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답게 죽을 수 있게 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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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진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럼 어디 한번.’
기해혈에서 시작한 기운이 온 몸을 타고 흘렀다.
시간이 느려진 기분이었다.
느릿한 바람이 살갗을 휘감는 기분.
붉은색으로 어긋나 있던 진기의 흐름을 바로 잡았다.
온몸을 관통하는 쾌감.
산적이나 금태정의 무공을 따라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시원함이었다.
녹색의 선이 내 온몸을 사정없이 자극했다.
하늘을 향했던 남궁진의 목검이 흐릿하게 움직였다.
동시에, 내 목검도 움직였다.
꽈앙!
주르륵.
“크윽.”
목검이 부딪치며 공기가 진동하는 폭발음이 퍼져나갔다.
나는 삼 장 가량 뒤로 밀려나갔다.
충격으로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평소 해오던 나무와 온갖 잡일로 다져진 근육이었지만, 터져나갈 듯 강한 진동이 밀려왔다.
“대, 대체 당신은······.”
털썩.
남궁진이 온 몸을 부들거리며 무언가 말을 하려 하다 그대로 쓰러졌다.
장금호가 놀란 눈으로 남궁진에게 다가갔다.
“어? 뭐야?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목검은 왜 부셔진 거야?”
장금호가 눈을 크게 뜨며 발을 동동 굴렀다.
“갑자기 둘 다 몸이 흐릿해 지더니, 폭발음이 들렸는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의, 의원을 좀 불러올게.”
* * *
하룻밤이 지나 아침이 되었다.
‘젠장. 허구한 날 새벽같이 일어나서 밭을 갈아대니, 이 시간만 되면 눈이 떠지네.’
따뜻한 침구와 아늑한 잠자리.
더 즐기지 못 하는 게 너무나도 가슴 아팠다.
숙소 빈방에 던져 놓았던 남궁진은 기력이 많이 쇠하였는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비무의 충격은 말끔하게 사라졌는지, 가뿐해진 몸을 이끌고 방 밖으로 나왔다.
“명아! 헉, 헉······.”
장금호가 땀을 훔치며 헐레벌떡 뛰어왔다.
“무슨 일이야?”
“두, 두 가지 소식이 있다. 우선, 남궁세가에서 사람이 다녀갔어. 어젯밤 이 공자가 들어오지 않았다며······.”
“뭐, 당연히 안심하고 돌아갔겠지?”
사고를 쳤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장금호가 마련해준 곳에서 쉬고 있다는 말에 아쉬움을 달래며 돌아갔을 터.
“어, 어찌 알았어?”
“내가 달리 개방도겠냐? 특히나, 네가 직접 찾아온 손님을 맞았다면 더욱 안심 했겠지.”
“그, 그래 맞아. 머무는 동안 잘 부탁드린다더라.”
온 집안이 대 공자의 학관행에 몰두하던 참이니 오히려 잘 되었다고 여길 것이다.
장금호가 서찰 하나를 내밀었다.
“그럼 이것도 알고 있는 거야?”
‘서찰?’
서찰을 보낼 사람이 없는데?
「이놈아! 대신 물건 잘 팔아줬으면 슬슬 올라오너라. 그리고 올라오면서 여아홍 두 병하고 죽엽청 다섯 병만 사 오너라.
추신. 이상한 이름으로 돈 보관하면 나중에 되찾기가 힘들다. 생활의 상식으로 알아두거라.」
부들부들.
온 몸이 떨려왔다.
나는 최대한 감정의 기복을 억제했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 차오르는 분노를 누르며 씹어내듯 말했다.
“금호야, 여아홍이 얼마냐?”
“서른 냥.”
“커억. 이, 이런 게 주화입마인가······. 그럼 죽엽청은?”
“하나에 두 냥쯤 해. 왜?”
울컥 신물이 올라왔다.
싸움에서도 경험한 적 없던 내상을 입었다.
‘이, 망할 노인네가······.’
정확한 내 수익금을 알고 있다.
차명거래까지 파악할 줄이야.
물끄러미 장금호를 바라보았다.
‘설마 이놈이······?’
“왜? 무슨 내용 이길래?”
장금호가 눈을 끔뻑거렸다.
“너, 혹시 의류판매 수익금과 맡긴 이름을 누구에게 발설한 적 있냐?”
“에이 설마······. 상인에게는 신용이 곧 내공이다.”
‘하긴, 이 놈은 그럴 놈이 아니지.’
몰래 산삼과 당과를 바꿔먹을 정도로 상재에 밝은 아이다.
미래수익이 뻔히 보이는 내 능력을 쉬이 팔아먹지는 않을 터.
‘앞으론 좀 더 확실하게 숨겨야했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수 없이 도망치고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번번이 잡혔다.
‘공식적으로 멀리 튀어야 하는데······. 튀어······? 맞다! 학관으로 튀면 되잖아!’
눈앞이 밝아졌다.
다시 한번 희망의 물결이 차올랐다.
‘그래. 이별주라고 생각하고 사주자.’
