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라떼밀르 님의 서재입니다.

드래곤 거세하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떼밀르
작품등록일 :
2021.02.13 22:03
최근연재일 :
2021.07.08 18:00
연재수 :
46 회
조회수 :
3,204
추천수 :
19
글자수 :
294,033

작성
21.03.06 22:56
조회
46
추천
0
글자
20쪽

22회 - 2부 7화 썸, 그리고 재회

DUMMY

천지에 말똥냄새가 진동했다.


「동방원정이라도 가려는 건가. 공화국에 있는 말이란 말은 다 모아놨군.」


캉에를루수아크.


수도 누크에서 약 2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옛 둠 브링거 왕국의 여름 별궁이 있는 곳이다. 혁명으로 왕국이 공화국이 된 후 재정난에 시달리던 캉에를루수아크 시의회는 이곳 별궁을 자이더르 상업조합에 팔았다.


지금은 조합의 당주이자 칼스의 아버지인 테르예 크비슬링이 소유한 호화별장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초라한 행색의 궁드르디와 클레어를 훑어보던 마구간 관리인이 퉁명스레 물었다.


「왜요? 위조라도 했을까봐?」


똥 씹은 표정으로 궁드르디가 소매에서 칼스의 초대장을 꺼냈다. 고급양피지에 금색실로 수를 놓은 글씨와 정교하기 그지없는 문장이 찍힌 멋들어진 초대장은 누가 봐도 자이더르 가문의 것이었다.


「드래곤 거세학교 클레어 양과 궁드르디 경?! 이거 실례했습니다. 다섯 번째 마구간으로 이동해 주시죠.」


다섯 번째 마구간이라니. 도대체 몇 개나 있다는 건가.


「사료는 뭐가 있죠? 우리 리피피는 입맛이 까다로운데.」


리피피의 풍성한 갈기를 쓰다듬으며 궁드르디가 말했다. 거세실습사건 이후부터 길들여 타게 된 것이다.


「니므롯산 귀리와 일루리샤트산 청보리가 준비돼 있습죠.」


「고향 청보리 품질은 최고지. 소금도 한 덩어리 넣어 주슈.」


궁드르디가 없는 처지에 허세를 부리느라 데나리온 한 닢을 쥐어주었다.


「표찰 받아 가십시오. 말, 아니 드래곤의 위치가 적혀있습니다. 돌아가실 때 관리인에게 보이시면 됩니다.」


「드래곤이 지금 발정기요. 많이 울어댈테니 좀 봐주쇼.」


현명한 독자들은 이상하다 생각할 것이다.


발정? 거세한 동물이 성욕을 느낄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궁드르디가 봉합술의 달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서는 안 된다.


***


「다시 붙여주자.」


「뭘?」


「고환.」


「뭐라고?」


마취에서 풀린 두족룡이 한바탕 소동을 벌인 직후 수술대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던 궁드르디는 클레어에게 믿기 어려운 제안을 했다.


「넌 뭐든 잘 자르지? 봉합한 부위를 다시 깨끗하게 절개해줘. 혈관이랑 근육은 내가 이어 붙일게.」


「저걸 다시 붙인다고?」


피가 흥건한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두족룡의 음낭을 가리키며 클레어가 물었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지만 가능할지도 몰라.」


「그게 돼?」


「실수로 새끼돼지 불알을 잘못 깠다가 몇 번 다시 붙여봤거든.」


「그런.」


「처음엔 서툴러서 상처가 덧나 몇 마리 죽었는데 나중엔 다 살아서 잘 번식했어.」


그런 게 가능하다니.


사실 비슷한 장면을 클레어도 어렸을 때부터 지겹도록 봤었다. 가축이 아니라 사람으로.


***


「이 년아, 누가 여길 들어오래? 당장 나가!」


아버지 프란츠는 폭력과 왕성한 성욕만으로 설명하기에는 꽤 복잡한 인물이었다. 그는 개천가 주변 염색업자와 도축업자 그리고 제빵조합원을 통틀어 유일하게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사형집행인인 아버지는 성 밖에 집단거주하는 나병환자들이 성에 들어가지 못하게 내쫓는 임무도 맡았다. 이 때 알게 된 귀족출신 백탁병(성기에서 고름이 흐르는 만성 유출병. 전통 중세사회에는 격리, 배제되었다) 환자에게 몇 가지 학문을 배웠다는 소문이 돌았다.


