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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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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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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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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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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La fenice.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가 다시 리도 섬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초청장을 보내왔다.

<친절한 금자씨> 홍보를 겸한 파티 초청장이었다.

류지호가 파티 참석을 수락하자, 명칭이 바뀌었다.

‘한국영화의 밤’으로.


‘이 양반들이 정말....!’


명칭을 바꾸지 말든가, 새로 초청장을 만들든가.

‘<친절한 금자씨>의 밤’이라고 인쇄된 부분에 급조해서 ‘한국영화의 밤’이 프린트 된 종이를 붙여서 보내왔다.

명색이 국제행사다.

알 하는 것 보면 답답하고 짜증이 치솟을 때가 있다.

암튼 영화제 주변으로 류지호의 참석이 알음알음 알려졌다.

거물들의 발길이 파티장으로 이어졌다.

영화제 집행위원장은 물론이고, 이탈리아의 다른 영화제 관계자들, 유럽지역 메이저 배급사 관계자, 할리우드 프로듀서, 이탈리아 영화 관계자들이 다수 참석했다.

한국영화의 밤 주최 측은 할리우드 특급 배우나 감독들이 방문해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파티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류지호의 할리우드 지인들은 다른 파티장으로 몰려갔다.

심지어 <칠검>과 <퍼햅스 러브>에 출연한 한국 배우들이 한국의 밤에 나타났음에도 그 영화를 연출한 감독과 동료 배우들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섭섭해도 할 수 없다.

현재 한국영화의 위상이 딱 그 정도다.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수상이 유력한가 봐?”


류지호가 농담으로 응수했다.


“폐막식에 빈자리가 많을 것 같아 머리수를 채우려나 봐요.”

“우리나라 영화 수상 가능성은 어떻게 보나? 뭐라도 하나씩은 가져갈 것 같은가?”

“몇 작품은 눈에 확 들어오기는 하는데, 훅이 센 영화보다 전반적으로 작품성이 고른 편인 것 같아요. 박 감독 영화는 성과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자네 영화는?”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만 해도 감지덕지죠.”


불쑥, 영화진흥위원장이 끼어들었다.


“대략 사파전인 것 같지?”

“......”

“자네 영화와 박 감독 영화, 리안 감독과 티모시 클루니. 이렇게 넷.”

“뉴욕파 대빵 페리라도 있어요.”


에이블 페리라 감독은 미국 독립 영화계를 대표하는 거장 중 한 명이다.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또 한 편을 추가했다.


“필리프 가펠 감독의 영화도 있지.”


전자는 누벨바그의 적자, 후자는 미국 독립영화의 대부라 불리는 감독이다.

내놓은 작품마다 모두의 환호를 받은 걸작은 아니다.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배신하지 않은 영화를 만들었고, 성찰과 고민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비평가와 관객들 사이에서 언제나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필리프 가펠 감독은 아직도 누벨바그가 끝나지 않았다고 믿었다.

집요하게 영화의 형식을 고민했다.

자기파괴적인 퇴폐미를 극한까지 밀어붙였던 에이블 페리라 감독은 종교를 이야기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해 많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깜짝 초청된 <다케시즈>는 자의식 과잉의 태작이란 평가를 받았다.

<친절한 금자씨>는 감독의 명백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전작인 <올드보이>에 못 미친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홍콩 영화계에서 여전히 예술영화의 길을 고수하고 있는 관금붕의 영화는 아름다운 비주얼에 비해 내용이 텅 비어 있다는 평가 속에서 영화제에서 잊혀졌다.

떠들썩하게 초청되었던 아시아 영화들에 대한 박한 평가 속에서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는 다크호스가 <민중의 적 : EMBARGO>이었다.

수상작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

국제영화제가 챙겨야 할 정치적 입장 표명과 포석은 다양한 법이다.

영화제 내내 별점표 상위권을 지킨 <민중의 적 : EMBARGO>, <굿 나이트 앤 굿 럭>, <브로크백 마운틴>, <레 자망 레귤리에>, <친절한 금자씨> 등의 수상이 유력시 되는 분위기 속에서....


