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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거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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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밀르
작품등록일 :
2021.02.13 22:03
최근연재일 :
2021.07.0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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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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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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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회 - 2부 8화 기선제압

DUMMY

캉에를루수아크의 자이더르 상업조합 여름별궁 회랑 안쪽에는 여러 채의 방이 있었다. 외국에서 온 거물 상인이 묵거나 거래가 오가는 숙소 겸 사무공간이었다.


「이 많은 방들이 꽉 차있을 줄은. 성인식은 그저 명분이군.」


방금 화끈한 정사를 마치고 방을 비운 불륜 커플이 떠난 침대에 앉아 궁드르디가 중얼거렸다.


「행사가 크면 먹을 게 많지. 진미, 사치품, 유행할 옷가지, 전쟁, 국제정세에 따른 선물(先物)거래까지.」


알라릭이 창밖을 내다보고 문을 걸어 잠근 뒤 체스판이 놓인 테이블에 앉았다.


「거대조합의 가족행사는 국가 대 국가규모의 대형거래가 오가는 창칼 없는 전쟁터. 소문, 첩보, 정보, 풍설, 고육계, 미인계가 난무하는 일종의 비공식 거래소지. 먹겠나?」


알라릭이 가죽 주머니에서 잠봉(얇게 저민 햄의 종류)조각 같은 걸 꺼내 권했다.


「생각 없소.」


「이게 뭔지 알면 그 말이 쏙 들어갈걸.」


알라릭이 한 입 베어 물고 말했다.


「이건 행커의 혀로 만든 햄이야.」


「뭐?! 당신들 기어코 해냈군?」


궁드르디는 반달족 은퇴군인들이 슈타이너로부터 입발굽병에 걸린 녹각룡 대신 행커를 두 마리 사냥할 권리를 받았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 땐 큰 빚을 졌네.」


「진짜 행커의 혀라면 먹어보고 싶은걸.」


「얼마든지.」


알라릭이 자기가 베어 문 자리를 손칼로 자른 뒤 나머지를 궁드르디에게 내주었다. 행커의 혀로 만든 햄을 입에 넣은 궁드르디의 눈빛이 반짝였다.


「와. 이건 정말.」


「같은 무게의 금값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더군.」


유명 연대기작가나 타이유방 같은 위대한 요리 평론가도 행커의 혀가 가진 풍미와 식감을 언어로 재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고향에서 하몽을 만들며 고기의 최상급 부위를 수 없이 먹어본 궁드르디였지만 이 기막힌 풍미를 자신의 소박한 어휘력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었다.


「행커는 가장 사나운 드래곤이라던데 대단한걸. 그래도 목숨 걸 가치가 있었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좀 들어보게.」


가발이었는지 알라릭이 머리를 들어 올려 이마 속 땀을 닦은 뒤 말했다.


「교회가 걸림돌이 됐어. 우리가 가공한 행커의 혀고기는 누크에서 거래가 안 돼.」


알라릭이 체스판의 비숍(주교)을 킹 앞으로 가져다 놓고 말했다.


「종교적인 이유로?」


「그렇지. 누크에서는 이교도가 만든 음식은 사고파는 걸 철저히 금하더군. 물론 니므롯이나 제3국에 파는 건 괜찮아. 문제는 4대 상업 조합 소속이 아니면 거래 시 관세가 무려 400%란 거지.」


「내가 할 일은?」


「자네 명의로 4대 조합에 행커 고기를 팔아 주겠나?」


「내가?」


알라릭이 고갤 끄덕였다.


「이건 드래곤의 고기야. 위대한 볼 브레이커스인 슈타이너의 수제자가 보증한다면 반드시 팔릴 테지.」


궁드르디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내 몫의 수수료는?」


「미안해. 돈은 없어.」


「그렇군. 잘 먹었어.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꼭 세례부터 받으시길.」


「기다려!」


뒤도 안 돌아보고 일어나려는 궁드르디를 알라릭이 간신히 붙잡았다.


「부탁일세. 이걸 제 값에 팔면 부평초처럼 떠도는 우리 일족 삼천 명이 춘궁기 한 달을 먹고 살 양식을 살 수 있어.」


「그럼 수수료로 1할 어때? 이 정도 거래에 큰 욕심은 아니잖아.」


「나야 그러고 싶네만, 자네 에피메테우스 사냥 때 함께한 훈네릭 기억하나?」


아까부터 계속 신경이 쓰이는지 창밖을 수시로 보던 알라릭이 궁드르디에게 귀를 가까이 대라는 시늉을 하고는 귓속말을 했다.


