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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도황제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이화영
작품등록일 :
2023.07.31 18:04
최근연재일 :
2023.12.30 10:43
연재수 :
9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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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38
추천수 :
659
글자수 :
649,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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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1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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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매화검수(梅花劍手) 채인하(蔡刃昰)

DUMMY

내 얘기가 끝나자 몽일천은 황망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안색이 파리해진 그가 홀 겹의 궁장 자락을 여미더니 장심(掌心)에 한 가닥 뜨거운 진기를 끌어올렸다.

몽일천이 자신의 절기인 홍염수(紅炎手)로 손바닥 위에 작은 불꽃을 만들어냈다.

그가 잠시간 협탁 위에 놓인 초에 불을 붙였다, 끄기를 반복했다.

몽일천이 아른거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한 가지는 무리맹에 내 신변을 보호해달라 요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임시긴 하지만 자네 밑으로 들어가 혈화문 사람이 돼라. 하하, 지상 문주, 내가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 한들 정말로 그런 선택을 하리라 생각하는 건가?”

“네.”


몽일천이 나를 올빼미 눈으로 바라봤다.

그의 손바닥 위로 떠오른 홍염수의 불꽃이 어둠 속 올빼미 눈처럼 매서워졌다.

내가 차분히 대답했다.


“그나마 지금은 몽 방주께 선택권이라도 있지, 며칠만 지나면 이런 기회조차 없을 겁니다.”

“만일 내가 둘 다 거절한다면?”

“그럼 스스로 만든 이 감옥 안에서 산 채로 타죽든지 아편을 빨다 죽든지 하겠지요.”

“······.”

“오다 보니 성벽에 물을 흠뻑 뿌려놨던데 화공을 염려해서 그런 거 아닙니까? 영업장뿐만 아니라 본인에 대한 암살 시도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진정 아직도 여유가 있으십니까?”


몽 방주가 침울한 안색으로 말했다.


“올빼미 굴에 들어와 올빼미를 죽이는 것도 모자라 아예 깃털까지 싹 뽑아갈 작정이로군.”

“아닙니다··· 저는 올빼미와 함께 밖으로 나가 적들에게 맞서 싸우려는 겁니다.”


몽일천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았네. 하면 내가 자네 밑으로 들어가면 당장에 무어가 달라지나? 혈화문 장원에 있는 자네가 날 어떻게 보호해줄 수 있지?”

“그리되면 몽 방주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제가 제 세력을 지키는 게 되겠지요. 이곳에 몽방의 깃발이 내려가고 혈화문의 깃발이 올라갈 테니까요. 상장로와 천룡회에도 방주님의 후보직 기권 소식을 통보할 거고요. 만일 그런 후에도 적들이 이곳이나 다른 영업장을 공격한다면 그건 저에 대한 선전포고가 되겠지요.”

“자네가 그걸 감당할 수 있겠나?”

“가능하니까 이런 제안을 하는 겁니다. 선택은 방주님 몫이구요.”

“흠···.”


몽일천이 한참을 숙고하더니 처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생각할 시간을 하루만 더 주시게. 내 어떤 선택을 하던 최대한 빨리 자네에게 연락하겠네.”

“그리하십시오.”

“아, 그리고 지상 문주.”

“네.”

“혹시 자네 꿈이 뭔가? 내 보기엔 도저히 천룡회 회장 자리 하나로 만족할 것 같지 않은데···.”

“그건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몽 방주께선 당면한 문제부터 숙고하십시오.”

“알았네, 한데 선거가 끝나고 나서 자네가 날 놔주지 않으면 어찌 되지?”

“하하하하하, 그리되면 그냥 혈화문 사람으로 살면 되지, 뭐가 그리 걱정이십니까.”


내가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방을 나왔다.

추문강이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몽 방주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곧장 나를 뒤따랐다.

올빼미 성을 빠져나온 우리는 오랜만에 추석 전야로 북적대는 야야장으로 향했다.


