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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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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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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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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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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군계(軍鶏). (8)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일본 스태프들도 한국의 충무로 못지않게 혹사당하고 있다.

촬영기간이 워낙 짧다보니, 6시에 종료되어야 할 촬영이 밤 10시까지 진행되는 일이 예사였다.

다음 날 새벽에 다시 촬영장에 나온다.

할리우드처럼 시간 외 근로수당을 지급하긴 한다.

그 액수가 류지호가 생각했던 것보다 형편없었다.

물론 한국의 영화 스태프보다는 상황이 좋다.


“괜찮습니다. 영화가 빨리 끝나면 곧장 다른 영화를 잡으면 됩니다. 저희 같은 스태프까지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칸토쿠상.”


류지호는 그저 황당할 따름이다.

<군계>를 하기 전만 해도, 그래도 일본 영화계가 한국보다 조금이라도 낫겠거니 생각했다.

막상 작업을 해보니 현장에서의 처우나 시스템이 매우 구시대적이었다.


“가장 큰 영화사가 제작하는 영화가 이러니, 독립제작사 영화는 도대체 얼마나 열악하다는 건지....”


김영복이 혀를 찼다.

류지호가 슬쩍 면박을 줬다.


“남의 나라 걱정할 때야?”

“나라가 뭐가 중요해. 영화밥 먹는 건 똑같은데.”

“형도 충무로에서는 A급이거든요. 대작만 하는 양반이 어디서 독립영화 코스프레를 하고 있어.”

“큰 영화만 한다고 영화판 걱정도 못하냐?”

“걱정만 하지 말고, 조수들에게 힘 좀 실어주지?”


김영복이 갑자기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구호를 외쳤다.


“재벌개혁! 노동3법 관철시키자!”

“영화노조가 민주노총 소속이었대?”

“노조쟁취!”

“형은 해당사항 없거든!”

“재벌개혁, 노조쟁취, 최저임금.”

“시끄러워. 얼른 가서 앵글이나 잡아!”


김영복이 ‘킥킥‘ 웃으며 카메라를 향해 걸어갔다.

이전 삶보다 한국영화산업 노조 결성이 1년 앞당겨 출범했다.

현재 표준근로계약서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이전 삶에서는 대기업 투자배급사를 협상 테이블로 불러오는 것조차 힘겨웠던 영화노조였다.

류지호로 인해 많은 것이 달라졌다.

한국영화 최대의 투자제작배급사 WaW가 적극적으로 단체협약에 나서고 협력사라고 할 수 있는 무비서비스 등이 뒤를 이었다.

비록 대기업 계열 투자배급사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2012년에나 체결되었던 ‘노사정 협약‘이 최소 4~5년 앞 당겨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향후 체결될 표준근로계약서 등 단체협약을 지키지 않는 제작사에는 투자배급을 심각하게 고민할 것이다.”


국내 최대 투자·배급사인 WaW 엔터테인먼트가 공공연하게 단체협약을 지지했다.

그러니 영화제작 현장에서는 도리가 없다.


“지금까지 영화계 기득권에게 돈은 시간이었지만, 스태프들의 시간은 덤이었다. 그 같은 영화판의 야만적 논리가 이번 협상을 통해 모두에게 시간은 똑같이 소중하다는 단순한 진리를 일깨우며, 방만하고 무질서하게 운영되어 왔던 영화제작현장에도 일대 개혁을 가져올 것이라 믿는다.”


사용자측이라고 할 수 있는 제작가협회는 영화산업의 특수성을 고려해 유연근무와 예외적인 계약을 놓고 노조측과 협상을 이어가고 있다.

일반적인 근로 환경에서는 유연근무제에 대한 찬반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영화산업에는 특수성이 분명 존재하기에 찬반 의견이 명확하기 갈리지 않았다.

영화는 작품별 계약으로 근무하고, 보통 1년에 3~6개월 작업한다.

유연근무제를 잘 활용하면 사용자와 근로자 모두 효율적인 근무 환경을 만들어갈 수 있다.

영화촬영 현장은 주 52시간 근무제를 지키기 그리 어렵지 않다.

휴식일 보장도 마찬가지다.

제작 시스템만 잘 뿌리 내리면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연출팀·제작부·미술팀 등 사전에 준비하는 부서의 경우는 적용하기 쉽지 않다.