「훈네릭의 수하들이 날 감시해. 자네에게 수수료를 줬다가는 자칫 내가 횡령으로 몰려 죽을 수 있어.」


「내가 왜 당신을 도와야하지?」


「때론 돈보다 가치 있는 것도 있으니까. 거래가 성사되면 후일 자네를 선대하겠네.」


「당신이 뭔데? 반달족의 왕이라도 될 건가.」


「...」


알라릭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궁드르디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 슬며시 장기 말에서 킹을 궁드르디에게 들이밀었다.


「이거 큰일 낼 사람이네.」


「난 자네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걸 제안했네.」


「반란이라도 일으키려고?」


「이 나라 정세는 지금 풍전등화야.」


알라릭이 킹 앞의 체스칸에 손칼을 내리꽂으며 말했다.


「칼스의 성인식이 끝나기 전까지 답변 기다리겠네. 그리고 충고 한 마디 하지. 아무도 믿지 마. 자네 주변은 철저히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냉혈한들 뿐이니.」


「당신 뭔가 아는 모양이군?」


「날 야만인이라고 무시했었지?」


손칼을 체스판에서 뽑으며 알라릭이 말을 이었다.


「난 열두 살부터 전장을 누비며 끝내 살아남았어. 삼백 명이 넘던 동기들 중 유일하게 살아서 은퇴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뭘까? 무용? 전술? 통솔력? 아니, 정치 감각이야.」


「힌트 좀 줘. 이쪽도 저울질은 해봐야지.」


떡밥을 생각하던 알라릭이 말했다.


「자넬 도울 사람이 여기 딱 한 명 있어.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가치중립적인.」


「당신,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하면 낯 안 간지러워?」


「날 말하는 게 아냐. 난 도움을 입는 입장이지, 당장 자넬 도울 처지가 아니잖나.」


「그럼 누구?」


밖에서 하객들의 박수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성인식이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알라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스로 생각해. 이 나라 운명은 자네와 그 친구에게 달렸어. 답변 기다리겠네.」


「‘그 친구’라고? 누구지? 슈타이너? 칼스? 로쉐?」


알라릭은 답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


「어디 갔다 온 거야?」


「똥 싸러 마구간까지. 이 궁전은 겉만 화려하지 동선이 엉망이야.」


클레어가 장거리 여행용 상비약 주머니에서 약재를 뒤적거렸다.


「설사야? 히드라스티스(장점막의 상처 부위를 치유해주는 것으로 알려진 미나리아재비과 약초)가 있는데 먹을래? 지사 작용을 하거든.」


궁드르디는 농담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그녀를 바라봤다.


‘자넬 도울 사람이 딱 한 하나 있어.’


「이 녀석인가.」


「뭐가?」


「아니, 잠시 딴 생각 좀.」


「궁드르디 경! 어디 있었습니까? 한참 찾았습니다.」


숨을 헐떡거리며 로쉐가 달려왔다.


「미안. 귀부인들 치마폭에서 놀아나느라. 역시 옷이 날개던데.」


「뭐야, 화장실 다녀왔다더니 한심하긴. 난 바움쿠엔이나 먹고 있을게.」


클레어가 입을 씰룩거리며 약재를 주머니에 도로 넣고 자릴 떴다. 둘만 남자 로쉐가 엄지를 치켜 올렸다.


「사람들 반응은 어땠습니까?」


「뭐, 뜨거웠달까.」


궁드르디는 대충 얼버무렸지만 로쉐는 몹시 기꺼워하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지요. 그래서 푸르푸앵을 입혀 놓은 겁니다. 이미 귀부인들 의상담당자와 재단업자들이 숨어서 스케치 했겠죠. 곧 불티나게 주문이 들어올 겁니다.」


「그럼 이 옷은 수고비로 나 줄래?」


로쉐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설마요. 거짓말 좀 보태서 그 옷 한 벌이면 코게선(Kogge : 코그 또는 코게선으로 불리는 상선. 13c~14c 한자동맹이 사용했다. 기존 선박보다 수면에 높이 올라와 있어 해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편이었다) 한 척은 살 수 있습니다.」


「그럼 맨 입으로 날 부려먹은 거냐? 나도 너한테 제안 하나 하고 싶은데.」


장사꾼인 로쉐는 궁드르디의 의중을 알아채고는 들고 있던 슈크림을 내려놓았다.


「거래로군요. 물건이 뭡니까?」


궁드르디는 대답대신 건너편 기둥 뒤를 서성이고 있는 알라릭을 가리켰다.


「행커의 혀.」


「물건을 볼 수 있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고가상품에 로쉐가 꽤 놀란 것 같았다.


「저 남자 은퇴한 반달족 기마대장이야. 실력은 내가 보증하지. 에피메테우스도 저 사람과 그 부하들이 아니었으면 못 잡았어.」


알라릭을 훑어보던 로쉐가 고갤 끄덕였다.


