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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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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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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1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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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1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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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9)

DUMMY

길버트는 침착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순간적인 당황감을 채 감추지는 못했다. 사실, 그럴 만한 내용이었다.

길버트는 맞은 편 소파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롱드는 선언하듯 말한 후에 가만히 길버트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대답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태도였다.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길버트는 잠시 대화의 주도권을 포기하기로 했다.


"...방금 저더러 황제가 되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길버트 선생, 당신은 반드시 차기 황제가 되어야 합니다."


길버트는 지그시 지롱드를 바라보았다. 길버트는 어쩌면 조금 전 홀에서 있었던 일처럼, 지금 지롱드의 말 역시 정보길드에서 통하는 어떤 암호 같은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길버트는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얼마 동안 지롱드를 유심히 관찰했다.

하지만 곧 자신의 가정을 폐기했다. 지롱드는 결코 그런 식의 농담을 하거나 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길버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길버트는 지롱드의 진실된 태도에 미약한 어지러움을 느끼며 다시 질문했다.


"제가 왜 황제가 되어야 합니까?"


"그야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대화가 빙빙 도는군요. 부디 당신이 제게 고약한 장난을 치고 있는 게 아니길 바랍니다. 먼저 제 쪽에서 묻겠습니다. 지롱드 당신은 정보길드의 익스퍼트이고 이미 제 신상에 대해 많은 부분을, 아니 거의 전부를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아아 그렇군요.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무벤 지부를 담당하고 있는 지롱드입니다. 선생을 알고 있냐고 물으신다면, 예 맞습니다. 우리는 성문에서 한번 만났었지요. 그때는 선생을 잘 몰랐지만 지금은 압니다.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대답에 돌연 길버트가 험악한 표정으로 지롱드를 노려보았다. 길버트는 명백히 분노가 서린 어투로 말했다.


"나에 대해 알고 있다면... 내가 황제가 되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고 말한 건가?"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였지만 지롱드는 여전히 천연덕스러움을 잃지 않았다. 지롱드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아, 부디 화를 거둬 주십쇼. 과연 선생께선 듣던 대로 명석하신 분이군요. 그 눈빛을 보니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선생이 하고 있는 상상은 분명 오해입니다. 저는 선생께 아버지를 죽이고 옥좌를 찬탈하라는 둥의 골육상잔을 권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사실, 이제와서는 그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드리안 황제는 이미..."


거기까지 말했을 때 길버트가 불쑥 지롱드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것은 현재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건 일단 멈추라는 유서 깊은 손동작이었다. 의도를 알아챈 지롱드는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방 안에 침묵이 찾아왔다. 길버트는 일그러진 얼굴로 잠깐 동안 방을 둘러보았다.

보잘것없는 가구들과 흔해 빠진 장식물을 훑던 길버트는 잠시 후 다시 지롱드에게 시선을 향했다. 잠깐 일그러졌던 길버트의 얼굴은 그 사이 침착하게 바뀌어 있었다.


"황제께서 이미 승하하셨다는 소식은 저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수도원의 노인들이 알려준 모양이군요. 아아, 그러고 보니 선생께선 거래를 하러 오셨지요. 그렇다면 거래를 하기 전에 서로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먼저겠군요. 그렇지요, 전후 사정을 전혀 모른 채로 황제가 되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야 누구나 허황된 헛소리라고 생각할 테지요. 하지만 제 얘기를 듣고 나면..."


길버트는 다시 한번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지롱드는 두 번이나 제지 당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약간 벙찐 얼굴로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길버트는 조곤조곤하게 설명했다.


"당신이 어떤 의미로 말한 것인지 대강 알 것 같습니다. 아마 제가 황제가 되는 것이 당신들이 살아날 유일한 길이겠지요."


지롱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롱드는 감탄 섞인 어조로 말했다.


