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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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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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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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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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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군계(軍鶏). (1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평범한 도쿄의 일상들.

도쿄 출근 풍경.

일본의 여느 평범한 고등학교 수업 시간.

도쿄 증권거래소 풍경.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일본의 국화인 벚꽃.

일왕의 처소인 고쿄.

일본의 국조인 꿩과 철망 너머에서 그런 꿩을 노려보고 있는 샤모(투계).

그리고 교묘하게 그런 쇼트 사이에 삽입된 야스쿠니 신사와 정치인들의 연례 참배, 또 극우단체 선전활동, 2CH로 대표되는 넷우익 암시 등.

마치 플래시 터지듯 타이틀 시퀀스 사이에 짧게 삽입된 그런 그림들은 아무 생각 없이 보면 현 시대 일본의 일상으로 치부될 뿐이다.

영화를 두 번 보게 되면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올 수도 있다.

이 타이틀 시퀀스가 끝나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나루시마 료로 이어진다.

서랍에서 잭 나이프를 꺼내 손에 쥐면서 본격적으로 오프닝 롱테이크 장면이 시작된다.

이 오프닝 3분은 엔딩 장면에서 명확하게 정리가 된다.

폐가 신사에서 나루시마 료와 스기와라가 극한의 대결을 펼친 끝에, 결국 스기와라의 승리로 끝날 듯 보인다.

선이 악을 이기는 것이 당연하니까.


[난 패배한 적이 없다! 패배해서도 안 돼!]


항거불능으로 여겨졌던 나루시마 료기 마지막까지 비겁하게 스기와라에게 암수를 쓴다.

그 구제불능의 행동으로 위태롭게 유지되던 폐허가 무너지고 만다.

암전과 함께 플래시백이 나오는데, 오프닝에서 감춰두었던 장면.... 열일곱 살의 나루시마 료가 부모님을 살해하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폭삭 주저앉은 신사 더미 사이에서 스기와라가 나루시마 료를 구한다.

끝까지 스토리의 결말을 쉽게 예측하지 못하도록 나름 꼬았다.


[왜? 도대체 왜! 날 살린 거냐! 스기와라~]

[너라는 폭탄을 만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모두. 비록 스위치를 누른 것이 너일지라도....]


스기와라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나루시마 료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면서.... 신사 아래로 펼쳐진 계단을 내려간다.

그 깊고 어둡고 불길한 계단을.

마치 영화 <엔젤하트>에서 엔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저지옥 하데스로 한 없이 내려가는 것을 암시한 것처럼.

<군계>의 엔딩도 비슷한 상징이다.

타락한 천사 스기와라가 악마 나루시마 료를 끌고 지옥을 암시하는 계단 아래로 하염없이 내려가는 것을 길게 보여준다.

심지어 5분간 이어지는 엔딩 크레디트 스크롤의 마지막 배급사 로고가 뜰 때까지 계속해서 한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두 사람을 보여주게 된다.

크랭크업 시점에서 예상 러닝타임은 2시간 30분이다.

류지호의 영화 가운데 가장 긴 영화가 될 것 같았다.

그 중 1시간 30분은 나루시마 료라는 악과 스기와라 나오토라는 선의 대결을 보여주게 된 다.

입식타격 격투기대화라는 형태로 두 사람의 대결을 묘사한다.

두 사람이 상징하는 것은 선과 악만이 아니다.

원칙은 있으나 멋없는 사람들.

잠재되어 있는 우월감과 열등감.

질서를 곧잘 지키다가도 한 사람이 위반하면 그대로 따라 하는 습성.

속과 겉이 다른 인격.

나라는 대국, 생활은 소국이라는 뿌리 깊은 인식.

미신 숭배.

일본인 내면에 자리한 이중성과 모순도 함께 암시한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나 같은 녀석은 죽어도 괜찮아. 외톨이보다는 나으니까...]


부모님을 살해하기 전에 나루시마 료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는 대사다.

한때 일본에서 유행했던 말이다.

