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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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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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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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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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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군계(軍鶏). (5)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립프로깅(Leapfrogging).

개구리처럼 단숨에 뛰어넘는다는 의미다.

건너뛰기, 짚고 넘어가기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진행하거나 단계를 밟아나가는 것이 아닌.

단숨에 몇 단계를 도약해 지나간다는 의미다.

할리우드 촬영현장에서도 이런 표현이 쓰일 때가 있다.

그런 촬영장 진행방식의 대표적인 감독이 벤자민 베이 감독이다.

류지호 또한 <REMO>처럼 고예산 영화에서 립프로깅 스타일의 촬영 진행방식을 곧잘 사용하곤 했다.

일반적으로 촬영팀이 현장에 도착하면 개퍼나 그립팀이 제일 먼저 장비내리고, 설치를 시작한다.

DP가 앵글을 잡으면 조명을 세팅한다.

그 사이 연출은 배우 동선을 잡는다.

첫 커트를 촬영하기 전 올 스탠바이에 대략 2시간 가까이 소모된다.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나면 다시 장비해제하고 다음 셋업으로 가는데 또 시간이 소모된다.

배우들은 트레일러로 가서 올 스탠바이 될 때까지 대기한다.

점심에는 식사를 해야 하고, 중간에 장소 이동도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렇듯 촬영현장에서는 쉴 틈 없이 기계처럼 돌아간다.

이 시기 최대 셋업을 돌리는 감독은 벤자민 베이를 꼽을 수 있다.

보통 할리우드 감독들은 하루 20~30 셋업 정도를 돌린다.

벤자민 베이는 무려 75 셋업을 돌린다.

류지호도 바쁠 때는 그렇게 한다.

물론 멀티 유닛을 포함한 셋업이다.

두 사람 다 프리비즈 즉 애니매트릭스 스토리보드를 애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촬영해야할 장면을 3D 애니메이션으로 구성한 동영상 스토리보드다.

만약 3개 쇼트를 찍어야 한다고 가정하면, 하나의 커트를 촬영하고 있을 동안 나머지 스태프들로 하여금 다음 커트를 준비하도록 한다거나, 촬영현장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두 개의 커트를 동시에 촬영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식이다.

셋업을 해체하고 다시 하는 시간 없이 끊이지 않고 연속적으로 촬영을 해나갈 수 있다.

일본에서 촬영하게 될 <군계>에 대입해보면 다음과 같은 식이다.

BayTV의 냉혹한 격투기 중계 프로듀서 요코가 부모살해라는 패륜범죄를 저지른 나루시마 료의 어린 시절 행적을 추적하는 장면이 있다.

일단 첫 촬영을 위해 패륜범죄가 벌어졌던 나루시마 료의 잡풀만 무성한 집터에 셋업을 해놓는다.

다른 유닛은 나루시마 료의 친척의 집 대문에서 세팅, 또 다른 유닛은 동네 근린공원 벤치에서 세팅한 상태로 대기한다.

모두 세 개의 유닛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준비 중이다.

류지호와 배우 그리고 DP는 맨 먼저 집터에서 촬영하고, 곧바로 친척집 대문으로 이동 끊지 않고 촬영, 그리고 근린공원 벤치에서 씬을 마무리하는 식이다.

물론 메인 촬영팀이 공원을 촬영하고 있을 때 남은 두 대의 카메라는 제 4의 장소에서 또 준비를 한다.

그렇게 류지호는 점심 식사 전까지 쉬지 않고 촬영을 진행한다.

여기서 두 감독이 다른 점이 있다.

벤자민 베이는 배우들이 쉬지도 못하게 마구 몰아붙인다.

반면에 류지호는 사이사이 커피 타임도 갖게 하면서 배우 컨디션을 꼼꼼하게 챙겨준다.

랩프로깅 촬영방식이 가능한 것은 두 사람 모두 자기 사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류지호의 경우 DP와 작곡가가 바뀌기는 하지만, 그 외 스태프들은 그대로 작품마다 이어지고 있다.

