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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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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2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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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3)

DUMMY

양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길버트는 고개를 들었다. 길버트는 탁자 위에 대고 있던 팔꿈치를 이용해 교묘하게 투명한 액체를 닦아냈다. 물론 모두 길버트를 주목하고 있어서 그 움직임을 놓친 사람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암묵적으로 못 본 체 하기로 한 듯했다.

길버트는 충혈된 눈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멍한 표정으로 탁자의 나뭇결을 따라 이리저리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것은 사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옆에서 봤다면, 꼭 사색에 잠긴 어느 학자 같은 모습이었다.

실제로 길버트는 슬퍼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입매가 기울어지거나 비뚤어지는 일도 없었고 눈은 약간 충혈되긴 했지만 온화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꼭 크게 넘어진 이후에 간신히 울음을 참는 어린아이의 얼굴 같다고 생각했다.

길버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사람들 역시 길버트에게 어떤 말도 걸지 않았다. 분위기는 칙칙했다.

잠시 후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던 침묵은 길버트의 깊은 한숨과 함께 종식되었다.

한숨을 내쉰 길버트는 자신과 전혀 관련 없는 일을 말하는 사람처럼 감정 없는 투로, 그리고 나지막하고 사무적인 투로 말했다.


"주교님의 말이 맞는 것 같군요. 예, 말씀대로입니다. 굳이 억지스럽고 희망적인 가정에 매달릴 필요는 없겠지요. 그 정보가 확실하다면 폐하께선 이미 승하하셨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유는 자명할 것 같습니다. 무패의 기사(騎士) 타레토는 눈 앞의 예상할 수 있는 수천 명의 적보다 예상할 수 없는 등 뒤의 아군 한 명이 더 두렵다고 말했습니다. 자드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자드는 자신이 북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자신의 등 뒤에서 일어날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길버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별안간 테오도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오도르는 두 사제와 하임 주교에게 은밀한 손짓을 보내며 회의실 입구로 움직였다. 곧 두 사제와 하임 주교가 테오도르를 따라 방을 나섰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서 네 사람은 다시 복귀했다. 테오도르는 여전했지만 두 사제와 하임 주교의 분위기가 조금 바뀌어있었다.

방으로 들어온 두 사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눈빛으로 길버트를 바라보았고, 하임 주교는 큰 실수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안절부절하기 시작했다. 그때 멀락이 길버트와 하임 사이에 오가는 묘한 기류를 단칼에 잘라냈다.


"이것 참 일이 더럽게 흘러가는구먼. 전쟁이라고?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구만. 하임 자네가 말해보게. 그 카니쿨라 같은 공작은 대체 왜 평화로운 호수에 파문을 일으킨 겐가?"


추기경이라는 직위와 멀락의 나이를 고려해보자면 그것은 다소 부적절한 언행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 자리에서 그 사실을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멀락의 푸념 비슷한 것을 신호로 본격적인 회합이 시작됐다. 말문을 튼 것은 하임이었다. 다섯 명이 회의를 벌일 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하임은 상황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말씀처럼 상황은 썩 더러운 편입니다. 현재 상황이 너무 복잡해서 한눈에 파악하기가 어려울 것 같으니 일단 정리하는 게 우선일 것 같습니다. 글쎄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역시 종교전쟁부터 얘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전쟁에서 있었던 일이 모든 것의 시발점이니까요."


하임은 리버 일행을 바라보며 설명을 이었다.


"여러분들은 추기경들께 대강 얘기를 들으신 것 같지만 그럼에도 간단하게 순서대로 한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어쩌면 얘기하는 도중에 다른 사실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곳에는 현명하신 분들이 잔뜩 모여있으니까요.

우선 이제 와서 종교전쟁의 발발 원인이나 목적을 따지지는 않겠습니다. 지금은 정치적이건 종교적이건 경제적이건 따질 계제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이 얘기는 전쟁 직후 남부의 네 명이 북부의 머리에 도달한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아니요, 생각해보니 그 전설적인 썰매꾼의 일화는 빼야 할 테니 세 명이라고 해야겠습니다.

남부의 세 명, 각각 테오도르 추기경과 자드 공작 그리고 듀라트 백작은 북부의 머리에서 대주교를 만나 유적과 성물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이후 각각의 행보를 알아보자면 이렇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테오도르 추기경께선 저희의 눈 앞에 계십니다. 추기경께선 무벤으로 돌아와 저희들과 멀락 추기경님과 함께 유적 탐사에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탐사 도중에 북부와의 교류로 악시오마에 대한 해석을 계속해서 듣고 있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듀라트 백작입니다. 이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남부인이면 모르는 이가 없겠지요. 그것이 배반인지 도망인지 망명인지 사망인지 모르겠지만 백작은 어느 날 사라져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자드 공작입니다. 현재 저희들이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입니다. 공작은 북부의 머리에서 내려온 후에 콜텐으로 곧장 돌아갔습니다. 그 뒤에는 얌전하게 치세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이면은 조금 다릅니다. 치세를 하는 와중에 공작은..."


거기까지 말한 하임은 잠시 입을 다물고 슬쩍 루나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루나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임은 그것이 승낙의 의미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치세의 이면에는 집요한 추적이 있었습니다. 공작은 전쟁이 종식된 후부터 쭉 무녀들의 마을을 수색해왔고, 고작 몇 년 만에 루나님을 찾아냈습니다. 루나님을 찾아낸 이유에 대해선 여러분들도 이미 알고 계실 테니 굳이 부연하지는 않겠습니다.

다행히 루나님은 자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셨습니다. 그 후의 행방은 저희들은 알지 못합니다. 저희들이 아는 것은 폴 영지에서 리버님과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서 두 분은 마침 폴 영지에 머무르던 토비님의 도움으로 탈출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길버트님은 그 시기에 아마 듀라트 영지에서 힘겨운 날을 보내고 계셨을 겁니다. 제 말이 모두 맞습니까?"