상업영화를 이렇게 마무리하면 안 된다.

대단한 반전이 있는 영화도 아니면서 애매모호하게 마무리했다가는 소위 ‘폭망’ 예약이다.


“안 망해.”


일본과 아시아는 몰라도 유럽과 북미에서는 충분히 통할 수 있다.

낚시 바늘을 삼킨다거나(섬), 망치로 사람을 패고 산 낙지를 먹거나(올드보이), 돈 때문에 부모를 살해한다거나(민중의 적) 등... 유럽의 영화팬들이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가 열렬한 마니아로 만들었던 한국영화의 폭력들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에서는 이런 한국영화들만 따로 묶어서 SE DVD를 제작해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다.

이런 가학성 폭력에 대한 입소문을 듣고 예술영화 전용관을 찾는 유럽 관객들도 꽤 많다.

그런 것에 열광하다가 <반칙왕>, <살인의 추억> 등을 보게 되고 진성 한국영화팬이 된다.

<The Killing Road> 이후 오랜만에 자의식 듬뿍 담긴 영화가 될 예정이다.

성적인 표현, 폭력 표현 수위 모두 전에 볼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지금껏 제한적으로 사용했던 핸드헬드 촬영기법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류지호 감독 하면 떠오르는 롱테이크와 롱쇼트도 여전할 것이다.

일부 예술영화에나 사용되는 소외효과(Alienation Effect)도 쓴다.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가 고안한 서사기법인 소외효과는 연극 공연 중 극중 인물과 관객의 감정적 교류를 차단함으로써 관객이 연극에 몰입하지 않고 소외된 상태에서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연극의 내용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주석달기, 관객에게 말 걸기, 번호 붙이기, 뜬금 없는 노래삽입 등이 주로 쓰인다.

영화 <군계>에서는 관객이 나루시마 료에게 감정적 호응을 불러일으킬 때마다 소회효과가 사용된다.

완전 뜬금없는 쇼트를 집어넣어 몰입을 깬다거나, 검은 화면을 불쑥 넣어버리는 방식으로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할 생각이다.

류지호는 어떤 관객도 나루시마 료에게 동조하지 않길 바랐다.

관객들이 나루시마 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길 원했다.

그가 영화의 주인공이지만, 관객이 그에게 연민이나 동정심을 갖지 않도록 할 생각이다.

물론 의도한 대로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류지호는 이전 삶의 논쟁적 영화 <조커>처럼 ‘나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동의할 수밖에 없는’ 악역의 탄생을 <군계>에서 그리고 싶지 않았다.

나루시마 료는 구제불능이자 동정의 여지가 없는 악이다.

그는 구원받아서도 안 된다.

그 같은 이들이 세상에 또 다시 나와서도 안 되고.

마치 군국주의 망령들처럼.

만약 <군계>가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졌다면, 류지호는 오만가지 가짓수를 계산해 가면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노력했을 수도 있다.

할리우드 영화 작법에 따르면 인물의 행동과 감정에는 이유가 다 있으니까.


[강력한 이유는 강력한 행동을 낳는다.]


셰익스피어가 한 말이다.

그런데 인류의 숫자 보다 많은 감정들과 상황들이, 제각기 다른 가치관이 세상에 무수히 존재한다.

그 속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경우도 많다.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경우도 많다.

이해가 가지 않고, 납득도 할 수 없지만, 그런 것을 어쩌겠는가.

세상만사 모래알만큼의 다양한 일이 항상 벌어지고 있는 걸.

그에 반응하는 인간의 대처 역시 각양각색이고.


“어렵네, 어려워.”


김영복이 툴툴거리며 류지호의 곁을 지나쳐갔다.


“그놈의 디테일 하고는....!”


김영복을 비롯해 모두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마지막 촬영인데도 어렵고 고생스럽다.

류지호와 작업을 하면 충무로 다른 영화 두 배의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사실 촬영이 힘들지는 않다.

사전에 계획한 대로 착착 진행하는 편이기에.

다만 준비를 정말 많이 해야 하는 것이 어렵다.