결국 시스템으로 해결 할 수밖에 없다.

프로듀서와 감독이 더 많이 일해야 한다.

각 부서별로 분업화·전문화가 정착하게 되면 해결방안이 생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인건비 상승으로 바로 이어진다고 제작자들이 반발했다.


- 할리우드 영화는 1,000억 원이 넘는 예산의 영화도 5달 안에 프로덕션을 마칩니다. 일본 역시 120억 대 영화를 2달 만에 프로덕션 끝마치고요.

- 그들은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지 않습니까?

- 지자체 영상위원회에서 지원 잘해줘, 가온그룹이 아시아 최고 인프라 깔아줘, 반나절이면 어디든 이동할 수 있는 좁은 땅덩어리에 살고 있어, 밥차 맛있어, 배우들이 스케줄 풀로 빼줘. 뭐가 부족합니까?

- .....

- WaW는 90년대부터 주 65시간(주 6일) 정도 근무하는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10시간 추가 휴식보장만 지켜지면 52시간 근무, 크게 불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만.

- 충무로 여건상 촬영기간이 더 늘어날 겁니다.

- 누군가 책임을 져야지요. 프로듀서나 감독은 뭐 하는 사람들이지요? 영화의 퀄리티는 프리프로덕션에서 프로듀서가 어떻게 하는가에서 결정되고, 연출력은 프로덕션에서 나오지요. 제작실장이 영화의 성패에 책임집니까? 조감독이 연출합니까?


WaW 엔터테인먼트 2대 사장으로 취임한 정운규의 일침이었다.

정운규는 가온웨딩 초창기 입사해 WaW 엔터테인먼트 사장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당초 WaW 엔터테인먼트 회장으로 유력했던 부사장 주영호는 종합엔터테인먼트로 개편된 스펙트럼 홈 엔터테인먼트 사장으로 옮겨갔다.

어쨌든, 가온그룹의 처사에 제작사들이 불만이 많았다.

그럼에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가장 많은 영화에 투자·공동제작·배급하고, 심지어 극장까지 업계 1위를 자랑하는 가온그룹을 거스를 수는 없었으니까.

대기업의 폭거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게 성토되고 있다.


- 먼저 산업화를 정착시키고 그 다음이 근로환경 개선 또 처우 개선을 해야지. 아직 한국영화는 산업화가 되지 않았다.


WaW 엔터테인먼트는 구시대적 발상이라고 반박했다.

동시에 해도 된다.

그것도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실제 WaW 엔터테인먼트는 10년 전부터 자체 표준근로계약서를 채택해 스태프들의 기본권을 보장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막상 해보면 안다.

갑자기 인건비가 대폭 상승한다든가, 충무로 제작 현장에 뭔가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단, 자체 제작시스템이 잘 갖춰진 프로덕션에 한 해서.


‘쥐뿔도 모르는 것들이 프로듀서입네, 대기업 투자파트 실장입네 깝죽거리는 것들만 득실거리지 않는다면....’


일반 스태프만 직업적으로 안정된다고 끝이 아니다.

헤드 스태프들도 역량을 더 끌어올려야 한다.


‘무능한 헤드 스태프로 인해 길바닥에 버려지는 돈이 얼마인데....’


그러기 위해서 WaW와 무비서비스 같은 영화인 중심의 메이저가 분발해야 한다.

현장 경험 없는 책상물림들이 감내라 배내라 하다가 영화를 망친 후 감독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풍토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2000년 전까지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면 투자자와 제작자도 함께 책임을 졌다.

대기업이 영화판을 좌지우지 하게 되면서 투자배급사는 은근슬쩍 책임에서 빠지고 흥행 실패 책임을 오로지 감독만 진다.

투자배급사 소속 관계자들이 기획부터 편집까지 전과정에 관여해 사공짓거리를 하며 영화를 망쳐놓았음에도.

충무로에 선무당들이 넘쳐난다.


‘영화가 좀 된다싶으니까.....’


암튼 안정적으로 매년 200여 편의 크고 작은 한국 영화가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

3억 미만 영화부터 100억 대 영화까지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수 있는.

