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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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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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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1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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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1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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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11)

DUMMY

어느새 지롱드는 다시 상체를 테이블 위로 잔뜩 기울이고 있었다. 가까워진 얼굴이 부담스러웠던 길버트는 반대로 상체를 뒤로 젖혔다. 지롱드는 연초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수잠은 참 현명한 여자입니다. 그 나이에 그토록 세상을 통렬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말입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선생, 바보와 멍청이들은 언제나 큰 쪽에 붙기 마련이지요. 제 생각에 이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그렇게 움직입니다.

가령 수십 만 개의 개성 중 하나가 돋보이게 되면 사람들은 곧잘 그 쪽에 붙습니다. 그리고 따라하지요. 옆에서 보기에는 우스울 만큼 필사적으로 따라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최초에 돋보였던 개성은 어느 순간부터는 완전히 밋밋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아무튼 모든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것은 더 이상 개성이라고 볼 수도 없겠지요.

하지만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특별함이 보편으로 치환 되고 나면, 갑자기 그 밋밋한 것들 중에서 또 다른 특별함이 태어나니까요. 역사는 이것의 반복입니다. 그리고 수잠은 바로 그 복잡한 인과관계를 단 한 문장으로 요약했습니다. 참으로 천재적인 여자이고, 또 마음을 울리는 문장 아닙니까?"


당황스러움에 길버트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길버트는 지롱드의 입에서 나올 것이 분명 협잡꾼들이 벌일 만한 작당모의 같은 것일 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지롱드가 꺼낸 것은 후미진 술집에서 나눌 만한 얘기가 아니라 학회장에서나 꺼낼 법한 얘기였다.

길버트는 잠시 대답을 고민했다.

물론 지롱드가 말한 내용이 어렵다는 이유로 고민한 것은 아니었다. 방금 전 지롱드가 말한, 그러니까 학회장에서나 어울릴 얘기들은 이를 테면 길버트의 전공 분야였고, 게다가 지롱드의 관점은 그리 특출난 역사관도 아니었다.

따라서 길버트가 고민한 것은 다소 복잡한 개념을 어떻게 쉽게 전달할 지에 관한, 전공자들이 흔히 하곤 하는 고민이었다.


"수잠이 명확한 해석을 내놓지 않은 탓에 그 문장에는 언제나 여러 해석이 줄줄 달리곤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롱드 당신의 관점은 옳습니다. 역사는 대체적으로 그런 방향으로 흘러왔습니다. 당신의 말처럼 큰 세력에 빌붙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리고 세력이 커지는 과정에서 도덕성이 결여됐는지 어떤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지요.

하지만 그 얘기에 관한 것은 다음에 하도록 합시다. 지금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방법론에 관한 것입니다. 현재 대륙에서 가장 큰 세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자드의 세력입니다.

따라서 당신이 제시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자드보다 더 큰 세력을 단기간에 만들 수 있는지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후의 문제는 상상의 영역이니 차치해야 할 겁니다."


"아아, 물론입니다. 당연히 그렇지요. 으음. 그럼 이번에는 이런 얘기를 한번 해 볼까요. 선생의 말씀처럼 대륙의 실질적인 주인은 자드입니다. 이견의 여지가 없지요. 저는 자드의 정치력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예, 그 카니쿨라새끼는 객관적으로 봐도 아주 뛰어난 위정자입니다.

다만 그는 정치인으로써 가장 처해선 안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처지에 놓인 제가 말하자니 꼴이 참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만... 자드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

예,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드에게 불만이 아주 많습니다. 특히 황궁 사람들이 그렇지요.

저는 정치에 관해 선생 만큼은 당연히 잘 모릅니다. 그래도 한 가지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요컨대 정치인의 권력이란 결국 신민들의 신의로부터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 신의란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이를 테면 어떤 한 인간이 갑작스레 대륙의 모든 인간을 자신이 통치하겠다고 나선다면, 아마 그는 대번에 미치광이 취급을 받을 겁니다.

