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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도황제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이화영
작품등록일 :
2023.07.31 18:04
최근연재일 :
2023.12.30 10:43
연재수 :
9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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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326
추천수 :
659
글자수 :
649,521

작성
23.09.08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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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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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흥정(1)

DUMMY

이호와 함께 급히 대문으로 달려가 보니, 혈화문 장원 앞에 어마어마한 상단 행렬이 자리하고 있었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 북쪽 고원 지방으로 떠나려는 금강상단 소속 상인들이었다.

그 중심에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마심아의 아버지이자 내 동업자 마영인 대인 말이다.

나는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마냥 기쁜 마음으로 마 대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잘 오시었소. 마 대인.”

“반갑소, 지상 문주. 한데 내 갑자기 찾아와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소. 장례식 때 못 들러 미안한 마음도 있고, 또 북방으로 떠나는 길에 몇 가지 안건들을 미리 상의하려고 들렸는데···.”

“폐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들어가서 편히 얘기 나눕시다.”


내가 그의 손을 잡고 장원 안으로 이끌었다.

마 대인과 그의 수행원 몇 사람이 나를 따랐다.

장원 곳곳이 공사 중이고, 또 본채 집무실이 누추해 후원의 송파정(松波亭)으로 모시려 했으나, 마른하늘에 웬 진눈깨비가 나부꼈다.

부득이 발걸음을 집무실로 옮겼다.

식사 중이던 부하들이 허겁지겁 상을 치웠다.

그 속에서 추문강을 발견한 마 대인이 깜짝 놀라 나를 바라봤다.

귓속말로 마 대인께 그간의 일을 간단히 설명하자, 마 대인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찾아 들었다.

내가 손짓하자 추문강이 다가와 겸연쩍은 얼굴로 마 대인과 악수를 나눴다.


“오랜만이오, 마 대인. 긴말 않겠소. 우리 옛일은 잊고 앞으로 있을 좋은 일만 생각합시다.”


추문강과 악수를 한 마 대인이 다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이곳에서 추 방주님 직위가···?


내가 빠르게 대답했다.


“편하게 추 고문으로 부르십시오.”


마 대인이 미소하더니 추문강의 손을 양손으로 다잡으며 말했다.


“추 고문. 저와 지상 문주 사이의 일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신 점,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잘해봅시다.”

“하하하, 추 고문이라, 듣기 나쁘지 않구만. 그래, 잘해봅시다. 마 대인.”


부하들을 내보내고 왕정정에게 차를 내오라 일렀다.

임하선과 강군을 따라 밖으로 나가려던 두문택의 바지춤을 붙잡았다.

내가 녀석을 팔선탁 가죽 의자에 앉히며 말했다.


“넌 대기.”

“왜?”

“이분들은 네 손님이기도 하거든.”

“응?”


나와 추문강, 두문택은 마 대인 일행과 팔선탁을 사이에 두고 통성명을 나눴다.

마 대인이 그를 따라온 세 명의 사내 중 청의 차림에 나름 영민하고 준수하게 생긴 삼십 대 검객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서진(徐瑨)이라고 우리 금강상단의 수석 무사입니다.”


나와 추문강, 두문택이 서진에게 포권의 예를 올렸다.

그 역시 보검을 든 손을 마주 잡고 우리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인사가 끝난 뒤 서진은 집무실 문 앞으로 이동해 그곳에서 경계를 섰다.

마 대인이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평소 그의 역할인 듯싶었다.

마 대인이 바로 옆에 있던 은발의 중년 사내와 땅딸막한 사십 줄의 사내를 동시에 소개했다.


“이 사람은 도방 탁지엽(卓之葉)으로 저와는 오랜 세월 상단 일을 함께했고 또 죽은 제 아내의 친동생입니다. 제가 북방에 나가 있는 동안 이 친구가 상단의 모든 일을 처리할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 사람은 앞으로 심아를 대신해 지상님과 연락을 주고받을 사람입니다. 이름은 증기동(增基棟)이고 직책은 행수입니다.”


내가 훤칠한 미남자인 은발의 중년 사내와 증기동 행수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탁 대인. 그리고 증 행수도.”


탁지엽이 한 발 앞으로 나와 포권으로 인사하며 화답했다.


“지상 문주님, 매형에게 얘기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옆에 계신 추 고문님도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는 끄덕였고, 추문강은 덕담을 남겼다.


