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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님의 서재입니다.

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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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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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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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7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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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5쪽

301화

DUMMY

“저 잘했죠?”


안 박사는 애교를 한껏 떨며 품 속으로 비집어 들어오는 계전아를 막지 않았다. 계전아는 흡사 쓰다듬을 원하는 강아지나 고양이와 같은 태도로 안 박사를 초롱초롱 바라본다.


오늘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인천에 왔다. 이제까지 경성에서만 집회를 열었지만, 이제는 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자 그가 화교자본의 가장 추악한 소굴이라고 소리높여 성토한 인천 지나정으로 원정을 가보자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계전아는 이때 뛸듯이 기뻐하였다. 안 박사가 그녀에게 직접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직접 앞장서서 중국인 거리 바로 앞에서 이곳에서 꺼지지 않으면 지나정대학살을 일으키겠다고 선언하라고 말이다. 지나정 앞 시위는 이미 인천경찰서에서 허가를 받은 것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고 하였다. 만약 경찰이 저지하려 하면 저항하지 말고 해산하라 했다. 이는 오직 안 박사에게 절대적인 열성을 바치는 그녀를 중히 쓴다는 표시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러나 계전아 양이 더없는 행복감을 느낀 이유는 이것만은 아니었다. 안 박사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경성으로 돌려보내고 자신만 잠깐 인천에서 여관을 잡아 유숙하고 싶다 한 것이었다. 그리고 시위가 끝나면 시위대와 헤어져 자신이 묵는 곳으로 와서 보고해 달라 하였다. 이에 계전아 양은 지레 짐작했다. 이것은 분명, 나의 사랑하고 경애하는 안호정 박사님이 나와 하룻밤을 보내자는 뜻이로구나!


그래서 계전아는 안 박사가 시킨대로 다 했다. 시위대를 이끌고 지나정 앞에 도달하여 지나정대학살을 일으키겠다고 한바탕 악을 썼다. 중국인들이 분노로 떠는 모습을 보고 통쾌해했으며, 그 자리에서 저지선을 형성한 일본 경찰이 너무 심하다고 뭐라 하자 소리만 좀 더 지르고 물러났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도 계전아를 이 모임에서 사실상 안 박사 다음으로 여겼기에 그녀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경찰의 해산명령에 잠시 항의하긴 했지만 바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인천역으로 향했다. 중국인 혐오라는 공통분모로 뭉친 이들에게 지극히 열성적이며 짱꼴라를 입과 손으로 두들겨 패고 머리끄덩이를 잡는데 물불을 가리지 않는 계전아 양은 그들의 딸이자 여동생과 같았다. 계전아는 그를 살갑게 대해주는 이들을 인천역에서 작별하고 바로 콧노래를 부르며 그 여관으로 달려갔다.


사실 계전아는 여관에 도착하고 나서 다소 실망했다. 이곳은 인천 중심부에서 한참 떨어진, 부천과의 경계선에 있는 매우 허름한 여관이었기 때문이었다. 인천에는 더 고급스러운 호텔도 여럿 있는데 왜 이런 곳에 방을 잡았을까? 내 정조를 박사님에게 주기에는 너무 분위기 없는 곳 같은데······.


하지만 계전아는 아무래도 남의 이목을 피해 밀회하기에는 좋은 곳이라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 납득하며 사뿐히 여관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안 박사가 알려준 호실로 들어가 다 시킨 대로 했음을 보고하고 그의 품에 와락 달려든 것이다. 계전아는 가슴이 뛰어 미칠 것 같았다. 평소 안 박사는 자신이 이렇게 달려들면 진지한 얼굴을 하며 밀어내고는 아직 전아는 어리다고만 했었다. 부루퉁해져서 입술을 삐죽 내밀고 심통을 부리거나, 아니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애교를 부려도 소용이 없어서 애간장이 바싹 타들어갔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자신을 거리낌없이 받아주는 게 아닌가.


그리하여 계전아는 안 박사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안 박사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품에 달려든 그녀를 껴안아주지도 않았다. 계전아는 안 박사가 왜 이러나 하고 생각하다, 분명 박사님이 자신이 이러니 부끄러워하는 게 분명하다고 속으로 웃었다. 한번 몽당치마 자락을 허벅지까지 올려보면 안 박사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상상하며 쿡쿡 웃던 그때, 안 박사가 그녀를 밀어냈다.


“전아. 내 말을 잘 들어.”