현장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영화노조 회원 3,000여 명, 홍보마케팅 등 영화업계 1만 2천여 명의 영화인들이 최소한의 수입이 보장되는 제작편수가 대략 200여 편이다.

실력이 없어 도태되거나 낙오하는 이들까지 챙길 수는 없지만.

참고로 가온그룹 산하에 노조가 있는 자회사는 건설과 금융부문이다.

본래 강성 민노총 산하에 있다가 친기업 성향의 한노총으로 소속을 옮겼다.

경영진에서는 어떤 압력도 의견도 내지 않았다.

노조가 자발적으로 민노총과 결별했다.

본래가 사업장 규모에 비해 노조원은 그리 많진 않았던 노조다.

한국영화계 현안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촬영준비가 끝이 났다.


“스탠바이!”


김영복의 외침에 류지호가 잡념에서 빠져나왔다.

한국영화 부문은 신임 사장이 알아서 잘 해나갈 터.

영화노조와의 단체협약으로 WaW와 제휴영화사들이 곤란할 일은 전혀 없다.

한국영화 전반 40%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WaW는 별 다른 이질감 없이 단체협약에 안착할 수 있다.

영화사업에 첫 발을 내딛을 때부터 조금씩 오늘을 대비해왔으니까.


“자, 다시 시작해 봅시다! 간밧데구다사이!”


나루시마 료는 TV 속에서 온갖 환호와 사랑을 받는 스기와라가 마뜩치 않다.

아니,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자신은 존속살인 패륜범죄자로 사회 밑바닥에서 벌레처럼 살고 있다.

스기와라는 가라데를 통해 대중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피해의식, 열등감, 분노, 증오심....

더 이상 저 오만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시선을 보고 싶지 않다.


[...죽여 버리고 싶다.]


야쿠자 야마자키는 마치 배신, 모략, 거짓말 등 악으로 가득 차 있는 악마 벨리알 같다.

증오심에 불타 있는 나루시마 료에게 야마자키가 권총 한 자루를 내민다.


[쓰레기에게는 쓰레기다운 방식이라는 게 있다. 료.]

[왜? 내가 저 놈에게 질 것 같아?]

[AK-47같은 것도 필요 없어. 그저 손가락만 한 번 당겨주면.... 피유! 그걸로 끝.]


나른하지만 달콤한 음성이다.

목소리는 자신을 나타내는 제2의 얼굴이다.

사람의 생김새가 각자 다른 것처럼 목소리도 개개인마다 자신의 색깔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 가지고 있는 능력 이상의 평가를 받거나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경우가 많다.


“좋은 목소리는 듣는 이에게 최면을 건 듯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다,”


오죽하면 그런 말까지 있을까.

톰 메이포더는 세계적인 미남 축구스타 베콤과 절친이다.

그를 <미션 임파서블>에 출연시키려고 했다.

무산되고 말았다.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우월한 외모에 대한 환상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을 얇은 목소리 때문이다.

류지호는 그와 관련한 일화를 듣고 배꼽을 잡고 웃었다.


“신은 베컴에게 축구재능과 외모를 주었지만 제2의 얼굴이라는 목소리는 주지 않았어.”


과거로 돌아온 후 류지호는 매일 단전호흡을 하고 있다.

악기마다 울림통이 다르듯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소리를 내기 위한 울림통의 크기와 기능은 다를 수 있다.

류지호는 후천적인 훈련과 노력으로 목소리를 좋게 바꿨다.

원어민 수준의 영어 발음이 아니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발음과 관련해 지적을 받은 적이 없다.

류지호 특유의 낮지만 귀에 잘 꽂히는 목소리를 무시하지 못한다.

암튼 야마자키를 연기하는 배우는 TV드라마에서 낯이 익은 배우다.

이봉호 사장이 추천했다.

재일동포 출신이다.

현재는 귀화해 일본인으로 살고 있지만.

슈퍼스타도 조선인임을 밝히는 순간 일감이 끊어지는 나라가 일본이다.

차라리 재일이 아니라 한국에서 건너오는 편이 일본에서 활동하기가 편하다.

한국에서 온 연예인은 외국인.

재일조선인은 이등 시민이니까.

왜 일본이 이지매(집단 따돌림)의 본산인지를 알게 해주는 일면이다.