"아주 정확합니다 선생. 아아, 이 얘기는 원래 절차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희가 나누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나누게 될 얘기는 대륙에서 가장 값어치 있는 정보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척이나 아쉽게도 우리에겐 절차를 따르고 있을 시간이 없군요. 정말로 아쉬운 일입니다. 예, 절차는 생략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생은 황제가 되어야 합니다. 정확히는 황제가 되어야만 저희들이 살 수 있습니다. 자 한번 봅시다. 저희는, 그러니까 정보길드는 현재 남부의 배신자로 낙인 찍힌 상황입니다. 그 빌어먹을 베르미 새끼가..."


덤덤하게 말하던 지롱드는 마지막 대목에서 인상을 크게 찡그렸다. 지롱드가 이어 말했다.


"죄송합니다. 마지막 비속어는 못들은 것으로 해주십쇼. 그놈 얘기만 나오면 헤르바지에 불이 붙는 것처럼 감정이 순식간에 격해지는군요. 이어서 다시 얘기하자면 저희는 북부와 결탁해 남부의 곳간을 털어먹은, 한 마디로 천하의 몹쓸 놈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존경해 마지않는 마스터가 일궈낸 이 고귀한 길드가, 아주 한 순간에 비루한 카니쿨라새끼가 돼버렸단 말입니다!"


바로 전의 사과가 무색하게 지롱드는 다시 비속어를 내뱉었다. 지롱드 역시 그 사실을 알아챈 것 같았지만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 같았다. 분개하던 지롱드는 결국 어느 시점부터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거칠게 얘기를 이어나갔다.


"보십쇼 길버트 선생! 저희는 실컷 이용만 당한 채 비참하게 버려졌습니다. 사냥을 나갈 때는 어떤 맛난 것이라도 줄 것처럼 굴던 사냥꾼 녀석은, 사냥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사냥카니쿨라를 잡아 먹어버렸단 말입니다.

아아- 그리고 부끄럽게도 저희는 완전히 속았습니다. 속임 당하는 쪽에 이렇게 저희들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바보 같은 연초 사업을 벌이는 게 아니었습니다. 욕심은 언제나 화를 부르는 법이지요. 물론 속은 것에는 저희의 잘못도 어느 정도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속은 자의 책임 같은 것 말입니다."


지롱드는 이제 거의 어른에게 억울함을 토로하는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만하면 됐잖습니까? 저희는 이미 재기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지금 자드 공작이 벌이고 있는 꼴을 보십쇼. 그 망할 새끼는 지금 군대를 이끌고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남부의 모든 곳에서 모병을 진행하면서 말입니다.

자드가 만든 그 거대한 인간들의 올가미가 무벤을 서서히 조이고 있습니다. 공작이 그 올가미를 이용해 잡으려는 것은 뻔하지요. 예 저희들입니다! 그 놈은 우리들이 재기할 아주 약간의 여지도 주기 싫은 것이 분명합니다. 아주 짓밟아버릴 생각인 겁니다. 여기서 저를 더욱 화나게 하는 것은, 대륙의 우매한 신민들은 지금 자드가 정의의 철퇴라도 내려치려는 것인 줄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선생, 자드가 군대와 함께 이곳에 도착하고 나면 모든 게 끝장입니다. 진실은 무벤의 깊은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테고, 저희들은 역사에 남부를 배신한 도둑놈 새끼들로 남을 겁니다. 거의 확정적이지요. 이제 더 이상 남부에 저희들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슬픈 일이지요."


기나긴 신세한탄의 마지막 대목에서 지롱드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슬며시 길버트의 눈을 응시했다. 순간 위로를 건네야 하는 것인지 망설이던 길버트는 그 눈빛을 발견하고서 입을 다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버트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길버트는 지롱드의 말이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러니까 지롱드 당신의 말은... 남부에서는 도저히 설 자리가 없다는 말이군요."


지롱드는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가 나중에는 빙긋 웃었다.