“서로 무탈한 모습으로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나도 무척이나 흐뭇하오. 앞으로도 계속 잘해봅시다, 탁대인. 그리고 증 행수님도.”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그때 탁지엽이 두문택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분은···?”


그제야 내가 마 대인 일행에게 두문택을 소개했다.


“여러분, 이 녀석이 바로 ‘과부의 뜨거운 밤’의 작가 두문택입니다.”

“호~”

“아!”


마 대인과 탁 대인이 마치 두문택의 추종자라도 된 듯 양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두 사람이 앞다퉈 두문택과 인사를 나눴다.

두문택의 양쪽 입꼬리가 귀밑까지 올라갔다.

내가 두문택에게 마 대인과 우리가 무슨 일을 함께하고 있는지를 상세히 털어놨다.

‘과부의 뜨거운 밤’의 재판본을 십만 부나 찍어낸 사람이 바로 여기 계신 마 대인이란 말을 했을 때 두문택의 눈동자가 아이처럼 빛났다.


이후로 집무실은 두문택의 독무대가 되었다.

녀석은 차기 작품으로 계획 중인 무협지에 대한 기획안까지 가져와서 마 대인 앞에서 자랑하듯 떠벌렸다.

내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대화가 무르익자 왕정정이 들어와 차를 따랐다.

다시 한번 느끼는 바지만, 왕정정은 많이 멍청하긴 해도 처세술 하나는 타고 났다.

그녀는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다소곳한 모습으로 말 한마디 없이 마 대인 일행을 공손히 대접했다.

한쪽으로 물러나 다과를 깎을 때도 평소의 그 경망스러운 모습은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한데 안타깝게도 오늘의 주인공은 왕정정이 아니었다.

마 대인과 탁 대인은 두문택의 입담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하긴, 마인들까지 홀린 전설의 입담이니.

나는 잠깐 추문강과 증기동 행수라는 사람을 데리고 창가로 이동해 담배를 피웠다.

내가 은근슬쩍 증 행수에게 마심아의 소식을 물었다.

증 행수가 차분히 대답했다.


“마심아 대행수는 지금 쌀 수매를 담당하는 사촌 오빠를 돕기 위해 묘강밀림에 가 있습니다.”

“묘강밀림?”

“네, 그곳은 중원보다 한 달 늦게까지 수확 철이 이어져 지금이면 싸고 품질 좋은 쌀을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습니다. 마침 손이 모자란다고 사촌 오빠로부터 기별이 와서 이틀 전에 상단 사람들을 데리고 출발했습니다.”

“···그렇군요.”


추문강이 문득 내게 말했다.


“지상아, 우리 슬슬 상장로 댁으로 출발할 시간이다.”

“맞다.”


내가 증 행수에게 우리 사정을 얘기했다.

증 행수가 마 대인과 대화를 나눈 뒤 우린 곧 서로 간의 일정을 조율했다.

마 대인은 지금 바로 상단과 함께 출발하기로 했고, 탁 대인과 증 행수는 남아서 두문택과 향후 일정에 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나와 추문강은 마 대인을 배웅한 뒤 바로 상장로 댁으로 출발할 생각으로 마구간으로 이동해 말을 타고 돌아왔다.

장원 입구에서 마 대인을 다시 만난 우리는 거의 군대 수준의 거대 상단 행렬이 이동하는 모습을 넋을 놓고 지켜봤다.

마 대인이 그의 황금 마차에 오르기 전 돌연 내게 물었다.


“지상 문주.”

“네.”

“혹시 우리 심아가 문주께 어떤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까?”

“네? 아닙니다. 그런 일 절대 없습니다.”

“···하면 왜 연락책을 바꿔 달라고 요청하셨는지 그 연유를 여쭤봐도 됩니까?”

“아··· 그게.”


내가 잠시간 머리를 긁적였다.

한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신 딸을 좋아한다고.

마심아랑 함께 있으면 가슴이 두근대서 미쳐버릴 것 같다는 말을 차마 할 수는 없었다.

마 대인이 이런 내 기분을 아는지 먼저 내 사정을 봐줬다.


“당장 말씀하시기 곤란하시면 뭐 다음에 하셔도 됩니다. 안 하셔도 되고요. 하하하.”

“감사드립니다. 마 대인. 아무쪼록 먼 길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음, 그리고 지상 문주. 일단 가봐야 알겠지만 아마도 상단과 함께 돌아오는 시기가 천룡회 회장 선거가 끝날 무렵일 겁니다. 내 회장 선거에 큰 도움은 못 드려도 틈날 때마다 좋은 결과 주십사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 대인.”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마 대인의 마차가 행렬의 뒤를 쫓았다.