“점점 한국의 아트필름들이 설 자리를 잃는 것 같아.”


류지호는 영화진흥위원장의 입에서 다음에 나올 말을 유추할 수 있었다.


“<활>의 관객수가 얼마인 줄 아나?”


모른다.

사실 관심도 없다.


“1,226명이라네. 오죽하면 김 감독이 앞으로 한국에서 자신의 작품을 개봉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울분을 터트렸겠나.”


최종적으로 1,382명을 기록했다.

상영관은 단 하나였다.


“임선택 감독도 투자를 받지 못해 촬영이 딜레이 되었다고 하더군.”


또 탓이다.

투자사 탓, 멀티플렉스 탓, 관객의 편식 탓.

많은 영화인들이 칸, 베를린, 베니스 등 해외영화제에 초청받고, 또 수상까지 한 작가들이 국내 관객에게 외면에 가까운 푸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해외에서 받는 후한 평가에 비해 국내에선 그만큼의 관심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푸념한다.

한국의 영화투자사들이 예술영화에 투자를 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메이저 투자배급사들이 지나치게 흥행 위주의 상업영화 라인업만 짜면서 예술영화의 입지가 급격하게 줄어든다고 성토한다.


“대만의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유럽 자본으로 영화를 찍고 있습니다. 차이밍량 감독은 직접 자신의 영화표를 팔고 있지요. 일본의 예술 지향 감독들도 유럽에서 투자를 받아 영화를 찍고 있고요.”


배부른 소리 아니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전하영 부사장이 끼어들었다.


“G.O.M에서 몇 년 전부터 소수 상영관 중심으로 한 장기상영을 시도하고 있죠.”


G.O.M에서 저예산·독립영화 전용관을 운영 중이다.

현재까지는 실패했다.


“해외 평단의 호평이 진리는 아니잖아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한국 관객을 위해 예술을 하지 말고, 해외 팬들을 위해 예술 하는 방법도 있어요. 왜 억울해하고 분통을 터트리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전하영의 발언이 꽤나 신랄했다.

한국어로 한국 관객들 보라고 만든 영화다.

한국 관객이 외면하면 다른 방법도 있다.

그들 영화를 선호하는 대상을 위해 영화를 만들면 된다.

유럽(특히 프랑스)에서 투자를 해주는데, 왜 억울해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심지어 세계적인 젊은 거장이라는 다소 낯간지러운 평가를 받는 류지호조차, 그의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그것가지고 류지호는 섭섭해 하거나 억울해 하는 걸 못 봤다.

모두를 충족시켜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전하영은 종종 예술지향적인 영화감독들이 이상한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예술영화 하는 게 벼슬은 아니지 않나요? 그분들보다 더 훌륭한 감독들도 자본주의 예술인 영화와 관객을 탓하진 않잖아요. 그리고 예술영화를 찍는다고 하지 말고, 독립영화를 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요. 상업영화 즉 주류영화와 그에 저항하는 독립영화로 일반적으로 분류하잖아요. 주류 영화에도 예술영화가 있어요.”


그러면서 류지호를 힐끗 쳐다보는 전하영이다.

예술영화 찍는 것이 힘들어서 못해먹겠다고 징징거리는 감독들에 대한 일침이다.

현대영화는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경계가 점차 모호해지고 있다.

당장 이번에 베니스에 초청된 영화들만 봐도 확연히 느낄 수가 있다.

지극히 대중적인 이야기지만 그 안에 메시지나 표현양식이 예술영화의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고, 예술지향적인 태도가 확연하지만 대중적인 표현이나 기법으로 풀어나가는 영화도 있다.

예술영화로 보이는 영화가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경우도 심심찮게 나온다.

상업영화니 예술영화니 두 가지로 구분하기에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이 21세기 영화 흐름이다.

그래서 다양성 영화라는 대안적인 표현이 등장한 것이고.


