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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밀르 님의 서재입니다.

드래곤 거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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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밀르
작품등록일 :
2021.02.13 22:03
최근연재일 :
2021.07.0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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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4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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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회 - 2부 12화 결투 전야(前夜) Part.1

DUMMY

12. 결투 전야(前夜) Part.1


드래곤 거세학교 실습 건물인 장 갈렌관 회랑에는 출입금지를 알리는 붉은 밧줄이 걸려 있었다. 최근 실습에서 벌어진 텔레마코스 종(種) 드래곤의 난동으로 기둥에 균열이 가면서 안전진단을 위해 내려진 조치였다.


「마누스, 바지 걷어 올려라. 붉은 잉크가 묻겠구나.」


밧줄을 풀쩍 뛰어넘은 슈타이너가 히죽히죽 웃으며 그를 졸졸 따라 오는 십대 후반의 소년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마누스.


창관에서 이질에 걸려 죽은 채 발견된 매춘부의 자식이라고 들었다. 어미는 전염병이 돌 때 혼자 마누스를 낳다 죽었는데 탯줄이 목에 감긴 채 나온 탓인지 마누스는 백치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런 마누스를 빈민구호소에서 드래곤 거세학교 사환으로 데려온 게 슈타이너였다.


「자, 마누스. 이쪽으로 와 보렴. 그림 그리기 시간이다.」


거세수업이 진행됐던 곳에 도착한 슈타이너가 소매에 숨겨온 파피루스와 목탄을 꺼내 수술대에 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남쪽대륙의 명물인 납작 복숭아가 놓였다.


「그림 먼저. 복숭아는 다음.」


반사적으로 복숭아를 짚으려는 마누스의 손등을 탁치며 슈타이너가 경고했다.


마누스가 언어인지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말의 강세와 동작을 통해 대강의 분위기는 파악할 줄 알았다.


「자 한 번 둘러보렴. 여기가 어디인지 알겠니?」


슈타이너는 마누스를 장 갈렌 실습관 한 가운데에 세운 뒤 몸을 한 바퀴 돌아 건물전체를 둘러보게 했다.


목탄을 손에 쥔 마누스는 창틀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신지 잠시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이내 건물 전체를 스윽 관찰하고는 고갤 끄덕이며 파피루스가 놓여 있는 수술대를 가리켰다.


「그래, 거기서 그리면 돼. 다 그리면 먹게 해주마.」


슈타이너가 납작 복숭아를 베어 물고 맛에 감탄하는 마임을 선보였다. 그러자 마누스가 고갤 끄덕이며 수술대로 다가가 파피루스에 뭔가를 급하게 그려 넣기 시작했다.


***


「나으리, 이 아이는 신의 은총을 받은 아이입니다.」


「양자를 맞이할 만큼 여유 있지 않소.」


7년 전.


드래곤 자원 관리청이 복지사업 예산편성 업무로 슈타이너를 빈민구호소에 보냈을 때였다. 원장신부가 십 대 초반의 한 사내아이를 거둬달라며 슈타이너에게 소개했다.


「이 아이는 한 번 본 모든 것을 기억하고 그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클레브 거리의 여자 목욕탕에 한 번 보내봐야겠군요.」


원장신부는 시답잖은 농담에 반응하지 않고 들고 있던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펼쳐 보였다.


「이것은?」


원장 신부가 슈타이너의 반응을 예상한 듯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놀랍지 않습니까? 겨우 열 두 살 소년이 단 한 번 보고 그린 것이랍니다.」


그것은 공화정 이전 둠 브링거 왕조의 시조인 칼레바 1세의 초상화였다. 실제 그림은 사람 키를 웃돌 만큼 커서 공화국 라이시움 중앙에 전시되어 있었다.


「구호소 아이들과 라이시움에 견학을 간 적이 있습니다. 마누스는 이 초상화에만 관심이 있어서 하루 종일 이것만 보고 돌아왔지요. 사실 오래 머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이틀 동안 식사도 거르고 잠도 자지 않더니 그려낸 겁니다. 그림을 가르쳐 준 적도 없답니다.」


슈타이너는 이 그림을 잘 알았다. 천성이 검소했지만 볼 브레이커스 단장으로 오래 일하다 보니 좋은 갑옷이나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의장용 갑옷에 나름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초상화는 드래곤을 물리친 칼레브 1세가 의장용 흉갑을 입은 위풍당당한 모습을 상상해 그린 것이었다. 궁정 소속화가들이 흉갑의 복잡한 드래곤 상감 문양까지 정교하게 재현해 슈타이너의 눈길을 끌었었다.


