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장 흐르는 별 3-4화 암살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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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살수
여왕파로 둘러싸인 남부 영지들 간의 연계와 안타미젤의 대관식 이후의 일에 관하여 로엘 대공과 여러 가지를 의논하느라, 아체프렌은 자정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침소로 향할 수 있었다.
자신의 침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두 명의 근위병에게 수고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준 다음 혼자만의 공간으로 들어선 아체프렌은 내심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물론 자신의 안위를 근심하고 있는 대공의 마음 씀씀이야 백번 이해하고 있으며, 또 그 배려를 진정 고맙게 여기고 있었지만, 노틸라드에 머물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이 새어 나왔던 것이다.
하크스로 내려온 후 세인(世人) 앞에 몸을 드러낸 적도 없는 자신의 신변 경호가 한층 더 엄중해진 것은 바로 로엘 대공이 도성으로 공문을 보낸 이후부터였다.
세느비엔느가 아체프렌의 귀환 사실을 공표하기는커녕, 그것을 철저히 비밀로 붙인 채 안타미젤의 대관식 일시를 확정 발표하자, 노대공은 낮은 말할 것도 없고 밤이면 침실 문 앞을 비롯하여 주변 복도에 근위병들을 포진시켜 두고 스물네 시간 쉼 없이 교대시켜가며 아체프렌을 지키게 했던 것이다.
아체프렌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문밖의 인기척을 느끼며 침대 위에 몸을 뉘였다. 습윤한 바닷바람이 주는 이상할 정도로 끈적이는 느낌 때문인지, 아체프렌은 자리에 누운 뒤에도 한동안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뒤척이다가 겨우겨우 잠에 들려던 찰나, 그는 불쾌할 정도로 전신을 압박하는 듯한 공기의 흐름에 다시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들어올린 시야 가운데 무언가가 번쩍였다. 그 순간 아체프렌은 앞 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옆으로 나뒹굴었다. 눈앞에서 번뜩이던 그 물체가 자신을 노리던 검날이었다는 것을 그는 자신의 왼쪽 팔뚝에서 느껴지는 화끈거림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어둡게 잠긴 공간 속에서 눈을 뜨는 것과 거의 동시에 반사적으로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노리고 달려오던 검을 완벽히 피하는 건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아슬아슬하게 팔을 스친 검이 침대 시트를 찢고 안으로 푹 파묻히는 미세한 소리에 표현할 길 없는 섬뜩한 기운을 느끼며 그는 침대 위에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침대 곁 장식장 위에 걸려 있던 장식용 검을 떠올려낸 아체프렌은 그 위치를 대강 어림하여 빠르게 손을 뻗치며 일어섰다.
손에 무언가가 잡혔다는 느낌이 든 순간, 아체프렌은 그것을 끌어내려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가슴 쪽으로 육박해 들어오는 상대의 검을 쳐냈다. 상대의 검날이 공중으로 튕겨져 나간 찰나, 그는 검집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일순 칼날에 손가락이 스치며 따끔한 쓰라림이 맺혔지만, 그 따위 미미한 아픔 따위에 집중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일어나게 되어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 바람에 급히 검을 뽑아들다가 손가락을 벤 듯하지만, 당장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통증보다는 장식용 검 치고는 날카로운 검날이 고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비록 그 목적이 방어에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지만, 세레즈에서 내노라 하는 무술 사범들에게 십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검과 창, 활 등의 각종 무예를 연마해온 아체프렌이다. 아무리 상대가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들어온 살수(殺手)라 해도, 손 안에 무기가 들려 있는 상황에서 무력하게 당할 만큼 허술한 실력은 아니었다. 그것이 단지 겉을 꾸미기 위한 장식용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시간을 끌기만 하면 된다. 침실 앞의 보초병은 이미 당했다 하더라도, 칼날이 맞부딪치는 파찰음을 듣게 되면 순찰 중의 병사들이 구하러 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아체프렌은 가슴에서 목줄기로, 이리 저리 급소만을 노리고 날아드는 상대의 칼날을 그저 본능적인 감과 미세하게 들려오는 파공성만에 기초해 필사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이제 보인다. 방향을 알겠어. 검을 맞대고 있는 동안, 어둠이 차차 눈에 익어가자 검이 날아드는 방향을 알 수 있게 되어 한층 더 방어가 용이해지는 듯 했다. 대여섯 차례 검이 허공에서 마주쳤을 때, 복도 저편에서부터 나지막한 말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저기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맙소사-!”
“전하의 침소다! 뛰어!!”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급박한 달음박질 소리에 이제는 살았구나 싶어 아체프렌이 뒤로 몇 걸음 움직였을 때였다. 안전하다고 여기고 있던 뒤에서 파공성과 함께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날아들지 않는가.