시멘트벽의 오돌토돌한 거친 면, 붉은 벽돌의 빛바랜 색감, 작은 소품에 대한 디테일까지.

지독할 정도로 따지고 드는 것이 류지호다.

추상적이며 막연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매우 구체적이고 지적으로 주문하고 요구한다.

간혹 생각 못 해봤던 걸 해내라고 하면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고민해야 한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다.

물론 결과물에 그 같은 고생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는 하다만.

류지호라는 감독은 한 번이라도 작업해 본 이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린다.

헤드 스태프들은 대체로 좋아한다.

영감을 많이 받으니까.

퍼스트 어시스턴트들은 대체로 싫어한다.

다른 영화보다 노력과 고생을 몇 배나 더 해야 하기에.

결국 그 퍼스트들이 디렉터로 올라가게 되면 류지호 같은 감독을 좋아하게 된다.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라라라라.... 라리라~


느닷없이 촬영현장에 클래식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슈만의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영화 <군계>에서 중요한 테마로 사용되는 곡이다.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요하임을 위해 슈만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곡이다.

제2악장은 슈만이 천사들로부터 계시를 받아 곡을 썼다고 전해진다.

 재밌는 것은 요하임이 콘서트마스터로 재직하던 하노버 궁정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이후 평생 동안 이 작품을 연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슈만이 젊은 브람스와 자신의 제자였던 알베르트 디트리히와 함께 요하임을 위해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F-A-E 소나타’를 작곡하여 헌정했는데, 요하임은 환상곡, 소나타는 기꺼이 헌정 받아 자주 연주했지만, 협주곡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슈만이 자살을 시도한 뒤 요양원으로 실려 갔고, 그 모습을 지켜본 요하임이 슈만이 미쳐있는 상태에서 이 곡을 만들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슈만의 광기와 환상이 빚어낸 곡이 <군계>에서 중요한 테마곡으로 쓰이게 되었다.

참고로 만화 원작에서 나루시마 료가 연주했다고 하는 곡은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 D단조 108번’이다.


뚝.


느닷없이 흘러나왔던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가 마찬가지도 느닷없이 끊어졌다.


“......”


촬영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조감독 윤박지가 류지호를 향해 손가락으로 오케이 신호를 보냈다.

츠마부키 로타의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류지호가 무전기를 입에 가져다 댔다.


“Go....”

<군계>의 마지막 촬영이 시작되었다.

촬영장에 다시 한 번 슈만의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가 흘러나왔다.

요하임 때문에 슈만 사후 80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이 곡의 1악장은 어두운 D단조 도입부를 거치며 저주받은 듯한 분위기가 지속되고, 슬픔에 잠긴 2주제가 제시되면서 슈만의 남다른 감수성이 극대화된다.

이후 오케스트라의 강박증적인 도발과 솔로 바이올린의 회한어린 체념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며 비관적인 분위기로 마무리된다.

정신적 혼란을 겪던 슈만에게 소나타 형식은 현실적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아니었을까 싶다.

영화음악가인 류순호가 말하길 이 바이올린 협주곡은 슈만이 자신의 정신적 문제를 음악적 창작열로 극복하고자 했던 시기의 작품인 만큼 실제 완성도는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 외에도 이 영화가 자칫 영원히 봉인될 뻔했다는 사연도 중요하지 않았다.

천사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자 한 슈만의 광기와 환상이 빚어낸 음악이 류지호가 새롭게 각색한 <군계>에 썩 잘 어울린다는 것이 중요할 뿐.

나루시마 료와 스기와라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 모순들을 짚어보는 것도 오늘로써 끝이다.

약간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크랭크업을 앞두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렇다고 찝찝하진 않았다.

더 찍는다고 해서, 또 다시 찍는다고 해서.

영화가 획기적으로 달라진다거나 알차지는 것이 아니니까.

편집도 있고, 음악도 있고, 사운드 디자인도 남아 있다.

