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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도황제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이화영
작품등록일 :
2023.07.31 18:04
최근연재일 :
2023.12.30 10:43
연재수 :
93 회
조회수 :
44,864
추천수 :
659
글자수 :
649,521

작성
23.10.02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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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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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악인곡(惡人谷)(2)

DUMMY

지상이 2층으로 올라가고 일다경(一茶頃)의 시간이 흘렀다.

세오객잔에 슬슬 평온이 찾아들었다.

하후현과 이불범이 안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을 때 입맛이 없던 정청하는 술잔을 비우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진매검(眞梅劍)을 들고 2층 계단 쪽으로 이동했다.

벽을 등진 채 악인곡 칼잡이들을 마주 보고서자 탁자마다 하나씩 켜진 희미한 촛불 위로 시커먼 얼굴과 빛나는 눈동자가 보였다.

악인들의 눈동자 속엔 무림맹 사람에 대한 경계심과 낯선 여인에 대한 호기심 같은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그 눈빛마저 객잔 내부에 자욱하게 깔린 어스름 속으로 녹아들듯 사라졌다.

악인들은 도박을 다시 시작하거나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닫힌 창문 틈으로 밖을 훔쳐보는 등 제 할 일에 열중했다.

그때 갑자기 2층에서 여자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악인들이 상상했던 지저분한 그런 게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의 절규였다.

쿵, 쾅쾅쾅,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하후현과 이불범이 식사를 멈추고 계단 쪽 정청하를 돌아봤다,

정청하가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고 올랐다.

그녀가 막 계단 끝에 다다랐을 때 맞은편 방문이 활짝 열리더니 얼굴에 피가 낭자한 여인이 복도에 사정없이 패대기쳐졌다.

이주(李姝)가 복도 난간에 머리를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부딪쳤다.

그녀가 잠시간 엎드려서 일어나질 못했다.

방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누군가가 그녀를 향해 은자 한 덩이를 던져주고는 문을 쾅, 닫았다.

정청하는 이것이 혹시 이지상이 꾸민 계략일까 싶어 이주에게 접근하지 않고 계단 아래서 가만히 주시하고만 있었다.

돌연 밑에서 소리가 들렸다.

객잔 밖에 있던 누군가가 소음을 듣고 안으로 들어온 거였다.

그 사람은 상관세가의 상급 무사 조진(曺辰)이란 자로 밖에 있는 이백 인의 무사를 통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조진이 놀란 낯으로 하후현에게 물었다.


“조금 전 여자 비명, 그거 무슨 소리였습니까?”


정청하가 계단 아래로 모습을 드러내 조진에게 잠시 기다리라 신호를 보냈다.

순간 이주가 신음하며 몸을 일으켰다.

난간을 짚고 간신히 일어나면서도 그녀는 복도에 놓인 은자를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그녀가 비틀비틀 위태로이 몸을 움직이더니 정청하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왔다.

이주가 단상 앞에 털썩 자리하고는 대머리 주인장을 향해 은자를 내밀었다.


“황주 반 근이랑 담배 있으면 하나만 줘.”


대머리가 은자를 챙긴 뒤 바닥에 있던 항아리에서 술을 한 그릇 퍼 이주 앞에 내려놨다.

통통한 담배 한 대와 피를 닦을 걸레도 내주었다.

이주가 지저분한 걸레로 얼굴에 묻은 피를 훔치고 있을 때 정청하가 다가와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이지상한테 맞았어요?”


이주는 정청하를 쳐다도 보지 않고 주홍빛 황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크으으――”


이주가 입가에 묻은 술을 소매로 훔치고는 담배를 입에 물고 주머니에서 불을 찾았다.

대머리 주인장이 기다란 나무 꼬챙이에 불을 붙여 이주에게 내밀었다.

뻐끔, 뻐끔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자 이주가 그제야 살 것 같은지 얼굴에 엷은 웃음기를 띄우고 다시 황주를 들이켰다.

