 없던 빈 허공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붉은 꼬리와 작은 날개를 가진 인간 모습의 정령.
"응..? 뭐, 뭐야..? 호무라가 날 불러내다니.. 무슨 일이야..?"
소심한 성격에 말을 많이 더듬고 사소한 일로 눈물을 보이기도 하지만 붉은색 트윈테일에 뜨거운 불꽃으로 신체를 두른 소녀는 분명히 불의 정령 셀러맨더였다.
"저 자식이 날 놀렸어!! 나보고 귀.. 귀엽다고 말했다고..!! 당장 뼈째로 불태워 버릴 거야!!"
"그, 그건 별로 놀린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게.."
"하아?! 지금 저 자식을 감싸려는 거야?! 네 그 꼬리를 실컷 잡아당겨서 괴롭혀줄까?! 어?!"
"히익..!"
자신의 꼬리를 꽉 붙잡고서 언성을 높이는 호무라의 모습에 셀러맨더는 겁에 질린 얼굴로 닭똥같은 눈물을 흘렸다.
교감이 좋은 사이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긴 해도 둘의 공명하는 마력에 마나는 그녀들이 서로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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