「기하학 무늬까지 똑같이 따라 그렸군.」


슈타이너의 흔들리는 눈빛을 포착한 원장이 귀띔했다.


「슈타이너 경, 참고로 마누스는 납작 복숭아를 참 좋아한답니다. 반드시 도움이 될 겁니다.」


***


잠시 옛 생각에 빠져 있던 슈타이너가 태양의 움직임을 살폈다. 곧 경비병이 순찰을 돌 시간이다. 슈타이너가 하늘을 가리키며 마누스에게 말했다.


「마누스, 이제 곧 끝내야 돼.」


마누스가 고갤 크게 끄덕였다.


‘거의 다 되어가는군.’


독신인 슈타이너가 장애아를 혼자 키우는 건 무리였다. 다행히 마누스는 거세학교에 사환자리를 얻었다. 이십 년간 교수직을 맡으면서 사적으로 자신의 힘을 사용한 건 마누스를 고용할 때와 궁드르디를 추천학생으로 뽑은 게 전부였다.


마누스는 의사소통은 어렵지만 손짓발짓으로 건물청소나 설거지 등 허드렛일을 믿고 맡길 수 있었다. 몇 년 만에 그는 거세학교 최고의 살림꾼으로 신뢰를 얻었다.


사서역할도 충실히 해냈는데 이것은 오직 슈타이너만 아는 비밀이었다.


우적우적.


마누스가 납작 복숭아를 먹기 시작했다.


「애썼다, 마누스. 네가 자랑스러워.」


어릴 적 영양실조로 땜빵이 생긴 소년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슈타이너가 파피루스를 펼쳐보았다.


그것은 장 갈렌 실습관의 설계초기모습을 담은 평면도였다.


현재는 도면원본을 재정담당관인 울리히 게르하르트가 관리하고 있어 그의 허가 없이는 열람할 수 없다.


딱 한 번. 장 갈렌 신관건설 당시 교직원회의에서 열람이 허락됐었다. 그 당시, 설계도의 분실을 대비해 슈타이너가 마누스를 데려다 몰래 조감도와 평면도를 보여준 것이다.


슈타이너는 이런 식으로 학교의 주요 기밀문서나 장부, 도면 등을 분실(혹은 의도적 날조)에 대비해 마누스에게 몰래 보여줘 왔다.


그리고 마누스는 한 번 본 것은 잊는 법이 없었다.


「마누스, 넌 정말 신의 은총을 입은 친구야.」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마누스는 당시 설계도면을 그대로 재현해냈다. 그리고 슈타이너는 설계도와 실제건물의 모습을 대조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이 암염기둥은 원래 설계도에는 없던 거였어.」


슈타이너는 재빨리 도면과 현재 건물의 실제 기둥 수를 비교했다. 설계에 없던 기둥은 총 네 개였다. 이제 경비들이 순찰을 돌 시간이다.


‘모르긴 해도, 나머지 기둥 셋도 내부가 암염으로 되어있을 가능성이 높겠군.’


누크에서 암염은 매우 비싼 세금을 붙여 수입한다. 이 나라 수도는 소금이 귀하다. 바닷가지만 북쪽 바다는 염수의 농도가 낮고 일조량이 적어 염전을 운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장인 오컴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소한 울리히 재정담당관이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재학생 결투 건으로 소집된 임시 9인회는 밤늦도록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오컴 공이 결투의 증표인 칼스와 궁드르디의 장갑을 테이블에 던지며 물었다.


「그래서? 교칙으로 제지할 방법은?」


「없습니다. 가문의 명예가 달린 문제잖습니까.」


「학교 잘 돌아가는군.」


견습학과장 기르카스의 원론적 답변에 교장이 불쾌한 어조로 물었다.


「죽기라도 하면?」


「결투로 인한 사망은 죄를 묻지 않습니다.」


「그건 그렇지. 책임은 학교와 무관해.」


교장이 천천히 고갤 끄덕이며 슈타이너에게 물었다.


「그래, 자네의 도제는 기권의사가 없다던가?」


슈타이너가 교장이 테이블에 던진 장갑을 도로 교장 쪽으로 던지며 말했다.