“영화 발전을 위해서 극장이 더 많은 스크린을 열어줘야 하지 않겠나?”

“영화계 내부의 그런 의견들이 입법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영진위가 더 노력해야 한다고 봐요. 아니면 정부 예산 안에서 독립영화를 보호할 수 있는 자금을 편성하든가.”


엉뚱한 곳에 피 같은 돈 쓰지 말고.

전하영은 덧붙이고 싶은 그 같은 말은 생략했다.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닌 건 자네들도 알지 않나.”

“한국영화 시장 안에 독립영화 수요가 있긴 하던가요? 그와 관련된 조사나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온통 대기업이 예술영화를 홀대하네 한국영화는 상업주의에 완전히 잠식되었네 명확한 근거 없는 주장만 난무하는 것 같습니다.”


류지호마저 한국의 예술영화에 부정적이라면 끝난 것이다.

G.O.M Cinemas와 BGV는 아트영화 전용관을 운영 중이다.

G.O.M의 경우, 아트영화 전용관에 관객이 단 한 명이라 입장하면 무조건 영화를 상영했다.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다른 극장들은 일정 관객 수 이하로는 아예 티켓을 판매하지 않는다.

환불조치 하든가, 다른 영화와 교차상영하고 있다.

G.O.M 다양성영화 전용관에 어떤 날은 손님이 한 명도 없을 때도 있다.

하지만 기본 2주는 무조건 보장했다.

왜?

최소한의 수익은 제작자에게 보장해 주고 싶어서.

또 감독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는 류지호가 오너이기에.

올해 독립영화 두 편, <목두기 비디오>와 <용서받지 못한 자>가 입소문을 타고 1만 명 이상 관객을 동원했다.

이 당시만 해도 독립영화로서는 초대박 기록이다.

G.O.M Cinemas는 100석 규모의 상영관 1년 유지관리비용을 다섯 편 정도의 저예산 영화 매출로 다 뽑았다.

첫 주말 개봉하고 손님이 없다고 곧바로 내리는 것보다 2주라도 극장에 걸려있으면 부가시장에서 단 돈 몇 백만 원이라도 더 건질 가능성이 생긴다.

그 2주간 영화 관계자들이 온갖 지인들을 동원해서 조금이라도 객석을 채우려고 노력한다.

그런 감독과 제작사도 많은데, 해외 영화제 와서 대접 조금 받는다고 되도 않는 불평이다.

전하영 부사장이 슬쩍 류지호의 눈치를 살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보기에 한국의 소위 예술영화 한다는 감독들만 배가 불렀어요. 유럽, 미국의 독립영화감독들은 가만히 앉아서 관객들이 자신의 영화를 봐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전하영이 다시 한 번 류지호를 의식하고는 말을 이었다.


“더 영화를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노력하고, 다음 작품으로 더 인정받으려고 노력한다고 들었어요.”


날이라도 잡은 모양이다.

전하영이 작정하고 쓴소리를 쏟아냈다.

그녀로서는 억울한 것도 많았다.

자신들은 일정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한국영화 전체가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외부에서 보는 시선은 달랐다.


‘.....음.’


류지호는 이전 삶의 이맘때를 떠올려 보았다.

몇 명의 감독은 한국에서 전혀 투자를 받지 못해 유럽에서 돈을 받아다 한국영화를 찍고 있다.

소위 영화제용 감독들이 그렇다.

프랑스 영화투자조합이 돈이 썩어나서 남의 나라 영화감독에게 제작비를 댈까?

전 지구적으로 할리우드 영화에 맞서기 위해, 예술을 사랑하는 나라니까.

그래서 아시아 영화감독들에게 투자하고 있을까?

투자한 돈을 회수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제작비를 대는 것이다.

한국에서 관객이 안 들어도, 유럽에서 충분히 투자금을 회수할 수가 있으니까.

유럽은 예술영화 혹은 독립영화 시장이 잘 마련되어 있다.

류지호가 기억을 떠올리던 걸 멈추고 입을 열었다.