“붓타, 이번에는 권총을 실제 손으로 쥐어.”

“옛!”


원작에서는 도키치라는 똘마니 캐릭터가 있다.

류지호는 그 캐릭터를 두목인 야마자키와 합쳐버렸다.

야마자키는 영화 속에서 가두우익 단체를 운용하는 야쿠자다.

시골에서 올라온 애송이 야쿠자 졸개에게 습격당해 어이없는 죽음을 맞는 그런 인물이다.

야마자키는 <엔젤 하트>의 사이퍼, <파이트 클럽>의 타일러를 연상시킨다.

주인공을 자꾸만 충동질한다.

매우 은밀하고 능청스럽게.


[마음이 죽으면 몸도 죽는다.]


원작 만화를 관통하는 명대사다.

영화 <매트릭스>의 중요한 설정이기도 했고.

류지호판 <군계>에서는 여러 인물들이 저 대사를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변용한다.


롯본기힐즈 모리타워 지하 주차장.

섭외가 쉽지 않은 장소에서 중요한 장면을 촬영하게 됐다.

처음으로 두 주인공이 마주하는 장면이다.

아베 히카루는 이 장면에서 강렬한 인상을 선보여야 한다.

격투기 최강자이자, 거대한 호랑이를 품고 있는 사내를 연기만으로 뿜어내야 한다.

원작 만화에서 꽤나 임팩트가 강한 장면이다.

그럼에도 영상에 그대로 옮길 경우 자칫 평이해 보일 수 있다.


- 영상에 슬로우를 걸 것인가.

- 스기와라 뒤로 포효하는 거대한 호랑이를 CG로 넣어볼까.

- 롱 쇼트, 롱 테이크로 잡은 화면에서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강조해볼까.

- 약간 부감 풀 쇼트로 잡아서 스기와라의 그림자를 거대하게 묘사하고 왜곡시켜 보여줄까.


매우 중요한 이 장면의 콘티를 짜기 위해 류지호는 몇날 며칠 머리를 쥐어뜯은 바 있다.

무엇을 궁리해 봐도.... 노멀(Normal)!

스기와라는 일상적인 걸음걸이로 걸어와 아무런 눈길도 주지 않고 나루시마 료를 지나쳐간다

아무것도 안하지만, 존재감만으로 나루시마 료를 압도해야 한다.


‘괜한 고집인가....?’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것을 배우에게 요구하다니...

류지호는 왠지 자괴감이 들었다.

아마추어나 하는 디렉션이기 때문이다.

NG가 몇 번이나 날 것을 감수하고, 힘차게 ‘슛‘을 외쳤다.


‘어?’


촬영이 시작되자, 아베 히카루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얼핏 봐서는 리허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인데.

뭔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두 사람 사이의 신장 차이에서 오는 착시인가?’


츠마부키 료타는 171Cm, 아베 히카루는 190Cm의 신장이다.

옆으로 길쭉한 1.35:1 화면비 왼쪽 구석에 약간 구부정하게 서있는 츠마부키 료타의 뒷모습을 위치시켰고, 화면 전체적으로 텅 빈 지하주차장 풍경으로 채워져 있다.


띵!


저 멀리서 엘리베이터 알람이 메아리처럼 들리고.


뚜벅뚜벅.

또각또각.


스기와라에게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에미가 나란히 걸어온다.

롱 테이크다.

처음에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

지켜보다가 저절로 롱 테이크가 되어버렸다고 할까.

암튼 점점 두 연인의 모습이 명확해지려는 상황에서.


슥.


츠마부키 료타가 구부정했던 어깨를 편다.

곧 폭풍이 몰아닥칠 상황!

모니터만 보고 있자면 별 것 없다.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을 그저 분위기로 끌고 가고 있다.

누가?

아베 히카루가!

현장 모니터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현장의 공기라는 것이 있다.

마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있는 것 같은 묘한 체험이다.

류지호는 가장 친숙한 차이니즈 극장의 대형 스크린을 머릿속에서 그려보았다.

현장 모니터가 아니라, 자신의 두 눈으로 들어오는 영화 속 그림을 상상의 스크린에 투영시켰다.


‘음악을 넣어?’


진부하고 상투적이다.


‘구둣발 소리가 엠비언스를 뚫고 휘몰아쳐?’


