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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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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최근연재일 :
2024.09.01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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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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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1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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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10)

DUMMY

여성의 등장에 그때까지 몽롱한 표정으로 연기를 내뱉던 지롱드가 슬쩍 방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지롱드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선 여성을 한번 훑고 나서 무심한 투로 말했다.


"마침 잘 왔어 루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기가 막힌 것을 들고 왔군 그래. 자 이리와서 선생 옆에 앉으라구. 앉아서 선생의 시중을 들도록 해."


그렇게 말한 후 지롱드는 물고 있던 연초를 깊게 한번 빨아들였다. 그것이 마지막 한 모금이었다. 지롱드는 연초를 비벼 껐다.

연초에서 나오는 까맣고 매캐한 냄새에 얼굴을 구긴 길버트는 탁자에서 시선을 돌렸다. 루실이라 불린 여성은 아직까지 문 앞에 서 있었다.

길버트는 조심스레 그녀를 관찰했다. 사실 조심스레 관찰할 수 밖에 없었다. 정체 모를 쟁반을 들고 있는 그녀의 차림새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욱 파격적으로 변해있었다.

도저히 눈 둘 곳이 없다고 생각한 순간 루실이 불쑥 움직였다. 루실은 묘한 눈빛으로 지롱드와 길버트를 번갈아 보다가 길버트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뚱한 표정으로 길버트의 바로 옆에 착석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맡아보지 못했던 진득한 향수 냄새가 풍겨와서 길버트는 약간 아득한 느낌을 받았다.

루실이 자리에 앉자 다시 지롱드가 입을 열었다.


"중요한 분이니 극진히 대접하도록."


길버트는 지롱드의 말에 루실이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지롱드의 화법은 상당히 불친절했고, 또 지나치게 위압적인 명령조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루실은 화를 내거나 고까워하지 않았다. 지롱드가 카니쿨라에게 명령하는 태도라면, 반대로 루실은 인간에게 순응하고 복종하는 카니쿨라 같은 태도였다. 루실은 이미 지롱드의 화법에 익숙한 듯 보였다.

루실은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그때까지 들고 있던 쟁반을 내려 놓았다. 그러고나서 쟁반에 담긴 것들을 탁자 위에 보기 좋게 늘어 놓았다.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술. 그리고 척 보기에도 곰팡내가 진동할 것 같은, 혹시 완전히 썩어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 치즈 덩어리였다.

바로 옆에서 묵묵히 하는 양을 지켜보던 길버트는 잠시 후에야 그 조합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길버트는 어이없는 감정을 담아 루실과 지롱드를 바라보았다.


"사막의 백합 16년 산과 브리치즈군요. 설마 이것들은 단순히 길드의 암호가 아니라 정말로 같이 즐기기 좋은 조합이었습니까?"


"직접 먹어보면 알겠지. 이 사기꾼 같은 자식아."


날 선 말투로 대답하며 루실은 세 개의 작은 잔에 술을 따랐다. 곧 두 개의 술잔이 각각 길버트와 지롱드 앞에 놓였다. 루실은 시종일관 마땅치 않다는 표정으로 길버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길버트는 난처한 기분과 함께 꼭 어떤 변명이라도 늘어놓아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길버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을 속인 적은 없지만, 속았다는 느낌을 받으셨다면 사과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길버트를 노려보던 루실은 콧방귀를 한번 뀌고서 팔짱을 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실이 표정을 풀었다. 루실은 책망하는 눈초리로 지롱드를 바라보았다.


"됐어. 네가 사과할 건 아니지. 길드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일일이 자기소개를 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어차피 이 대머리가 또 못된 장난을 쳤겠지. 지롱드, 너 이 남자가 골목에 들어왔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 골목의 초입은 항상 감시하고 있는 곳이니까."


"아아, 루실. 그렇게 노여워하지마. 지금 우리 상황에서는 도무지 즐길거리가 없다는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방금 전처럼 진심으로 웃어본 것이 며칠 만인지 모르겠군. 아, 길버트 선생께선 저희들의 얘기에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도둑놈들의 사설 같은 것이니까요. 그보다 마셔 보시죠. 빈말이 아니라 이건 쉽게 꺼내지 않는 술입니다. 마스터가 방문했을 때를 위해 아껴두었지만, 이제는 그럴 일이 없어질지도 모르니까요. 썩는 것보다야 누군가의 뱃속에 들어가는 편이 좋겠지요."