「부르크하르트 가문이 뒤를 봐준다더군.」


「어디 가서 그런 헛소리 퍼뜨리지 마요. 이단 심문 받으니까.」


세간에는 프란츠가 교회권력을 쥐고 있는 부르크하르트 가문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놀랍게도 프란츠는 여덟 딸들을 모두 성사(聖事)에 참가시켜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등을 치러 준 것이다.


사형집행인은 부정하다 하여 미사도 참여할 수 없었던 걸 생각하면 대단한 파격이었다.


「낭시가 어제 자살했어.」


「아니 왜?」


「잘 모르고 그 인간 도살자랑 같이 술을 마셨는데 수치심을 견디지 못했다는군.」


「맙소사. 그 작자, 성 안을 정말 제 집처럼 들락거리는구먼.」


원래 사형집행인은 광장에서 처형이 있거나 특별한 용무가 없는 한 성내 출입이 불가능하다. 술집이나 식당에도 앉는 자리가 따로 있고 성안 사람들과는 말 섞기도 금지됐다.


심지어 위의 사례처럼 사형집행인과 부지중에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 죄책감과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극단적인 인간도 있었다.


그런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는 처지임에도 프란츠는 돈이든 여자든 원하는 것은 모두 손에 넣었다. 그게 클레어의 아버지다. 놀라운 수완을 가진 남자였다.


「거기 서.」


혼비백산해 밖으로 나가려던 딸을 프란츠가 불러 세웠다.


「들어 와.」


아버지와 단 둘이 있을 때가 제일 두려운 딸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클레어는 방에 아버지와 둘만 있으면 소름부터 돋았다.


「너 올해 몇이지?」


「열다섯이오.」


「자위하나?」


「아, 아니오.」


클레어는 순간 악몽 같은 상황을 상상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눈을 굴러 유사시 아비의 안구나 경동맥을 찌를 뾰족한 물건을 재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저게 뭔지 알지?」


아버지는 매대(賣臺)의 고깃덩이를 보듯 전나무 테이블에 놓인 머리 없는 시신을 가리켰다.


어제 오후 처형된 막시밀리안 지거르트라는 좀도둑이었다. 그는 사천 피트 상당의 리넨을 뤠이벡과 여러 군소 조합에서 훔쳤다가 아버지에게 목이 달아났다.


「죄, 죄인이오.」


「아니. 저건 그냥 멈춘 기계야.」


공화국법에 의해, 처형당한 시체는 부정하다하여 땅에 묻지 않고 불태웠다. 그리고 시체의 소유권은 사형집행인에게 있다.


화장만 확실히 한다면 시체로 무슨 짓을 해도 불문에 붙였다. 때문에 사형집행인 집안들은 대대로 해부학과 흑마술을 연구하는 가풍이 발달했다.


집안마다 다르지만 사체를 통해 학습한 외과술로 돈을 벌거나 특정 부분을 잘라 부적으로 파는 일들이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의 기계작동원리다.」


프란츠는 축 늘어진 시체의 고간 사이 물건을 움켜쥐며 말했다.


「이건 관장기(灌腸機)의 끝을 날카롭게 해서 만든 도구야. 혈액을 주입할 때 유용하지.」


프란츠는 보통 사순절 직후 재의 수요일에 사용하는 관장기를 망자의 ‘물건’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혈액을 주입했다.


그러자 선지를 잔뜩 넣은 부댕처럼 망자의 그것이 팽팽하게 부풀었다. 클레어는 남자의 물건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라 이렇게 크고 단단해진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 물건은 외부자극을 받으면 혈관이 부풀어 올라 이렇게 된다. 이것이 교회와 주교, 추기경들이 거품을 물며 저주하는 욕정. 정욕, 성욕, 음란의 실체다. 결국 생명이란 자극에 반응하는 자동기계일 뿐이야.」


‘내 말 듣고 있나?’ 라는 표정으로 프란츠가 딸을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눈빛에 반사적으로 고갤 끄덕인 순간, 클레어는 「자극과 반응」이라는 것의 실체를 어렴풋이 몸으로 이해한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새 밀실에 아버지와 단 둘이 있다는 두려움은 사라지고 진지하게 스승의 다음 강의를 기다리게 되었다.


「네 애비는 사회적 기준에서 자극에 비합법적으로 반응한 기계를 영원히 멈추는 일을 하는 거다. 흥, 이 자식은 제대로 작동할 때도 볼품없었겠군, 에잇.」


만지는 내내 본인도 불쾌했는지 프란츠는 집어 던지듯 망자의 물건을 패대기쳤다.