“지상아, 나 잠깐 먹자거리 들러서 애들 줄 꼬치구이 좀 사 올게.”

“어, 그래. 다녀와. 나는 저기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있을 게.”


추문강을 보내고 먹자거리 외곽 한적한 곳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어느새 가을의 녹음이 엷어지고 누런 단풍이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날까지 선선해 바람막이 깃을 목까지 여며야했다.

그때 하나의 말 탄 인영이 뚜벅뚜벅 다가와 나와 열 장 거리에서 멈춰섰다.

무슨 일인지 방금까지 담벼락 아래 켜져 있던 푸른 등롱의 불빛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입을 열었다.


“잠깐 고민했다. 너희를 벨지 말지를.”


이야기 내용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고상하고 낭랑한 목소리였다.

내가 대답 없이 담배 연기만 꾸역꾸역 내뿜었다.


“내 직감은 분명 류금전장을 턴 게 너희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직감일뿐 증거가 없어 니들을 오후 내내 미행했다. 그리고 조금 전 결론에 도달했다.”


말솜씨가 형편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호기심에 조금만 더 들어보기로 했다.

그가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일단 너희를 베고 나서 그 후에 증거를 찾기로 했다.”


순간 보름달이 구름을 빠져나왔다.

소슬한 달빛에 적의 정체가 드러났다.

특무관(特武官) 채인하(蔡刃昰)라고 했던가.

점심 무렵 상장로 집에서 마주쳤던 자였다.

그가 검자루를 움켜쥔 채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내려라, 이지상.”


내가 담배꽁초를 멀리 내던진 뒤 말에서 내려섰다.

말 엉덩이를 쳐서 옆으로 물린 후, 양손을 교차시켜 쌍검자루를 움켜잡았다.

지나던 이들이 우리를 보고 화들짝 놀라 도망쳤다.

뜻하지 않은 진검(眞劍) 승부였지만,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상쾌했다.

근자에 채인하만큼의 기백을 보이는 적과 마주한 적이 없어서일까.

간만에 살아 있는 느낌이었다.


거기다 상대는 상당한 고수였다.

채인하가 내게 물었다.


“죽기 전 남기고 싶은 말은?”


내가 짧게 대답했다.


“없다.”


순간 자색 검강이 번쩍였다.

스치기만 해도 베일 것 같은 일단의 날카로운 검강(劍罡)이 내 보법보다 빠르게 머리칼을 자르고 지나갔다.

비튼 몸을 그대로 돌려 채인하의 그림자 속으로 파고들었다.


카아아앙―


채인하가 검을 등 뒤로 돌려 내 흑사검날을 막아냈다.

나와 등을 마주한 채로 녀석이 속삭였다.


“십 보. 십 보였지? 귀신보의 유효거리.”

“음영검을 알고 있나?”

“네 사부 유무성과 검을 마주한 적이 있다. 철부지 시절이었지.”


채인하가 흑사검의 톱날에 물린 자신의 검날을 비틀어 빼더니 팔꿈치로 내 머리를 후려쳤다.

안면을 강타당하는 위험을 무릎 쓰고 녀석의 오금을 걷어찼다.

홍사검의 월아가 쓰러지는 녀석의 철릭을 찢고 살을 한 움큼 베어냈다.

채인하가 땅바닥에서 한 바퀴 구른 뒤 짧은 거리에서 검을 연거푸 세 차례나 휘둘렀다.


각기 서로 다른 방향에서 공기를 가르며 날아드는 일직선의 검강.


그 앞에서 귀신보를 시전하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홍사검과 흑사검을 날려 두 개의 검강을 쳐낸 후 나머지 하나는 몸을 비틀어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채인하가 노리던 순간.

바람처럼 달려온 채인하의 검이 내 허리를 베었다.

문득 녀석의 검에서 매화 향이 느껴졌다.


벌어진 복부를 틀어쥐고 몸을 공중에서 크게 뒤집으며 땅바닥에 착지했다.