여러 차례 손발을 맞춰봤고, 스토리보드까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류지호 촬영현장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간도쿠상, 그 리브프로깅이라는 게 이번 촬영에서도 가능하리라고 보십니까?”


<군계> 제작위원회의 프로듀서 니시무라 타카시가 물었다.

일본에서는 투자사나 제작위원회 안에도 프로듀서가 있다.

심지어 <군계>에는 모두 네 명의 프로듀서가 있다.

제작위원회 멤버인 도쿄다카라 프로듀서, 푸지TV 프로듀서, WaW 재팬의 이봉호 사장, 한국 WaW에서 파견 온 한중기 프로듀서가 그들이다.

자칫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이다.

이런 제작위원회 시스템 때문에 일본 프로덕션이나 감독이 무척 힘들어 한다.

서로 의견이 맞으면 좋지만, 그런 경우는 별로 없다.

제작위원회 프로듀서들에게 끌려 다니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Eye-MAX 작업할 때는 립프로깅 작업방식을 자주 쓸 순 없었어요. 디지털 작업은 꽤 수월하지 않을까 싶네요.”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일본 측 프로듀서들은 하나의 사안을 가지고도 여러 차례 확인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정말 그렇습니까?”

“멀티 유닛 때문에 제작비가 오버될 것 같습니까?”


멀티 카메라 시스템과 립프로깅 진행방식이 일본에 없는 것이 아니다.

매우 노련한 감독들만 할 수 있기에 확인하는 것이다.


“현장에 카메라가 많이 나오고, 촬영팀 인원이 늘면 제작비가 상승할 것 같지만, 그것이 결국 제작비를 아끼는 겁니다. 때론 촬영 일수까지 줄일 수 있지요.”


푸지TV 프로듀서 하야시 켄이 반색했다.


“오오. 촬영 기간이 단축될 수도 있겠군요?”


류지호의 말을 한중기 피디가 끼어들어 일본어로 정정해주었다.


“촬영기간을 단축한다는 것이 아니라, 프리프로덕션에서 계획한 일정을 준수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말이 그 말이 아닌가.

일본 측 프로듀서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절레절레.


한중기 피디가 고개를 젓고는 류지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감독님. 일본 스태프들과는 손발이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일본 측 프로듀서들의 기대를 한 번 눌러줄 필요가 있었다.


“A급이라면서요? 몇 회차 돌려보면 답 나오지 않겠어요?”

“딱 3회만 해보죠.”

“그러죠 뭐.”

“한 피디는 나와 작업을 안 해봤잖아요?”

“예.”

“괜찮겠어요?”

“립프로깅 말씀이십니까?”

“내가 현장진행이 좀 빨라요.”

“박은상 감독님도 성격이 참 급하시죠.”

“내가 립프로깅으로 현장을 진행하는 것은 제작비 절감이나 촬영분량을 철저하게 준수하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에요. 배우에게도 이로운 면이 있어요.”

“감정 연결입니까?”


분절해서 진행할 수밖에 없는 영화촬영 시스템상 배우들의 감정과 연기 연결이 쉬울 리가 없다.

끊지 않고 연기를 할 수 있다면 배우에게도 이로운 점이 많다.


“어떤 감독처럼 혹사가 되어서는 안 하느니만 못할 때도 있어요.”


할리우드에는 벤자민 베이 말고도 배우를 혹사시키는 감독들이 꽤 있다.

콘티도 없고 명확한 디렉션 없이 모호하게 현장을 이끌어서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의미 없이 혹사시킨다.

해고를 당해도 마땅하지만, 귀신 같이 촬영일정은 지킨다.

흥행 결과가 좋아서 명장 감독 듣는 경우도 있다.

오래 가진 못하지만.


“여러분.”


일본 쪽 프로듀서들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넷! 간도쿠상!”

“나는 영화 할 때만큼은 허투루 제작비 쓰는 걸 매우 싫어합니다. 계약사항 또한 최선을 다해 지키려고 노력하지요. 내 영화의 테마, 표현양식, 고유 스타일에 대한 간섭만 없다면 난 여러분의 의견에 귀 기울일 겁니다.”


