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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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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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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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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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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군계(軍鶏). (7)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일본에서 <군계> 프리프로덕션 기간이 쏜살 같이 지나갔다.

어느덧 무사고를 기원하는 고사를 진행했다.

한중기 피디는 한국식으로 고사를 고집했다.

과거부터 신들의 나라라 불릴 정도로 일본은 다양한 신사가 있다.

제사 또한 일상에서 매우 흔하다.

일본 스태프 누구도 <군계> 고사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의아해 하는 부분은 있었다.

승려를 모셔와 안전을 기원하는 염불을 외우도록 하지 않았기에.

일본에서는 운전자를 위한 ‘안전 불공’이라는 것이 있다.

불교계와 보험회사가 합작해 만들어낸 족보가 없는 전형적인 미신이다.

한국식으로 하면 자동차 고사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안전 불공’은 시대가 변하면서 위축된 불교 사찰에서 강구한 특단의 대책이었다.

1970년대 일본이 경제호황기에 접어들 무렵 보험사 또는 자동차 대리점과 사찰이 제휴를 맺고 차량과 보험을 판매하고 안전을 기원하는 염불을 외웠던 것이 시초다.


똑 또르르르.


<군계> 제작고사장에서 일본 승려의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염불 외는 소리까지 들렸다.

한국식으로 진행된 제작고사의 마무리를 일본식으로 장식했다.

이봉호 사장의 설득으로 한중기 피디가 결국 고집을 꺾었다.


“요로시쿠 오네가이시마스!”


류지호의 잘 부탁드린다는 말로 고사를 마무리했다.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군계> 촬영에 들어갔다.


맴맴맴맹!

밍밍밍밍!


한 여름, 주택가에서 촬영할 때 가장 짜증나는 건 매미소리다.

일본 역시 피해가지 못했다.

일본 영화계에는 밥차 문화가 없다.

로케이션이든 세트촬영이든 무조건 도시락이다.

배우는 배우들끼리, 스태프는 스태프들끼리, 헤드 스태프는 또 그들끼리 식사를 했다.


“밥을 함께 먹는 사이. 식구. 그런 거 아냐?”


김영복이 투덜거렸다.


“이건 뭐.... 너무 삭막한데... 안 그래, 류 감독?”

“로마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별 수 있나.”


일본의 영화촬영 평균 기간은 보통 한 달이다.

<군계> 규모의 영화도 한 달 보름을 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에서 50억 예산 사이즈 영화가 보통 3~4달 촬영하는 것과 너무 차이가 났다.

그래서인지 배우와 스태프 간의 유대감이 거의 없었다.

그저 비즈니스로 만나 일하고 헤어지는 사이라고 할까.

할리우드도 그렇지만, 일본 영화판도 그와 비슷했다.

같은 동북아 문화권인데 한국과 너무 달랐다.

한국은 촬영 기간이 길다보니(지나치게) 스태프들과 배우들과의 소통이 좋은 편이다.

밥을 함께 먹고 그 사이 대화도 나누면서 유대감 같은 것도 생긴다.

한 작품을 같이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동료애 혹은 상호 유대감이란 측면에서는 장점일 수 있다.

하지만 개런티를 쥐꼬리만큼 주면서 3~6개월 씩 영화에 붙잡아두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단점이자 모순이다.


“정(情)이란 문화를 침소봉대해서 착취의 명분으로 삼는 걸지도....”

“아따... 어려운 말 좀 쓰지 말지. 꼭 일본까지 와서 많이 아는 척을 해야쓰겠냐?”

“그러는 형은 일본까지 와서 족보도 없는 사투리를 섞어야겠어?”


류지호와 김영복이 말꼬리 잡기 놀이를 하는 사이에도 일본 스태프 누구도 주변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심지어 모니터 스테이션 근처에도 안 온다.

먼저 말을 걸지도 않는다.

마치 류지호가 있는 곳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도 되는 것처럼.

심지어 배우들의 태도도 이상했다.

함께 현장편집본을 보자고 하면.


“정말! 정말! 봐도 되는 겁니까?”


중견배우든 신인배우든 가리지 않고 은총을 받은 것처럼 감격해 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왜 이리 오버를 하고 그러나 싶었다.

말로만 듣던 전형적인 일본인들의 가식적인 줄로만 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심으로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걸 알게 됐다.

도대체가 일본 영화판이 어떻기에....

게다가 촬영을 알리는 사인이 외쳐지면.


“스탠바이!”