「기권이라니요. 먼저 결투를 신청한 게 궁드르디 입니다.」


「무례하고 무모하군.」


교장이 혀를 차자 재정담당관 울리히도 비웃으며 거들었다.


「이노샹 공동묘지를 알아보시죠. 용사의 무덤은 정식 볼 브레이커스만 묻힐 수 있으니까요.」


「무슨 말씀인지?」


「일루리사트에서 온 당신 도제 말입니다. 칼스가 전력을 다하면 죽을 겁니다.」


「그럴 일 없습니다.」


「자신만만하시군요?」


「내 수제자는 에피메테우스를 물리쳤소.」


울리히가 어깰 으쓱하며 조롱조로 물었다.


「솔직히 그거 믿어도 됩니까?」


「안 믿어도 상관없습니다. 클레어도 궁드르디와 같은 편으로 결투에 나설 예정이니.」


「클레어가?!」


뜻밖의 전개에 모두가 웅성거렸다. 슈타이너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태연히 입을 열었다.


「최근 학칙이 바뀌었죠. 해부학실습을 제외한 대부분의 과목이 최우수인 클레어는 궁드르디가 해부학실습만 수석을 해주면 볼 브레이커스 시험에 자동 합격합니다. 물론 2인 1조로 활동하는 조건으로요.」


일동을 스윽 돌아보며 슈타이너가 말을 이었다.


「당연히 파트너가 죽거나 다치게 놔두지 않겠죠. 반드시 면허를 받아야 하니까.」


「말도 안 돼! 중단 시키시오!」


불 같이 노한 교장의 말에 슈타이너는 어깰 으쓱하며 능청을 떨었다.


「무슨 수로요? 강제할 방법이 없다면서요.」


「수석과 차석이 혼인추문으로 결투라니. 원로원에 무슨 트집을 잡히려고?」


이번에는 교감인 브뤼헤 경도 우려를 표했다. 그러자 울리히가 목소릴 높였다.


「왕당파가 거세학교 폐지론까지 논하는 판입니다! 칼스와 클레어의 결투만큼은 막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수로?」


슈타어너가 재차 묻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울리히가 연신 검지로 책상을 두드리다 무리수를 두었다.


「퇴학 시키겠다 경고하면?」


「클레어를? 억지군! 가르친 중 가장 훌륭한 학생이오!」


울리히의 말에 클레어에게 창검술을 가르친 스벤 경이 흥분해 탁자를 치며 말했다.


「퇴학 사유가 될 도덕적 결함이 있습니다.」


「임질치료 받고있는 당신이 할 소린 아니구려.」


「스벤 경! 닥치시오!」


홍당무가 된 울리히가 벌떡 일어나자 교장이 제지하며 말했다.


「내가 모르는 약점, 아니 문제가 있었나?」


모두가 교장 입에서 부지중에 나온 '약점'이란 단어에 주목했다. 평소 클레어를 바라보는 그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는 단어였다. 일개 학생이 아닌 찍어 누를 잠재적인 적수로 여기고 있던 것이다.


울리히가 야비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항간에, 그녀가 마녀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


염색 공방에 암모니아 악취가 진동했다. 오늘 밤까지 오백 피트 분량의 옷감을 염색해야 한다.


‘학업은 학업, 생계는 생계, 그리고 결투 준비까지. 힘들어 죽을 같아.’


후텁지근한 공방에서 오래 일하다보니 클레어의 인중에 습기가 맺혔다. 소매로 닦았다. 물방울이 아니었다. 코피였다.


「이년아! 옷감에 피 떨어지잖아!」


「죄송해요!」


염색조합 장인이 거칠게 밀쳐내는 바람에 클레어는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엉덩이에 더러운 침출수가 축축하게 젖었다. 툭툭 털고 일어났다.


서러울 틈도, 배고플 틈도, 피곤할 틈도 없다. 머릿속만 복잡했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방광염 왔어?! 한 번 갈 때마다 한 렙돈 씩 급여삭감이야!」


***


축축한 악취로 가득한 공방에서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달았다.


클레어는 코를 빨아들여 코피와 콧물을 시궁창에 뱉었다. 피비린내가 입 안 가득 고였다. 침을 한 번 더 뱉고 코를 눌러 지혈하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쟈우스트로 칼스를 이길 수 있을까? 대체 궁드르디 그 애송이는 어쩔 셈인지?’