핏물이 물방울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기회를 놓칠세라 채인하가 달려와 단숨에 내 목을 베려 했다.

검술이나 보법에 쓸데없는 움직임이 하나도 없었다.

평생 검을 맞댄 상대 중에서 가장 강한 놈이었다.

하하하.

기뻐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까아아아아앙―


내가 왼 손목에 찬 원걸영의 은방울을 이용해 녀석의 매화검을 튕겨냈다.

땅을 끌듯 다리를 접어 채인하를 쓰러뜨린 뒤 잠시 땅바닥에서 녀석과 난투극을 벌였다.

구음백골조로 녀석의 허벅지 살을 한 가닥 찢어냈다.

채인하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더니 뒷발로 나를 힘껏 걷어찼다.

코뼈가 완전히 부러졌다.

우리 둘은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일어남과 동시에 쌍검을 거둬들였다.


채인하가 그 찰나 지간 내 양 손목과 이어진 투명한 유리사(琉璃絲)를 발견했다.

녀석의 몸이 공중으로 4장가량이나 높이 치솟았다.

인하의 목을 자르려고 교차해서 날아오던 홍사검과 흑사검이 빈 허공을 썰며 다시 내 손으로 들어왔다.

내가 장삼 한쪽을 북 찢어 복부의 상처를 동여맸다.

어느새 근처 장원의 담벼락 위로 올라선 채인하가 양손으로 그의 매화검을 움켜쥔 채 최후의 일격을 준비 중이었다.

녀석의 머리 위에 떠 있는 푸르스름한 달이 무척이나 차갑게 느껴졌다.


좀 놀랐다.


마인이 아닌 인간을 상대로 새로운 음영검을 써야 할 날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 몰랐다.

순간 저만치서 추문강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상!”

“다가오지 마. 거깄어.”


내가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눈을 감고 빠르게 새로운 음영검 구결을 읊었다.


‘혈적세(血積勢) 제1식 음영파라검(陰影破邏劍―!’


눈을 뜨자마자, 뼈에 스밀 듯 강렬한 매화향이 콧속을 파고들었다.

채인하가 흉광을 폭사(暴射)하며 섬전과 같은 속도로 지쳐들었다.

녀석의 매화검날이 내 몸통을 향해 거대한 호를 연속으로 그리며 쇄도했다.

귀신보를 쓸 수도,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는 허점 하나 없는 완벽한 초식이었다.

내가 만일 원걸영을 만나 음영신공을 완성하지 못했다면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채인하의 검에 갈기갈기 찢겼을 게 자명했다.

하지만 운 좋게도 나는 음영검을 완성했다.

수라의 날개가 등을 찢고 나와 채인하의 검강을 모조리 튕겨냈다.

내가 박쥐가 쏘아지듯 날아가 가위 치듯 움켜쥔 쌍검의 양날로 채인하의 매화검을 캉! 가로막았다.

순간 눈앞이 붉어지며 채인하의 몸속에 있던 피가 순식간에 내 몸으로 스며들어왔다.

피막과도 같은 거대한 뼈날개에서 뿌려진 음습한 혈기들이 공간을 지배한 채 채인하의 몸속 핏물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악.”


채인하가 요동치는 심장을 움켜잡고 갈가리 날뛰었다.

내게서 검을 뽑아내려 발버둥 쳤지만, 내가 놓아줄 리 만무했다.

곧 녀석의 검날을 꺾어 끝내 부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투카아앙―!


채인하가 마치 자신의 목이 꺾이기라도 한 것처럼 분노하며 내 어깻죽지에 이빨을 쑤셔 박았다.

순간 뼈날개가 효력을 다하고 사라졌다.

다시 찾아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에 내가 녀석의 몸뚱이를 끌어안은 채로 신룡도해(神龍渡海)의 수법을 펼쳐 담벼락을 향해 돌진했다.


쾅-! 소리와 함께 담벼락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뿌연 흙먼지와 부서진 돌들에 깔리기 직전 채인하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팔로 내 목을 틀어쥐었다.