일본 스태프는 물론 배우까지 마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는 것처럼 하던 일을 일제히 멈췄다.


“레디! 카메라! 롤링! 사운드! 롤!”


“샤모. 씬 남바 니쥬 이찌, 카트 남바 산, 테이크 이찌!”


첫 촬영 때였다.

슬레이터가 일본어로 말하는 걸 들은 김영복 촬영감독이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전자식 슬레이트를 치면서 일본책을 또박또박 읽듯이 영화 제목부터 감독 이름, 날짜, 씬, 커트, 테이크를 모두 외쳤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다음부터는 씬, 커트, 테이크만 빨리빨리 말하고 빠졌지만.

한국이라면 당장 촬영감독의 불호령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다.

쓸데없이 시간 끈다고.


“고!”


도쿄에서도 전망이 좋기로 유명한 레스토랑이다.

대성회관 총재와 그의 젊은 애인 요코가 우아하게 식사를 하고 있다.


[격투기의 이미지도 많이 변한 것 같아. 고독하고 금욕적인 느낌은 사라지고 없거든.}

[산에 처박혀 폭포 아래서 수행을 쌓고 더럽고 떡진 머리에다 누더기 도복을 걸친 그런 모습?]

[거액의 상금과 명성. 우쭐대는 꼴이라니. 아이돌과 껴안고 있는 모습이 파파라치에 찍히고 말이야. 자기가 연예인인가?]

[BayTV의 히트제조기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요코도 판을 그렇게 만든 것에 책임이 없다고는 못해.]


대성회관 총재는 무도가라기 보다는 비즈니스맨에 가깝다.

스포츠전문 케이블 채널의 유명 프로듀서 요코는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여자다.

두 사람은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다.

애매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영화에서는 실제 정사장면을 보여주진 않는다.

다만 두 사람이 사적으로 만나는 장소를 호텔 객실이거나 리조트 객실로 설정했다.

부적절한 관계임을 암시하기 위해.


촬영 이주 차.


크랭크인 이후로 조연급들이 주로 등장하는 장면 위주로 빠르게 분량을 지워나갔다.

도쿄의 유명한 거리는 영화촬영하기 최악이다.

아키하바라, 신주쿠, 시부야 등은 도둑 촬영하듯 진행했다.

관계당국에서 촬영협조를 해주긴 했다.

허가받은 시간, 비용 등 여러 여건이 좋지 않았다.

대부분의 촬영은 도쿄가 아니라 주변 도시로 나가 촬영을 진행했다.

그나마 나루시마 료의 활동이 번화가보다 주로 뒷골목에서 이뤄지는 설정이라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도쿄 외곽의 변두리 거리.

버스 지붕 전후좌우에는 대형 스피커 4개가 달려 있고 뒤에는 초대형 일장기가 꽂혀 있다.

앞뒤로 경찰차 두 대, 작업복 같은 복장을 한 수십 명의 사내들이 모여 있다.

일본의 명물(?) 우익 가두선전차량이다.

사내들은 극우단체 회원들이다.

버스에 붙어 있는 선전문구가 섬뜩하다.


- 우익의 본령은 테러다. 우익이 테러를 하지 않으니까 녀석들이 날뛰는 것이다. 한발의 총성은 10만 명을 동원하는 것보다 낫다!


조끼를 입은 청년들이 작업복 남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일장기와 선전문구가 새겨진 깃발을 나눠주고 있다.

주변을 순찰하는 일본 경찰이나 일본 시민들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도 대수롭지 않아 했다.

그저 자기들끼리 ‘한 동안 또 시끄럽겠네’ 하는 정도.


“우익세력이 사회를 위협할 정도로 커지지 않을 것으로 알고 있어 공연히 충돌해서 말썽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다.”


일본인들의 일반적인 우익에 대한 생각이 일상에서 그대로 보인다고 할까.


“괜찮을까?”


김영복이 다소 근심어린 어조로 류지호에게 물었다.


“꼴통들이 촬영 방해하지는 않겠지?”


픽.

류지호는 그저 웃기만 했다.

대기하고 있는 차량을 비롯해 작업복 차림의 남자들은 사실 실제 가두우익이 아니다.

<군계> 촬영을 위해 불러온 보조출연자들이다.

그들 사이에는 안전사고를 우려해 JHO Security JPN 직원들이 섞여 있다.


“감독님!”


짧은 스포츠머리, 팔뚝의 용문신, 껄렁한 태도.