‘이런, 한 놈이 더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돌렸지만, 그것은 이미 그를 노리고 있던 단검이 아체프렌의 오른쪽 어깨부터 등에 이르기까지 길게 검흔을 남긴 뒤였다. 순간적으로 숨이 컥 하고 막혀오며 눈앞이 아찔해졌다.
등에서부터 밀려드는 타는 듯한 고통에 아체프렌은 손가락 사이로 틀어쥐고 있던 검 자루를 부지중에 놓쳐 버렸다.
“전하!!”
침실의 문을 열어 제치며 병사들이 뛰어 들어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들을 본 순간, 아체프렌은 온 방 안에 진동하는 비릿한 피내음과 함께 아찔한 현기증 사이로 간신히 붙들고 있던 신경의 줄을 그대로 놓아버렸다. 모래성이 허물어지듯 천천히 쓰러져 가는 혼미한 의식 사이로, 환한 불빛과 자신을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꿈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4화 후회
아체프렌이 의식을 되찾은 것은, 첸트로빌 성에 한바탕 태풍이 지나간 뒤였다. 태자를 암살하기 위해 잠입해 들어온 두 명의 자객은 병사들의 집요한 추격 끝에 포박되었고-비록 그들은 잡히는 순간 자결해버렸지만 말이다- 영주 로엘 대공은 아체프렌의 침소가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접하는 즉시 전시 체제에 임하라고 영지 내에 엄한 포고령을 내렸다. 그 지시에 따라 수비대장 슈발츠는 단 두 개를 제외한 하크스의 모든 항구에 봉쇄령을 내렸고 각 관문마다 두 배 이상의 병력을 배치하고 성안에도 로엘 대공과 태자 아체프렌의 신변 경호 인선에 한층 더 신경을 기울였으며, 그 인원 수 역시 배로 증강시키는 등 그 경계를 한층 더 엄중히 하였다. 그리하여 전시 체제령이 내려지고 북적거리던 성이 잠잠해질 즈음에 아체프렌은 혼절 상태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등줄기의 검상으로 인해 바로 눕지도 못한 채 엎드려 있던 아체프렌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로엘 대공의 근심스런 얼굴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그에게 괜찮다는 말을 하기 위해 목에 힘을 준 것만으로도 상처가 당기며 욱신거려왔으므로, 그는 그저 노대공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그것도 매우 힘겹게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송구하옵니다. 성 안에서 이리 불미스러운 사태가 벌어지다니 소신, 태자 전하를 무슨 면목으로 뵈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대공의 잘못이 아니오. 이런 일, 이미 예상했던 바···”
통증을 억눌러가며 아체프렌은 힘들게 말을 꺼냈다.
사실 여왕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맞이하리라는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여왕이 자신의 일을 비공식적으로 처리한 그 순간부터 정해져 있던 일이 때마침 터져 버린 것뿐이다. 이건 어느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아체프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갑갑하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자신의 신변 경호에 주의를 기울여 온 로엘 대공 아닌가. 게다가 암살자라는 것이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기한다 해서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것쯤은 그 누구보다도 아체프렌 자신이 지난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어차피 지나간 일이다. 이제 와서 누군가를 문책한다 해서 이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대공이 알아서 수습했을 일을 가지고 자신까지 새삼 나서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아체프렌은 생각했다.
“신이 도성에 장계를 올리지 않았어야 했을 것을··· 아둔한 늙은이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태자 전하의 안위에 중대한 누를 끼쳤습니다.”
비록 아체프렌은 자신의 탓이 아니라 말했지만, 대공으로서는 이 모든 사태가 자신이 도성으로 올려 보낸 공문 때문이라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비록 가문의 주치의의 말을 빌리면, 아체프렌의 상처는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요, 일주일 정도 정양하면 일상생활을 하는데 불편이 없을 만큼 가벼운 것이라 했지만, 대공은 자신의 노파심 어린 행실이 이 젊은이의 발목을 휘어잡는 걸 뛰어넘어 급기야 그 생명까지 위태롭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대수롭지 않은 상처요. 허니 대공께서 너무 마음 쓰지 마시오···.”
그러나 아체프렌은 그런 자신을 책하기는커녕, 도리어 걱정하는 자신을 안심시켜 주기라도 하려는 양 가볍게 미소까지 짓지 않는가. 이제 자신의 척도로는 도저히 잴 수도 없을 만큼 성장해 버린 이 청년에게서, 로엘 대공은 문득 이제 자신들은 물러나고 새로운 세대에게 의자를 물려주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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