프로덕션에서 미진했던 것이 있었다면, 제2의 창조작업이라는 포스트프로덕션에서 충분히 만회할 수 있다.


“류 감독, 수고했어.”

“형도 고생했어.”


짝짝짝!


배우와 스태프들이 한 마음으로 촬영종료를 축하했다.

4개월간 끈끈한 팀워크를 보여줬던 <군계> 제작진이다.

배우와 스태프들이 서로에게 박수를 보내며 촬영을 마친 기쁨과 아쉬움의 나눴다.


“마지막 촬영이 아쉬울 만큼 그 동안 정말 즐겁게 작업했습니다. 뜨거운 열정을 보여준 스태프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거기까지!”


김영복이 얼른 류지호를 만류했다.


“감독님. 연설은 쫑파티에 가서!”

“하하하. 그럽시다.”


주섬주섬.


닳아서 금방 바스러질 것 같은 대본, 페이지마다 온갖 메모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콘티북을 백팩에 챙겨 넣으며 류지호는 묘한 감흥에 젖었다.

지난 몇 달 간 일본에 머물며 촬영했다.

한국영화의 일본 로케이션이 아니었다.

합작영화라곤 하지만, 일본 자본과 배우들 그리고 스태프들과 함께 찍은 일본영화다.

영화감독의 삶을 다시 살아가면서 일본영화를 연출한다는 것은 계획에 들어있지 않았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영화를 하는 것만으로 벅찬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왜 굳이 일본영화를... 그것도 격투기 만화를 선택하게 된 것인지.

지금 생각해 봐도 엉뚱한 결정이었다.


“......!”


백팩을 짊어진 류지호가 마지막 촬영을 한 일본의 전형적인 중산층 주택을 돌아봤다.

돌아보면 추억 이상에 무언가를 일본에서 얻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욱일장은 아니지.”


도쿄다카라가 류지호가 일본정부로부터 양국의 상호 이해 촉진에 이바지한 공을 인정받을 수도 있도록 ‘욱일소수장’을 받을 수 있도록 해볼 수 있다고 넌지시 제안했다.

욱일장은 모두 6등급으로 나누는데, 그 중에서 4번째 등급을 받을 수 있단다.

문제는 욱일장이란 이름의 일본 훈장이 이완용을 비롯해 을사오적과 친일인사들이 받았던 훈장이란 점이다.

일본의 욱일장은 대체적으로 상대국의 수장,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증진시킨 고위 공직자 및 기업인들 그리고 일본에서 근무한 대사관 직원에게 주어지기도 하는 터라 이제 와서는 수훈을 해도 ‘나라 팔아먹은 놈’ 소리 듣지는 않겠지만, 왠지 찝찝했다.

이봉호 사장이 문화훈장으로 추서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외국인 단 7명만 받아서 쉽지 않을 거란다.

그 7명도 모두 미국 국적자들이었고.

지금까지 몇 나라에서 훈장을 받았다.

이러다 영화와 관련된 상보다 훈장이 더 많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 정도다.

각종 감사패는 벨에어 주택에 발이 치일 정도로 많이 굴러(?) 다니고 있고.


‘꺼림칙한 건 아예 안 하는 것이 맞겠지.’


혹시나 일본에서 문화훈장을 주겠다면 받고, 그 외에는 사양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일본정부가 기분 나빠 할 수도 있다.

애초에 후보 명단에 들지 않으면 된다.

그 정도는 일본의 지인들을 통해 사전에 조율할 수 있다.


✻ ✻ ✻


대형 음식점 정도에서 크랭크업 파티를 할 줄 알았다.

제작위원회에서 시내 특급호텔 연회실을 빌리는 깜짝쇼를 펼쳤다.

게다가 한국에서 WaW 엔터테인먼트 사장과 해외배급총괄까지 건너왔다.

가온그룹과 JHO Company 일본지사장, 도쿄 주재 수뇌부들도 총출동했다.

심지어 소프트인프라 회장을 비롯해 워너-타임, UPI 일본지사장도 찾아왔다.