“우리 관객들 가운데 예술영화나 독립영화 찾아보는 분들 분명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 영화제가 몇 개고 앞으로 개최할 영화제까지 하면 몇 개던가요? 현재 소수의 예술영화 관객들이 영화제에서 우수한 독립영화를 이미 감상했는데, 영화가 개봉했을 때 다시 멀티플렉스나 예술영화 전용관에 와서 볼까요? 대학에서 영화를 배우는 학생들은 어떻습니까? 그 친구들 고전영화나 예술영화 보던가요? 독립영화 하는 친구들 다 동료들이 만든 영화 공짜 시사회로 봅니다. 과연 예술영화니 독립영화니 시장이 확대될 여지가 있겠습니까?”


이 시기 한국에서 독립장편영화를 볼 수 있는 상영관은 대략 G.O.M, 아트플러스, 필름포럼, BGV인디영화관 등 대여섯 개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독립장편의 극장 진입이나 저변 확대에 근본적인 장벽이 존재한다고 한목소리로 지적한다.

류지호가 보기에 그런 말을 하기 전에 한국의 예술영화 시장이나 독립영화의 저변이 확대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해봐야 했다.

독립영화 업계(?)에서조차 남의 영화를 돈 내고 안 본다.

영화과 학생들조차 작가주의 영화 잘 안 본다.

영화업계에서 종사하게 될 예비 영화인들조차 예술영화를 보지 않는데, 어떻게 관객에게 예술영화, 독립영화를 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소수의 영화팬들은 영화제를 통해 검증된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만 본다.

DVD수집 문화가 활성화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제가 볼 때, 가장 시급한 것은 예술영화와 독립영화를 동일시하는 것부터 바꿔야 한다고 봅니다. 기존 상업영화와 비교했을 때 시선과 표현양식 다른 것뿐이지, 지적이며, 철학적이며, 난해하고 고리타분 영화라는 편견을 없애야 합니다.”


류지호가 전하영을 돌아봤다.


“오동석 사장에게 G,O.M 상영관의 아트영화 전용관 명칭을 다른 것으로 바꾸라고 하세요. 가령 버라이어티 필름 존이든가 판타스틱 무비 시어터라든가.... 뭐든 관객이 선입관을 가질 만한 명칭을 피할 방법을 강구하라고 하세요.”

“알겠어요.”

“독립영화전용관 티켓값을 인하하는 방안을 궁리했다고 들었어요.”

“네.”

“그러지 마세요. 자칫 저렴한 티켓값으로 인해 저예산 영화가 싸구려라는 이미지만 만들어집니다. 대신에 전용관에 문화예술진흥기금을 보조를 해주는 방안을 고민해 보세요. 영진위에서 독립영화제작비를 지원하는 것에서 일부를 전용하는 방법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시기 극장 요금은 주중 7,000원 주말 8,000원이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독립영화로 인정된 작품은 그 절반 티켓값으로 판매하고 나중에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채워주는 방식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베네치아는 오래 전부터 오페라의 메카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류지호의 곁으로 토머스 뮐러 집행위원장이 다가왔다.

WaW 엔터테인먼트 해외영업팀 직원이 얼른 옆에 붙어 통역을 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에 라 페니체(La Fenice)라는 유명한 극장이 있습니다. 지난 1996년 화재로 인해 목조 건물이 홀랑 타버렸다고 합니다. 그 전에도 한 차례 화재로 유럽의 오페라 팬들을 안타깝게 했던 사연이 있는 극장입니다. 두 분 위원장님도 파바로티를 아실 겁니다. 세계적인 테너죠. 그가 극장 재건을 위한 모금 운동에 앞장섰다고 합니다. 수많은 성악가들, 작곡가, 안무가가 동참했다고 하지요. 이탈리아 정부를 비롯해 유네스코. 유럽연합 등이 특별 예산을 마련했답니다. 이탈리아와 외국계 대기업에서도 적잖은 기부금을 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성금이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2년 전 완전 복원되어 다시 그곳에서 오페라 공연이 열리고 있습니다. ‘베네치아의 불사조‘라는 별칭이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토마스 뮐러 집행위원장이 자부심 가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비록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부주의로 인해 화마에 휩싸였지만, 이후 벌어진 문화예술인들과 당국, 세계 오페라 애호가들이 보인 모습은 칭찬 받을 만 했다.