퍽!


「악!」


진탕을 피해 잡초가 자란 곳에 발을 딛는데 목재 둔기가 클레어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아픈 건 둘째고 고막이 나간 것처럼 귀가 웅웅거렸다.


순간 앞이 보이지 않았다.


뒤통수를 심하게 고문당해 장님이 된 경우가 있다던데,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아, 앞이.」


「앞이 뭐? 어차피 눈에 뵈는 거 없던 년 아냐?」


아버지 프란츠였다.


인간 백정은 반만 남은 클레어의 머리칼을 부여잡고 힘껏 벽으로 집어 던졌다.


힘이라면 클레어도 어지간한 성인남자를 능가한다. 하지만 상대는 맨손으로 멧돼지의 어금니를 뽑는다는 괴력의 사나이. 버틸 재간이 없다.


쾅!


벽돌에 부딪힌 충격이 그대로 등을 타고 발가락까지 전해졌다. 척추 기립근이 워낙 튼튼했기에 망정이지 일반여성이었다면 등뼈가 부러졌을 거다.


아무튼 프란츠는 자식을 공평하게 다스렸다. 주먹으로. 그리고 훈계할 땐 멱살을 잡았다.


「못 들었냐? 애비가 부르크하르트 가문에 도박 빚이 좀 있다고. 그런데 결혼식을 파토네?」


「컥! 이길 수... 있어요...」


「물론 주판알이나 튕기는 상업조합 도련님 병신 만들기야 좆 주무르듯 쉽겠지. 문제는」


멱살을 잡았던 프란츠가 딸의 목을 잡아 벽으로 밀어붙였다. 클레어가 컥컥거렸다.


「전쟁은 다 돈이야. 결투 한 번에 네 보호자인 애비 앞으로 얼마가 청구될까?」


클레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술이나 파트너의 역량만 신경을 썼던 것이다. 그렇다, 결투는 돈이 든다. 그것도 많이.


「이년아, 이 나라는 내가 사형수 대가리 자를 때도 소득세, 도로 점거료 같은 세금을 붙인단 말이다.」


결투가 옛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의 전유물이었던 이유는 명예와 같은 추상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모든 전쟁은 돈이다.


「결투장소 대관비, 갑옷 임대, 랜스 구매, 말 사료비와 마구간 대여료도 빠질 수 없지. 여기에 교회에서 발부하는 공공풍기문란 약식재판벌금, 약식 고해성사실 설치비, 교구신부 사례금, 사망하면 장례비까지!」


「컥컥!」


질식해서 의식이 희미해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프란츠는 딸의 목덜미를 놓아주었다. 간신히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한 클레어가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다 구역질을 시작했다.


「물론 네 년이 결투에 승리하면 상대에게 비용을 뒤집어씌우면 돼. 하지만 나도 만일을 위해 보험은 들어 둬야겠지?」


언니이!


구역질을 하다가 놀란 클레어가 집 마당 쪽을 바라보았다.


검은 띠에 붉은 두건, 노란 리본을 달고 ‘어깨’ 둘에게 끌려가는 둘째 아가타가 보였다.

전형적인 매춘부의 복장이었다.


「언니이이! 도와줘!」


덩치 큰 포주 놈들에게 다리가 허공에 뜬 것처럼 들려가는 둘째 딸과 떳떳하게 눈을 마주치지 못하던 프란츠가 가래를 뱉으며 중얼거렸다.


「네 년이 자초한 일이야.」


「잠깐만요! 잠깐만!」


동생을 끌고 가려던 두 사내 앞에서 클레어가 길을 가로막았다.


‘뭐야, 이 계집. 덩치가.’


본인들보다도 키가 큰 클레어의 체구에 어깨들이 움찔해 프란츠에게 외쳤다.


「프란츠, 우리는 시청소속 공창관리자야. 자네 딸이 도끼를 휘둘러봐야 교수형감이라고.」


「나를 사세요.」


「엥?」


「덩치 크고 힘 좋은 계집도 나쁘지 않잖아요?」


「흠!」


사실 두 어깨는 악의는 없었다. 자신들이 하는 일에 자부심 따윈 없지만 그렇다고 대충하지는 않는 위인들일 뿐이다.