내가 양다리를 머리 위까지 끌어올려 녀석의 목을 사정없이 휘감았다.

우린 남은 힘을 쥐어짜 서로의 숨통을 틀어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뭔가 딱 맞물린 순간 우린 팔 하나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서로의 힘이 팽팽하게 균형을 이룬 백중지세의 상태에 접어들었다.

얼마 후, 채인하가 입 밖으로 핏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아래쪽에 있는 내게 물었다.


“이지상, 혈교와는 무슨 인연이 있는 게냐?”

“인연 따윈 없다. 그저 무공 하나 훔쳐 배웠을 뿐.”

“방금 네가 펼친 게 흡혈신공이 맞지?”

“이름이야 갖다 붙이기 마련이지.”

“분명 내가 배를 베었을 때 네 내장을 함께 베었는데,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거지?”

“그건 나도 묻고 싶은 말이다. 피를 그만큼이나 빨렸으면서도 어떻게 기력이 하나도 쇠하지 않았지?”


채인하가 대답 없이 숨만 거칠게 몰아쉬었다.

나도 힘들긴 매한가지였다.

채인하가 투박하게 말했다.


“셋 세면 서로를 풀어 주기로 하자. 그러고 나서 다시 검으로 승부하자.”

“검은 부러졌을 텐데.”

“너 따위 부러진 검으로도 충분해.”

“하하, 여기까지 몰리고도 그딴 말이 나오냐?”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좋아, 세라. 단번에 끝을 보자.”

“하나, 둘···.”

“셋!”


나와 채인하가 즉시 서로의 몸을 놓아주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각자의 검을 움켜잡았다.

우리가 서로를 향해 검을 내지르려던 순간 갑자기 우리 두 사람 사이로 한 줄기 온화한 강풍과 함께 하얀 진눈깨비가 날아들었다.

얼굴에 묻은 그것을 떼어내고 보니 진눈깨비가 아니라 배꽃의 꽃잎이었다.


“매화에, 배꽃에 꽃 풍년이로구만.”


내가 소맷자락으로 입가에 묻은 핏물을 닦아내며 퉁명스레 말을 내뱉자, 곧바로 상공에서 내려온 누군가가 내 말을 이어받았다.


“꼬맹이, 안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이 몸이 납신 걸 알고서도 농을 지껄일 여유가 있다니.”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백의의 절세미녀를 바라봤다.

여우 털로 꼬아 만든 순백의 불진을 목에 두른 미녀가 나와 채인하를 한 차례 번갈아 바라보고는 문득 채인하를 향해 말했다.


“너 매화검수(梅花劍手) 채인하 맞지? 여불선 그 능구렁이 새끼가 늘그막에 얻었다는 복덩이. 호호호, 뭐 하고 있느냐. 까마득한 무림 선배를 봤으면 절부터 올려야지.”


채인하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인사를 받으려면 자신이 누군지부터 소개하는 게 순서가 아니겠소?”

“나를 모르느냐?”

“모르오.”

“네 평생 나처럼 아름다운 여자를 본 적이 있느냐?”


여인이 채인하 앞에서 가녀린 몸을 한 바퀴 휘돌렸다.

몸에서 떨어진 은가루가 달빛에 반짝였다.

한 떨기 전설 속 생화가 눈앞에서 춤추듯 흩날리자, 목석같던 채인하마저 얼굴을 붉혔다.


“······.”

“이제야 알겠느냐?”


채인하가 끄덕이더니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혹시 이화문의 은이화?”

“맞다. 하면 네가 어찌해야 하겠느냐?”

“당신이 내 사모(師母) 은이정의 자매라는 사실은 알고 있소. 하지만 그뿐이지 않소. 당신은 외부인에 불과하니 나와 특별한 관계도 아니오. 만일 강호의 선배로서 대우를 바란다면 내 그 정도 대우는 해드리겠소.”