공포영화 클리셰에 가깝다.


절레절레.


류지호는 다시 카메라 너머에 집중했다.

그것으로 성에 차지 않아 모니터 스테이션을 빠져나왔다.

카메라 옆에 서서 배우들이 장악하고 있는 공간의 공기를 함께 호흡했다.

촬영 어시스턴트가 카메라에 달려 있는 미니 모니터를 빼서 류지호 눈앞에 내밀었다.

류지호는 그것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


나루시마 료가 스기와라를 죽일 듯이 쳐다본다.

허용 범위 안에 있는 감정 표현이다.

컵에 담긴 우유가 찰랑찰랑 넘칠 듯 말 듯.

딱 그 상태다.


‘셋업을 바꿔 촬영할 때, 지금의 저 기세를 츠마부키 료타가 유지시킬 수 있을까.’


류지호는 자신할 수 없었다.

때문에 커트를 자르지 않았다.


스기와라 커플과 나루시마 료의 거리가 점점 좁혀진다.


으어어헝!


포효다.

어디선가 환청이 들린 듯 싶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깊이 몰입해 만들어낸 류지호의 망상이다.

유치하다.

영화의 톤 앤 매너에서 너무 튄다.


스윽.


스기와라 커플이 나루시마 료를 그대로 지나쳐버린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본 스태프들이 감독을 힐긋거렸다.

‘컷’ 소리가 나오길 기다렸다.


“......?”


아무런 조짐이 없다.

촬영감독이나 퍼스트 역시 요지부동이다.

배우들?

감독의 사인이 나지 않으니, 계속 연기를 이어갈 수밖에.

아시아 배우들에게는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할리우드였다면 배우들이 약속된 디렉션까지만 하고 그대로 연기를 풀어버렸을 터.

아닌 배우들도 있지만, 보통은 그렇다.


“.....!”


스기와라와 모에미는 대기하고 있던 호르셰에 올라탄다.

모에미가 시동을 거는 스기와라를 쳐다본다.

원래는 다이얼로그가 있다.

두 배우 모두 잊었다.

감독과 촬영감독이 우두커니 서있는 나루시마 료의 뒷모습을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감독이 자신에게 손짓을 하고 있다.

아베 히카루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아베 히카루가 혹시나 싶어 손가락으로 카메라 앞 쪽을 가리켰다.

감독의 손이 재촉한다.

맞는 모양이다.

얼른 차를 몰았다.

리허설에서 약속된 바가 전혀 없던 블라킹이다.

감독이 하라면 하는 것이 예의.

아베 히카루가 차를 몰아 츠마부키 료타를 다시 한 번 스쳐지나간다.

잠시 후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다.


끼이익.


저 멀리서 주차장 바닥에 타이어가 미끄러지는 소리만 몇 번 들려올 뿐.


“컷! 형! 빨리! 붓타!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


류지호의 재촉에도 김영복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김영복이 얼른 카메라를 트라이포드에서 분리해 들고 달렸다.

두 사람은 찰떡이다.

퍼스트 역시 배터리를 들고 따라 달렸다.

한중기 피디는 츠마부카 료타 뒤편에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들을 재빨리 양옆으로 물러나게 조치했다.

김영복이 핸드헬드 기법으로 츠마부키 료타의 얼굴을 잡았다.

츠마부키 료타는 감정이 꺼지지 않고 유지 중이다.

핏발로 붉어진 눈으로 무섭게 바라보는 나루시마 료에게서 흉포한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저 감정이 식기 전에 얼른....


“MOS(Mute Of Sound)... 엔드 슬레이트.... 카메라....!”

“롤.”

“고....”


김영복의 핸드헬드 카메라는 핏발 선 눈으로 공포, 혼란, 당황을 마구 분출하는 나루시마 료를 침착하게 잡아냈다.

아직 연기가 미숙한 츠마부키 료타다.

일본의 젊은 배우들이 대체로 표정을 쓰는 법이 서툴다.

오랜만에 좋은 클로즈업을 건졌다.


“오케이! 오츠카레사마(수고했어), 붓타.”


길고 길었던 촬영이 끝났다.

실제로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아니다.

다만 심리적으로 오래 걸렸다.