길버트는 잔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노려보다가 훅 들이켰다. 이름처럼 향기로운 술이었다. 술이 넘어가는 순간, 길버트는 꽁꽁 압축된 꽃뭉치가 식도를 비집고 내려가는 느낌에 작게 소스라쳤다.

맞은 편에서 지롱드와 루실은 순수하게 감탄하는 길버트의 반응에 즐거워하며 잔을 들었다.

곧 세 사람의 잔이 전부 비워졌다. 루실이 다시 술을 따랐다. 지롱드는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이며 진지한 얼굴로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자, 그럼 얘기를 마저 합시다 선생. 선생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의 처지는 아주 최악입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최악보다 더 최악인 단어를 찾을 수 없기에 최악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유감일 정도로 최악입니다."


"...최근에 당신들에게 벌어진 일들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제가 황제가 되어야 하는 이유와 관련이 있습니까?"


"선생. 제 생각엔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유일한 탈출구는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바로 전력을 다해 당신을 차기 황제로 만드는 일입니다. 선생이 황제가 되기만 하면 저희는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런..."


길버트는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틈에 미약하고, 조금 멍청하게 들리는 신음을 내뱉었다. 사실 지롱드의 발언은 정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어이없을 만큼 황당무계했다. 곧바로 지롱드의 정치적 감각에 대해 지적하려던 길버트는 그러나 입을 다물었다.

그때까지 느슨하게 긴장을 풀고 있던 길버트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길버트는 지롱드의 계획을 점검했다. 그 사색은 일종의 직업병이나 습관이었다. 지롱드의 발언이 황당하건 말건 길버트는 거의 반사적으로, 또 습관적으로 그 일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고려했다.

물론 고뇌의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길버트는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수 많은 가정을 세웠고, 그 가정을 실행하는 과정까지 전부 그려 보았다. 하지만 그것들 중 긍정적인 결론은 단 하나도 도출되지 않았다.


길버트는 물끄러미 지롱드를 바라보았다.

정보길드에 들어서기 전, 길버트는 막연히 길드의 익스퍼트가 좌절감이나 분노 혹은 체념 같은 감정에 휩싸여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길버트는 어쩌면 방금 전의 바보 같은 계획도 감정에 휩쓸려 아무렇게나 뱉은 말일지도 모를 거라 의심했다.

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여태 지롱드는 대체적으로 침착하게 대화에 응했다.

더욱이 태도만 놓고 보자면 오히려 지롱드는 큰 일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이 보일 법한 기대감이나, 아니면 설레임 같은 감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정황상 단순한 허세일지도 모르겠지만 길버트는 그렇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지롱드의 가장 깊숙한 부분에서는 분명 어떤 자신감 같은 것이 일렁이고 있었다. 길버트는 잔의 윗부분을 매만지며 나지막이 상황을 정리했다.


"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어지럽군요. 지롱드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현재 정보길드는 존폐의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이유는 당연히 자드의 치밀한 공작 때문입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길드를 통해 관세 없는 연초를 유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당신들과 북부는 현재 모든 남부인들에게 원망을 사고 있지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지금 당신은 저를 황제로 추대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황제가 되고 나면, 그때부터는 저더러 길드의 뒷배가 되라는 말이겠지요. 그리고 당신은 이 계획을 정보길드를 재건할 유일한 방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아아, 정확합니다 선생."


"당신의 계획에 대한 솔직한 감상평을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선생. 가감 없이 말해주시면 감사할 따름이지요."


"터무니없는 계획입니다."


"얼마나 터무니없습니까?"


"아주 가난한 남자들이, 비록 가난하지만 행복하고 단란한 결혼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 여기는 것 만큼이나 터무니없습니다."


지롱드가 빙긋 웃었고, 길버트가 따라서 작게 미소 지었다. 잠시 후 길버트가 부언했다.


