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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밀르 님의 서재입니다.

드래곤 거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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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밀르
작품등록일 :
2021.02.13 22:03
최근연재일 :
2021.07.0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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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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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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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3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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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 돼지 거세사

DUMMY

제1부


1. 돼지 거세사


고틀란트 산맥에 늦은 봄이 찾아왔다.


이곳은 공화국 최북단 수목 한계선.


마을이름은 고트하브(Godhab). 고대인의 사어(死語)로 ‘희망’이라는 뜻이다.


축사를 열자 돼지 냄새가 진동했다.


「본격 ‘불까기’의 계절이다.」


먼지 속에서 코딱지를 파며 궁드르디의 아버지 프롬이 중얼거렸다.


「올 해는 유독 수놈이 많이 태어났어요. 귀찮게.」


「올해 안에 전쟁이 날 거다. 재수 없을 징조야.」


마을은 돼지가 수놈을 많이 낳으면 전쟁이 난다는 미신이 있다. 경험인지 구전인지는 모르나 프롬의 설명이 그럴듯하다.


「돼지 놈들은 본능으로 냄새를 안다.」


「무슨 냄새요?」


「전쟁 냄새.」


프롬이 삽으로 분뇨가 들러붙은 톱밥을 퍼냈다.


「도시에서 날아오는 죽음의 냄새지.」


도시라고?가장 가까운 도시도 산맥 너머 천 리나 떨어져 있다. 그런데 어떻게?


「봄이면 산맥 너머에서 남풍이 불어. 거기에 도시 냄새가 타고 넘어 온다. 제련소에서 태우는 숯 냄새, 모루에 쳐대는 금속 냄새, 병기창에서 만든 염초 화약 냄새.」


프롬은 거기까지 말하고 새끼 돼지 거세를 위해 선반에 쌓인 지푸라기를 쓸었다. 아들이 물었다.


「왜 돼지들은 전쟁 직전에 수놈을 많이 낳죠?」


「본능으로 아니까. 젊은 거세꾼들이 전장에 끌려가 죽는다는 걸.」


숯불에 달군 고환 봉합용 바늘을 찬물에 식히며 프롬이 말했다.


「거세꾼이 없는 동안 씨를 많이 뿌린다는 게 돼지의 전략이야. 짐승이라고 생각도 없는 줄 알면 오산이지.」


하지만 다행히 이 부자가 전쟁에 차출되어 죽을 일은 없다.


이 지방은 벽촌이라 군역이 면제다.


세금 받으려고 저승까지 쫓아온다는 관리들도 이 지방은 두 손 들었다.


험산준령, 산적, 악천후.


공화국은 이 지방에 면세와 반영구 자치를 허가했다. 물론 독립채산제로.


「우리 같은 이주민에게 여긴 전쟁도, 세금도, 노역도 없는 고독한 천국이지.」


프롬이 궁드리디에게 달군 바늘을 건넸다.


바늘에서 검은 광택이 번쩍였다.


바늘에는 촌부의 것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 정교한 드래곤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점심까지 끝내자. 폴커씨 집도 올해 수퇘지 풍년이라 백 마리 까줘야 돼.」


「백 마리요?!」


싸구려 럼주에 칼을 소독하던 궁드르디가 면도날을 돼지 분뇨에 빠뜨릴 뻔했다.


「그럼 하루 동안 백 쉰 마리? 제가 무슨 불알 학살자인가요?!」


「투르니에. 물 들어 올 때 노 저으라 이거야. 재능 썩히지 말고.」


프롬은 아들 궁드르디를 ‘투르니에’라고 부르길 좋아한다.


궁드르디 판 투르니에 2세.


귀족호칭인 ‘판’이 붙는 건 부농인 프롬이 몰락 귀족의 족보를 일천 데나리온에 샀기 때문이다. 가난한 노동자 삼년 치 품삯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그 고귀한 재능으로 어머니는 임금 옷을 가봉하셨다는데. 저는 돼지 불알 가죽을 꿰매고 있네요.」


바늘구멍에 실을 꿰면서 궁드르디가 자조했다.


아버지 말에 따르면, 궁드르디의 어머니는 왕실 옷감을 수선하던 특급 재봉사였다고 한다. 혁명으로 공화국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이 얘기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다루겠다.


그녀의 놀라운 손재주는 아들에게 유전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은 죽은 그녀가 생각도 못한 일을 하며 살고있다.


돼지 거세사.