조금은 서툰 한국말을 구사하는 청년이 류지호에게 뛸 듯이 다가와 넙죽 인사했다.


“승진씨. 수고가 많아요.”

“아니모니다! 아닙니다!”


재일교포 청년이 정신 사납게 손사례를 쳤다.

조총련계 재일동포 우승진은 야쿠자 조직원으로 실제 가두우익에도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청년이다.


“일대는 우익 데모하는 놈 하나 없이 깨끗합니다. 편하게 영화 찍으시면 됩니다.”

“그래요.”


우승진이 다시 한 번 넙죽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후다닥 달려갔다.

자신처럼 떳떳하지 못한 놈과 어디 내놔도 자랑스러운 조선동포가 사람 많은 곳에서 오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기에.

이 시기 일본내 가이센 우익 즉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선전활동을 벌이는 가두우익이 약 900개 단체, 1만 명으로 추산됐다.

‘재생하라, 대화혼’이란 문장과 전범기를 차량에 달고 다니며 노골적으로 군국주의 부활을 외치는 자들도 있고, ‘천황을 존경하고 애국심을 가져라’라든지,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하라’라며 독도 외에도 러시아에 빼앗긴 북방영토 탈환을 주장하는 전쟁 미치광이들도 있고, ‘신의 나라 대일본은 영원불멸하라’라는 국뽕맛 듬뿍 담긴 문구를 휘날리는 단체도 있다.

모두가 거리선전 활동을 펼치지만, 저마다 추구하고 주장하는 바가 다 달랐다.

그 900개 가두우익 단체 가운데 재일동포가 관여하는 곳도 꽤 많다.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지.

슬픈 현실이라고 해야 할지.

주로 어둠의 길에 들어선 이들이 가두우익에 관여하고 있다.

심지어 파친코 사업으로 크게 부자가 된 모 재일계 부자가 돈세탁 용도로 사용하는 단체도 있다.

2010년에 접어들면 가우우익끼리 합종연횡이 벌어지게 되는데, 그때 재일조선인계가 상당 부분을 흡수해 덩치를 키운다.

그리고 사사키재단 같은 극우와 전범기업으로부터 후원금을 받고 활동을 하게 된다.

일본의 폭력조직의 성세가 예전만 못하게 되면서 그 여파가 재일조선인 야쿠자들에게도 미치게 되면서 새로운 수익사업으로 부상하는 것이 가두우익 선전활동이다.

하루 반나절 시끄러운 소음을 유발하는 것만으로 각종 기업과 재단에서 후원금이 따박따박 들어오는데다가 경찰들과도 우호적으로 지낼 수 있으니 그만한 사업도 없다.

게다가 구호와 선전문구는 굉장히 살벌한데, 폭력시위는 거의 없다.

차라리 겁쟁이들에 가까워서 시민들이 떼로 몰려와 항의하면 주춤거리는 단체까지 있을 정도다.

그래서 재일조선인 야쿠자 출신들이 환영을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군계>에 그런 현실을 담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다.

참았다.

스기와라가 아이누이고 몇몇 다문화가정 출신 일본인이 차별받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국제영화제에서 좀 더 먹힐 것 같아서다.

재일동포의 현실은 그 출신의 감독이 더 잘 만든다.

굳이 류지호가 나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건드릴 것까진 없다.

다만 기회가 된다면 OTT 드라마로 재일동포와 고려인에 대한 대하역사극을 해볼 생각은 있다.

영화 <대부> 이후로 미국 영화계에서 이민사를 다룬 영화, 웨이트리스가 여주인공인 영화와 함께 아카데미 직행이란 징크스가 있기도 하고.


“감독님. 준비 끝났습니다.”

“촬영해 봅시다!”


노랗게 물들인 스포츠머리가 인상적인 츠마부키 료타가 가두우익 보조출연자들 사이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김영복 촬영감독은 핸드헬드 촬영을 준비했다.

핸드헬드 촬영 기법(Hand-held camera, Hand-held shooting)은 말 그대로 카메라를 손으로 직접 들거나 어깨에 메고 촬영해 화면의 자연스러운 흔들림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촬영 방식이다.

스태디캠이나 트라이포드를 활용하지 않고, 연출과 인위적인 조작의 느낌을 최소화한 채, 사실적이고 즉흥적인 스타일을 부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고전기법 가운데 하나다.

류지호는 주인공 캐릭터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극단적인 대비를 줄 계획이다.