그런데 그 인물이 수 많은 추종세력과 지지세력을 등에 업고 있을 경우엔 얘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람들은 미치광이는 커녕 그를 구원자 쯤으로 여기게 됩니다.

선생, 추앙이라는 행위는 참 전염성이 강한 행위인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 누군가를 치켜세우고 있으면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나도 모르게 따라서 추앙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한번 지지를 받은 정치인은 그저 지지를 받고 있다는 이유 만으로 다음 번에 더 큰 지지를 받게 됩니다."


거기까지 말한 뒤 지롱드는 길버트 앞에 잔을 들어 보였다. 그쯤에는 길버트도 분위기에 적응해 있었으므로 거부하지 않고 마주 잔을 들었다.

두 사람이 한잔을 걸치고, 지롱드가 연초를 꺼내고, 루실이 길버트의 입에 치즈 조각을 밀어 넣었다. 일련의 과정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탓에 세 사람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보였다. 연기를 내뿜은 지롱드는 만족한 얼굴로 얘기를 이어갔다.


"이 같은 일들은, 아 물론 선생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사람들의 대부분이 바보거나 멍청이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변화를 싫어하지요. 남들이 다 하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안정적인 일일 테고, 그래서 인간은 남을 쫓습니다. 변화는 불안정한 것이고, 또 변화에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니까요.

제가 믿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사실, 직접적으로 한 인물을 추앙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사람들이 어떤 인물을 추앙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만 하면 곧바로 대세에 편승하고 싶어집니다.

음, 여기서 '그 느낌'은 일종의 정보지요. 맥락이 가득 담긴 훌륭한 정보 말입니다.

그런데 어라? 우연찮게도 저희는 정보길드입니다. 정보를 생산하고 가공하는 일은 저희들의 생업이자 전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저희들은 대륙에서 일어난 수 많은 주요한 사건들에 죄다 관여해 왔습니다. 마치 거위들이 물 밑에서 필사적으로 발장구를 치는 것처럼, 역사의 뒤 편에서 그렇게 해 왔다는 말입니다. 뭐- 비록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지만 그럼에도 저희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대륙에 있는 한 정보는 사라지질 않으니까요.

그야 저와 마스터, 혹은 돼지나 족제비 같은 녀석들은 사라지겠지만 결국 다른 인간이 우리들의 자리에서, 우리들이 하던 일을 계속 할 뿐입니다.

그러니 묻겠습니다 선생. 어떠십니까? 선생이 황제가 될 의향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선생을 차기 황제로 만드는 일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예, 그 편이 좋을 겁니다. 저희들에게도, 그리고 선생에게도 말이지요."


지롱드와 루실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길버트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길버트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씀하신 것은 대체로 맞습니다. 정치의 본질은 사람들에게 추앙 받는 일이며, 추앙 받기 위해선 불가피하게 타인을 속여야만 합니다.

가령 농부들은 어떤 인물을 황제로 세워 놓으면 다음 해에는 반드시 풍년이 찾아올 거라 믿습니다.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인물이 황제가 되는 순간, 이유도 없이 자신의 가축들이 훨씬 살찌게 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상인들은 어떤 인물이 옥좌에 앉기만 하면 그 모든 사람들의 돈이 자신에게 굴러 떨어질 거라 여깁니다.

예, 당신 말처럼 그 모든 것들은 그저 그렇게 될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이며 거짓이고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위정자는 신이 아닙니다. 따라서 정치는 그 수 많은 기대와 속임수라는 모래알 위에 세워진 성과 같습니다. 그래서 위태롭습니다. 모래성은 세우기 쉽지만 부서지기도 쉬우니까요."


"위태롭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쉽게 기회가 생긴다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보통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에서는 어렵습니다. 요약하자면 당신은 대중을 기만해 저를 차기 황제가 유력한 인물로 만들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지요 선생.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요원합니다. 상황이 벌어지기 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어렵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타인을 속인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타인의 신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속았다는 것은 신뢰가 깨졌다는 말과 같습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 말은 애초에 서로 간의 신뢰가 없다면 속일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 당신들은 모든 남부인들에게 신뢰를 잃은 상황입니다. 따라서 당신들은 신민들을 속일 수 없습니다."