「흥미롭군요. 반달족은 식료품 직거래가 안 되니 궁드르디 경을 중개인 삼았겠지요. 좋은 인맥이군요. 거래하지요. 진품이면 시세에 따라 금 무게로 달아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


궁드르디가 악수를 청하자 로쉐는 손을 내미는 대신 접시의 슈크림을 다시 짚으며 말했다.


「거래는 성인식 끝난 다음에.」


궁드르디가 노심초사 하며 바라보던 알라릭에게 엄지를 치켜보였다. 로쉐도 알라릭에게 뱅쇼를 들어 보이며 거래 성사를 알렸다. 알라릭은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갤 숙였다.


뿌우웅~


색버트가 본격적인 행사의 시작을 알리자 백파이프, 숌 등의 관악기가 뒤를 따랐다. 이어서 살터리, 류트, 비엘 같은 현악기들이 우리며 주인공의 등장을 알렸다.


「자이더르 상업 조합의 차기 당주 칼스 크비슬링님 나오십니다.」


조합서기가 외쳤다. 칼스가 주단을 밟으며 귀빈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칼스의 옷차림은 가문의 압도적인 부와 권세 그 자체였다.


금으로 드래곤을 수놓은 푸르푸앵과 요란한 레이스, 칼스의 트레이드마크인 고가의 타이리언 퍼플로 염색한 담비가죽을 망토처럼 둘렀다. 단추와 슬래쉬에는 온갖 진귀한 보석이 알알이 박혀있었다.


「뭐, 오늘은 그래도 좀 무난하군요.」


로쉐가 궁드르디가 입고 있는 푸르푸앵과 비교하더니 말했다. 궁드르디의 생각도 같았다.


「응. 다행히 불알주머니는 안 달았으니까.」


교회법에 따라 성인식은 만 17세가 되었을 때 침례식과 동시에 진행된다.


아르테벨테 대주교가 주교단과 함께 침례식을 거행할 별궁 연못 양쪽에 도열했다. 대주교는 보좌 신부가 가져온 금실로 수놓은 경전에 칼스의 손을 얹게 한 뒤 물었다.


「칼스 크비슬링. 그대는 상인들의 후원자이자 이교도로부터 공화국을 수호할 자로서의 거룩한 부담을 온전히 감당하길 원하느뇨?」


「나는 신령과 진정으로 신께 봉사하겠나이다.」


「음란을 피하고 가정을 지키며 술 취하지 아니하고...」


대주교가 형식적인 교리문답을 읊었다.


칼스가 신앙을 고백할 때마다 사람들은 성호를 그으며 화답했다. 물론 그 순간도 몇몇 직물조합원들과 의복장인들은 칼스가 입고 있는 레이스와 단추, 자수 등을 몰래 스케치하느라 부산했다.


「이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칼스 크비슬링에게 물로 침례를 주노라.」


침례를 위해 대주교는 칼스를 배영자세로 연못에 입수시켰다.


침례는 「둠 브링거 정교회」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사실상 물고문이었다.


죽음에서 거듭난다는 의미로 정말로 익사 직전까지 물속에 잠기게 한 뒤 끄집어내는 것이다.


「크어어어어헙 푸읍!」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왔지만 칼스의 머리를 쥔 대주교 아르테벨테는 올라오려는 칼스를 억눌렀다.


「훗. 이 모습은 시사하는 바가 크군요.」


기도하는 척 하며 로쉐가 중얼거렸다.


「뭐가?」


「누가 공화국 진짜 실세인가에 대한 무언의 상징이자 선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공화국의 교회권력은 대대로 제사장 가문인 부르크하르트 집안이 세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우두머리인 아르테벨테 대주교는 이번 기회에 중요한 사업 파트너이자 정치적 동지, 그리고 언젠가는 건곤일척의 상황을 맞이할 자이더르 가문의 차기 후계자를 만인 앞에서 기선제압 해버릴 생각이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우웃!」


대주교가 경전의 말씀을 인용하던 중이었다. 칼스가 갑자기 대주교의 손목을 잡고 억지로 물에서 일어났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대주교님의 눈에는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것이 보이지 않으시는지?」


- 비둘기라고?


- 정말이다. 흰 비둘기다.


- 성령의 현현인가?


- 그렇다! 성령께서 자이더르의 당주와 함께 하신다!


별궁 정원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바람잡이도 섞여있었으리라.


정말로 연못 위로 하얀 비둘기 한 쌍이 날아와 이내 칼스의 어깨에 내려앉았다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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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30회 - 2부 15화 특훈과 죽음의 상인 21.03.27 26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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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2회 - 2부 7화 썸, 그리고 재회 21.03.06 47 0 20쪽
21 21회 - 2부 6화 네 이름은 리피피(Rififi) 21.03.05 52 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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