정청하가 더는 묻지 않고 이주의 험한 몰골을 살폈다.

그사이 상급 무사 조진이 하후현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하후 대협, 아무래도 우리 무사 십여 명 정도 객잔 안에 들이는 게 좋을 것 같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후현이 조진에게 사납게 쏘아붙였다.


“주제넘은 짓 하지 마시오.”

“엥? 하후 대협, 그게 무슨 소리요?”

“여긴 우리가 맡겠다고 당신네 대장하고 약속한 거, 조진 당신도 잘 알지 않소?”

“아니 나도 그건 알지만 내 말은··· 임무의 성공을 위해 혹시나 있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자는 거 아니요.”

“하, 답답하네. 여보시오. 조진 양반. 당신네 흑도들은 상관의 명령을 그렇게 개좆으로 봐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우린 다르오. 응? 이 단순한 이치가 이해가 안 되오?”


하후현이 조진을 거만하게 쳐다봤다.

조진이 한숨을 내쉬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가 속으로 분을 삭인 후 인사도 없이 객잔을 빠져나갔다.

대머리 주인장이 이주에게 얼굴에 바를 금창약과 은자 조금을 내밀며 말했다.


“금창약은 공짜로 주는 거고 이건 외상값 빼고 남은 거다.”


이주가 히죽거리며 돈을 챙겼다.


“고마워, 히히.”


정청하가 이주의 표정이 나아진 걸 보고 다시 물었다.


“이봐요, 그러지 말고 말 좀 해줘요. 이지상이란 사람이 당신을 때린 게 맞아요?”


이주가 청하를 돌아보더니 걸레로 코를 킁, 풀며 대답했다.


“그럼 내가 혼자서 지랄했을까 봐?”


청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니, 그 사람이 왜 당신을 때렸죠?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주가 청하를 한심스런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유가 뭐가 있겠어. 그냥 재미로 때린 거지. 아까 당신들 때문에 화 난 거 그 남자가 나한테 푼 거잖아. 나는 몇 대 처맞고 돈 번 거고. 아이고, 허리야. 대답하기도 귀찮으니까 더 말 걸지 마.”


이주가 의자에서 일어나 악인들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다 중간에 한 번 몸을 크게 휘청였다.

이주와 어깨를 부딪친 칼잡이가 쌍욕과 함께 이주를 반대쪽으로 밀어버렸다.

우당탕, 자빠진 이주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칼잡이 정수리에 가래침을 뱉었다.

노한 칼잡이가 이주를 덮쳤다.

엉겨 붙은 두 사람이 고성을 내지르며 서로 치고받으려는 순간 갑자기 객잔 구석에 있는 밀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럽다. 조용히 좀 해라.”


이주와 칼잡이가 즉시 싸움을 멈췄다.

칼잡이가 들릴 듯 말 듯 한목소리로 이주에게 조상과 사돈의 팔촌까지 욕을 퍼붓자 이주도 지지 않고 칼잡이의 부모를 개로 만들었다.

낄낄대며 칼잡이로부터 멀어진 이주가 붉은 홍등이 켜져 있는 밀실 안으로 사라졌다.

그때까지 이주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정청하가 한숨을 내쉬며 이불범에게 말했다.


“다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이불범이 술잔을 기울이다 웃음을 터뜨렸다.

청하가 계속 말했다.


“하지만 이지상이란 남자, 그 남자는 저들과 왠지 다르게 보였는데···. 여자한테 화풀이로 주먹질까지 하는 걸 보면 그자도 일반 흑도랑 별반 다르지 않나 봐요.”


한 자리 건너 앉아 있던 하후현이 정청하를 향해 싸늘하게 말했다.


“사매, 며칠 흑도들과 어울렸더니 벌써 까먹은 거야? 떠나기 전 맹주님께서 신신당부하셨잖아. 흑도를 같은 인간으로 보지 말라고.”