도쿄다카라와 푸지TV는 류지호라는 유명 감독의 명성과 재능에 기대고 있다.

어차피 할리우드 현역 감독이라서 일본 감독 다루듯이 할 수도 없다.


“우리 입장에서 A급 스태프 개런티 등 여러 가지 곤란한 점이 있음을 알아주십시오.”

“그래서 WaW가 제작비를 더 많이 부담하지 않습니까?”


류지호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앓는 소리 해대는 관리자 직급에게 성을 내 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

싫은 소리는 도쿄다카라 회장에게 직접 하면 된다.

어떤 나라나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제작비 50%를 대는 메인투자사가 있어야 한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영화 프리프로덕션이 시작된다.

그러는 동시에 영화 투자펀드를 두드리거나, 공동제작사를 찾는다.

일본은 제작위원회가 가장 먼저 꾸려지고, 자체적으로 제작을 할 때가 있고 군소제작사로 위탁하기도 한다.

제작위원회 시스템이 자리 잡고 나서 씨네-콰논, 로봇 프로덕션 같은 기획·개발 및 자금 조달이 가능한 자체 제작사의 수가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다.

일본의 메이저는 자신들이 가져가야 할 파이를 절대 나눌 마음이 없는 욕심꾸러기들이다.

경쟁자가 고개를 쳐드는 것을 가만 두고 볼 리가 없다.

WaW JAP이 이른 시간에 일본에서 안착하리라 생각하지 않는 류지호다.

워너-타임과 UPI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시장이 이곳 일본이다.

천천히 그리고 물 스며들 듯이....

약간은 부족한 실력의 일본어로 류지호가 힘주어 말했다.


“나는 계약서를 성실히 이행할 것이며, ‘샤모‘ 성공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할 겁니다.”


일본 쪽 프로듀서들은 잘 알고 있었다.

류지호의 말 한 마디가 어떤 의미인지.


‘내가 알아서 잘 할 테니, 간섭하지 마.’


이후 제작위원회는 류지호에게 어떤 참견이나 피드백을 하지 않았다.

모든 걸 류지호에게 맡겨버렸다.

대부분의 일본 영화는 한 달 안에 촬영을 끝마친다.

저예산 영화는 2주 만에 끝내버린다.

핑크무비라고 불리는 초저예산 에로틱한 영화는 3~5일 만에 촬영을 마친다.

10억 엔이 넘는 블록버스터의 경우 6개월 간 촬영을 진행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중급 규모 영화는 1~2달 만에 뚝딱 해치우는 편이다.

그렇다 보니 조명을 많이 할 필요 없는 로케이션 촬영을 많이 한다.

복잡한 배우의 블로킹도 없다.

그걸 짜는 순간 촬영스케줄이 꼬인다.

따라서 실내로 들어가 촬영해도 인물 위주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 2주 만에 장편영화를 끝내버리는 감독들은 투자가 잘된다.

아이돌 한 명과 대형 기획사 소속 배우 섭외하고, 저예산으로 영화를 찍으면, 어찌되었든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과 군소제작사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다.

그런 방식이 아니면 투자를 못 받고 배급도 안 된다.

일본은 2차 판권 시장이 굉장히 잘 되어 있다.

그 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제작사들이 굉장히 많다.

그러니 일본 영화계가 극단적일 수밖에 없다.

중간 규모가 없이 대작 아니면 저예산만 제작된다.

중간 규모 예산 영화는 오로지 애니메이션에만 존재한다.


“어떻게 된 게 안 좋은 건 모두 일본을 따라하냐?”


한국영화계 미래의 모습이다.

4개 대기업 계열 투자배급사가 한국영화의 90%를 좌지우지하고, 주요 흥행시즌용 블록버스터 외에는 저예산 기획영화만 난무하고, OTT납품을 제외하고 해외 수출보다는 국내 흥행에 목숨을 거는 미래....


“일본의 좋은 점인 2차3차 시장은 왜 따라하지 못하는 것인지.....”