나루시마 료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은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될 예정이다.

혼란과 무질서를 일관되게 유지시키기 위해서다.

반면에 스기와라를 포함한 다른 모든 장면에서는 안정감 있는 구도와 앵글로 촬영되고 있다.

사실 류지호는 핸드헬드 촬영기법을 썩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단편영화 <Help Me, Please> 정도였고, <REMO> 시리즈의 액션 시퀀스에서 마치 주인공과 함께 하고 있는 듯한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한 정도다.

핸드헬드 촬영기법은 전쟁과 같은 상황에 놓인 인물의 시선과 체험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기에 좋은 기법이다.

<REMO> 최종편은 액션장르라서 많이 쓸 법도 했지만, 3D Eye-MAX 포맷이기에 포기했다.

활용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다.

무조건 진짜처럼 보여야 하는 좀비떼 공격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람의 눈과 비슷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는 헨드핼드 기법은 매우 유용한 방법이다.

실제 수많은 좀비영화에서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입체영화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입체영화에 대형 스크린이 장점인 Eye-MAX에서 화면이 무분별하게 흔들리게 되면 멀미하는 관객부터 시각에 고통을 선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테스트 영상 내부시사에서 눈 통증과 피로를 토로하는 관계자가 여럿 있었다.

극의 몰입감을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기법이 도리어 몰입을 확 떨어뜨릴 위험이 있는 셈이다.

2010년대로 넘어가면 후반작업에서 화면의 흔들림도 보정이 가능해진다.

인위적으로 꽤나 자연스러운 쉐이키캠 효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때까지 입체영화나 Eye-MAX에서 핸드헬드는 환영받지 못하는 기법일 수밖에 없다.


“레디..... 고!”


선동구호를 외치는 가두우익원들 사이에서 나루시마 료는 입만 벙긋 거린다.

억지로 참여한 태가 역력하다.


“통역!”

“예!”

“카메라 앞으로 자유롭게 지나가도 된다고 해! 피하지 말고!”


김영복 촬영감독이 쉴 새 없이 통역을 닦달했다.

인물을 중심에 둔 핸드헬드 기법은 주인공이 처한 현실적 맥락과 그 속에서 겪는 실질적인 고통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유럽의 수많은 리얼리즘 영화들에서 주인공이 겪는 문제와 그로 인한 극심한 고통을 초근거리에서 핸드헬드 기법으로 잡아내 그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더 묵직한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핸드헬드의 고전적이고 교과서적인 사용 방식은 의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흔들리는 카메라 시선을 통해 관객이 사건 속 혼란과 고통의 현장에 함께 하고 있다는 몰입을 유도하는 것이다.

류지호는 <군계>에서 다른 방식으로 활용했다.

불운하고 참담한 현실 속에서 놓인 나루시마 료의 불운, 강박, 혼란의 감정을 좀 더 극명하게 전달해 관객으로 하여금 안정적인 다른 장면과 대비되어 혼란 그 자체인 삶과 평화로운 세계를 이원적으로 구분하도록 안내한다.

결국 스기와라의 안정감과 나루시마 료의 불안정한 앵글이 만나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이 <군계>의 하이라이트가 된다.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

혼돈은 창조를 낳았다.

창조는 질서로 자라났다.

어느 날 질서는 혼돈과 한판 전쟁을 벌였고....

마침내 질서가 혼돈을 무너뜨렸다.

이때부터 슬픔은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창조가 죽었으므로...]


그 같은 고차원적인 통찰을 담아내진 않는다.

서사와 플롯의 구조를 의도적으로 그런 식으로 설계했을 뿐이다.

물론 류지호는 <군계>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수없이 고민하고 탐구했다.

질서와 혼돈의 과학적 그리고 인문학적, 철학적 의미들.

수구주의부터 무정부주의까지.

고민과 탐구 끝에 그것들을 깨끗하게 지우고 장르영화로 접근해 시나리오를 썼다.

그럼에도 고민의 파편이랄까 흔적이 영화 시나리오에 묻어 나왔다.

영화를 어렵게 구성할 이유는 없다.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 어렵게 접근했다고 해서 관객까지 공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전쟁은 내가 일으키지도 않았고, 난 패배한 적이 없어. 왜 내게 그 책임을 묻는 거지. 난 죄가 없어!]