“하후 사형··· 말이 쉽지, 실제 상황에서 그게 돼요? 그래도 같은 사람인데.”

“그게 바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라니까. 사매, 정신 차려. 사매의 그 안일함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다칠 수 있어.”


정청하가 입을 삐쭉 내밀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사형. 주의할게요.”


하후현이 위를 올려다보며 이불범에게 물었다.


“너무 조용하지 않아?”

“가볼까요?”

“엉, 문 앞에서 잠깐 기척만 살피고 돌아와.”

“네.”


이불범이 검을 빼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정청하는 아까 잠깐 마주했던 이지상과 그 일행의 모습을 떠올리며 술을 한 잔 더 기울였다.

순간 밀실에서 험악한 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몸을 돌린 청하의 눈에 커다란 곰에게 멱살이 잡힌 채로 끌려 나오는 이주가 보였다.

이주를 붙잡은 덩치 큰 사내가 곰 가죽을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있어 진짜 곰인 줄 알았다.

곰 사내가 이주를 탁자를 향해 사정없이 내던지며 고성을 내질렀다.


“이년이 감히 누구 앞에서 밑장을 빼고 자빠졌어, 미쳤냐? 이 쌍년아.”


탁자에 부닥친 이주가 허리가 뒤로 크게 꺾이며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칼잡이들은 이주가 마치 더러운 뭐라도 되는 양 옆으로 후다닥 물러났다.

이주가 바닥에서 신음하며 다가오는 곰 사내에게 말했다.


“미안, 남원기(南元岐). 진짜 미안. 내가 잠깐 눈에 뭐가 씌었나 봐. 다신 안 그럴 테니까 이번 한 번만 봐주라. 응? 내가 딴 돈도 너한테 다 줄게. 응? 제발···.”

“이 망할 년이 밑장 빼고 걸리니까 바로 꼬리 내리고 자빠졌네. 하하하, 야, 나는 니 더러운 돈 필요 없어, 이 쌍년아. 대신 다른 게 필요해. 오늘 내가 기필코 네 손모가지 두 개를 잘라서 내 베개에 넣고 자고 말겠어.”

“안 돼, 남원기, 제발, 제발 그것만은···. 내가 이렇게 빌게. 남원기, 제발. 살려줘.”


보다 못한 정청하가 검을 빼 들고 일어서려는 데 하후현이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붙들었다.


“상관하지 마.”

“아니, 그래도 사형!”

“저들 일은 저들끼리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라고!”

“하···.”


그때 이불범이 2층에서 내려왔다.

이불범이 별일 없다는 듯 하후현에게 눈짓했다.

이불범이 하후현과 청하 사이에 자리하며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청하가 턱짓으로 바닥에 자빠져있는 이주를 가리켰다.

남원기라는 사내가 손이 발이 되게 빌고 있는 이주를 일으켜 세우더니 다른 사내들에게 지시해 그녀의 양손을 탁자에 올리게 했다.

이주가 머리를 남원기에게 짓눌린 채로 이를 악물고 저항했다.

남원기가 실실 쪼개며 이주의 얇은 상의를 북, 북 찢어버렸다.

어마어마한 흉터로 뒤덮인 이주의 등이 모두의 시야에 드러났다.

청하가 끝내 두 눈을 감았다.

이주가 울부짖었다.


“끄아아아악, 안 돼···! 제발···!”


그녀의 양팔이 탁자 위로 올려졌다.

남원기가 누군가로부터 칼등에 강철 고리가 무수히 달린 묵직한 환도(環刀)를 받아들었다.

그것은 대파비웅(大巴臂熊)이라 불리는 남원기의 칼, 소리환도(魈魑環刀)였다.

남원기가 소리환도를 머리 위로 서너 번 휘저으며 울먹이고 있는 이주를 향해 말했다.