곧장 리버가 감탄하며 대답했다.


"대단한데요? 그런데 추기경... 아니 주교님. 저희들이 듀라트 영지로 움직였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아내신 거예요? 저희는 폴 영지의 지하에서 빠져나온 후로 어떤 마을에도 들르지 않았는데요."


리버의 말에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토비가 고개를 내렸다. 토비는 과연 듣고 보니 그렇다는 표정으로 하임 주교를 바라보았다. 그 옆에 있던 길버트와 루나 역시 조금 의문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임 주교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여러분이 듀라트 영지에 계실 거라는 확신은 없었습니다. 그야 저희는 신을 믿는 사람들이지 점쟁이는 아니니까요."


"그럼 어떻게 저희를 찾아낸 거죠?"


"저희들에겐 인력이 풍부합니다. 예컨대 저희 수도원에는 수도원 담을 넘을 수만 있다면 어떤 고행도 마다 않겠다는 혈기왕성한 사제들이 가득합니다. 게다가 리버님이 계셨던 폴 영지는 외진 곳에 있지 않습니까. 그 주변에는 사람이 사는 마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리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길버트는 대신 대답했다.


"남부의 모든 영지로 사제들을 파견한 모양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사실 지나치게 외진 곳을 제외하면 피오의 교구는 어디에나 있고, 그래서 여러분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마탑이 없는 영지와는 소통할 수 없으니 그 경우엔 직접 사람을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곳들 중 한 곳이 듀라트 영지였고, 다행히 필립 주교가 여러분을 찾아내 서신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대륙 단위의 세작질이군요. 수도원에서 적극적으로 정보를 모으는 일은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는군요."


"그렇게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비단 여러분을 찾기 위한 목적 만은 아니었습니다. 테오 추기경께서 꿈의 계시를 받은 날부터, 저희는 대륙의 정세를 유의 깊게 주시해야만 했습니다. 전쟁의 징조가 어느 곳에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잖습니까.

저희들은 전쟁이 발발한다면 반드시 조짐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전쟁은 여태 있었던 영지전과, 또 이전에 있었던 종교전쟁과 전혀 다를 게 분명합니다.

남부와 북부는 그 당시 전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몰랐습니다. 조금 냉혹하게 평가하자면, 종교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타인을 죽이는 일에 어설펐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우리들은 그 전쟁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어떤 식으로 창칼을 휘두르고 찔러야 사람이 가장 쉽게 죽는지, 또 어떻게 해야 한 영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점령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예, 남부와 북부의 병사들은 지난 몇십 년 동안 그런 것들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렵습니다. 그들은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의기양양한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는 작은 동물을 대할 때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습니다. 귀여운 병아리를 쥐여주면, 어린아이들은 그냥 터트려버리지요.

타인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들은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쉽게 동년배의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하곤 합니다. 그것이 아주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키건 말건 감정대로 움직이지요.

저는 앞으로 벌어질 전쟁에 나서는 사람들이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역사에 다시 없을 정도로 많은 피가 흐를 겁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참혹한 전쟁이 분명하기에 저희는 반드시 징후가 있을 거라 예상했습니다."


거기서 하임은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저희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간 것 같습니다. 자드 공작은 전쟁을 선포한 뒤 지금은 출정식을 마치고 북진해 오고 있는 실정입니만, 저희들은 여태 어떤 조짐도 발견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하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에 모인 다섯 명의 종교인들이 각자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하임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다시 말을 꺼냈다.


"그렇지만 전쟁의 목적에 대해선 짚이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알기론 자드 공작은 신념이 무서우리만치 확고한 동시에 권력욕이 넘치는 인물입니다. 그런 부류는 대개 야심은 가득하지만 야심을 실현할 능력이 부족한 경우가 태반입니다만..."


하임은 말을 끊고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하임은 길버트 앞에서 자드의 성격이나 가치관을 얘기하는 것이 마치 쿠니 앞에서 뜀박질을 자랑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버트는 하임이 말을 멈춘 이유를 알아챘다. 길버트는 신음하듯 말했다.


"자드에게 능력부족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물론 평화롭던 시기에 홀로 주전론을 주장했을 때에는 그런 평을 받은 적도 있기야 합니다만, 결국 종교전쟁은 남부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자드는 그 전쟁으로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정치적 성공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럼 역시 자드 공작은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전쟁을 벌인 걸까요?"


하임의 질문에 길버트는 깊게 생각에 빠졌다가 이내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제가 아는 자드는 효율성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남자입니다. 그는 더 효율적인 것이 더 행복하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권력욕은 납득할만한 전쟁의 목적입니다. 행정의 효율성을 따지자면 대륙을 통일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화폐와 도량형과 언어와 의복이 통일되고 나면 그것이 달라 발생하는 모든 사회적 손실을 제거할 수 있으니까요.

이것은 제 가치관과는 전혀 다르지만 틀린 가치관이라고 하기에는 어렵겠습니다. 어차피 그런 것에는 애초부터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역시..."


"...이것이 가장 그럴듯한 추측이지만, 저는 이제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말할 추측은 조금 애매하고, 일견 황당하게 들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추측은, 사실 저 역시 지하에 들어가고, 또 추기경님들과 주교님에게 얘기를 듣기 전까지 떠올리지 못한 추측입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보면 가능성이 꽤 높은 추측일 것 같기도 합니다."


"뜸 들이지 말고 자네 생각을 들려 주게나. 그래, 자드 공작은 어째서 전쟁을 일으킨 겐가?"


"자드는, 어쩌면 신이 되려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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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2) 24.04.22 9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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