나름 거물들이 참석하니 그 소식을 들은 유력자들이 얼굴을 비췄다.

제작위원회가 의도한 것 같지는 않다.

저절로 <군계> 크랭크업 파티가 류지호가 호스트인 사교파티가 되어 버렸다.


“우리 감독님 부하직원들 회식인 줄 알았는데, 비즈니스 파티장이네 완전히...”


새삼 류지호가 가진 이름값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이봉호 사장이다.

다들 즐기는 가운데 웃을 수만은 없는 이들도 있었다.

바로 <군계> 제작위원회 사람들이다.

무사히 촬영을 마쳤다지만, 작품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전편을 다 본 것은 아니지만, 오다가다 현장편집본 일부를 본 관계자들이 깊은 우려를 드러냈다.

너무 무겁고 진지하고 공격적이어서.

할리우드를 넘어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감독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흥행에 대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느와르 풍의 비극은 일본에서 잘 안 먹히는데.....’


<의리 없는 전쟁> 이후로 야쿠자 영화가 확고부동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군계>는 지나치게 예산이 높았다.

차라리 독립계 영화였다면 걱정을 하지 않았겠지만.

어찌 되었든 엎질러진 물이다.

촬영까지 모두 끝낸 마당에 억지로라도 유쾌한 척 해야만 한다.

한 동안 할리우드식 파티처럼 흘러갔다.

각 잡고 앉아서 높은 사람 순서대로 지루한 연설 듣고 그런 거 없었다.

그저 편하게 즐기고 놀았다.

문제는 높으신 양반이 출몰하면서부터다.

도쿄다카라 회장이 크랭크업 파티장에 나타나고, 푸지TV 고위 관계자도 모습을 드러냈다.

자유분방하던 파티분위기가 전형적인 꼰대 파티로 변해버렸다.


- 아, 아! 마이크 시험!


언제 준비했는지 마이크까지 등장했다.


- 감독님! 한 말씀 해주십시오.


짝짝짝.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보내며 류지호를 마이크 앞으로 이끌었다.


- ...음. 힘든 촬영에도 늘 웃음을 잃지 않고 함께해준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함께 담아내고자 하는 영화의 모든 부분들이 관객들께도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마지막 후반 작업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모두 수고 많았습니다.


이어 도쿄다카라 회장에게 마이크가 넘어갔다.


- 우리에게 <군계>는 <이니셜D> 등과 함께 WaW와 협력하는 세 번째 작품입니다. <이니셜D>가 크게 성공한 것처럼 류지호 감독님의 이번 작품도 잘 될 것이라 믿습니다. 에 또....


회장의 축하는 한참이 이어졌다.

다음은 한국에서 넘어온 WaW 엔터테인먼트의 정운규 사장이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 일본에서 처음으로 큰 투자금이 들었던 작품입니다. 그만큼 부담도 컸겠지만, 감독님과 제작위원회의 배려로 편안한 작업 환경에서 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일본 스태프들이 정운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에는 없는 다양한 시스템을 경험했다.

영화 전체를 스토리보드로 그리지를 않나, 복잡하고 난이도 있는 장면은 프리비주얼로 사전에 꼼꼼히 준비하고, 현장모니터로 모자라 현장편집이라는 기상천외한 방식을 사용했다.

리허설을 얼마나 철저히 하던지 현장에서 NG 컷 자체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어떤 영화든 누끼(모아찍기)가 필수다.

헌데 류지호와 촬영감독은 촬영여건, 배우 컨디션 등에 따라 셋업을 조정하고, 때로는 멀티카메라 운용, 심지어 립프로깅(Leapfrogging) 방식까지 능수능란하게 활용했다.

오랜 경력의 노련한 스태프라고 자부하는 일본 스태프들이지만, 류지호 감독과 한국의 촬영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해서 한 사람 한 사람 크랭크업 소감을 전했다.


- 작품 하는 동안 내내 즐겁게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촬영인데 마지막 같지 않은 느낌입니다. 무사히 촬영이 끝나서 좋고, <군계>가 관객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길 것이란 기대가 듭니다. 모두 수고 많았습니다.“


마에다 사다호가 점잖은 소감을 전했다.