“이주야, 눈 뜨고 잘 봐둬라. 앞으론 이 두 개의 팔을 영영 볼 수 없을 테니, 하하하, 야, 다들 잘 잡고 있어.”


남원기가 높이 들어 올린 환도를 이주의 양팔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까아아아앙――


소리와 함께 날아든 정청하의 진매검이 남원기의 소리환도를 제때 막아냈다.

남원기가 대갈했다.


“무슨 짓이냐!”


뒤쪽에 있던 하후현과 이불범이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채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청하가 남원기를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있는 동안 이곳에서 어떠한 폭력 행위도 허락할 수 없다.”


남원기가 혀를 세게 차며 물었다.


“무림맹이면 남의 대소사에 함부로 끼어들어도 되나?”

“돼.”

“뭐?”

“된다고. 너희 같은 범죄자들의 일에 끼어드는 게 바로 우리 무림맹이 하는 일이야. 내가 분명히 경고하는데 오늘 이 여자 팔을 자를 생각일랑 일찌감치 접어두는 게 좋아.”

“···만일 그렇게 못하겠다면.”


정청하가 진매검의 검끝으로 남원기의 목을 겨누며 말했다,


“그럼 죽어야지.”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자 이불범이 사매를 돕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하후현이 그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하후현은 사매의 경솔한 행동에 무척이나 화가 난 상태였다.

해서 그녀가 엎지른 물, 그녀가 주워 담게 할 생각이었다.

남원기가 환도의 날을 털이 숭숭한 가슴팍에 들이댄 채로 주변을 돌아봤다.

어스름 속에서 상당한 무위의 악인들이 그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남원기가 바닥에 침을 흘리듯 내뱉더니 정청하와 이주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좋아, 내 이번 한 번만 물러나 주지. 대신 이주야, 다음번에 보면 그땐 꼭 네 팔을 잘라낼 거다. 그때까지 어디 한 번 내게서 멀리 도망쳐봐라.”


남원기가 눈짓하자 이주의 몸을 붙들고 있던 놈들이 그녀를 놓아주었다.

이주가 온몸에 힘이 빠진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청하가 남원기를 향해 여전히 검을 들이민 상태로 조심스럽게 이주의 한쪽 팔을 붙들었다.


“일어나요, 나랑 함께 저쪽으로 이동해요.”


이주가 끙, 신음하며 청하의 팔을 붙들었다.

그리고는 청하에게 기대 몸을 일으키는 척하다가 갑자기 청하의 대퇴부 쪽 혈도를 찍었다.

하지만 청하가 일신에 보유한 자하신공의 진기가 그녀의 손가락을 튕겨냈다.

놀란 청하가 이주에게서 몸을 빼내려는 데 이주가 번개처럼 다리를 회전시켜 청하의 다리를 차서 넘어뜨렸다.

깜짝 놀란 하후현과 이불범이 동시에 신법을 펼쳤지만 때맞춰 튀어나간 남원기와 악인들에게 가로막혔다.

삽시간에 검과 칼이 수십 합 맞부딪쳤다.

고성 속에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얼마 안 있어 누군가 모두를 향해 소리쳤다.


“당장 멈춰!”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주였다.

이주가 정청하의 목에 단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정청하는 무려 악인 세 사람에게 몸이 깔린 채로 검까지 빼앗기고 바닥에 엎드린 상태였다.

그녀 옆으로 그녀에게 죽은 악인 시체 두 구가 엎어져 있었다.

하지만 청하의 무위가 아무리 뛰어나도 좁은 공간에서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악인들을 모두 막아낼 순 없었다.

더군다나 이주가 이미 그녀의 예봉을 꺾어버린 상태였다.

이주를 매섭게 노려보던 하후현과 이불범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정청하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주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이주가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녀석과 거래했거든.”

“뭐?”


순간 2층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이지상이 그의 심복 마상춘과 함께 계단을 내려왔다.

지상이 이주를 향해 박수를 치며 말했다.