채인하가 은이화를 향해 포권하더니 딱딱하게 묵례했다.

그러자 은이화의 신형이 눈 깜짝할 사이 채인화에게 달라붙어 녀석의 뺨을 수십 차례 후려갈겼다.

분기탱천한 채인하가 검을 휘둘러 막으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녀석의 손은 은이화의 불진에 맞아 뺨만큼이나 붉게 달아올랐다.


은이화가 다시 이형환영(移形換影)의 수법으로 제 자리로 돌아왔다.


채인하가 선지 같은 핏물을 꿀꺽꿀꺽 토해내다 결국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번엔 은이화가 나를 돌아봤다.

세상에.

그녀의 모습은 십 오 년 전 사부와 함께 봤을 때랑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경국지색이라 칭송받던 서시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이 내가 손목에 찬 은방울을 매섭게 노려보며 물었다.


“설마. 이지상 너 벌써 원걸영과 계약을 맺은 것이냐?”


내가 은이화를 향해 혓바닥을 쑥 내밀었다.

은이화가 고운 눈썹을 치뜨며 날카롭게 외쳤다.


“내 당장 널 찢어 죽이고 말 테다.”


내가 그녀에게 재빨리 말했다.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선배님.”

“왜?”

“벌써 잊으셨습니까, 제 사부 유무성이 당신의 목숨을 한 차례 구해주셨던 일. 그리고 그날 당신이 그 앞에서 했던 맹세를.”

“시푸랄, 어린놈이 기억력도 좋구나.”


그랬다.

예전에 사부는 누군가와 비무 후 초죽음 상태가 된 은이화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

그때 은이화는 자신을 구해준 대가로 유무성에게 그녀의 몸을 하룻밤 취할 권한을 주었다.

하지만 사부는 그 제안을 거절했고, 대신 훗날 자신이나 제자인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목숨을 한 번 구해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일렀다.


그 오래된 약속이 지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은이화가 무심히 섬섬옥수를 뻗어 한 쌍의 은방울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러면서 내게 속삭이듯 물었다.


“아수라대다라니경(阿修羅大陀羅尼經)을 보았느냐?”

“직접 보진 못했습니다.”

“하아··· 그럼 내 앞에 원걸영을 불러내 줄 수 있느냐?”

“지금 말입니까?”


그녀가 일순 주변을 돌아봤다.

우리가 있는 곳은 이미 야야장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겹겹이 둘러싸인 상태였다.

은이화가 구경꾼들을 향해 백의의 소맷자락을 펄럭이자, 구경꾼들 머리 위로 하얀 배꽃이 흩날렸다.

순간 구경꾼 중 누군가가 이지를 상실한 채 은이화를 향해 달려왔다.

은이화가 그 남자를 지척에서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더니 남자에게 대뜸 무릎을 꿇고 엎드리라 명령했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엎드린 남자를 의자 삼아 깔고 앉은 은이화가 턱을 괸 채로 내게 물었다.


“이지상, 네게서 원걸영을 빼앗을 생각은 접었다. 대신 녀석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다른 날 장원으로 찾아오시지요. 그때 차 한 잔 정중히 대접하겠습니다.”

“원걸영이도?”

“네, 한데 선배님.”

“응.”

“저번 날 선배님 부하가 제게 보여줬던 그 오풍초(烏風草) 말입니다. 그거 진짭니까?”

“당연히 가짜지.”

“아.”

“왜? 오풍초가 필요해?”

“제 동생이 사요(蛇妖)의 독에 당해 사지가 마비됐는데 행여 오풍초가 도움이 될까 싶어서 여쭤본 겁니다.”

“사요의 독을 당하고도 목숨을 부지했으면 남은 인생 부처님께 감사드리며 살면 되지. 왜 헛된 짓에 정력을 낭비하려 드느냐. 사요의 독으로 망가진 몸은 오풍초가 아니라 천년 하수오를 먹어도 나을 수 없다.”

“······.”