- 촬영이 끝났다는 것이 너무 아쉽지만 제 마음 속에는 <군계> 팀들이 항상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다들 고생하셨고 잘 챙겨주셔서 늘 감사했습니다.


주인공 츠마부키 료타의 감회였다.


- 마지막까지 팀워크가 정말 좋았습니다. 팀 모두에게 감사드리며 후반작업까지 잘 마무리해 좋은 작품이 되길 기원합니다. 촬영이 끝났으니 이제부터는 제 본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몇 달 동안 너무 고리타분했었거든요.


아베 히카루의 유쾌한 소감에 장내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전반적으로 배우들은 영화에 대한 애정과 작품에 대한 남다른 각오를 전했다.


- 모두 수고했습니다. 건배!


건배사를 끝맺은 한중기 프로듀서가 잔을 높이 들자, 스태프들과 배우들도 감개무량한 얼굴로 잔을 들며 건배를 외쳤다.


“건배!”


피로는 어디 갔냐는 듯 모두들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입가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이 순간의 희열이야말로 영화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세계 어디나 영화판은 똑같다.

비록 일이 고되고 박봉이라 할지라도.


“건배!”


배우, 스태프 할 것 없이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연신 잔을 부딪쳤다.

그때마다 술이 넘실거렸고, 사람들의 얼굴색은 점점 빨갛게 무르익었다.

사케 한 잔 가지고 홀짝거리는 스태프는 없었다.

최영웅이 말아주는 폭탄주를 넙죽넙죽 잘도 받아 마셨다.

일본인과 영화인은 다른 모양이다.

스태프들이 주량을 초과해 술잔을 기울였다.

누군가 나서서 말려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의 폭음 문화를 잘 아는 조감독 윤박지가 최영웅을 말렸다.


“감독님.. 이제 그만....”


한편으로 묘한 구석도 있었다.

함께 어울리며 웃고 떠드는 가운데, 배우와 스태프의 경계가 명확했다.

그 사이를 넘나들며 잇는 존재는 몇 없었다.

츠마부키 료타의 소속사 상무는 류지호에게 말이라도 걸어보기 위해 계속해서 주변을 맴돌았다.

마침내 기회가 찾아오자.


“그래서 우리 호리프로모션 배우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늘 강조합니다. 스타병 걸리지 않은 개념 있는 배우들이 많습니다. 붓타 보셨죠?”


호리프로모션은 80년대 이전 야쿠자들이 업계에 득세할 때 혜성 같이 나타난 기획사다.

일본 매니지먼트 업체 최초로 증권거래소에 상장까지 시켰다.


“안녕히 가십시오.”


높으신 양반들이 파티장을 떠났다.

이후부터는 배우와 스태프들의 시간이다.

가온그룹과 JHO 일본법인 수뇌부들도 잘 어울렸다.

한국 촬영팀은 털털하고 가식 없는 태도로 여전히 스태프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슬슬 낙오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취한 사람이 생겨나고 집에 가는 사람도 있다.

츠마부카 료타가 류지호에게 다가왔다.


“감독님, 이제 이별이군요?”

“자주 일본을 방문할 거야. 네가 바쁘지 않다면 만나서 식사할 수 있을 걸.”

“배우로서 아직 부족한데, 잘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류지호는 농담조로 받았다.


“사실 연기를 헉 소리 나게 잘하진 않았어. 지독한 노력에 비해선 아쉬웠어.”


츠마부키 료타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죄송합니다.”

“농담이야. 너무 잘 해 주었어. 고맙다 붓타.”


분명 츠마부키 료타의 연기는 뛰어난 편은 아니다.

반면에 연기에 임하는 태도나 자세가 아주 좋았다.

이전 삶에서 왜 롱런 했지 알게 됐다.

성실함이 무기였다.


[내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분하고 부끄러워서 무력함을 느꼈습니다.]