계전아는 그러는 안 박사를 보고 놀랐다. 안 박사의 말투는 대단히 진지하였고, 표정은 놀라우리만치 복잡하였다. 뭔가 커다란 망설임이, 뭔가 해서는 안될 일을 해야 할때의 망설임이 서려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프랑스의 소녀영웅 잔다르크 이야기를 들려준 걸 기억하지?”


“예! 기억해요!”


계전아는 안 박사를 만났던 때 구라파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냐고 물었었다. 서양옷을 입고 서양 화장품을 바르며 모던걸 행세를 하던 그녀였건만 퇴학당하리만치 공부와는 담을 쌓은 그녀였기에 다른 모던걸들과 어울리면 그 얄팍한 지식수준이 드러나던 터였다. 그리하여 은근히 무시당하며 씩씩거리던 그녀였기에 독일에서 유학한 안 박사의 지식을 받아들이는 건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에도 매우 좋은 일이었다.


그 물음에 안 박사는 프랑스와 영국 간 벌어진 백년전쟁의 영웅 잔다르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프랑스가 영국의 손에 멸망의 위기에 놓였을 때, 기도하다가 신의 계시를 받은 오를레앙 동레미 마을의 소녀 잔다르크가 분연히 일어섰다고. 잔다르크는 아직 왕위에 오르지 못한 프랑스 왕세자를 만나 자신이 계시를 받았음을 말하며 그를 설득해 프랑스 병사들 앞에 서며 영국군을 무찔렀다고. 하지만 그녀를 두려워한 사람들의 배신으로 영국군에 넘겨져 화형을 당했다는 이야기. 계전아는 그 이야기를 듣고 감동해 소리내어 울었었다.


“잔다르크가 화형을 당한 건 그녀에게는 크나큰 비극이었지. 하지만 그건 프랑스인들을 분노케 하여 하나로 뭉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 것도 기억하지? 그 덕에 프랑스는 영국을 상대로 승리했고 영원히 바다 저편으로 내몰을 수 있었어.”


“예! 그것도 기억해요!”


“그래. 잘 아는구나.”


그렇게 말하는 안 박사의 표정은 기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웃는 낯도 아니고 우는 낯도 아닌, 그 두게가 괴이하게 뒤섞여 있었다.


“전아는 참 용감하고 열심히지. 내가 다 알아. 저 추악한 짱꼴라 중국놈들에게 앞장서서 맞서왔지. 우리 운동에서 전아만큼 열성적인 사람은 없어. 전아는 정말인지 우리의 잔다르크로 불릴 자격이 있어. 다른 사람이 안그렇다고 생각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단다.”


“정말요? 진짜요? 제가요?”


계전아는 그 말에 너무나도 기뻐서 방안을 펄쩍펄쩍 뛰어다닐 뻔했다.


“그래. 전아 양이 아니면 누가 잔다르크라 불리겠어? 하지만 말이야······. 전아가 완전히 잔다르크로 거듭나려면······. 거쳐야 할 마지막 단계가 있어······.”


“무엇인가요? 전 박사님이 하라고 하면 뭐든 할 거여요! 그러니 말씀만 해 주시어요!”


흥분한 계전아는 안 박사의 안면이 기묘하게 흔들리는 것도 보지 못한 채 그저 들뜬 목소리만 낸다.


“잔다르크는 지금······. 오를레앙의 성처녀로서······. 영원히 기억되고 있지.”


안 박사의 말투가 이상해졌다. 말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느낌이었다.


“프랑스의 애국애족을······.. 상징하는 표상으로···... 전아도······. 그렇게 될 거야. 우리 운동의 성녀로서······. 영원히 기억될 거라고······.. 딱 마지막 단계만······.. 거치면 돼.”


“아이 참! 뜸들이지 말고 말씀해 주시어요!”


안 박사가 하였던 말을 느릿느릿하게 또 하니 성질 급한 계전아는 답답해져서 성화를 낸다.


“그 마지막 단계가 무엇인가요?”


“지금······ 알게······ 될거야······”


닫힌 여관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그 소리에 안 박사는 표정을 일그러트리고는 밖으로 들어오라고 말한다. 쩔걱 하고 낡고 녹슨 경첩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방 안으로 건장한 사내 네다섯명이 우르르 들어왔다. 하나같이 머리를 짧게 깎고 험상궂은 인상을 한 자들이었다.