「그런데 어, 어떤 자극인가요?」


「뭐?」


예상치 못한 딸의 질문에 프란츠가 피식 웃었다. 클레어의 표정은 진지했다.


「이 년 봐라? 저걸 보니 본능적으로 다리 사이가 벌름벌름 젖어들더냐? 그게 자극에 반응한 거지.」


냉소적으로 코웃음을 친 뒤 프란츠는 생선포를 뜰 때 쓰는 날카로운 식칼로 사체의 허벅지 가죽을 벗겨내며 말했다.


「기계란 그런 거야. 그리고 자극에 대한 반응이 격렬한 성능 좋은 기계일수록 죄라는 걸 짓기 쉽지.」


「그게 아니라 궁금해서요.」


프란츠가 딸을 돌아봤다. 대퇴부의 근육이 드러난 사체를 가리키며 클레어가 말했다.


「가르쳐 줄 수 있나요? 이 기계의 모든 작동원리요.」


***


「너 대단하다. 어떻게 부위별 명칭을 다 알지?」


리피피의 고환을 절개부위에 봉합하던 궁드르디가 감탄해 말했다.


「이론은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배웠어. 실습은 늘 꽝이지만.」


「어릴 적부터?」


「선행학습이라 해둘게.」


그 사건 이후 클레어는 숱하게 아버지의 실험을 참관했다.


아버지가 양피지에 그린 수백 장의 해부학 스케치, 가장 효율적으로 절단할 수 있는 근육의 방향, 파열되기 쉬운 신체 부위, 격투와 참격에 요긴한 전술적 이론 등을 이 시절 이미 베테랑전사만큼 습득했다.


「네 부모도 극성이었구나. 아무튼 덕분에 지금 내가 꿰매는 부위가 구요도선이고 그 아래가 덮개근막이라는 걸 알았어.」


「배우면서도 이런 내가 싫었어. 하지만 어떤 면에선 가르쳐준 아버지를 존경해.」


「왜?」


「자기 일에 진지하고 기계를 잘 고치는 사람이니까.」


***


쿠르르륵 쿠르르륵.


발정이 난 리피피는 아래턱을 부풀려 두꺼비 비슷한 소리를 냈다.


「잘 붙긴 했나보네.」


클레어가 리피피의 그곳을 신기한 듯 쳐다보며 말했다.


「발정 난 드래곤 울음소릴 듣는 건 처음이야. 날 때부터 사육된 수컷은 짝짓기를 안 하니까.」


「왜지?」


보리이삭을 한 움큼 짚어 리피피에게 건네며 클레어가 말했다.


「드래곤들도 본능적으로 아는 게 아닐까?」


「뭘?」


「태어난 곳이 자식 키우기 적합하지 않다는 걸 말야.」


킁킁거리던 리피피가 울음을 멈추고 게걸스레 보리이삭을 우적거렸다. 궁드르디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자는 시늉을 했다.


「리피피는 운이 좋아. 얘는 특별하니 기회 되면 짝짓기도 도와주자.」


「하긴. 칼스 같은 왕재수도 짝짓기 하는 마당에.」


「뭐? 오늘 그 녀석 성인식 아냐? 짝짓기라니?」


궁드르디가 고갤 갸웃하며 물었다. 그러자 클레어가 손바닥에 묻은 보리껍질을 울타리에 스윽 닦으며 말했다.


「가보면 알게 돼. 일단 온 김에 별궁부터 구경하자.」


***


마구간에서 별궁까지는 걸어서 한 식경 거리였다. 대로를 따라 심은 아름드리 삼나무들이 웅장했다. 일찍 온 탓인지 하인들은 나뭇가지마다 반짝이는 리본과 구슬꿰미를 장식하느라 분주했다.


「쓸데없이 큰 궁전이네, 약소국 주제에. 이러니 반란이 일어났지.」


「저기 좀 봐.」


클레어가 손가락으로 나무 꼭대기에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사내는 수십 피트 높이 삼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짊어지고 올라온 새장을 열었다. 그러자 안에서 성인 주먹 크기의 거미 서너 마리가 기어 나왔다.


「핑갈 거미네. 북쪽 끝 드워프들의 동굴에 사는 독거미야. 저걸로 뭘 하는 거지?」


풀려난 거미들은 나무들 사이를 오가며 재빨리 방사형의 거대한 거미줄을 짓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실을 내뱉는 즉시 넓은 면적에 방사형 거미줄이 만들어졌다. 거미줄은 햇살에 반사될 때마다 멀리서도 윤곽이 선명히 보일만큼 굵었다.