막 배우가 되었을 때를 회상하며 츠마부키 료타가 했던 말이었다.

연기수업을 받은 정통파가 아니다.

스스로 연기를 체득한 스타일이라고 할까.


‘탈아시아급 배우까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만 발전하면 좋은 배우가 될 거야.’


그럼에도 스스로 자만하지 않도록 조언했다.


“연기력은 누가 평가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야. 모두가 같은 노력을 한다는 가정 하에 본다면 연기력이라는 건 종이 한 장 차이일 뿐. 난 기술을 뛰어넘는 것이 공감이고 소통이라고 생각해.”

“음··· 예. 명심하겠습니다.”


츠마부키 료타로서는 류지호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에게 류지호 감독은 특별했다.

처음에는 명성과 권위로 인해 높고 큰 벽처럼 느껴졌다.

촬영이 없는 날 어울려 보니 고향에서 알고 지내던 형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같은 아시아 문화권에서 자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일본 감독 중에는 배우에게 연기를 가르치려는 사람이 많았다.

헌데 류지호 감독은 자신의 연기를 지적하지 않았다.

대화로써 캐릭터의 이해를 도왔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가 풀리곤 했다.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함께 출연한 여배우 츠요시의 변신이었다.

그녀는 방송계에서 성격이 못 된 것으로 유명했다.

되도 않는 영어를 섞어 쓰며 스태프를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런 츠요시가 류지호 감독 앞에서 순종하는 양이 되어버렸다.

그녀를 따라다니는 분장·의상팀은 그녀의 스트레스 해소 도구였다.

하지만 <군계>를 하면서 그녀의 스탭들은 그 어떤 스트레스도 받지 않았다.

적어도 촬영현장에서는.


‘스마트하고, 신사 같은... 멋있는 형님이야.’


영화도 못 찍으면서 거만한 영화감독과 TV 프로듀서가 일본에 널리고 널렸다.

천상계에 있는 류지호 감독은 거만함은커녕 친절하고 겸손했다.

물론 가끔 불같이 화낼 때는 호랑이 같았지만.


“천천히 마셔.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 탈난다.”

“빨리 살 좀 찌워야 합니다. 안주도 많이 먹고 있습니다.”

“곧바로 영화 들어가는 거야?”

“3주 쉰 후에 또 영화 찍습니다.”


일본에서는 배우가 조금 떴다 하면 일 년에 3~4작품씩 한다.

거기에 드라마까지 한다.

주인공·조연 구분 없다.

일이 없어 불행한 것보단 좋단다.

일만 하니 직업 배우가 되어버린다.

그런 현실에 일본 연예인들은 크게 불만이 없다.

일본 연예기획사들의 소속 연예인에 대한 통제와 간섭은 말도 못한다.

소속사와 분쟁이 나면 연예계를 떠나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소속사의 파워가 너무 막강해 연예인이 노예처럼 여기지기도 한다.

다만 햇병아리 연예인 시절부터 꼬박꼬박 월급을 주며 소속감을 키워주고, 수익분배도 비교적 투명하다.

연예인은 소속사에 불만이 생겨도 좀처럼 계약을 해지 하는 법이 별로 없다.

조직을 떠나는 것을 배신으로 생각하는 일본인 특유의 소속의식 때문이다.


“일본 연예인 걱정해 줄 때냐?”


한국에서 ‘연예인X파일“이 큰 화제다.

한국 기획사와 소속 연예인의 관계도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매니지먼트 CHAN을 통해 서구식 에이전트 시스템을 만들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2차 가야지?”


호텔에서 파티도 어느덧 마무리 시간이다.

귀가할 사람은 귀가하고, 일부가 남아 근처 술집으로 몰려갔다. 결국 한국에서 온 스태프만 남아서 새벽까지 달렸다.

류지호도 점잔빼지 않고 함께 3차4차를 외쳤다.

그렇게 류지호가 연출한 아홉 번째 장편 영화 프로덕션이 마무리됐다.


작가의말

한 주 마무리 잘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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