계전아는 갑자기 처음 보는 이들이 들어오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나같이 무섭게 생긴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는 얼굴에 흉터자국이 있는 사람도 보여서 가슴이 선뜩했다.


“누······ 누구여요? 이 사람들?”


안 박사는 계전아의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전아는······.. 영원히 기억될 거야······. 우리의 성녀로······. 우리 운동의 성녀로······.. 짱꼴라들에게 맞서는 성녀로 말이야······.”


안 박사의 떨리는 목소리에, 전아는 이제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불길함을 느끼고 말았다.


“무슨······. 말이에요?”


“조금만 참으면 돼······. 조금만 참아서······. 이 단계만 거치면······.”


안 박사는 그러고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문 밖으로 나가버리고 만다. 차마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볼 수 없다는 듯.


“박사님? 박사님?”


화급히 부르는 계전아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안 박사는 들릴락말락 읊조렸다.


“전아는 잔다르크가 될거야.”


그렇게 안 박사는 방을 나갔다. 방에 들어온 사내들 중 한 명이 문을 닫고 걸쇠를 걸어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그 직후, 처절한 비명소리가 문틈으로 새어나왔다.


“싫어어어! 오지 마아아아! 엄마아! 엄마아아아아!”


안 박사는 황급히 여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비명을 들었다가는 평생 귀에서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담벼락에 기대 주저앉아서는 주머니에서 잎궐련을 꺼냈다. 손이 너무 떨려 성냥 여러 개를 부러트리고서야 궐련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러나 하얀 담배연기도 그의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켜주진 못하였다. 그는 몸을 와들와들 떨며,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와버리게 만든 어제의 일을 회상했다.


어제도 그는 열성적으로 강연했다. 자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인 상해가정부가 중화민국의 앞잡이라고, 그들의 독립운동이란 건 이 나라 조선을 중국에 팔아넘기는 거라고 열변했다. 안 박사는 그 증거로 일전에 말한 대한민국이 중화민국에서 따온 것이며 삼균주의가 삼민주의에서 따온 것이라는 근거에 하나 더 추가했다.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이라는 조소앙이 장개석을 접견하고 그에게 중국의 꿈을 함께 하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안 박사는 이 중국의 꿈이라는 것은 결국 옛 명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조선을 비롯한 중국의 이웃나라들을 중국의 노예로 만들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동참한다는 건 상해가정부가 결국 짱꼴라의 앞잡이임을 증명하는 게 아니겠는가?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저 사대주의에 찌든 이씨왕조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칭 헌법에 구황실을 존중한다고 써 놓았다. 이는 결국 이들이 이씨왕조에서 중국에 사대하며 유교경전이나 읊고 공리공담이나 하며 사농공상 신분이나 따진 기득권을 누린 세력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기득권세력은 늘 청년세대를 착취하여 배를 불려 왔으며 지금 불황으로 힘든 청년세대를 더욱 나락으로 몰아붙이며 배를 불릴 것이다. 독립운동 한답시고 거들먹거리며 입바른 소리나 하면서. 그러니 우리 청년들은, 이 땅의 주인이 될 청년들은 이들에게 속지 말고 이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바로 알아야 생존할 수 있다고 부르짖었다.


물론 안 박사는 조소앙이 정말 장개석을 만났는지 만나지 아니하였는지는 아는 바가 없었다. 구황실 존중이란 헌법조항이 정말 그런 의미인지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군중 사이에 섞여 있는 헌병의 밀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지어낸 말이 필요하였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열성에도 군중들 중에 이탈하는 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망할 늙은이, 그 망할 절뚝발이 선비가 그를 꾸짖은 후에 이 자리에 안 보이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자의 일갈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게 뼈저리게 후회되었다. 헌병 밀정이 군중 속에 있다는 우려에 왜 전제주의를 비판하며 천황을 비판하지 않느냐는 그 선비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계전아를 비롯하여 운동 처음부터 그를 따른 추종자들은 늘 열성적이었지만, 분명 이 때문에 새롭게 들어온 사람들의 눈에 의심의 눈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열변을 마친 후 이제 어찌해야 하냐고 고민하며 집으로 돌아갔을 때였다. 대문간 앞에서 얼어붙었다.


“안호정 박사, 맞소?”


팔뚝에 헌병완장을 단 일본군인 두어 명이 있었던 것이었다.


“우리 수사본부장님께서 잠깐 저녁이라도 같이 하자 하시는데, 시간 괜찮은 걸로 알겠소.”