서진이라는 수석 무사가 마차 앞에서 든든하게 말을 달렸다.

추문강이 다가와 말했다.


“참나, 저 양반, 진짜 널 좋아하나 본데?”

“왜?”

“나하고는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인사를 나눈 적이 없었어. 항상 가겠소, 가보겠소. 이렇게 단답형이었지.”

“그건 니가 좀···.”

“응?”

“아냐, 가자. 늦었다.”

“뭐? 말을 해. 왜 말을 하다 말어.”

“가자고, 늦었다고.”



*



미시(未時) 조금 넘어서 소중원 중심가에 있는 상장로 저택에 도착했다.

한데 말이 저택이지.

상장로 이춘수의 집은 전각 하나랑 우물 하나만 딸랑 있는 그야말로 중산층이 사는 일반 주택이랑 별반 차이가 없었다.

몇 년 전에 한 번 공무로 방문했을 때랑 달라진 게 있다면 대청 한쪽에 어린 앵두나무 한 그루가 심어진 것뿐이었다.

나와 추문강은 상장로만큼이나 연로해 보이는 노인 집사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 앞 좁은 낭하에 도착했다.

마침 집무실 안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보다 앞서 방문한 손님이 있는 모양이었다.

집사가 기침한 후,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 우리의 도착 사실을 알렸다.

얼마 안 있어 문이 열리더니 자색 철릭 차림의 사내 하나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철릭의 가슴에는 무림(武林)이라는 황금색 두 글자가 선명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나와 추문강이 차례대로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

이목구비가 더할 나위 없이 수려한 용모의 사내는 귀티가 좔좔 흘러넘쳐 얼핏 강호의 흔한 귀공자를 보는 듯했으나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살기는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나나 추문강처럼 살인을 밥 먹듯 하는 자의 것이었다.


사내가 감정이 하나도 실리지 않은 얼굴로 우리를 한 차례 일별하고는 그대로 낭하를 따라 대청 밖으로 사라졌다.

추문강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상장로에게 물었다.


“누굽니까?”


상장로가 우선 다가와 앉으라 손짓했다.

우리가 그의 책상 앞에 자리하자 상장로가 더운 듯 부채질하며 말해주었다.


“무림맹 사람인데 나도 오늘 처음 봤다. 특무관(特武官) 채인하(蔡刃昰)라고 하더구나.”


추문강이 따지듯 물었다.


“무림맹 사람이 어인 일로 예까지 찾아온 겁니까?”

“얼마 전에 대도무문 삼거리에 있는 류금전장(劉金錢莊)이라는 은행이 삼인조 강도들에게 털린 모양인데 그 강도들의 행적을 좇다가 여기까지 왔다더구나.”


나와 추문강이 짧게 눈을 마주쳤다.

상장로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물었다.


“아니지?”


내가 당당히 대답했다.


“저희가 무슨 하오문 조무래기들도 아니고 이 나이에 은행을 텁니까? 말씀이 조금 지나치십니다.”

“그래, 그렇겠지?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린놈이나 잡범은 아닌 듯싶더라. 다른 귀중품은 손도 안 대고 은자 덩어리만 2천만 냥 어치를 가지고 갔다는데··· 그게 딱 전문가의 솜씨거든. 일단 추적이 안 되잖아.”

“······.”

“······.”


내가 한쪽에 서 있는 집사를 돌아보자 그가 다가와 차를 따라주었다.

뜨거운 찻물로 입을 헹군 후 상장로에게 물었다.


“그래, 어인 일로 우릴 부르셨습니까?”

“아, 차차. 맞다. 내가 너희를 불렀지? 하하, 난 또. 웬일로 너희가 내 집을 방문했나 싶었다. 하하, 내가 이래, 80을 넘어서니 기억력이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는구나.”


그러더니 상장로가 갑자기 부채를 세워서 나와 추문강의 이마를 콕콕 찍었다.

추문강이 성내며 말했다.


“아니, 상장로 어르신. 기분 나쁘게 뭐 하는 겁니까? 우리가 애들도 아니고···.”

“애들이 아닌 놈들이 어제 잔혹동산에 가서 그 난리를 피웠냐?”


추문강이 즉시 입을 다물었다.