스태프들은 방금 촬영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솔직히 김영복조차도 잘 몰랐다.

오로지 감독만이 종종 촬영현장에서 겪는 직관의 영역이다.

사실 류지호조차 설명해보라고 하면,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불현 듯 찾아오는 어떤 직감 같은 것이니까.


“붓타, 계속 갈 수 있겠어? 아니면 조금 쉴까?”


우물쭈물 댄다.

쉬고 싶지만 말을 못하는 것이다.


“충분히 쉬고 와.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꾸벅.


츠마부키 료타가 인사하고 터덜터덜 배우 대기 장소로 걸어갔다.

매니저와 분장, 의상팀이 호들갑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

김영복 기사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끝난 거 아니었어? 더 찍게?”

“달리 깔 수 있지?”

“달리?”

“스기와라 시점 쇼트로 달리로 밀고 들어가는 거 하나. 나루시마 료 목덜미로 땀 흐르는 거 하나, 나루시마 료의 주먹 하나 이렇게 따놓자.”

“야쿠자는 차 안에 넣을 거야, 뺄 거야?”

“빼자. 나루시마 료로 달리가 밀고 들어가는 커트 탑에 야마자키가 걸리는 정도가 좋겠어.”

“나중에 그 야쿠자 단독도 따고?”

“응.”

“스기와라 커플은 안 찍어?”

“없어도 될 것 같아.”

“진짜?”

“편집에서 장면 하나를 바꿔치기 해야 될 것 같아.”


그 말을 남긴 류지호가 현장편집 기사에게 향했다.

김영복은 그립팀에게 달리 설치를 지시했다.

촬영팀이 분주하게 새로운 셋업을 준비하는 동안 현장편집 기사가 류지호의 요구에 따라 바쁘게 노트북 마우스와 키보드를 조작했다.


“이렇게 가려고? 호텔 지하주차장하고 너무 튀는 거 아냐?”


어느새 김영복이 다가와 참견을 했다.

류지호는 듣는 둥 마는 둥 제 할 일에 집중했다.


“대성회관 인서트 있으면 아무거나 넣어봐.”

“나이트 씬으로 붙이면 될까요?”

“이왕이면 밤 인서트가 낫겠지.”


현장편집 기사가 순식간에 인서트 하나를 찾아 붙여서 보여주었다.

일본 스태프들 입장에서 언제 봐도 신기한 모습이다.

영화를 촬영하는 동시에 뚝딱 현장에서 편집을 하는 풍경은 여전히 적응이 잘되지 않았다.

일부 스태프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그렇다고 보여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은근슬쩍 어깨 너머로 보는 것은 감질나서 차라리 안 보는 게 났다.


“대강 이런 편집이 되지 않을까 싶네.”

“웬일이래? 압축하지 않고 친절하게 풀어주길 다 하고.”

“원작 만화를 본 관객들은 우리가 촬영한 걸로 확 와 닿을 거야. 일반 관객들은 크게 임팩트가 없을 것 같아서. 약간의 개연성을 부여해야 할 것 같아.”

“그렇긴 하지.”

“스기와라 커플은 따로 안 찍는 걸로. 콜?”

“콜!”


류지호의 촬영현장은 피드백이 빠르다.

시간낭비가 거의 없는 편이다.


털썩.


류지호가 자신의 디렉터스 체어로 돌아와 앉았다.

한숨 돌릴 틈이 생겼다.

달리도 깔아야 하고, 배우도 좀 더 쉬게 해주는 편이 좋다.

오늘 찍을 분량이 많이 남아있기도 했고.

잠시 긴장감을 내려놓을 짬이 났다.

자신의 의자를 가져온 김영복이 류지호의 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내가 가만 보니까. 넌 영화 찍는 기계 같아.”

“.....?

“그것도 영화 잘 찍는 성능 좋은 기계.”

“내가 다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인간적으로 다작은 맞잖아. 비슷한 퀄리티의 영화를 매년 내놓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관객들은 몰라주겠지만. 업자끼리는 모를 수가 없지.”

“시스템의 힘이지 뭐.”

“그걸로 설명이 다 안 되지.”