[늙은이들이 모두 뒈져버렸으면 좋겠어. 그들은 우리들의 짐일 뿐이야. 고리타분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자기들은 좋은 시절을 보냈으면서 왜 우리가 좋은 시절을 보내고 싶어 하는 것에는 제동을 걸지. 왜 온순해져야 하는 거지? 자기들이 도대체 뭔데?]


나루시마 료를 잡고 있는 흔들리는 카메라 주위에서 들려오는 말들이다.

실제 일본의 익명 커뮤니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말들이다.

10년 후 한국의 익명 커뮤니티에도 똑같이 등장할 말들이기도 하고.

가두우익의 선전활동 모습은 영화 속에서 세 번 등장한다.

소년원을 출소해 사회에서 변변한 일거리가 없던 나루시마 료가 야마자키라는 야쿠자 보스 밑에서 우익시위를 하며 일당벌이는 할 때.

야마자키가 가두시위를 감시·감독하다가 적대 조직원에게 총격을 받고는 가두시위대로 차를 몰고 돌진할 때.

마지막으로 스기와라와의 비공식 결투장으로 향하기 전, 나루시마 료의 삶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몽타주에서.


“컷!”


핸드헬드 촬영의 장점 중에 하나가 현장 진행이 빠르다는 것이다.

촬영감독은 죽을 맛이지만.


“형, 파스 냄새가 너무 심한데? 저녁에 숙소 들어가서 붙이는 게 어때?”

“....”

“배우 몰입이 깨질 것 같아서 그래.”


감독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김영복으로서는 섭섭함을 감출 수 없었다.


“지호야. 형 좀 살려주라. 내가 허리, 어깨, 무릎 아작 나야 네 맘이 편하겠냐?"

"....?"

"꼭 그렇게 나를 보내버려야 속이 후련하겠냐?”

“오늘은 분량이 좀 많잖아. 오늘만 이해해줘.”

“취소다 자식아....!”

“뭘?”

“그런 게 있어!”


화가 난 듯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얼른 카메라를 어깨에 올리고 촬영장을 누비는 김영복 촬영감독이다.


‘너랑 영화하는 거 재밌다는 말....!’


그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이었다.

류지호와 영화를 한 편 하면 마치 열편을 한 것 같다.

뭐 하나 쉬운 것이 없다.

물론 영감도 마구 얻는다.

류지호와 영화를 하면 영화가 예술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관객들은 모른다.

류지호가 인물이 등장하는 방향이냐 위치 하나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는지.

대형화면이 아니면 절대 발견할 수 없는 화면 귀퉁이에 들어가는 소품 하나까지도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디테일이 매우 풍부해서 영화가 늘어질 것도 같은데, 한국영화 중에서 템포가 가장 빠르고 재미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류지호다.

사실 장면마다 밀도가 높으니 지루할 리가 없다.

류지호는 굉장한 이야기꾼은 아니다.

영화 속에 그만의 세계와 사회를 만들어내는 창조자에 가깝다.


“고생했습니다! 이틀 간 쉬고 건강하게 만납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월요일부터 금요일 5일 촬영 주말 이틀 휴식 스케줄을 철저히 따르는 편이다.

일본영화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휴식일마다 김영복은 숙소에 처박혀 끙끙... 앓지 않았다.

통역도 없이 시내를 돌아다니며 신나게 놀았다.

그런 거다.

류지호는 남의 건강을 갈아 넣어 영화를 만들 정도로 모질지가 못했다.

더해 그럴 정도로 예산을 빡빡하게 운용하지도 않는다.

좀 더 쾌적하게.

자신이 겪었던 불합리와 불공정을 후배들이 조금이나마 덜 겪도록.

류지호가 한국영화에 투자하는 이유이고.

영화를 산업적 안정화 단계로 하루속히 정착시키려는 이유이기도 했다.


❉ ❉ ❉


태풍으로 두 차례 촬영 일정이 변동된 일이 있었다.

그 외에는 큰 문제없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다.

다만 슈퍼 태풍 나비(Navi)가 훑고 지나간 일본은 1만여 가구가 침수피해를 입었다.

규수 지역에 산사태가 발생해 20여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한국의 동해안 지역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태풍 나비가 지나간 5일 동안 <군계> 촬영도 올스톱 되었다.

JHO와 가온그룹 일본 지사들이 모금액을 태풍 피해 지역에 전달했다.

류지호와 촬영팀도 피해지역 복구와 사상자들을 돕기 위한 모금에 손을 보탰다.

몇 해 만에 찾아온 슈퍼 태풍이다.

예상을 뛰어넘는 수재로 인해 한국에서도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다.