최소한의 부가시장을 유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걸 못 살렸다.

대기업 계열 투자배급사가 다 해먹으려고 하다가.

제작자들의 마인드도 문제다.

IPTV에서 '극장 동시상영작' 타이틀을 달면 일반 주문형 비디오(VOD)보다 더 비싸게 판매할 수 있다.

극장 개봉작이 IPTV에서 더 비싼 값에 판매되면서 '꼼수 개봉'이 늘어나게 된다.

게다가 1~2주만 기다리면 극장개봉영화를 저렴한 가격에 집에서 편하게 즐길 수 있다.

극장을 찾는 관객이 감소할 수밖에 없다.

영화업계가 근시안적으로 판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업자득이지.”


❉ ❉ ❉


<군계> 원작 만화에서 주인공들이 수련한 무술은 가라데다.

이봉호 사장은 한국에서도 친숙한 극진회관 쪽에 가라데 코디네이팅을 부탁했다.

덤으로 주인공들에 대한 트레이닝과 보조 출연도 부탁했다.

처음에는 극진가라데 측에서 영화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냈다.

주인공 나루시마 료가 극우성향의 야쿠자 무리의 행동대로 묘사되고, 소년원에서 가라데를 전수한 캐릭터가 신우익 계열의 일수회(一水会)라는 극우단체 일원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고리타분한 신우익을 들고 나와서.....”


사실 1970년대만 해도 일본에는 무려 200개 단체, 총 가입자 12만 명의 우익단체가 있었다.

그 중에 1972년 설립된 일수회(一水会)는 매월 첫째 주 수요일에 집회를 개최한다는 의미에서 모임의 명칭을 일수회로 하였다.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천황 중심의 유신개혁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후체제를 부정하고 미국으로부터의 자립과 존엄을 회복해야 한다는 반미주의 성향을 강하게 내세웠다.

또한 노동자 중심의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서 국철노동자 파업을 비난하는 전단지를 배포하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모임의 대표적인 인물이 극우 소설가이자 신우익 사상가 미시마 유키오다.

할복자살로 유명한 인물인데, <군계>에서는 유키오의 할복자살에 충격을 받은 청년 구로카와가 일본총리를 암살하려다 실패해 체포되어 종신형을 사는 것으로 나온다.

그가 바로 나루시마 료에게 가라데를 전수하는 스승격의 인물이다.

영화에서 구로카와의 신우익 사상을 제자(?) 나루시마 료에게 주입하는 묘사는 없다.

다만 여러 암시를 통해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

나루시마 료는 차라리 과격한 무정부주의자에 가깝다.

현대 일본의 질서와 체제를 거부하고 오로지 폭력본능으로 좌충우돌하는 한 마리 싸움닭(シャモ)으로 묘사할 생각이다.

잃어버린 10년을 겪고 있는 일본의 암울함이 끝내 폭발(유신개혁) → 신우익 스승으로부터 가라데 사사(군국주의 재무장) → 야쿠자 세계(제국주의) → 입식타격 무술대회(천민자본주의와 양극화) → 시대의 양심 마주하고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는 스토리.

그 안에서 나루시마 료는 명백히 안티히어로다.

폭력 반대를 주장하기 위해 극단의 폭력을 영화에서 묘사하는 아이러니.

격투 액션장르에서 무슨 의미를 찾느냐고 우습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관객이 가볍게 영화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드는 한 편, 영화감독 자신은 진지하고 무겁게 이야기를 다뤄야 한다.

그 어렵고 무거운 이야기를 쉽고 정갈하게 요리해 내는 것이 감독의 연출력이고.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풀어내고 쉬운 이야기도 어렵게 풀어내는 것은 연출이 아니다.

자기 과시일 뿐이다.

관객을 놀리는 것이기도 하고.


[영감은 유파 같은 거 없어?]

[북진류다.]


영화 <군계>에서 이 유파는 흑룡회라는 일본 극우 무술단체에서 떨어져 나온 유파라는 설정이다.


[무기력은 악이다!]


구로카와 겐지가 나루시마 료에게 강조하는 말이다.