헌병들은 그러며 그를 다짜고짜 문간에 주차된 차에 태웠다. 안 박사는 어찌 항변할 말도 입에서 꺼내지 못한 채 헌병 둘 사이에 낀 채로 뒷좌석에 실렸다. 눈 앞이 캄캄해지고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헌병 밀정이 상부에 뭐라 보고했기에 헌병대로 끌려간단 말인가? 내 발언 중에 문제소지가 있는 게 있었던가? 난 분명 앞장서서 상해가정부를 공격했단 말이다! 진실이건 거짓이건 그치들이 나라를 중국에 넘기려 한다고!


“여 보쇼. 좀 떨지 마쇼.”


옆자리의 헌병이 피식 웃으며 한 말이었다. 조선말이 능숙한 게 조선인 헌병보조원 같았다.


“우리 본부장님은 그냥 저녁 한끼 먹자고 모셔오라 한 거요. 별 일 아니니 걱정하지 마쇼.”


그러나 안 박사의 떨림은 멈추지 않아서, 옆자리의 두 헌병은 그저 웃고 말았다.


승용차는 어느덧 용산 조선헌병사령부 부지로 진입했다. 예상 외로 그를 데리고 내린 헌병은 안 박사를 결박하거나 완력으로 제압해 나름 정중히 “이쪽으로.”라고 안내하였다. 그는 사령부의 벽돌건물 하나로 안내되었다. 그런데 향하는 곳은 지하였다. 천장에 나란히 늘어선 주황색 전구불이 복도를 비추고 양 옆으로 음산하게 닫힌 철문들이 늘어선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안 박사는 그곳 바닥을 보자마자 떨었다. 방금 생긴 것 같은 핏자국이 복도를 따라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비린내가 코를 쑤셨다.


안 박사를 겁에 질리게 한 건 눈과 코에 들어오는 정보 문만 아니었다. 꺼어억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 으으으 지르는 신음 소리, 그리고 순간 심장을 내려앉게 하는 끔찍한 비명소리. 안 박사는 자신이 헌병의 조사실로 가는 것임을 직감하고 이 자리를 죽음으로라도 벗어나고픈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나 양 옆의 헌병이 무뚝뚝하게 같이 걸어가고 있기에, 그는 그저 떨어지지 않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어서라도 걸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여러 문 중 하나 앞에 정지했다. 헌병 한 명이 문을 두드리자, “오! 들어오라 해!”라고 하는 일본말 대답이 들렸다.


철문이 끼익 하고 열린 순간, 안 박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아, 오느라 수고 많았소, 박사 나리.”


소좌 계급장을 단 장교 한 명이 조사실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안경을 쓴 땅딸막한 체구에 살집이 있어 보이는 장교였는데, 안경 너머의 눈이 파충류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안 박사를 당황케 한건 그 소좌의 모습이 아니었다.


“와서 사양말고 앉으시오. 슬슬 시장할 때 아니오?”


소좌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일본식 닭고기덮밥인 오야코동 그릇에 젓가락을 가져다대고 있던 것이었다. 그 외에 테이블에는 튀김요리나 절임요리를 비롯해 각종 일본 음식들이 정갈히 차려져 있었다. 소좌의 맞은편에는 안 박사의 몫으로 준비된 듯한 오야코동 그릇과 기타 음식들의 그릇이 있었다. 심지어 일본 청주 병과 술잔까지 있었다. 한쪽에는 웬 축음기 하나까지 올려져 있었다.


안 박사는 이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에 어안이 벙벙하여 앉지도 못하였다. 피비린내와 신음소리가 가득한 소름끼치고 어두컴컴한 조사실에 한상 떡 하니 음식들이 차려져 있고, 저 장교는 그걸 자길 위해 차려놓았다고 하고 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아, 일단 인사부터 해야겠군. 본관은 제6헌병대장 기타무라 헤이스케 소좌요. 지금은 어떤 중대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도 겸임하고 있소. 그리고 이제 앉아도 돼오.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 거요?”


기타무라 소좌의 말에 안 박사는 결국 얼이 빠진 채 자리에 앉고야 말았다. 그에게 소좌가 손수 술을 따라준다.


“독일 예나대학 철학박사라고 들어서 알고 있소만. 와타베 씨에게 들었소.”


“예······ 그렇습니다······.”


안 박사는 대답하다 말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와타베 류사부로 씨를 아십니까?”