“불사조 극장은 자료실의 악보와 사진 자료까지 몽땅 불타버려서 완벽하게 되살릴 수 없었다고 합니다.”


끄덕.

이번에도 토마스 뮐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사조 극장 복원 과정에서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센소>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혹시 보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대충 오스트리아 청년 장교와 이탈리아의 백작부인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영화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베네치아를 침공하던 날 밤 불사조 극장 무대에 오른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로 영화가 시작되죠.”


전하영이 남몰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영화학과 교수나 평론가도 아니고.

모르는 게 없다.


“예술영화든, 독립영화든, 상업주의 영합 영화든. 모두 동시대가 정직하게 담깁니다. 감독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든, 그 시대 풀 한 포기까지 고스란히 필름에 담기는 겁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우리는 어떤 영화를 찍든 현실을 담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술영화니 대중영합주의 영화니 편 나누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구분조차 이제 와서는 무의미한 것 같습니다. la fenice, The Phoenix, 피닉스. 어떠한 고난이나 역경에서도 살아 돌아오는 근성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별명이기도 합니다. 영화 예술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감독들은 그런 사람들이겠지요. 그들에 대해 영화산업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보다, 불사조로의 찬사를 보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예술영화가 영원불멸이 되는 길이 아닐까 합니다.”


짝짝짝.

박수가 쏟아졌다.

류지호의 연설(?)을 감명 깊게 들은 토머스 뮐러 집행위원장과 이탈리아 영화 관계자들이 박수를 친 것이다.


“....음.”


류지호가 검지로 볼을 긁적거렸다.

한국 영화관계자들 들으라고 한 말인데, 엉뚱한 이들이 감동을 받았다. 송라원이 활짝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설형기가 특유의 시니컬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베니스영화제 집행위원장과 이탈리아 주요 영화관계자들에게 점수를 딴 연설(?)이 되고 말았다.

조금은 난감해 하는 류지호와 달리 전하영 부사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본상이 아니면 어떤가.

폐막식 전에 수여되는 비공식상만 받아도 류지호의 명성과 결합하면, 한국에서의 흥행과 더 많은 국가에 수출계약을 기대할 수가 있다.


‘하여간 말빨은...! 한국 감독님들 해외 나가서 하는 인터뷰 스킬이 영 아닌데, 감독님은 가는데 마다 UN연설급 말빨을 과시한다니까.’


송라원은 존경하는 감독님이 또 한 건 터트렸구나 하는 생각에 어깨가 우쭐해졌다.

류지호가 멋있는 것은 멋있는 것이고.

가끔 옛날 영화 보라고 숙제 내주는 건 질색이다.

무슨 내용인지 모를 예술영화는 하품만 유발하니까.

류지호의 시선에 WaW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들의 눈동자가 바쁘게 영화제 관계자들을 오가는 것이 잡혔다.

모른 척 했다.


‘비공식상이야 업자들에게나 먹히는 거지. 관객에게는 그다지....’


국제영화제 비공식상 수상 여부는 포스터에도 잘 넣지 않는다.

말 그대로 비공식적으로 수여되는 상이기 때문이다.

베니스영화제는 3개의 중요한 비공식상이 있다.

18~21세 젊은 영화인들이 심사해 수상하는 젊은 사자상(Young Lion Award),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유럽 영화인들의 모임인 ‘아르카시네마 조바니‘가 선정하는 ‘베스트 이노베이션상(Best Innovated Award)’, 마지막으로 국제영화평론가연맹(FIPRESI)상이다. 그 외에도 젊은 비평가상(PREMIO AGISCUOLA LEONCINO D'ORO')을 비롯해 모두 십여 개의 비공식상을 수여하고 있다.