「궁드르디, 조심해!」


클레어가 뒤를 가리켰다. 돌아보니 두 마리 말이 끄는 수레가 나타나 항아리에 가득한 금가루와 은가루를 거미줄을 향해 흩뿌리며 지나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백여 미터에 달하는 가로수길이 거대한 루미나리에처럼 반짝였다.


「별세계 같다.」


황홀한 표정으로 클레어가 말했다. 궁드르디도 속으로는 감탄했지만 떨떠름한 표정으로 빈정거렸다.


「대체 이런 놈이 왜 학교에 다니는 거지? 나 같으면 거세학교를 사 버릴텐데.」


「너무 두리번거리지 마. 무시당해.」


클레어가 궁드르디를 타일렀다.


「턱 당기고 가슴 펴. 그리고 거만하게 걸어.」


「그러지. 소똥 밟기 좋은 자세군.」


별궁 입구에 이르자 클레어가 궁드르디에게 당당히 팔을 내밀었다.


「팔짱을 껴주지 않겠어?」


「뭐?」


놀란 궁드르디가 너무 큰 소리를 내자 얼굴이 빨개진 클레어가 소릴 낮춰 말했다.


「기사도 에티켓 몰라?」


궁드르디가 그제야 입구로 향하는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함께 온 여성의 팔짱을 끼고 걸으며 꽤나 여성을 위하는 척 가식들을 떨고 있었다.


「알겠다. 부부처럼 보이는 녀석들은 하나도 없는 걸 보니까 오늘 행사공식명칭이 ‘범공화국 혼외자식 많이 낳기 포럼’인가?」


「입 다물어. 내가 도끼 챙겨왔으면 넌 이분도체(二分屠體)감이야.」


「예예.」


궁드르디가 마지못해 팔을 내밀었다. 클레어가 팔짱을 꼈다. 그리고 입이 비죽 나온 궁드르디를 최대한 가까이서 훔쳐보았다.


‘속눈썹 기네. 가까이서 보니.’


클레어는 가짜 귀족행세를 하는 이 일루리사트 촌놈이 허풍쟁이지만 유머러스하고 성실하며 귀여운 구석이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가짜 귀족인 줄 아느냐고? 간단하다.


공화국혁명 당시, ‘투르니에’라는 성을 쓰던 수많은 귀족들을 참수한 게 바로 그녀의 아버지 프란츠였기 때문이다.


***


궁드르디와 클레어는 여름 별궁의 정원으로 인도받았다.


정원은 기존건물과 달리 신축이었다. 니므롯 제국 건축사를 고용해 지은 탓에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정원을 둘러싼 회랑은 니므롯에서 공수한 최고급 대리석으로 만들었고 가운데는 수직으로 긴 직사각형 연못이 있었다. 바닥은 모두 최고급 오닉스를 박석으로 깔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정원 전체가 유리궁전이란 사실이었다.


천장을 모두 유리로 덮어 온실효과를 낸 덕에 정원에는 둠 브링거에서 볼 수 없는 진귀한 열대과실과 화려한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궁드르디 경!」


촌놈처럼 두리번거리는 궁드르디와 클레어 사이로 로쉐가 끼어들었다.


「귀공이 여길 어떻게? 칼스가 초대장을 줬을 리 없는데.」


「클레어의 것을 위조했어. 수도원에서 필사할 때 내 솜씨 봤지?」


집사에게 건넨 초청장은 궁드르디가 정교하게 만든 가짜였다. 로쉐가 한바탕 웃었다.


「못 말리겠군요. 아무리 그래도 이런 옷차림이라면 남들은 종글뢰르(떠돌며 노래, 연주, 요술 등을 선보이던 중세 예술인)인 줄 알 겁니다.」


「칸텔레 연주는 자신 있지. 오늘이 칼스 그 놈 성인식이니까 [코드피스와 창관마님]을 연주해줄까 싶어.」


[코드피스와 창관마님]은 근엄한 척 하는 대주교와 순결서약을 한 귀족의 딸이 수녀원 고해실에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한다는 저자거리 최신 유행가였다.


「유쾌한 무례함이 바로 귀공의 매력이죠. 안 그래, 클레어?」


「응?」


당황한 클레어에게 로쉐가 말했다.


「클레어, 궁드르디 경 좀 빌릴게.」


「어딜 가는데?」


로쉐가 궁드르디를 한적한 방 쪽으로 끌고 가며 말했다.