“알다마다. 요즘 그 극도 나리에게 도움을 받을 일이 생겨서 말이오. 꽤 재미있는 친구지.”


어쩐지 와타베 씨가 헌병 밀정에 대해 귀띔해 줬다 했더니······. 안 박사가 채 그에 대해 생각하기도 전에 소좌가 다시 입을 연다.


“참 대단한 업적이군! 내지인도 아니고 요······. 아니 조선인이 구라파, 그것도 독일에서 박사학위라! 참 길이 남을 일인데 말이오.”


“예······. 감사합니다······”


안 박사는 떨리는 손으로 소좌가 따라준 청주를 겨우 삼켰다.


“본관도 독일을 좋아하오. 아니 내지인의 절대다수는 독일을 좋아하지. 우리 장교들은 특히 좋아하오. 본관도 독일육군사관학교에 연수를 가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소. 독일은 정말 위대한 나라 아니오? 프리드리히 대왕과 블뤼허의 나라,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의 나라, 클라우제비츠와 몰트케의 나라, 골츠와 멕켈의 나라, 슐리펜과 젝트의 나라, 그리고······.”


소좌가 한 차례 그가 아는 독일의, 정확히는 프로이센의 전쟁영웅들을 열거하고는 닭고기 덩이를 하나 집어 우물거리며 말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라.”


안 박사는 소좌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아 침만 꿀꺽 삼킨다.


“히틀러와 나치스는 우리에게도 대단한 주목의 대상이오. 그만한 강인한 지도자도 드물고, 국민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는 지도자도 드물지. 그리고 지지자들이 보여주는 그 열광이란! 일본의 위정자란 자들 중에 그정도의 지지자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없을텐데 말이오! 내가 독일인이었더라도 나치스를 지지했을 것이오. 저 허약하고 나약한 바이마르 체제 따위 대번에 부숴버리고 다시 독일민족을 부흥케 한다는데 지지하지 아니하고서야 이상한 거겠지. 아마 그쪽이 유학갔을 때 히틀러가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을 텐데, 맞소?”


“예······. 그렇습니다······.”


“그럼 이 노래도 들어보셨겠군.”


소좌가 그러고는 손수 유성기를 작동시킨다. 그러자 안 박사는 거의 2년만에 독일말을 들을 수 있었다.


Die Fahne hoch! Die Reihen fest geschlossen!

(깃발을 높여라! 대열을 단단히 갖추어라!)


SA marschiert mit ruhig, festem Schritt.

(돌격대가 행진한다, 조용하고도 확고한 걸음으로)


Kam'raden, die Rotfront und Reaktion erschossen

(적색 전선과 반동분자들이 사살한 동지들도)


Marschier'n im Geist in unser'n Reihen mit.

(영혼이 되어 우리의 대열과 함께 행진한다.)


유성기에서 거세게 울려퍼진 독일말 노래는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박자마다 발을 굴러야 한다는 충동이 들 정도의 노래였다. 안 박사는 노래를 듣자마자 바로 떠올렸다. 히틀러가 연설할 때 환호하던 갈색 제복의 돌격대원들을. 일제히 그들의 경애하는 지도자를 향해 오른팔을 곧게 뻗어 경례하며 “지크 하일!”을 외치던 모습을.


“이 노래는 요즘 나치스 집회에서 불리는 노래요. 참 박력있는 노래지. 들어 보셨소?”


하지만 안 박사는 나치스 집회장에 몇 번 가 보았어도 돌격대원들과 당원들이 저런 노래를 부르는 건 일절 듣지 못하였기에 그저 눈만 꿈쩍거린다. 이때 소좌가 갑자기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 그쪽은 이게 불리기 전에 귀국했었지? 쇼와 4년 말에 말이요. 대공황 터진 그 해. 이 노래는 쇼와 5년에 나왔다 하니 못들었겠구먼. 본관의 실수요. 이거 미안하외다.”


소좌는 그렇게 웃고는 야채튀김을 하나 잡아 와작 씹었다.


“여하튼지간에, 이 노래는 이른바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라고 한다오. 누군지 아시오?”


그 말에 안 박사는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베를린까지 가서 공산당원들과 맞붙었다던 돌격대원 지인이, 호르스트 베셀 동지만큼 앞장서서 빨갱이들을 박살내는 용사는 없다고 말했었던가?


“알것······. 같습니다.”