일수회의 미시마 유키오가 한 말이기도 하고.

영화 <군계>의 장르적 성격을 굳이 규정하면, 느와르 풍의 격투 액션영화다.

고등학생부터 묘사되지만 성장 드라마는 1%도 담기지 않는다.

선과 악의 대결이 가진 스토리 쾌감도 없다.

한 인간이 어떻게 망가져 가는지를 따라가는 영화다.

거기에 양념처럼 스포츠화 되어 돈벌이 도구로 전락한 가라데의 현실을 통해 일본 무술의 순수성이니 약육강식, 승자독식 사회의 비정함 등을 살짝 버무린다.

관객들은 그런 무거운 이야기 몰라도 된다.

그저 류지호가 보여주는 격투 액션의 다양한 눈요기를 즐겨도 상관없다.

여담으로 영화 <레이징 불>을 오마주한 시퀀스가 들어갈 예정이다.

하나는 오프닝 시퀀스의 고속촬영된 쉐도우복싱을 오마주해서 나루시마 료가 독방에 갇혀 가라데를 수련하는 장면을 구성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라모타가 조이의 복부에 바디 블로우를 열심히 치고 나서 링에 오르기 위해 대기실을 빠져나가는데 피에트로 마스카니의 오페라 굴리엘모 라트클리프 (Guglielmo Ratcliff)의 음악이 점점 고조되고 복도를 통과해 마침내 경기장에 입장하면서 관중들의 엄청난 환호를 받으며 링에 오르는 모습까지 대략 1분 30초짜리 3인칭시점의 롱테이크샷을 오마주할 예정이다.

류지호가 롱테이크에 빠져들 게 한 결정적 장면 중에 하나가 바로 <레이징 불>의 경기장 입장 시퀀스다.

투기종목 영화를 찍는데, 류지호로서는 <레이징 불>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얏!”

“합!”


도쿄에 위치한 극진회관에서 수련생들의 기합소리가 터져 나왔다.

<군계>에 출연하는 츠마부키 료타, 아베 히카루, 마에다 사다호가 극진회관 관원 사이에 끼어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다.

크랭크인이 가까워지자 없는 시간까지 만들어 극진회관에 나와 훈련에 매진하고 있는 배우들이다.

일본의 젊은 배우들은 무척 바쁘다.

하는 일이 정말 많다.

연예인인지 대기업 영업사원인지 모를 정도다.

두 주인공 츠마부키 료타와 아베 히카루는 작년과 올해 영화·TV를 종횡무진하며 다작을 하고 있다.

워낙에 영화 개런티가 적어서 광고, 화보촬영, 뮤직비디오, 예능 등 닥치는 대로 해야 한다. 특히 TV드라마는 작품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해야 한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츠마부키 료타가 <군계>에 캐스팅 되면서 이전 삶과 다른 필모그래피를 만들었다.

극우적인 영화 <로렐라이> 대신 극우에 대해 비판적인 <군계>에 출연하게 됐다.

본인에게 잘 된 선택인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


“왔어?”


회관 안으로 들어서는 류지호를 친구 최영웅이 반갑게 맞이했다.


“수고가 많다.”


처음에는 제작위원회가 추천한 일본 스턴트팀과 일을 하려했다.

그들은 류지호가 원하는 처절하고 현실감 넘치는 파이트액션 디자인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한국에서 최영웅의 팀을 불렀다.

스턴트팀을 부르는 김에 현장편집 기사도 불러들였다.

배우와 현지 스태프들과 통역을 거쳐 의사소통하는 것이 답답했다.

현장편집본을 보면서 직관적인 방식으로 촬영현장에서 소통할 생각이다.

편집도 한국의 류지호 사단으로 교체했다.

처음 계획과 달리 한국 스태프가 늘어나게 되면서, 아예 포스트프로덕션을 여주의 WaW종합촬영소에 하기로 했다.

일본보다 물가와 인건비가 저렴한 한국에서 작업을 함으로써 후반작업비용을 조금 절약할 수 있게 됐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배우들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던 최영웅이 입을 열었다.