「궁드르디 경, 뭐라도 제대로 된 걸 걸치시죠. 마침 우리 뤠이벡 조합의 신상품을 소개할 건데 좀 도와줘요.」


***


- 저 사람 누구야? 뤠이벡 조합 사람인가?


- 남의 잔치 와서 자기네 상품홍보라니 정말 못됐어.


- 하지만 저런 푸르푸앵(Pourpoint : 14C~17C 유럽남성들이 착용한 퀼팅 재킷)이라면 나라도 입어보고 싶은걸.


- 브리 금화 삼십 냥?


- 아니. 오십은 받겠어.


- 드래곤 가죽을 가공해 저런 자수와 슬래시 효과를 내다니. 뤠이벡 조합이 절치부심했군.


로쉐가 준비한 신상 푸르푸앵을 입고 나타난 궁드르디는 성인식에 참석한 모든 귀빈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북쪽출신답게 훤칠한 키, 궂은 농사일로 적당하게 다듬어진 잔근육 덕에 옷걸이가 좋아 옷의 매력을 십분 살렸다.


「뭐야, 모두 이 몸을 보고 있잖아. 이놈의 인기란.」


「잠자코 따라와요.」


로쉐가 아는 체 하는 귀빈들과 인사를 나누며 궁드르디를 별궁 가운데 연못으로 데려갔다.


「존경하는 공화국의 위대한 자이더르, 외레순드, 포즈냐뉴 조합 귀빈 여러분, 그리고 주교단과 원로원 회원 여러분. 오늘 자이더르의 차기 당주 성인식을 맞아 자리를 빛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전은 ‘옛 현명한 임금의 옷이 들판의 백합화 한 떨기만 못하다’라고 말씀하고 있지요. 하지만 인간은 옷으로 신이 주신 재능을 찬미하게끔 창조 되었습니다. 제가 오늘 이 옷을 소개하는 까닭은,」


로쉐가 청중들 앞에서 행사 축사 겸 능란한 쇼케이스를 벌이자 박수가 터졌다. 궁드르디도 얼결에 사람들에 둘러싸여 질문 공세를 받았다. 특히 늙은 귀부인들이 몰려들었다.



- 궁드르디 경? 위대한 슈타이너 경의 뒤를 잇는 무용을 자랑하신다는 그 분?


- 성 게오르그나 성 패트릭처럼 대성당만한 드래곤을 무찔렀다는 고귀한 분?


- 나도 봤어요. 라이시움에 있는 성기뼈! 공성병기처럼 크던데.


- 망측해라. 하지만 그 뼈에는 수태를 시키는 마력이 있다고들 하더군요.



처음이다.


지체 높은 귀부인들 사이에 파묻히는 것도 숨 쉬기 어려울 정도로 아찔한 분냄새에 황홀해지는 것도. 궁드르디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런 드래곤을 무찌르신 분이라면, 강하시겠지요...」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며 궁드르디의 아랫도리를 흘긋 쳐다보고 음탕하게 웃는 귀족부인도 있었다.


이성을 찾아야 해.


그러나 궁드르디는 경험이 부족했다


「자애로운 성모의 순결과 성녀 고디바의 아름다움, 루치아 성녀의 담대함을 가진 분들이여!


차가운 북쪽지방에서 고생의 떡과 물로 십칠 년의 세월을 보내온 제게 고귀한 부인들의 고상한 사랑과 향기로운 찬미는 로뎀나무 아래 기갈하여 죽어가던 선지자에게 주어진 생명수와도 같습니다.


지금 칸텔레가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성부의 사랑에 버금가는 여러분의 찬미를 나의 부정한 혀로 화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천사 가브리엘이시여! 내려와 내 입술을 부젓가락으로 지져 정결케 하소서. 골짜기의 백합화 같은 부인들의 찬사를 받을 자격이 나는 없도로소이다.」


갑작스런 시선에 도취된 궁드르디가 과장된 수사로 여인들의 관심을 찬양한 뒤 무용담을 떠들어대려던 찰나였다. 클레어가 혼자 기둥 구석에서 루트비어를 홀짝이다 궁드르디와 눈이 마주쳤다.


- 그런데 아까 함께 계셨던 여성은 종자인지요?

- 혹시, 숨겨둔 애인?

- 아닐걸?

- 궁드르디 님! 진실을 알려 주세요!


질문공세를 쏟아지자 당황한 궁드르디가 간사하게 웃으며 여성들을 진정시켰다.