“암튼 내 조만간 찾아갈 터이니 이쁘게 꾸며놓고 기다리고 있어라.”

“뭘 말입니까?”

“원걸영!”


남자의 등에서 일어난 은이화가 쓰러져 있는 채인하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그녀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말했다.


“저 녀석이 여불선의 제자만 아니라면 데려가서 노예로 만들고 싶은데 아쉽구나. 하하하, 암튼 다음에 보자. 꼬맹아.”


그녀가 어딘가를 향해 손뼉을 치자, 갑자기 구경꾼들이 바다처럼 양옆으로 갈라졌다.

그 사이로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꽃마차가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이화문의 그 유명한 육준비거(六駿飛車)라는 전설의 마차였다.

풍문에 의하면 육준비거가 하늘을 나는 걸 목격한 이도 있었다.

가림막을 내린 꽃마차에 올라탄 은이화가 백색 궁장을 젖혀 매끄러운 허벅지를 사람들 앞에 한껏 드러냈다.

그녀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영원히 내 노예가 되고 싶은 자는 이 육준비거를 따라와라. 내 끝까지 쫓는 자에게 평생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천상의 밤을 선물할 터이니.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마부석에 있던 시녀가 채찍을 사정없이 휘두르자 마차가 하늘을 날듯 둥실둥실 앞으로 달려나갔다.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남정네가 마차를 쫓았다.

아낙들이 나서서 남편 몸을 붙들었다.

한데 마차 바로 꽁무니에 달라붙은 녀석들 속에 추문강이 섞여 있었다.

내가 몸을 날려 추문강의 혼혈을 눌러 단숨에 기절시켰다.

휘파람을 불자, 추문강과 내 말이 어디선가 쏜살같이 나타났다.

추문강을 말 등에 올려둔 채로 또각또각 말을 몰아 쓰러져있는 채인하에게 다가갔다.

잠깐 고민 후 녀석을 베지 않기로 했다.

품에서 은자 덩어리를 꺼내 녀석의 머리맡에 떨어트렸다.

류금전장에서 훔친 은자였다.

내가 신음하는 녀석을 향해 말했다.


“부러뜨린 검 값이다. 그리고 네 감이 틀렸다. 나와 혈화문 사람 누구도 류금전장을 털지 않았다. 하지만··· 좋은 승부였다. 채인하.”


말머리를 돌려 혈화문 장원을 향해 매섭게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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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악인곡(惡人谷)(3) 23.10.03 272 6 15쪽
55 악인곡(惡人谷)(2) 23.10.02 293 6 19쪽
54 악인곡(惡人谷)(1) 23.09.30 314 8 12쪽
53 기린아 당지위(唐志偉)(2) 23.09.29 309 6 15쪽
52 기린아 당지위(唐志偉)(1) 23.09.28 344 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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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밀정(密偵)(2) 23.09.26 316 6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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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대운종(大雲宗)(4) 23.09.23 389 6 16쪽
47 대운종(大雲宗)(3) 23.09.22 346 5 15쪽
46 대운종(大雲宗)(2) 23.09.21 372 6 14쪽
45 대운종(大雲宗)(1) 23.09.20 412 7 13쪽
44 탁단봉(卓丹峰)의 심장(4) 23.09.19 377 8 19쪽
43 탁단봉(卓丹峰)의 심장(3) 23.09.18 400 8 15쪽
42 탁단봉(卓丹峰)의 심장(2) 23.09.18 411 7 19쪽
41 탁단봉(卓丹峰)의 심장(1) 23.09.15 443 6 17쪽
40 무림맹주 여불선(余不善) 23.09.14 436 6 19쪽
39 혈화문(血華門) 23.09.13 420 6 15쪽
38 추석 23.09.12 405 6 15쪽
» 매화검수(梅花劍手) 채인하(蔡刃昰) 23.09.11 418 6 19쪽
36 흥정(2) 23.09.09 424 9 16쪽
35 흥정(1) 23.09.08 505 8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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