“저기 아베라는 사람은 좀 하는데, 붓타는 대역을 많이 써야 할 것 같아.”

“붓타 운동신경이 나쁘지 않아 보이던데... 그 정도야?”


붓타는 팬들이 부르는 츠마부키 료타의 애칭이다.


“운동신경과 격투기 센스는 다르지. 실제로 얻어터져야 한다며?”

“후반부의 체육관 시합 장면에서는 실제 파이트처럼 리얼했으면 좋겠어.”

“복싱이 아니라.... K-1 스타일이라 잘못하면 킥에 배우가 다칠 수가 있어.”

“<풍운아> 때는 어떻게 했는데?”

“와이어를 적재적소에 잘 써먹었지. 격투기 시합은 트렁크만 입고 싸우잖아. 와이어를 달기도 뭣하고....”

“그 부분은 네게 맡길게. 최대한 K-1 느낌이 날 수 있도록 해줘.”

“영복이형하고 최대한 바래(가짜 티) 안 나게 찍긴 하겠지만, 진짜와 스턴트는 다르다는 걸 잊지 말아줘.”

“당연하지. 편집 장난을 안치고 싶은 것뿐이야.”

“체육관 장면 실사는 다 WaW스튜디오에서 찍는 거 맞아?”

“응.”


일본 보조출연자 인건비가 생각 이상이다.

주요 배우들만 한국으로 데리고 가서 찍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WaW종합촬영소 A 스튜디오는 1,000평이 넘는다.

사각의 링과 주변 관중석 일부까지 세트를 지을 수 있다.

CG 합성을 위한 대형 그린 패널도 준비되어 있다.


“더블은 확인해 봤어?”

“체격이나 분위기는 꽤 싱크로울이 높은 것 같더라. 한 명은 스턴트맨 아니지?”

“스기와라 더블은 극진회관 수련생이야. <바람의 파이터>에도 출연하고 싶었대. 그때 출연을 하지 못해 무척 아쉬웠다고 하더라.”


극진가라데 창시자를 모델로 한 영화 <바람의 파이터> 제작기는 온갖 우여곡절로 점철되어 있다.

고생한 것에 비해 관객과 극진가라데 제자들 모두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영화 완성도와는 관계없이 한국에서는 손익분기점을 훌쩍 넘겼다.


“극진가라데와 다른 가라데 유파와 많이 다르냐?”

“시합 룰이 많이 달라. 기본은 다 같지만.”

“원조나 기원을 따지자는 건 아니고....”


가라데 유파가 꽤나 많았다.

대표적인 4대 유파는 송도관류, 강유류, 사동류, 화도류다.

일본 내에서 극진가라데는 유파라기보다는 별개의 무술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했다.

때문에 극진류나 파라고 부르기보다 극진공수도 00회관, 00회라는 식으로 부른다.

가라데 유파 간 교류전에서 극진만은 항상 제외된다.

서로 시합 룰이 달라 교류전을 펼치지 못하겠지만.

총재 서거 이후 극진회관은 파가 나뉘었다.

둘로 나뉘어 서로 본류라면서 법정 분쟁을 벌이고 있다.

암튼, 극진가라데 내부에서도 분파가 심화되면서 일본, 한국, 북미, 러시아 등 다 따로 돌아가는 추세다.

그로인해 자칫 극진에서 협조를 못 얻을 뻔했다.

할리우드 명감독이 연출하는 영화이기에 전 세계적으로 극진가라데를 알릴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기고 이 사안에서는 법정 다툼과 상관없이 두 파벌 모두 협조하기로 했다.

영화 <군계>의 격투기 최강자 스기와라는 대성회관 수련생이다.

현실의 극진가라데 대산파를 모티브로 했다.

원작자에게 만화 <군계>에 대해 세세하게 묻거나 공부하진 않았다.

완전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루시마 료의 스승격인 구로카와가 소속된 북진관은 극우적이며 폐쇄적인 곳이다.

반면에 대성회관은 개방적이고 민주적이라는 설정이다.