"황제가 되는 일은 일개 길드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대체 이 상황에서 당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마지막 대목에서 지롱드가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꼭 당연한 상식을 질문 받는 사람이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저희들이 무엇을 할 수 있냐고 하셨습니까? 그야 사람들을 속이고, 기만하고, 농락하고, 농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대륙의 모든 사람들에게 선생이 차기 황제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을 것 같군요.

뭐, 사실 이 부분은 속이거나 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누가 뭐라해도 선생은 그야말로 차기 황제에 가장 적합한 인물입니다. 아무튼 아드리안 황제의 피를 이어 받은 사람은 대륙에 선생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자식이 부모의 직업을 물려 받는 것은 아주 흔한 일 아닙니까?"


"...뒤의 말은 동의하겠습니다. 혈통에 따른 정당성은 당연히 제게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현실성과 실현 가능성의 문제입니다. 당신은 사람들을 기만하고 농간한다고 했습니다. 예, 그것이 정치이고 동시에 모든 정치인이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라는 점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정치는 사람들에게 꿈을 파는 직업입니다. 다만 제가 묻고 싶은 부분은 현 시점에서 당신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말입니다. 온 대륙인들의 사상을 한 순간에 개조하는 마법이라도 쓸 생각입니까?"


길버트가 몰아붙이는 투로 말을 끝내자 지롱드는 생긴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약간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이어서 갑자기 피곤함이 드러나는 기색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그것이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는 자세가 분명했으므로 길버트는 더 이상의 질문은 꺼내지 않았다.

대신 길버트는 여태 무의식 중에 매만지던 술잔을 입술께로 가져갔다. 길버트는 반 잔 정도를 들이켜고 다시 술잔을 내려놓았다.

묵직한 꽃 향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루실이 치즈 조각 하나를 길버트의 입에 가져다 댔다. 거절하려 했지만 루실은 지나치게 완고했다. 결국 길버트는 입을 열었다.

치즈를 씹자마자 고약한 향이 났다. 인상을 찌푸린 길버트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길버트는 어째서 내노라 하는 미식가들이 그 곰팡이 핀 치즈를 호평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약하지만 중독성 강한 향이었고, 심지어 술과는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아직 치즈향이 입에 남은 상태에서 길버트는 남은 반 잔을 마저 들이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길버트는 맞은 편에서 지롱드가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롱드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지롱드가 마침내 서두를 꺼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선생. 저는 강하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맥락을 파악할 수 없는 말에 길버트는 약간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무엇을 믿고 있단 말입니까?"


지롱드는 씨익 웃으며 덧붙였다.


"저는, 바보와 멍청이들이 언제나 큰 쪽 만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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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10) 24.05.01 10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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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8) 24.04.22 12 0 13쪽
145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7) 24.04.22 11 0 13쪽
144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6) 24.04.22 10 0 14쪽
143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5) 24.04.22 7 0 10쪽
142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4) 24.04.22 10 0 11쪽
141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3) 24.04.22 6 0 13쪽
140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2) 24.04.22 10 0 15쪽
139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24.04.22 19 0 11쪽
138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5) 24.04.22 8 0 14쪽
137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4) 24.04.22 11 0 9쪽
136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3) 24.04.22 9 0 12쪽
135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2) 24.04.22 10 0 17쪽
134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1) 24.03.10 13 0 17쪽
133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0) 24.03.10 12 0 12쪽
132 익숙한 것과 낯선 것 (9) 24.03.10 13 0 11쪽
131 익숙한 것과 낯선 것 (8) 24.03.10 7 0 17쪽
130 익숙한 것과 낯선 것 (7) 24.03.03 9 0 12쪽
129 익숙한 것과 낯선 것 (6) 24.03.03 11 0 18쪽
128 익숙한 것과 낯선 것 (5) 24.03.03 12 0 9쪽
127 익숙한 것과 낯선 것 (4) 24.03.03 7 0 12쪽
126 익숙한 것과 낯선 것 (3) 24.02.23 14 0 19쪽
125 익숙한 것과 낯선 것 (2) 24.02.23 15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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