내가 남은 차를 다 마신 뒤 담배를 꺼내 물고 상장로에게 말했다.


“한 대만 피우겠습니다.”

“이 녀석아, 피우려면 나가서 피워.”

“그새 또 담배를 끊으셨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기분 나빠서 그래. 이 녀석아.”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그러니 양해 좀 해주십시오.”

“썩을 놈이···.”


상장로가 눈짓하자 집사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내가 담배를 피우며 그간에 있었던 잔혹동산 관련한 여러 사건들을 상장로에게 가감 없이 털어놨다.

이야기가 전 천룡회 회장 사천화의 죽음에 이르렀을 땐 상장로 이춘수 역시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얘기를 끝마치자 상장로가 넌지시 물었다.


“그 마인 나효란 놈이 분명 제 입으로 곽규랑 사천화를 죽였다고 말했다고?”

“곽규만 언급했습니다. 사천화 어르신은 그의 유해 일부와 소지품을 보고 나중에 추정한 것이고요.”


상장로가 침음하며 말했다.


“제갈세가 놈들이 도대체 왜 마교를 선거에 끌어들였을까.”

“그야 저희는 모르지요. 한데 총관 곽규의 죽음에 대한 수사는 누가 하고 있습니까?”

“철혈대 대장 진가엽(陳茄葉)이가 혼자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곽규의 죽음을 회합 전까지 숨긴 게 진가엽 대장의 생각입니까?”

“아니다, 그건 내 의견이었다. 그 전에 살수를 찾아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천룡회 회장 선거에 먹물을 끼얹기 싫었다.”

“······그렇군요.”


상장로 이춘수가 말없이 부채질만 연신 해대며 깊은 숙고에 빠져들었다.

얼마 뒤 추문강이 상장로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상장로님, 외람되오나 제갈세가가 상관세가를 돕고 있는 게 확실하다면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상관세가에게 물어도 되는 거 아닙니까?”


이춘수가 추문강을 사나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물었다.


“나한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게냐?”

“상관금천의 후보직 박탈을 요구합니다.”


추문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춘수가 냉소를 터뜨렸다.

그럼에도 추문강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이번엔 이춘수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지상이 너도 문강이랑 같은 생각이냐?”

“나쁠 거야 없죠.”


이춘수가 냉랭히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 정도 이유로 후보직을 박탈했으면 애초에 천룡회란 조직 자체가 유지될 수 없었다. 과거엔 이보다 훨씬 더 추잡하고 더러운 일들이 얼마든지 행해졌다. 하지만 그럼 에도 후보직 박탈은 없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흑도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범죄는 눈감아주는 게 우리의 상식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추문강과 이지상 너희들한테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무슨 문제 말입니까?”

“니들은 천룡회 회합 전 서로 간에 연맹을 맺어놓고도 그 사실을 나나 천룡회 간부 누구한테도 털어놓지 않았다. 그것도 엄연한 반칙 행위다.”

“······.”

“해서 내 이번 일은 이리 처리할까 한다. 들어보고 이의를 제기하든가 해라.”

“말씀하십시오.”


상장로 이춘수가 차 한잔으로 목을 축이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아무도 후보직에서 박탈되지 않는다. 천룡회 회장 선거는 기존에 공표된 대로 10월 1일에 시작해 12월 7일 마무리된다. 대신 진 장로가 제갈세가에 자신의 서신을 보낸 행위는 내 엄히 추궁할 생각이다. 그의 서신은 무효화 하든가 아니면 후보자 모두에게 오늘 중으로 보여주든가 할 것이다. 만일 보고 나서 무효화 필요성을 느끼면 내게 답장을 보내라. 내 그 문제만큼은 지상, 네 의견을 전적으로 따를 것이다. 이게 내 결정이다.”


추문강이 흥분해서 따졌다.


“아니 제갈세가에 대한 처벌은요? 마교랑 손을 잡았는데 아무 처벌도 없다고요?”

“제갈세가에 관해선 선거 기간 좀 더 면밀히 조사한 후, 선거가 끝나고 나면 바로 처벌할 것이다. 막말로 당장엔 지상이 네 증언 말고는 녀석들이 마교랑 손잡았다는 증거도 없지 않으냐? 만일 녀석들이 배 째라 오리발을 내밀면 그땐 어떡하란 말이냐?”

“아니, 실제 흑옥궁에 잡혀갔던 두문택이란 사람까지 실존해 있는데 증거가 없다니요?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그 두문택이란 친구도 결국엔 너희 혈화문 사람이라며···?”