한류스타 몇 명이 일본 돕기 기부 행렬에 동참했다.

일본에 체류 중인 류지호는 푸지TV, NHK 등 주요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 고귀한 생명이 희생됐다. 행방을 알 수 없는 분들도 몇 분 계시는 것으로 안다. 깊은 슬픔을 금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피해지역의 주민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와 배우들 그리고 스태프들은 일본 국민들과 한국의 동포들이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한마음으로 응원한다.


아직까지는 극우가 일본 사회전반을 지배하던 시절이 아니다.

일본 언론에서 한국인들이 보인 호의를 대서특필했다.

헌데 동해안 지역도 피해가 적지 않은데, 굳이 외국을 돕느냐며 한국에서 설왕설래가 있었다.

금방 진정됐다.

류지호 가족재단 다울에서 낸 성금이 일본에 기탁한 금액에 몇 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도리어 미담이 다시 한 번 부각됐다.

류지호의 가족이 가난한 시절부터 행해오던 수재의원금 기부가 재조명되기도 했다.

일본의 푸지TV는 한국발 보도를 열심히 일본으로 퍼 날랐다.

제작위원회에서 피해지역에 가서 자선봉사를 할 생각이 없냐며 은근슬쩍 류지호를 압박하기도 했다.

주요 언론이 모두 그 모습을 찍어 내보낼 것이라면서.

류지호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시했다.

암튼 슈퍼 태풍 ‘나비‘는 한국이 낸 이름이다.

곧 그 이름은 박탈당하게 된다.

지나치게 큰 피해를 끼쳤을 때 종종 태풍의 이름이 박탈당하기도 한다.

일본이 제명을 요청했고, 그 의견이 받아들여져서 앞으로 ‘나비‘ 라는 이름은 영원히 태풍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대신 한국은 ‘독수리’라는 이름을 다시 냈다.

이후부터 2005년 슈퍼 태풍의 이름은 ‘독수리’로 정정된다.


- 지독해. 치열하군.

- 프리부터 프로덕션까지 이 정도로 꼼꼼하게 하는 감독은 근 10년 만에 처음이야.

- 마치 오시마 나기사가 재림한 것 같아. 저런 자세는 일본 감독들이 배워야 해.

- 할리우드 감독은 모두 저렇게 해야 살아남는 걸까?

- 원하는 대로 무조건 해내라고 강압적일 줄 알았는데, 융통성도 있어.

- 권위적일 줄 알았는데, 상냥하잖아.

- 은근히 고집도 강해.

- 왠지 화내면 무서울 것 같아. 사무라이 오시마 나기사처럼.


<군계>에 참여한 일본 스태프들은 일을 썩 잘 했다.

대부분이 도쿄다카라 스튜디오에서 월급을 받는 직원들이다.

최소 15년 경력의 스태프들이라 일을 못하는 것이 이상했다.

그럼에도 류지호는 눈높이를 많이 낮췄다.

WaW 픽처스 제작 여건 정도로 생각하며 작업에 임하고 있다.

물론 일본영화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나와 오시마 나기사를 비교하다니 말도 안 돼.’


동양의 고다르라고 불린 감독이다.

한창 때 신좌파 이념에 동조해 일본영화 전통과 싸웠던 감독이다.

일본의 기성정치와 이데올로기, 일본인들의 허위의식 그리고 위선과 싸웠다.

그가 싸웠던 대상은 일본식 군국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를 넘어 국가 그 자체였다.


[우리가 일본인이 지닌 정신의 비밀을 밝히지 않는다면, 숨 가쁘게 살다가 숨 가쁘게 죽은 그 일본인의 정신을 밝히지 않는다면, 일본은 다시 전쟁에 이를 것이다. 영화로 치유하기 위한 실험을 하기에 너무 늦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다른 할 일이 없기에 조용히 영화를 만들 뿐. 국가가 소멸할 날을, 먼 후일을 꿈꾸며.]


오시마 나기사가 한 말이었다.

피해자인 척하는 일본을 꾸짖으며 가해자 또는 범죄자의 입장에서 전쟁을 왜 벌였는지 오시마 나기사가 자신의 영화에서 질문을 꾸준히 던졌던 것처럼 <군계> 역시 비슷한 질문을 일본사회에 던지고 있다.

일본인도 아닌 류지호가 질문할 자격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작가의말

일교차가 꽤 큰 것 같습니다. 건강관리 잘 하십시오.

행복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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