「투르니에. 직업엔 귀천이 없어. 니가 불알을 잘 까줘야 노린내 없는 좋은 베이컨을 만들지. 우리 집안이 베이컨 만들어 귀족 족보를 산 사실을 잊지 마라. 저 놈부터 까자.」


「돼지 젖에 럼주 섞어 먹이셨죠?」


「물론. 점심 전에 끝내자.」


「제발요! 마취되는 시간도 생각하셔야죠.」


몽둥이로 돼지 양미간을 내려쳐 기절시킨 뒤 거세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궁드르디는 가장 고통을 적게 주는 방식을 선호한다.


고통 없이, 흉터 없이, 신속하게.


일명 ‘거세 3원칙’이다.


「마, 서둘러. 오늘 마을에 귀한 손님이 온단 말이야. 회관에서 돼지 잡을 거야. 해체작업 도와줘야 돼.」


「아하, 그래서 백단나무 방패를 꺼내셨군요.」


백단나무 방패.


한 때 프롬이 용맹한 전사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물건이다. 이 방패는 바다 건너 먼 남쪽대륙에 자라는 백단목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소금물에 1년 이상 담근 뒤 말려 수차례 옻칠을 한 명품이다.


그 방패는 지금 프롬의 집 부엌에 걸려 있다.


일루리사트 지방으로 이주한 뒤로는 사람 죽일 일이 없어졌다. 그래서 돼지수육이나 얼린 대구 내려칠 때나 가끔 도마로 쓴다.


「기대해도 돼죠, 아버지?」


「그래. 돼지 뽈살 따로 빼놓으마.」


프롬이 백단나무 방패를 꺼내는 날은 다들 허리끈을 느슨하게 해두는 게 좋다. 아침 정도는 굶어 줘야한다. 진짜 포식할 수 있는 축제날이니까.


「오늘 수도에서 위대한 [볼 브레이커스]슈타이너 경이 마을에 오실 예정이다.」


「'위대한'이라고요? [볼 브레이커스]는 뭐죠? 특급 드래곤 슬레이어인가요?」


프롬은 거세가 끝난 뒤 마취가 덜 깨 비틀거리는 돼지새끼를 조심스레 짚더미에 뉘였다. 그리고 경멸하듯 코를 풀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볼 브레이커스]는 그런 호구새끼들이랑은 달라. 슈타이너 같은 분 때문에 이 마을이 먹고 사는 거다.」


드래곤 슬레이어.


말 그대로 드래곤 사냥꾼이다. 마을에선 통칭 ‘호구새끼’로 부른다. 이놈들이 와서 먹고, 자고, 쓰는 돈으로 마을이 유지된다.


「슈타이너님은 볼 브레이커스들의 전설이지. 그 분들은 드래곤의 개체수를 조절하고 계시단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마을이 일년 안에 초토화 됐을걸.」


「흐흠.」


대륙 최북단에 위차한 작지만 강한 나라, 둠 브링거 공화국.


둠 브링거를 지탱하는 부의 원천은 바로 드래곤 사냥과 드래곤 가공 산업이다. [음녀의 자궁]이라 불리는 거대한 분지 전체가 공화국 영토다. 그리고 이곳에 지상에서 유일하게 드래곤들이 서식한다. 덕분에 드래곤 사냥은 공화국의 황금알 낳는 독점사업이다.


「드래곤과 돼지의 공통점이 뭔지 아냐? 버릴 게 없다는 거야.」


그렇다. 드래곤은 버릴 게 없다. 게다가 하나 같이 고급이다.


가죽은 최상급 방어구.

뼈와 이빨과 발톱은 강철보다 단단한 무기.

기름은 고급 약재와 화장품.

내장과 알은 고급 식자재.

털은 최고급 옷감.

눈알은 장신구.


「심지어는 배설물도 일반 유기비료나 최상급 비료인 구아노보다도 열 배나 비싸지.」


축사바닥에 들러붙은 돼지 똥을 삽으로 긁으며 프롬이 말했다.


상황이 이러니 당연히 수요가 엄청나다. 그리고 드래곤 관련 산업일체는 공화국 통제 하에 있다.


「뭘 모르는 놈들은 이 마을을 수목 한계선의 유배지 정도로 생각해. 하지만 공화국은 일루리사트 지방과 이 고트하브 마을에 관심이 많아.」


고트하브는 드래곤을 사냥하러 온 드래곤 슬레이어들에게 숙식을 제공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불법 행위를 감시한다. 일종의 계획도시다.


공화국은 쿼터제를 통해 각국이 연간 사냥할 수 있는 드래곤의 개체수와 종류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마을에 어슬렁 거리는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놈들을 봐라. 열에 서넛은 밀수꾼, 스파이, 불법 가공업자야. 우린 면세와 군 면제를 대가로 공화국의 눈과 손이 돼야 해.