“훌륭해. 기대 이상이야.”


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화를 참고 있는 하후현과 이불범을 한 차례 일별하고는 정청하에게 다가갔다.

지상이 정청하의 혈도를 짚었다.

청하의 3성에 가까운 자하신공도 지상의 손속은 막아낼 수 없었다.

그제야 그녀를 전력으로 누르고 있던 사내들이 숨을 헐떡이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때 남원기가 지상을 향해 물었다.


“당신이 혈화문 문주 이지상이요?”

“댁은 누구신지?”

“대파산 비웅(臂熊) 남원기라고 하고, 이주에게서 당신의 거래를 제안받은 사람이요.”

“그렇군. 남 형, 내 제안을 받아줘서 고맙소.”

“약속한 대금은 확실할 테죠?”

“당연한 말씀. 하지만 일단 여기부터 벗어난 뒤 얘기합시다.”


순간 하후현과 이불범이 객잔 문을 막아섰다.

하후현이 말했다.


“택도 없다. 이지상 넌 절대 이곳을 벗어날 수 없어.”


지상이 엷게 미소하며 이주를 향해 눈짓하자 이주가 정청하의 목에 실금을 그었다.

선홍빛 혈흔이 청하의 하얀 목덜미를 타고 옷 속으로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현무칠협 이인이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지상이 손을 뻗어 청하의 가녀린 목을 움켜잡았다.

청하의 목에 뻘건 손도장이 그려졌다.

이불범이 소리쳤다.


“그만둬!”


지상이 손을 멈추고 두 사람에게 경고했다.


“당장 비켜서. 목이 부러진 사매를 보고 싶지 않으면.”


하후현이 노기를 참지 못하고 칼을 움켜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불범이 사형 하후현에게 다가가 억지로 그를 옆으로 밀어냈다.


“사형, 제발. 다음을 기약합시다. 네? 일단 청하는 살리고 봐야 할 거 아닙니까.”

“이런 엿 같은··· 내 이런 일이 있을까 봐, 그리도 경고했는데!”


악인 하나가 두 사람을 조심스럽게 지나쳐 객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미 내부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하후현과의 불화로 들어오기를 주저했던 조진이 그의 부하들과 함께 입구를 철통처럼 틀어막고 있었다.

지상이 정청하를 붙든 이주와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더니 그의 양쪽 소맷자락이 어딘가를 향해 펄럭였다.

지상이 쏘아낸 홍사검과 흑사검이 이주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들던 반월 모양의 대도(大刀)를 쳐낸 뒤, 곧장 누군가의 목을 싹둑 베어버렸다.

세오객잔의 주인 대머리 사내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 한참을 굴러다니다가 탁자 다리에 부딪혀 멈춰섰다.

기겁한 마상춘이 지상에게 물었다.


“주인장이 왜?”


지상이 담담히 응답했다.


“무림맹 끄나풀이었던 게지.”


순간 객잔 내부에 있던 모두가 헉, 소리를 내질렀다.

지상이 단검을 모두 걷어 들인 뒤 하후현과 이불범에게 밖으로 나가라며 턱짓했다.

하후현과 이불범이 뒷걸음질로 객잔 밖으로 나가자, 지상과 마상춘, 이주와 정청하, 남원기와 악인들이 차례대로 객잔을 빠져나왔다.

지상이 객잔 주위를 지켜선 이백 인의 적들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너희 중에 진매검 정청하가 무림맹주 여불선의 직계 제자란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오늘 이곳에서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부터 우리는 목적지로 향할 것이고 안전한 곳에서 그녀를 풀어줄 생각이다. 고민할 필요 없다. 너희는 그저 이곳에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니까. 너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지상이 남원기를 향해 품에서 꺼낸 일화(一花)를 던져주며 말했다.


“어디로 가든 저 녀석들의 말까지 전부 끌고 가주시오. 계산서는 며칠 지나 혈화문으로 청구하고.”