“금호야······. 전장에 맡겨둔 돈······ 크흑. 찾아서 여야홍 두 병하고, 죽엽청 다섯 병만 사다······ 줄래?”
울분을 토하듯 천천히 단어를 씹어냈다.
눈에 핏발이 섰는지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
어깨를 으쓱한 장금호가 무언가 생각난 듯 품을 뒤져 서찰을 하나 더 내밀었다.
“아, 이것도 같이 왔다.”
「구양 사부가 네가 마을에 내려가 있는 동안 먹었을법한 기름 섞인 음식을 걱정하더구나. 하여, 특제 벽곡단을 함께 보내니 오기 전에 심신을 깨끗이 하고 오너라」
‘버린다.’
「추신. 안 먹고 올라와봐야 진맥 한 번이면 다 알 수 있으니, 까불지 말고 눈 딱 감고 먹으란다.」
부들부들.
종이에 곱게 쌓인 벽곡단이 나왔다.
묵빛의, 동그란 똥처럼 생긴 벽곡단은 평소보다 두 배는 컸다.
장금호가 안타까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썩은 내······. 할배 서찰인가보네······.”
“아까 말한 것 좀 사다줄래? 할배들에게 올라가 봐야겠어······. 잠시 혼자 있고 싶다······.”
핼쑥해진 내 모습에 장금호가 서둘러 떠났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딱 감고 벽곡단을 삼켰다.
“크악!”
도저히 씹어 먹지는 못할 맛이다.
“우욱······.”
빼갈!
순간, 영업을 하며 처음 마셔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식도를 따라 느껴지는 화끈함! 위장에서 머무르는 찌르르함!
온 몸으로 빼갈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온 몸에서 벽곡단의 기운이 느껴졌다. 땀이 비오듯 흘렀고, 탁한 묵빛 액체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크아아아악!’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독맥, 임맥, 충맥, 대맥, 양교맥······.’
충격이 큰 혈 자리를 본능적으로 되뇌었다.
스스로에게 한심함을 느끼며 정신이 점점 아득해졌다.
“······명아?”
문 밖에서 장금호의 음성이 들렸다.
‘다행이 죽지는 않았나보군.’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몰라도 끔찍한 맛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 장금호가 입을 뻐끔거렸다.
“너······ 옷이 왜 그래? 어후······ 냄새.”
“응?”
깨끗했던 흰 무복이 거뭇했다.
온 몸에선 똥 썩은 내가 진동했다.
“좀 씻고 올게.”
“그래 빨리 좀······ 우읍.”
장금호의 헛구역질을 뒤로하고 재빨리 씻었다.
새로운 무복으로 갈아입자 장금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명아, 너 키가 좀 큰 거 같다? 피부도······ 좋아 보이고?”
“성장기 소년은 원래 빨리 크는 법이다. 피부야 깊고 깊은 산 중에, 맑은 공기만 쐬며 처박혀 있으니 상할 껀덕지가 있나.”
진지한 내 말에 장금호가 피식 웃으며 꾸러미를 내밀었다.
“이거 가져가. 근데, 저기 남궁진 소협은 어쩌지?”
“깨어나면 충격이 클 텐데······ 네가 잘 달래줘. 난 금방 다녀올게.”
“다시 올 수 있는 거야?”
“물론이야.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지.”
‘무조건 나온다.’
여아홍! 명주 중에 명주다. 이걸 맛 본 다면, 반드시 다시 내보내게 될 것이다.
덜그럭거리는 술병을 들고 서둘러 초옥으로 향했다.
* * *
‘추천입관이라······.’
어디나 제도의 구멍은 있다.
엄격한 입관시험과 규율은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그게 불만인 것은 아니다.
세상은 원래 그런 거니까.
‘우리 할배들이 진짜 태상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다.
수년을 함께 살아도 장가상단주를 제외하면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일선에서 물러난 태상이지만 전대 방주와 장문인의 자리는 그리 만만한 배분이 아니다.
‘소설책 속에서는 언급조차 안됐던 사람들인데······.’
이것이 내가 할배들을 믿지 않는 이유다.
소설에는 전대 장문인, 전대 방주와 같은 표현만 있고, 사실상 언급이 전무하다.
‘한번 찔러나 봐?’
사실이라면 그 정도 끝발로 추천입관 하나 정도쯤이야.
아무리 오대세가 쪽 힘이 막강해도, 한 명 밀어 넣는 것쯤이야 그리 대수겠는가?
‘남궁진을 꼬셔서 동행해야겠군.’
잘 나가는 세가의 무인이니 여행길이 편할 터.
우선 학관에 입관만 한다면야, 그 이후는 자유의 몸이다.
기연도 먹고, 절세의 내공심법도 찾으러 다니고.
기왕지사 돈도 벌고.
유명해지면 슬슬 아버지도 찾아보고.
‘훌륭한 인생계획이야.’
술로 빼앗긴 내 전 재산의 울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설마 학사경고 같은 게 있지는 않겠지?’
청명한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어느덧, 산적을 만났던 곳에 이르렀다.
‘흑호채 아저씨들은 다른 데로 갔으려나?’