“올 일본 스태프들로만 꾸려서 작업했으면, 지금처럼 진행하지 못했을 걸? 내가 형을 몰라 형이 날 몰라. 현장편집 기사도 일부러 손이 빠른 친구를 불러왔고. 무술팀도 영웅이가 왔잖아. 일본 유학파 한 피디도 감독 마인드가 있는 프로듀서라 나와 쿵짝이 잘 맞고.”

“따뜻한 휴머니즘 영화는 생각 없어?”

“<엠바고>에서 했잖아.”

“그게 따뜻하냐? 졸라 우울하지.”

“할 거야. 언젠가.”

“그게 언제냐고?”

“다음 작품이 될 수도 있고, 한 50대 넘어서 할 수도 있고.”

“마약 안 하지? 미국에서....”


류지호가 무슨 개소리냐는 듯 김영복을 쳐다보았다.


“주제넘은 말일지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풀 악셀 밟고 질주만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커브길 나오면 고꾸라질까봐?”

“사람 앞길이라는 게..... 무당도 자기 앞날은 못 맞추고 죄다 틀린다던데.”

“다음 작품까지 하고 조금 속도를 줄여보려고.”


김영복이 반색했다.


“생각 잘 했어. 창작자는 잠시 휴지기를 가질 필요도 있어. 리프레쉬 차원으로다가.”

“고갈 된 게 있어야 다시 채워 넣지.”

“밧데리 다 닳을 때까지 기다렸다 충전하냐?”

“하긴 리튬이온배터리는 완전 방전 후에 충전하지 않아도 오래 사용할 수 있으니까. 납축전지나 니켈-카드뮴전지는 배터리가 완전 방전되지 않은 채 충전을 하면 메모리효과라고 하든가? 배터리의 실제 용량이 줄어드는 현상이 발생한다고 하지. 리튬이온배터리는 메모리효과가 없어 자유롭게 수시로 충전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하여간 쓸데없는 건 진짜 많이 알아. 누가 감독 아니랄까봐.”

“알아두면 쓸데 하나 없는 잡지식 빼면 시체요.”


김영복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이고. 또 가서 밥값 해야지.”

“헤드 풀고 쉐이키캠 느낌 한 번 테스트해줘.”

“오냐~”


류지호의 요구에 따라 김영복이 카메라와 트라이포드를 고정시켜주는 고정 레버를 풀고 카메라를 슬쩍슬쩍 움직여봤다.

결국 이 방식은 탈락했다.

스기와라 정면을 향해 달리를 활용하는 기법 중에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줌 앤 달리 아웃(Zoom In & Dolly Out)이다.

서서히 다가오는 뒷배경 때문에 나루시마 료의 충격과 공포를 극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 때 영상 분야에서 유행처럼 휘몰아쳤던 시기가 있었다.

고로 신선도가 떨어진다.

때로는 노멀하게 찍는 것이 특별해지기도 한다.

카메라 기교를 최소화한 상황에서 연기, 사운드, 조명만으로도 충분히 의도를 전달할 수가 있다.

그런 걸 잘해내기가 무척 어려워서 그렇지.


‘자식이, 무쇠팔 무쇠다리도 아니고... 쉬었다 가면 좋겠구만.’


김영복은 류지호가 매우 영민하고 뛰어난 영화 예술가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다만 상업영화를 찍으면서도 지나치게 장인정신을 발휘한다는 점이 걱정이다.

계속해서 ‘센 영화‘만 작업하다보면, 정신이든 마음이든 황폐해질 수 있을 테니까.

비워야 채운다는 말이 있듯.

류지호가 한 번 쯤 쉬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 위대한 감독이 되기 위해 중간점검을 해보는 시간을 갖길 바랐다.

정작 류지호 본인은 인생은 짧고 할 일이 너무 많아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하건만.

그를 아끼는 이들은 지치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한다.

김영복이 류지호를 볼 때면 느끼는 것이 있다.

예술가란 사람은 절대 타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또 집요하면서 어떤 면에서는 무서운 사람이라고.

뛰어난 감독들의 공통점이 있다.


‘더럽게 독하다는 거지.’


김영복이 접해본 영화감독 중에서 가장 독하고 집요한 이가 바로 류지호다.

앞으로도 그 부분은 변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페이스 조절을 하길 바랐다.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PS. f8608_yjchoo74님 후원감사드립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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