남원기가 활짝 웃으며 한쪽 눈을 깜박이더니 악인들과 함께 적들의 말에 올라탔다.

녀석들이 자신이 탄 말 양옆으로 한두 마리씩 말 고삐를 더 붙잡은 채 잠시 대기했다.

지상이 상급 무사 조진을 매섭게 노려보자 조진이 한 차례 하후현을 사납게 쳐다보고는 부하들에게 봉쇄를 풀라 명령했다.

남원기가 무리의 선두로 나아가며 지상에게 말했다.


“지상 문주, 멋진 거래였소.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함께합시다.”

“그럽시다.”


악인들이 탄 말이 흙먼지를 내뿜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지상이 휘파람을 불자 한혈마와 마상춘의 말이 그 앞으로 또각또각 걸어 나왔다.

지상이 문득 이주를 돌아보며 물었다.


“야, 넌 왜 안 갔어?”


이주가 황당해하며 말했다.


“어떻게 가. 이 여자를 붙잡고 있는데.”


지상이 이주에게서 정청하를 빼앗아 한혈마에 태웠다.

그가 한혈마에 올라타며 마상춘에게 말했다.


“둘이 같이 타고 먼저 달려. 내가 뒤에서 엄호하며 따라붙을 테니.”

“네.”


마상춘과 이주가 탄 말이 앞서 나가자, 지상이 한혈마 위에서 하후현과 이불범에게 말했다.


“정청하는 주산채 주인 소 씨에게 맡겨둘 테니, 알아서 찾아가. 그리고 행여라도 따라붙을 생각하지 마. 만일 꼬리 붙은 게 보이면 그 즉시 정청하를 떨어트려 말발굽으로 머리통을 짓밟아버릴 테니까. 알겠지만, 난 헛소리 안 해.”


하후현이 지상을 향해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다음에 만나면 넌 내 손에 죽는다. 임무고 뭐고 없다. 넌 반드시 내 손에 죽는다.”


지상이 하후현을 향해 맑게 미소하며 답했다.


“기대하마. 이럇!”


지상과 정청하가 탄 한혈마가 이백 인의 적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산채를 향해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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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악인곡(惡人谷)(3) 23.10.03 272 6 15쪽
» 악인곡(惡人谷)(2) 23.10.02 294 6 19쪽
54 악인곡(惡人谷)(1) 23.09.30 315 8 12쪽
53 기린아 당지위(唐志偉)(2) 23.09.29 310 6 15쪽
52 기린아 당지위(唐志偉)(1) 23.09.28 345 5 13쪽
51 밀정(密偵)(3) 23.09.27 313 6 14쪽
50 밀정(密偵)(2) 23.09.26 316 6 18쪽
49 밀정(密偵)(1) 23.09.25 337 7 13쪽
48 대운종(大雲宗)(4) 23.09.23 390 6 16쪽
47 대운종(大雲宗)(3) 23.09.22 347 5 15쪽
46 대운종(大雲宗)(2) 23.09.21 372 6 14쪽
45 대운종(大雲宗)(1) 23.09.20 413 7 13쪽
44 탁단봉(卓丹峰)의 심장(4) 23.09.19 377 8 19쪽
43 탁단봉(卓丹峰)의 심장(3) 23.09.18 401 8 15쪽
42 탁단봉(卓丹峰)의 심장(2) 23.09.18 411 7 19쪽
41 탁단봉(卓丹峰)의 심장(1) 23.09.15 444 6 17쪽
40 무림맹주 여불선(余不善) 23.09.14 437 6 19쪽
39 혈화문(血華門) 23.09.13 420 6 15쪽
38 추석 23.09.12 406 6 15쪽
37 매화검수(梅花劍手) 채인하(蔡刃昰) 23.09.11 418 6 19쪽
36 흥정(2) 23.09.09 425 9 16쪽
35 흥정(1) 23.09.08 506 8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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