“음. 들어본 적은 있는 모양이군. 그 호르스트 베셀 씨는, 유감스럽게도 쇼와 5년 1월에 살해당했소. 공산당원들에게 말이지.”


“아······ 그렇습니까······”


안 박사는 머리가 조금씩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이 헌병소좌는 어째서 자기를 불러놓고 독일과 나치스 이야기를 밑도끝도없이 하고 있는 건가?


“베셀 씨의 장례식은 아주 성대하게 열렸소. 나치스의 그 선전부장 괴벨스 씨는 베셀을 예수에 비유했다더군. 그리고 독일민족신화 속의 영웅 지크프리트에도 비유했소. 그리고 방금 들려준 노래, 원래 가사는 베셀 씨가 쓴 거라 하오. 베셀 씨의 노래를 이렇게 당의 노래로 만들어서 집회때마다 부른다 그거요. 참 재밌는 일이지. 베셀 말고도 공산당과 싸우다 죽은 돌격대원이 한둘이 아닐 텐데 꼭 집어서 이렇게 순교자로 만들었단 말이오. 베셀이 법대생이어서 그랬나? 뭐, 괴벨스 씨 속을 수천리 밖에 있는 본관이 알 수는 없소만.”


그러며 야채절임을 집어다가 우물거리던 소좌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 안 박사를 쳐다본다.


“내가 이렇게 나치스 얘기를 길게 한 이유는, 결국 어떤 조직이던 간에 순교자 한명 쯤은 필요하다는 거요. 베셀이 죽고 괴벨스가 그를 순교자로 만듦으로서, 나치스의 전투력과 동원능력은 더더욱 올라갔다오. 빨갱이들이 아무리 설쳐도 모두 다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를 부르며 거침없이 전진하는 거지. 우리 제국도 마찬가지요. 일로전쟁 때 203고지에서 흩날리는 벗꽃처럼 옥쇄하면서도 적진에 쇄도한 용사들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소. 고다이고 천황을 호종해 아시카가 막부에 맞선 다이난 공 쿠스노기 마사시게 이야기도 마찬가지고. 요는 뭐냐 하니······.”


소좌가 그 파충류 같은 눈을 섬짓하게 번뜩였다.


“박사가 주도하는 그 운동에도 순교자가 필요하다는 거요.”


“예······ 예?”


안 박사가 얼떨떨해 하는 가운데 소좌가 말을 잇는다.


“박사의 운동에 대해서는 보고를 잘 받았소. 착한 지나놈은 죽은 지나놈이라고 외치며 다닌다지? 훌륭하오. 확실히 지나놈들은 기생충 같은 놈들이지. 지나놈들을 경성이건 인천이건 어디서든 다 대륙으로 쫓아버린다면 우리 일도 줄어들고 좋은 것이오. 그놈들 사이에 지나 국민정부에서 보낸 첩자가 얼마나 있을지 알 수가 없는데도 총독부에서 놈들을 쓸어버리기는 꺼려한단 말이지. 그런 와중에 안 박사가 그 일을 대신 해주니 얼마나 좋소?”


“예······. 감사합니다······.”


이 헌병소좌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칭찬하는 건가? 무슨 목적으로? 안 박사는 심장이 덜덜 떨리는 채로 된장국으로 목을 축였다.



“그런데 말이오. 어제 우리 쪽 사람에게서 보고를 들어 보니, 곤란한 일이 있던 것 같더이다.”


그 말에 안 박사는 된장국 그릇을 떨어트릴 뻔했다.


“웬 불령한 노친네가 출연해 불령한 소리를 하는데, 거기에 바로 반박도 못하고 어버버 했잖소? 그때 대체 왜 그랬는지······.”


“그······ 그건!”


안 박사가 다급한 나머지 소좌의 말을 끊고야 말았다. 그 순간, 실실 웃던 소좌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난 누구던 내가 말하던 도중에 끊는 걸 아주 싫어하오.”


“죄······. 죄송합니다······.”


소좌가 무섭게 노려보자 안 박사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기타무라 소좌는 피식 웃고는 하던 말을 계속한다.


“이해는 하오. 지나인에 대한 조선인의 악감정을 부추기기 위해서는, 조선의 민족감정을 자극해야 하겠지. 그 과정에서 우리 제국의 조선 지배를 편들수는 없었을 것이오. 참 유감스럽게도 조선인의 민족감정이 지나만 향하지는 않으니 말이오. 그 감정의 방향이 총독정치와 내지에도 향하기에 우리로서는 그쪽 활동을 주의깊게 볼 수밖에 없다는 거요. 그 관계로 상해가정부를 그렇게 공격한 건 현명한 선택이었소.”