"선생께선 듣던 것보다 훨씬 더 총명하신 분이군요. 왠지 여기서 몇 마디를 더 했다간 작년 정보길드의 순수익까지 들통나버릴 것 같은 기분입니다."


"본론만 말하는 게 서로에게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없다고 한 것은 당신 쪽입니다."


"아아 그렇지요. 죄송합니다. 그럼 선생께서도 이쯤이면 전부 아셨겠지만 제 입으로 전부 말하겠습니다. 예 저희들은 현재 남부에 설 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 죽을 수도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런 이유로 저희는 어제 북부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렇지요. 남부에서 길드를 재건하지 못한다면 북부에서 길드를 재건하면 되는 일이잖습니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요, 냉정하게 말하자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드는 무벤을 정복하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드는 이번에 완벽히 북부를 점령할 생각입니다. 그는 종교전쟁때 이뤘던 반쪽짜리 통일에 언제나 신물을 내곤 했으니까요. 북부에 정보길드를 세우는 일은 의미가 없습니다. 어차피 자드는 북부에 신설될 모든 정보길드도 파괴할 겁니다."


대화의 그 지점에서 지롱드는 품에서 연초 하나를 꺼냈다. 말없이 불을 붙인 지롱드는 연기를 한 모금 내뱉은 후에 아차 싶은 얼굴로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미안합니다 선생. 이 방에서 늘상 습관처럼 피우던 것이라 선생께서 앞에 있다는 사실을 깜빡해버렸습니다. 불을 붙여버린 이상 바로 끄는 것은 연초에 대한 예의가 아닐 테고... 어떻게, 딱 한 대만 선생 앞에서 피워도 되겠습니까?"


"...그러십쇼."


솔직한 심정으로 그리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길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버트는 눈 앞의 대머리 남자에게 동정심을 품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지롱드는 수십 년 간 일해왔던 자신의 직장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사내이며, 또 동시에 하루아침에 남부의 모든 신민에게 원망을 사게 된 남자였다.

심지어 그 모든 일은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런 고초를 겪고 있는 사내에게 당장 연초를 끄라고 하는 일은 너무 무정할 것이다.

지롱드가 침묵 속에서 연초를 빨고, 연기를 내뱉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 무렵, 불쑥 그들이 있던 방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길버트는 무심코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조금 전 홀에서 길버트에게 나이프를 겨눴던 여성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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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9) 24.05.01 8 0 11쪽
146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8) 24.04.22 12 0 13쪽
145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7) 24.04.22 11 0 13쪽
144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6) 24.04.22 10 0 14쪽
143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5) 24.04.22 7 0 10쪽
142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4) 24.04.22 11 0 11쪽
141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3) 24.04.22 6 0 13쪽
140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2) 24.04.22 10 0 15쪽
139 북부에서 말은 필요 없다 24.04.22 19 0 11쪽
138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5) 24.04.22 8 0 14쪽
137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4) 24.04.22 11 0 9쪽
136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3) 24.04.22 9 0 12쪽
135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2) 24.04.22 10 0 17쪽
134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1) 24.03.10 13 0 17쪽
133 익숙한 것과 낯선 것 (10) 24.03.10 12 0 12쪽
132 익숙한 것과 낯선 것 (9) 24.03.10 13 0 11쪽
131 익숙한 것과 낯선 것 (8) 24.03.10 7 0 17쪽
130 익숙한 것과 낯선 것 (7) 24.03.03 9 0 12쪽
129 익숙한 것과 낯선 것 (6) 24.03.03 11 0 18쪽
128 익숙한 것과 낯선 것 (5) 24.03.03 12 0 9쪽
127 익숙한 것과 낯선 것 (4) 24.03.03 7 0 12쪽
126 익숙한 것과 낯선 것 (3) 24.02.23 14 0 19쪽
125 익숙한 것과 낯선 것 (2) 24.02.23 15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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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얻은 것과 잃은 것 (13) 24.02.10 10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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