피식 웃으며 산적들이 뛰어나왔던 풀숲을 바라보았다.
오싹.
살갗을 스치는 따가움.
순간, 온 몸에 한기가 스쳤다.
‘······!’
나무 사이로 검은색 피풍의를 입고 검붉은 가면은 쓴 자들 두 명이 나타났다.
“혈천? 아니 어떻게······? 아직 나오실 때가 아닌데요?”
흠칫.
혈 가면 두 명이 내가 중얼거린 말에 멈칫 했다.
묘한 대치상황.
내가 내 뱉은 혈천이라는 단어가 다소 혼란스러웠는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보통 일반적인 조우 상황에서는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 먼저 자신의 정체를 밝히거나, 또는 제안을 하거나, 아니면 하다못해 괴팍한 웃음이라도 지으면서 등장하는 게 무림의 법도입니다만······? 그래서 그쪽 용건이······?”
입가에 옅은 미소와 함께 눈을 크게 뜨며 상대방의 답변을 기다렸다.
푸드드드득.
새 한 마리가 하늘로 힘차게 날았다.
혈 가면 한 명의 눈길이 새를 쫓았다.
‘성대제거? 젠장······ 이거 찐이잖아?’
혈천은 주로 성대를 제거하고 완전히 혈천 소속으로 지내는 자들과 기존 집단에서 정보를 캐는 부류로 나뉜다.
즉, 성대를 제거하고 목울대 부근을 꿰맸다면 이들은 이유가 있어 나를 찾아왔다는 이야기.
“그냥 놀러온 거 아니시죠? 아 답답하네.”
스윽.
혈 가면 하나가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아아, 그럼 문답무용 뭐 그런 건가?”
‘······!’
쉴 새 없이 입은 떠들고 있었지만 가슴이 서늘했다.
단검을 손에 쥔 혈 가면의 온 몸에는 녹색의 선이 거미줄처럼 퍼져나갔다.
‘거패권으로는 택도 없다. 그렇다면?’
초록색 선이 진해졌다.
“잠깐!”
혈 가면이 움찔했다.
“갈 땐 가더라도, 한 마디 정도는 들어줘도 괜찮잖아?”
단검을 쥔 혈 가면이 뒤에 있는 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끄덕.
“흠, 좋아. 우선 너희들이 왜 여기서 하필 날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묻지 않을게. 어차피 너희들도 말단이고 신입이 다 그렇듯 까라면 까야 하는 거잖아?”
움찔.
단검을 쥔 혈 가면이 움찔했다.
“혹시 아는지 모르겠는데, 오늘 그간 모은 피 같은······ 아니, 피 보다 소중한 돈을 노인부양에 써야 해서 몹시 슬픈 날이야.”
스윽.
“어허이, 단검 잠깐 내려놓고. 자자, 잘 들어 봐. 내가 개방도다 보니, 아무래도 행선지를 항상 보고해야 한단 말이지? 따라서 모든 개방도가 나를 주시하고 있다 이말 이야. 그건 바꿔 말하면 아마도 지금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너희 혈천의 꼬리가 잡힐 수도 있다는 거고. 알겠어?”
속사포처럼 이어진 내 말에 혈 가면의 초록색 진기가 혼란한 듯 춤을 추었다.
쿵.
뒤에 있던 자가 발을 굴렀다.
단검을 쥔 혈 가면의 진기가 안정되었다.
‘젠장······ 출수하려나.’
“잠깐! 님! 좋아, 알겠어!”
가면 뒤 얼굴에서 작은 한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얼굴을 굳힌 나는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목소리를 깔았다.
“나 또한 어엿한 한 명의 무인! 무인답게 죽을 수 있게 해 주게.”
혈 가면이 고개를 갸웃했다.
“검을 하나 주겠나? 무인답게 싸우다 죽겠다.”
기운이 빠지는 듯 혈 가면의 어깨가 살짝 쳐졌다.
툭.
발 앞에 철검 하나가 떨어졌다.
아무런 특색 없는 검.
재빨리 주워들어 기수식을 취했다.
‘남궁진. 역시 좋은 친구야. 잘 써먹으마.’
온 몸에 진기가 흐르며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진지한 내 눈빛을 본 혈 가면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냥 달려들면 필패.’
혈 가면의 허리 밑으로 기가 뻗쳐 내려갔다.
‘보법이 필요하다.’
그대로 앞으로 몸을 날리며 금태정에게 복사한 보법을 사용했다.
사위가 흐릿해지며 혈 가면의 모습이 빨려 들 듯 다가왔다.
‘창천섬격!’
검을 잡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고요한 숲에 빛이 번쩍였다.
털썩.
단검을 들고 있던 혈 가면의 가슴이 뻥 뚫린 채 바닥에 쓰러졌다.
스릉.
뒤에 있던 혈 가면이 아무런 동요 없이 검을 빼 들었다.
조금 전 쓰러진 자와는 비교를 불허할 수준의 선명한 녹색 선.
바닥을 힘차게 박차고 달려드는 혈 가면의 검이 내 목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 작가의말
무인답게 싸우게 해 주게!
싫음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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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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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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