벨에어 저택의 거실 중 한 곳에 트로피 진열장이 있다.

오스카 작품상 트로피 같은 것들은 트라이-스텔라 본사에 진열되어 있지만, 개인적으로 수상한 트로피들은 벨에어 주택에 진열되어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가사도우미들이 정성스럽게 닦는다고 한다.

베니스영화제에서 비공식상을 받는다면 그 트로피는 진열대로 가지 않는다.

박스에 담겨져 창고에 보관된다.

자랑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 주요 국제영화제에서 한 번 수상하면 반 년 이상 각종 영화제에 초청된다.

지금까지 류지호의 영화들이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다양한 수상을 해왔다.

대부분 JHO Pictures의 앨런 포스터, WaW 픽처스의 전하영이 국제영화제들을 돌며 대리 수상했다.

<REMO> 시리즈는 오스카 시각효과상 외에도 전 세계 유명 판타스틱영화제에서 수차례 수상했다.

류지호가 연출한 Ⅰ·Ⅱ 두 편으로 수집한 트로피만 30개에 이른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영화제에 초청되는 것도, 상을 수상하는 것도.

타본 감독이 자주 타게 된다.

영화 한 편으로 주목받았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감독이나 작품도 부지기수다.

한편으로 영화제용 감독이 따로 있다.

국제영화제와 비평에서 주목 받은 감독의 후속작 평가 잣대가 높아지기에 그들은 영화를 상업적으로 접근하기 쉽지 않다.

매 작품을 새로 시작할 때마다 전작들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으로 해서 대중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그 같은 작가주의 함정이 빠지지 않기 위해 류지호가 한국에서도 영화를 찍고 심지어 일본에서도 영화를 찍는 것이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특정 장르나 작가주의 감독으로 규정되기 싫어서.


❉ ❉ ❉


WaW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들의 기대가 무색하게 <민중의 적 : EMBARGO>는 폐막식 전에 수여하는 비공식상 어떤 부문에서도 상을 받지 못했다.

반면에 한국영화 <친절한 금자씨>가 ‘젊은사자상, ’베스트 이노베이션상‘ 두 개의 비공식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특별사자상 정도인가....?’


특별사자상은 베니스 영화제 역사상 지금까지 두 번 시상됐다.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민중의 적 : EMBARGO>이 받을 만한 상은 특별상과 신인배우상 정도다.

암튼 초반부터 황금사자를 향한 호쾌한 레이스를 유지한 <굿 나이트 앤드 굿 럭>이 주요 부문 각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매카시의 광기에 종지부를 찍은 미국의 언론 영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영화로는 가장 오래된 영화제란 베니스영화제를 만족시키기에 뭔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황금사자상이나 심사위원대상, 은사장 수상에 실패했으니까.

영화적으로는 평범하고, 정치적으로는 지나치게 명백했기 때문에 최고 영예를 안겨주는 것에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다.

최고 영예 황금사자상의 주인공은 아시아 출신의 미국감독 리안이 차지했다.

1960년대를 배경으로 게이 카우보이들이 평생을 이어가는 가슴 저린 사랑 이야기라는, 본인의 장기를 최대한 살린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이 황금사자를 품었다.

수상 가능성을 낮게 보고 토론토 영화제로 날아갔던 리안 감독이 수상 소식을 전해들은 뒤 부랴부랴 다시 베니스로 돌아오는 촌극도 있었다.

그는 황금사자상을 손에 꽉 쥐고 못내 감격을 억누르지 못했다.

객석에서는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폐막식을 중개하는 TV카메라는 스타감독 류지호의 얼굴을 연신 좇았다.

황금사자의 주인공으로 점쳐지던 그가 수상에 실패한 뒤의 반응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류지호에게 수여된 상은 다소 의외였다.

굳이 따지자면 동메달이라고 할 수 있는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했다.

은메달이라고 할 수 있는 심사위원대상은 <레 자망 레귤리에>가 차지했다.