「성부께서 나의 졸렬함이 아브라함과 이삭(성경 속 인물로 둘 다 타지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름다운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였다가 망신을 당했다)의 반열에 오르지 않게 하시길! 그녀는 드래곤 거세 학교의 동문입니다. 하지만 결단코 저와 아무 관계도 없지요.」


들었으려나?


궁드르디는 잠시 눈이 마주친 클레어 표정에 그늘이 진 것을 본 것 같았다.


아닐 거야. 주변 소리가 시끄러워서 못 들었어.


「어이, 돼지거세사!」


갑자기 억센 악력의 손이 귀부인들 무리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궁드르디를 잡아채 뒤로 끌어당겼다.


「자네 여기서 뭐 하나? 성실한 전사인 줄 알았더니.」


「당신은?!」


개종한 사람처럼 적당히 머리숱을 치고 눈 아래 스모키 화장도 지웠지만 낯이 익은 북쪽 사나이였다.


「이런, 벌써 취했나? 생사를 같이 한 전우를 기억 못 하다니. 슈타이너가 사람 보는 눈이 없군.」


「당신은 붉은 수수밭 게이세리크의?!」


말쑥한 문명인처럼 변장한 남자가 소매를 걷자 반달족 특유의 룬문자 문신이 드러났다.


「위대한 마루두크의 후예이자 에피메테우스를 물리친 붉은 수수밭의 게이세리크를 모시던 가신 알라릭. 그대에게 중대한 부탁이 있다.」


작가의말

모두 즐거운 밤 되십시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드래곤 거세하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휴재 공지(~7월 까지) 21.05.09 15 0 -
공지 연재 일수를 토,일로 변경합니다. 21.03.06 45 0 -
46 46회 - 3부 4화 화폐전쟁 21.07.08 188 0 8쪽
45 45회 - 3부 3화 전운 21.07.07 14 0 13쪽
44 44회 - 3부 2화 대지의 씨앗 21.07.05 13 0 13쪽
43 43회 - 3부 1화 칼레브의 후예, 밝혀지는 비밀 21.07.03 12 0 14쪽
42 42회 - (번외편) 상처II 21.05.08 18 0 14쪽
41 41회 - (번외편) 상처I 21.05.02 43 0 12쪽
40 40회 - 2부 25화 슈타이너의 죽음 21.05.01 28 0 14쪽
39 39회 - 2부 24화 잘못된 해석 21.04.25 65 0 13쪽
38 38회 - 2부 23화 시험에 들게 마옵시며 21.04.24 40 0 14쪽
37 37회 - 2부 22화 뜻밖의 면회자 +1 21.04.18 49 0 16쪽
36 36회 - 2부 21화 라비린스와 알레고리 21.04.17 30 0 13쪽
35 35회 - 2부 20화 챔피언의 몰락 21.04.11 60 0 17쪽
34 34회 - 2부 19화 히든카드 21.04.10 41 0 14쪽
33 33회 - 2부 18화 죽음의 그림자 21.04.04 23 0 14쪽
32 32회 - 2부 17화 승부조작 21.04.03 24 0 16쪽
31 31회 - 2부 16화 바늘의 주인 21.03.28 27 0 13쪽
30 30회 - 2부 15화 특훈과 죽음의 상인 21.03.27 26 0 16쪽
29 29회 - 2부 14화 전쟁의 냄새 21.03.21 30 0 18쪽
28 28회 - 2부 13화 결투 전야(前夜) PART.2 21.03.20 31 0 18쪽
27 27회 - 2부 12화 결투 전야(前夜) Part.1 21.03.14 35 0 18쪽
26 26회 - 2부 11화 자우스트 게임(Joust game) 21.03.14 42 0 12쪽
25 25회 - 2부 10화 웨딩 크래셔 21.03.14 41 0 17쪽
24 24회 - 2부 9화 정략결혼 21.03.07 67 0 11쪽
23 23회 - 2부 8화 기선제압 21.03.07 41 0 12쪽
» 22회 - 2부 7화 썸, 그리고 재회 21.03.06 47 0 20쪽
21 21회 - 2부 6화 네 이름은 리피피(Rififi) 21.03.05 52 0 20쪽
20 20회 - 2부 5화 무엇이든 잘 베는 여자, 클레어 아우프 데어 마우어 PART.2 21.03.04 58 0 15쪽
19 19회 - 2부 4화 무엇이든 잘 베는 여자, 클레어 아우프 데어 마우어 PART.1 21.03.03 62 0 1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