개잡놈들 감시하고 고발하는 게 여기 주민의 임무지.」


타국에서 온 드래곤 슬레이어들은 드래곤을 한 마리만 잡아다 팔아도 엄청난 이익을 남긴다. 때문에 각국에서 내로라하는 전사, 마법사, 사냥꾼, 암살자들이 사냥 허가증을 받거나 갱신하려고 매년 둠 브링거 공화국의 수도인 누크로 몰린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드래곤 슬레이어 허가증을 받은 이들은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기 위해 매년 봄이면 [음녀의 자궁] 곳곳을 누빈다. 덕분에 수도 누크와 거점 도시들은 숙박업, 보험업, 장의사, 의료 보조기구상점이 늘 성황이다.


술집마다 드래곤 잡겠다고 덤볐다가 비명횡사하거나 불구가 된 외국인이 넘쳐난다.


공화국의 풍요와 번영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작자들의 뼈무덤과 천명 중 한명이 안 되는 확률로 일확천금을 거둔 사냥꾼들의 신화 위에 견고히 세워져 있다.


「게다가 올해는 이십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성(聖)패트릭 축일]이 있는 해다. 외지 놈들 행동을 더 철저히 감시해야 돼. 궁드르디, 넌 패트릭 축일 처음이지?」


「이십 년에 한 번 돌아온다면서요. 전 열일곱이고요. 아들 나이도 몰라요?」


궁드르디는 다섯 번째 돼지를 거세하며 사무적으로 대꾸했다.


「대단한 구경거리지. 수백, 수천 에이커 사탕무밭에 수십 마리 녹각룡이 들이닥칠 테니까. 빨리 까. 끝내고 들판으로 가자.」


***


「저 넓은 사탕무밭을 녹각룡이 전부 망쳐놓는다고요?」


거세용 수술도구를 메고 사탕무밭을 가로지르며 궁드르디가 프롬에게 물었다.


「너한테나 사탕무밭이 드넓지. 드래곤에게는 돌아서면 배고픈 간식 아니겠니.」


냉대기후인 이곳에서 키울 수 있는 작물은 호밀과 사탕무 정도다. 사탕무는 설탕의 주원료라 공화국이 식량안보를 위해 일괄수매 한다. 당연히 수확량이 많든 적든 일정한 가격을 받을 수 있어 집집마다 재배한다. 게다가 즙을 짜낸 찌꺼기는 양질의 사료다. 돼지 키우는데 없어서는 안 될 자산이다.


그런 사탕무 재배에 이십 년에 한 번 큰 흉년이 찾아온다.


바로 [성 패트릭 축일]이 있는 해다. 녹각룡들 때문이다.


「녀석들은 이십 년에 한 번 번식기가 되면 수컷들이 민가로 내려와 사탕무밭을 쑥밭으로 만들지.」


공화국의 수도 누크에는 국토관리부 산하 [드래곤 자원청]이라는 곳이 있다. 드래곤의 습성과 서식지, 해부학적 특성을 전방위로 연구하는 곳이다. 이곳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녹각룡의 번식주기는 이십 년에 한 번으로 매우 길다. 이 때 수컷들은 몸집을 불려 암컷에게 잘 보이기 위해 대량의 탄수화물을 섭취한다.


「알지? 인간이나 드래곤이나 살찌가 가장 좋은 음식이 뭔지.」


「당연히 설탕 아닌가요.」


「그래서 녹각룡들이 내려오기 시작한 거지.」


인간이 일루리사트에 정착해 숲을 태우고 사탕무밭을 일구면서 개척민들은 드래곤과의 공존을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게 성 패트릭 축일과 무슨 상관이 죠?」


「패트릭 성인이 드래곤을 무찌른 것을 기념하는 거지. 녹각룡들이 밭에서 빨리 떠나기를 빌면서 말이다.」


성 패트릭은 천년 전 일루리샤트를 처음 개척했다는 전설 속 영웅이다.


패트릭은 태초의 세계수인 이그드라실에 기생해 살던 옛 뱀 ‘실버 서펀트’의 머리를 으깨버렸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공로로 태초의 ‘현명한 드래곤들’에게 대륙을 다스릴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두.두.두.두.두.두.


숲에서 산사태 같은 소리가 평지를 울렸다.


거세 의뢰를 받고 폴커의 농장으로 향하던 프롬과 궁드르디 부자가 멈춰 섰다. 프롬이 땅에 귀를 댔다.


「놈들이군. 녹각룡이 오고 있어. 이제부터 볼만해 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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