「한 바퀴 돌아봐.」


둘 중 새치가 반 쯤 섞여 더 늙어 보이는 염소수염이 아가타와 클레어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클레어의 몸매를 다리부터 머리까지 스윽 훑었다. 이런 일을 지겹도록 겪었는지 욕정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사무적인 눈빛이었다.


「각오는 된 거지?」


「대신, 내가 결투에서 졌을 때에요.」


클레어가 침을 꿀꺽 삼키며 대꾸했다.


「근데 이 처녀는 덩치가 너무 크지 않나?」


어깨 중 근육질 민대머리가 어느새 아가타의 손목을 놓고 볼멘소리를 냈다. 그러자 가죽 주머니에서 양피지 계약서를 주섬주섬 꺼내며 염소수염이 말했다.


「취향 특이한 놈들도 있어. 특히 외레순드 해양 조합소속 검둥이들.」


「하긴 그 종마새끼들은 수도원 종과 종이 칠 때부터 찬과 종이 칠 때까지(밤 9시부터 새벽 3시) 떡을 쳐대니. 체력 좋은 근육질 계집도 필요하지.」


인장을 찍기 위해 횃불에 왁스를 녹여 양피지에 흘리며 염소수염이 말했다.


「아가씨, 우리도 할 일 하는 것뿐야. 빚만 갚으면 자넨 자유라네.」


「언니 안 돼! 아저씨, 나 괜찮아요. 하란 거 다 할게요. 우리 언니는 안 돼요! 언니, 안 된다고 해! 볼 브레이커 되기로 했잖아. 언니! 공화국 최고 실력자잖아!」


언제 그랬냐는 듯 꽤나 자상하게 아가타의 손목 결박을 풀어주며 염소수염이 말했다.


「꼬맹아, 안 됐지만 넌 반품이야. 운 좋은 줄 알아라.」


「언니이! 안 돼! 안 돼!」


발버둥을 쳤지만 민대머리가 아가타를 어깨에 들쳐 메고 서둘러 자릴 피했다. 염소수염은 사무적으로 양피지에 쓰인 계약조항을 읽기 시작했다.


「자네 물론 처녀겠지? 첫 손님은 처녀 프리미엄이 붙으니까 일당 사십 캉탈, 두 번째 부터는 십 캉탈에 한 소짚이 넘어갈 때마다 할증으로 삼 캉탈 씩. 그리고 자네는 매일 간음죄를 지으니까 고해성사사례로 여기서 서 푼을 떼고, 성병이 걸리면 위로 퇴직금이...」


「찍을 거냐?」


염색공방 벽에 기대 팔짱을 낀 채 프란츠가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보험 들어 드려야죠.」


「난 식구가 너 말고도 여덟이야.」


「알아요. 나도 돈도 벌고 검둥이 맛도 보고 일석이조겠네요.」


클레어가 양피지에 녹아내린 왁스에 지장을 찍으려는데 프란츠가 손목을 잡았다.


「가져가.」


「뭐?」


염소수염이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해 봤는데 수지가 안 맞아.」


염소수염도 긴 말하지 않았다. 양피지에서 녹아내린 왁스를 긁어내고 주머니에 넣으며 차갑게 말했다.


「충고하는데 자네 지금 부르크하르트 가문과 척지는 거야. 도박 빚도 그대로지.」


「이 년이 어차피 따먹힐 과실이면 개보다 사슴에게 주는 게 낫지.」


염소수염은 지금 벌어지는 일은 자신이 무관하다는 뜻으로 가죽신에서 먼지를 털고 침을 뱉었다.


「짐승 같은 놈. 나도 바닥이지만 너란 놈은. 아편 없는 곳에서 종창에 걸려 뒈져도 널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이 없길, 아멘.」


덤덤하게 저주를 퍼부은 뒤 염소수염과 민대머리는 빈손으로 자리를 떴다. 프란츠가 딸에게 말했다.


「시합. 꼭 이겨라.」


「흥.」


「하지만 만약의 경우에는.. 날 따라와 봐라.」


프란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체를 해부하는 자신의 공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꿍꿍이긴 건가.


그리고 아버지가 무엇을 꾸미든 클레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이번에도 무언가에 끌리듯 아버지의 작업실로 따라 들어갔다. 염색공방 야간작업급료는 진즉에 포기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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