지롱드는 애매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루실은 이제 아예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길버트는 두 사람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덧붙였다.


"물론 만약의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솜씨 좋게, 기막힌 재주를 부려 대륙의 모든 신민들을 농간하는데 성공한 경우 말입니다. 그때는 자드는 지탄을 받고 물러나게 되고, 제가 언제 옥좌에 앉아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가 형성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당신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겁니다."


"으응? 그것은 어째서 그렇습니까? 모든 것이 잘 해결된 최고의 상황 아닙니까?"


"저는 그런 식으로 황제가 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보십쇼 선생, 지나친 겸손은 오히려 타인의 불쾌감을 야기하는 법입니다. 당신의 능력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겸손을 떨자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얘기입니다.

당신이 제게 제안한 것은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소극적인 반란 같은 것입니다. 꼭 창칼을 들고 궐기하는 것만이 반란은 아니지요.

저는 이 나라에 반란을 행하기 싫습니다. 자드는, 물론 저와 가치관은 전혀 다르지만 국정을 훌륭하게 운영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극적인 변화이고 변화는 언제나 혼란을 야기합니다. 저는 대륙이 이 이상으로 혼란스러워지는 것 또한 바라지 않습니다.

전쟁을 통한 북부와의 완전한 통일은... 제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카니쿨라가 아닙니다. 각자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곤 해도 후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할지는 모를 일입니다. 대륙이 하나의 행정 체계를 갖춘 뒤, 사람들이 더 이상 북부와 남부 시절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쩌면 사람들은 자드의 결단력을 칭송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자드의 행동을 마냥 지탄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습니다. 비하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당신은 선량한 시민들 사이에서 당신들이 어떻게 불리고 있는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길버트가 묻는 듯한 시선을 보내자 지롱드가 조금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도둑놈들이지요."


"예. 당신들은 분명 그렇게 불리고 있습니다. 사실 당신도 알고 있을 겁니다. 당신들이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하고 가공하는 과정 속에선 결코 도덕적이지 않은, 다소 불쾌하고 폭력적인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테니까요."


"뭐,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선생."


"저는 그것이 걱정됩니다. 제가 당신들의 도움으로 황제가 된다면, 그 이후 당신들은 분명 저에게 많은 것들을 요구할 겁니다."


"그건..."


"아니요. 아니라고 말할 셈이라면 그만 두십쇼. 인간의 본성이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낙천적이고 이타적인 인간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자신이 베푼 것의 절반 정도는 받고 싶어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제게 황제의 자리를 주려 하고 있습니다. 그 절반이라면, 저는 대가로 당신들에게 얼마나 큰 것을 줘야 할지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길버트는 결연한 눈으로 지롱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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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6) 24.04.22 10 0 14쪽
143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5) 24.04.22 7 0 10쪽
142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4) 24.04.22 10 0 11쪽
141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3) 24.04.22 6 0 13쪽
140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2) 24.04.22 10 0 15쪽
139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24.04.22 19 0 11쪽
138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5) 24.04.22 8 0 14쪽
137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4) 24.04.22 11 0 9쪽
136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3) 24.04.22 9 0 12쪽
135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2) 24.04.22 10 0 17쪽
134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1) 24.03.10 13 0 17쪽
133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0) 24.03.10 12 0 12쪽
132 익숙한 것과 낯선 것 (9) 24.03.10 13 0 11쪽
131 익숙한 것과 낯선 것 (8) 24.03.10 7 0 17쪽
130 익숙한 것과 낯선 것 (7) 24.03.03 9 0 12쪽
129 익숙한 것과 낯선 것 (6) 24.03.03 11 0 18쪽
128 익숙한 것과 낯선 것 (5) 24.03.03 12 0 9쪽
127 익숙한 것과 낯선 것 (4) 24.03.03 7 0 12쪽
126 익숙한 것과 낯선 것 (3) 24.02.23 14 0 19쪽
125 익숙한 것과 낯선 것 (2) 24.02.23 15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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