“와··· 상장로님, 정말 이럴 수 있습니까?”

“내가 뭐? 나는 제갈세가가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주장을 내 입을 빌려 표현했을 뿐이야.”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내가 가벼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알았습니다. 하면 그리 알고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가 대뜸 자리에서 일어나자, 상장로가 황급히 책상 위에 올려진 내 손을 붙잡았다.


“잠깐.”

“······.”

“너희가 그리 억울하다 느낀다면 내가 이걸 보여줄 수도 있다.”


상장로가 맨 아래 책상 서랍을 열더니 하얀 종이 하나를 책상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추문강의 손이 즉시 종이로 움직였다.

내가 소리쳐 녀석을 제지했다.


“멈춰!”


추문강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됐어, 보지 마.”


서신은 상장로의 것이었고, 그 안에는 상장로 이춘수가 후보들에게 바라는 요구 사항이 적혀 있을 게 분명했다.

상장로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내게 말했다.


“봐도 괜찮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됐습니다.”

“설마 선거를 공정하게 치르고 싶다, 뭐 그런 공명심 같은 게 우러나와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닙니다.”

“하면?”

“그냥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안다?”

“네.”

“물어보면 대답해 줄 수 있느냐.”

“물론입니다.”

“하하하, 알았다. 이만 가봐라. 진 장로 서신은 오후 늦게나 도착할 거다.”

“네, 가자. 문강아.”


상장로 집을 나와 돌아가는 길에 추문강이 물었다.


“빨리 말해줘.”

“뭘?”

“이춘수가 원하는 게 뭔데?”

“뻔하잖아.”

“뭐냐고, 빨리 말해줘.”

“천산화(天山華).”

“야, 이지상. 그건 저번 선거 때 이춘수가 원했던 거잖아.”

“그래, 맞아. 그리고 아무도 못 구했지.”

“너,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때랑 지금이랑은 상황이 완전 다르잖아. 당시엔 이춘수가 아픈 딸을 살리려고 그 전설의 꽃을 원했던 건데. 딸은 몇 년 전에 이미 죽었잖아. 인제 와서 이춘수가 천산화를 얻어서 어디다 쓰냐고.”

“이유는 나도 몰라. 하지만 이춘수가 아직도 천산화를 원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그걸 대체 네가 어떻게 아냐고!”

“부채에 그려져 있었어. 눈 덮인 천산이랑 그 꼭대기에 핀 붉은 꽃 한 송이가.”

“헐.”

“뭔가 그리움 같은 걸 수도 있지. 천산화를 보고 딸을 회상하고 싶다거나.”

“아, 시발. 나도 아까 부채에 그려진 그림 봤는데 왜 난 그걸 보고도 너처럼 생각을 못 했지?”

“나도 운 좋아서 깨달은 거야. 그니까 멍청하다고 너무 자책하지 마. 그리고 우리 지금 해 떨어지기 전에 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 서둘러.”

“또 어딜 가는데? 그리고 나 안 멍청해. 이 새끼가 또 은근슬쩍 날 멍청이로 만드네.”


내가 말을 달렸다.

추문강이 쫓아오며 물었다.


“어딜 가냐고?”

“몽방의 올빼미 성. 늦기 전에 몽일천하고 매듭지어야 할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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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악인곡(惡人谷)(4) 23.10.04 272 4 13쪽
56 악인곡(惡人谷)(3) 23.10.03 278 6 15쪽
55 악인곡(惡人谷)(2) 23.10.02 301 6 19쪽
54 악인곡(惡人谷)(1) 23.09.30 319 8 12쪽
53 기린아 당지위(唐志偉)(2) 23.09.29 313 6 15쪽
52 기린아 당지위(唐志偉)(1) 23.09.28 348 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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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대운종(大雲宗)(3) 23.09.22 350 5 15쪽
46 대운종(大雲宗)(2) 23.09.21 375 6 14쪽
45 대운종(大雲宗)(1) 23.09.20 416 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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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탁단봉(卓丹峰)의 심장(2) 23.09.18 415 7 19쪽
41 탁단봉(卓丹峰)의 심장(1) 23.09.15 447 6 17쪽
40 무림맹주 여불선(余不善) 23.09.14 440 6 19쪽
39 혈화문(血華門) 23.09.13 425 6 15쪽
38 추석 23.09.12 408 6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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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흥정(2) 23.09.09 431 9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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