메인 경쟁부문 수상 결과를 보면 상을 분배하는 데 있어서도 무척 현명했고, 더 나아가서는 얄미울 만큼 영리하게 입장을 정리했다.

뮐러 집행위원장이 중국통인 것에서 드러난 것처럼 중국영화를 전폭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는 한편 유럽 거장들에 대한 예우와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자존심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류지호는 끝까지 매너를 잃지 않고 주어진 상에 만족하며 즐거움을 선사했다.

시상대에 올라 소감을 말할 때.


- 이 자리에 서게 되어 기쁩니다. 고백하자면 태어나서 전 처음으로 베니스를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자주 베니스를 방문할 것 같습니다. 이 상을 세계 어디에선가 소명의식을 가지고 언론인으로서 소임을 다하는 기자들에게 바칩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여전히 변하지 않겠지만. 대한민국은 언론자유지수에서 34위를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김수영 시인이란 분의 말씀을 빌어서.... “적어도 언론 자유에 있어서는 '이만하면'이란 중간사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언론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둘 중의 하나가 있을 뿐이다. '이만하면 언론 자유가 있다고' 본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그 자신이 시인도 문학자도 아니라는 말밖에는 아니된다”... 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영화제 내내 정치적 발언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류지호는 김수영 시인의 <창작자유의 조건>을 인용해 소감을 전했다.

류지호를 코리안필름 뉴에이지의 리더라고 유럽의 평단에서 규정하곤 한다.

그의 존재가 표현의 자유 측면에서 취약한 아시아가 여전히 영화적이고 정치적이라는 희망을 보이는 증거라고 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류지호, 박진우, 앞으로 합류하게 될 공진형은 그런 면에서 유럽의 영화평론가들이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감독들이다.

애프터 파티까지 베니스영화제 모든 공식행사가 끝났다.


“우와! 감독님!”


송라원의 쾌활한 음성이 공항 VIP 라운지에 메아리쳤다.


“이제, 칸만 남았어요. 돌격 앞으로~”


꽁.


“무슨 감독이 여배우에게 꿀밤을... 힝.”


송라원이 까불든 말든.

류지호는 이번 베니스영화제를 돌아봤다.

그저 힘 빼고, 좋은 대본과 좋은 배우들 데리고 영화를 찍었을 뿐.

후속편을 기획할 당시에는 오만가지 고민과 고뇌가 있었다.

결국엔 깔끔한 장르영화로 뽑았다.

작정하고 영화제를 위한, 자신의 영화적 성취를 위해 영화에 접근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공익과 정의 그리고 저널리즘의 역할을 더 깊이 파고들었을지도 몰랐다.

통쾌한 승리의 드라마가 아닌 묵묵하고 뚝심 있게 걸어가는 참 언론의 길을 다룬 영화.

그런 스토리가 좀 더 매력적일 수도 있다.

황금사자상이나 심사위원대상이 아닌 감독상을 수여한 것은 그간의 성찰과 고민의 흔적이 역력한 영화를 내놓은 것에 대한 격려일지도 몰랐다.

조금 더 분발해 달라는.

트라이-스텔라 영화 공습에서 약간의 자비를 기대한다는 아부가 들어있을 수도 있고.

어쨌든 올해 베니스영화제에서 한국영화는 큰 성과를 거뒀다.

한류가 주춤할 기색이 보이고 있는 시점에서 나름 시의적절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Film Coreano di fenice.....!’


한국영화가 다시 불사조처럼 날아오르기를....

베네치아 오페라 극장은 세 번이나 화재로 소실되어 재건축된 비운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 극장을 일러 ‘잿더미에서 일어선‘ 극장이라고 말한다.

한국영화는 지금까지 수차례 위기와 우여곡절을 겪었다.

고사위기에 처한 적도 있다.

그랬던 한국영화가 90년대를 거쳐 비상하고 있다.

그 기세를 꺼트리지 않고 이어갈 수 있기를.... 류지호는 간절히 기원했다.


작가의말

한 주 마무리 잘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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