대성회관 총재가 극진의 무예를 텔레비전 쇼(K-1)로 타락시키는 함정이 있지만.


“곤니찌와, 칸토쿠상.”

“오스!”


아베 히카루가 껄껄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하하하. 오하이오 고자이마쓰!”


TV드라마에서 주로 허당 캐릭터를 연기해서 실없는 이미지가 있다.

이봉호 사장 말에 의하면 일적인 부분에서는 매우 영리한 배우란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배역을 잘 캐치하고, 잘 활용할 수 있는 작품을 택하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출연한 TV드라마는 평균 이상이었다.


“주변에서 스테레오타입화 되고 있지 않느냐는 걱정을 하는데,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감독 윤박지가 얼른 달려와 그의 말을 통역했다.


“사람들이 내게서 보길 원하는 캐릭터를 꾸준히 갈고 닦으면서 만족감을 안기는 동시에 해보고 싶은 다른 역할도 도전하길 멈추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번 작품이 아베에게 캐릭터 변주와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스기와라라는 인물은 배우로서 뭔가를 해볼 만한 여지가 별로 없는 전형적인 캐릭터다.

침착하고, 선량하며, 진지하고, 과묵한 성격이다.

한편으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품어내야 한다.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겪고 있는 주인공이 절로 움츠려들 수밖에 없는 카리스마와 압도감이 품어져 나와야 한다.

우월한 신체스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연기 호흡, 표정, 몸가짐, 사소한 행동까지.

아베 히카루는 영화 속에서 감정의 진폭이 적은 속에서 섬세한 연기를 펼쳐야 한다.

베테랑도 쉽지 않은 연기다.

비록 연기경력 10년이 넘는 아베 히카루라 할지라도 어려운 도전이다.

이번 <군계> 배우 오디션에서는 대본을 미리 보내지 않았다.

오디션에 온 후에 독백대사를 받아 연습 없이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을 봤다.

짧은 시간 안에 앞 뒤 내용을 유추해 독백대사를 분석해 연기를 선보이는 방식이다.

일종의 지정연기 오디션인데, 배우의 재능과 기본기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신인 오디션이나 입시연기에서 많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아베 히카루 정도 되는 배우에게는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오디션이었다.

소속사에서는 흔쾌히 수락 했다.

보통 지정 대사는 배우가 알고 있는 작품이 걸리는 경우도 있지만, 잘 모르는 작품일 경우가 훨씬 많다.

류지호는 일부러 해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미국 TV시리즈 대본을 가져왔다.

아베 히카루의 오디션은 류지호의 기대 이상이었다.

다이얼로그 연기의 기본은 발성, 화술이 기본이다.

말 즉 언어는 연기라는 예술행위의 기본이며, 배우는 정확하게 언어를 구사할 책임이 있다.

그런 측면에서 류지호는 일본어 표현을 정확하게 끄집어 낼 수 없다는 점이 고민이었다.

나름 과외도 받고, 일본에 도착한 후에는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쉽게 되는 일은 결코 아니다.

<민중의 적> 촬영을 끝내 놓고, 일본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배우들이 출연한 영화를 틈틈이 돌려보면서 그들이 일본어로 연기하는 호흡, 말투, 언어를 다루는 방식 등을 머릿속에 담았다.

그럼에도 일본 감독이 디렉션을 주는 것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을 터.

생각해보면 그 같은 문제는 단순하게 접근하면 된다.

연기는 배우가 하는 것이다.

감독은 배우들이 캐릭터를 받아들이고, 공감할 수 있도록 이해시키는 것이다.

결국 배우를 믿을 수밖에.

무책임한 태도 같지만.

그것이 정답이다.


“하이. 붓타!”

“곤니찌와.”


츠마부키 료타는 영어 울렁증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류지호가 무심코 영어를 쓰면 슬쩍 딴청을 피우기 일쑤다.

평소에는 쾌활한 성격이다가 그때만큼은 수줍은 소년이 되어버린다.


작가의말

한 주 마무리 잘 하시고.

즐겁고 행복한 하루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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