소좌는 그러고는 오야코동을 맛깔나게 몇젓가락 입에 넣고 “하여간 오야코동은 조사실에서 먹어야 제맛이라니깐.”이라 너스레를 떨고는 하던 말을 계속한다.


“하지만, 당장 우리 작전에 투입하기에는 아직 휘발성이 부족하오. 비록 작년 7월에 그쪽 집회에 나갔던 사람들이 지나인들 상대로 난리를 쳤다지만, 그 정도로는 우리 쪽에서 구상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오.”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그런 게 있소. 군사기밀이라 말해줄 수는 없소만, 하여간 그쪽이 우리 작전에서 해줘야 할 일이 있다는 거요. 아주 중대한 걸로 말이오.”


소좌는 그러고는 안 박사가 해야 할 일을 설명했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모아 인천 지나정으로 쳐들어가 한바탕 난리를 친다는 게 핵심이었다. 사실상 작년 7월의 폭동을 재현하란 요구와 다름이 없었다. 그때는 박사의 추종자들이 개별적으로 폭동에 참가했지만, 이번에는 조직적으로 한꺼번에 몰려가라는 게 소좌의 말이었다.


“그······.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안 박사는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는지 몰라하자, 소좌가 갑자기 얼굴을 굳힌다.


“그 이상은 군사기밀이오. 더 알려 하지 마시오.”


그렇게 나서자 “예······. 예······. 죄송합니다······.”라고 다시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는 그렇게 조직적으로 응집해서 지나정으로 처들어갈 수는 없어 보이니, 죄다 분노로 불타오르게 만들 연료가 필요하오.”


그러며 소좌는, 안 박사가 떨군 고개를 다시 올리게 만드는 이름을 언급했다.


“계전아란 여학생, 박사의 추종자 중 하나라고 들었소. 맞소?”


“예?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조사하면 다 나오는 법이오. 박사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지나놈들을 극히 증오한다지?”


“그······. 그렇습니다만······”


“그렇군, 그렇다면 말이오.”


그 순간, 소좌의 입이 양 옆으로 쭈욱 찢어졌다. 기괴하고 섬뜩한 웃음이 그의 얼굴에서 펼쳐졌다.


“그년을 당신네들의 호르스트 베셀로 만드시오.”


안 박사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저······. 무슨 말씀이신지······.”


“앞서 본관이 신나게 말했잖소? 베셀 씨의 죽음이 나치스의 결집에 영향을 크게 끼쳤다고. 순교자 한명 생기면 운동은 불타오르게 된다고 말이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안 박사는 너무 충격을 받아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 사이 소좌가 계속 입을 놀렸다.


“그년을 당신 따르는 사람들 맨 앞에 세워서 인천 지나정으로 보내시오. 보내서 난리치게 하시오. 지나놈들의 시선을 다 뜰고 열받게 만들란 말이오. 그 다음은 와타베 씨의 아토베조가 알아서 할 거요. 아토베조가 인천 외곽 떨어진 곳에 거점으로 삼을 여관 하나를 확보했는데, 거기로 유인하시오. 거기 위치는 아토베조가 알려줄 것이오. 참고로 거기서 이미 집회신고서를 제출했소. 그 멍청한 년이 거기 오면, 아토베조가 그년을 적절히 순교자로 만들어줄 것이오.”


“뭐······. 뭐라고요?”


안 박사가 자기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경악해 입이 벌어졌다. 소좌는 낄낄 웃으며 다시 오야코동을 맛있게 쩝쩝였다.


“사악한 지나인들에게 맞서 항거하다가 꽃다운 나이에 겁간당하고 신체가 훼손당해 발가벗겨진 채로 지나정에서 발견된 소녀의 주검! 이 정도면 최고의 순교자 아니오? 와타베 씨도 참 악당이라니까! 이런 종류의 계획은 본관만 만들 수 있는 건줄 알았는데, 역시 잘나가는 극도는 달라도 다르다니깐!”


머리가 멍해진 안 박사는, 상대가 헌병소좌인 것을 잠깐 잊어버리고 말았다.


“저···....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뭐?”


소좌가 웃음을 멈췄다.


“어떻게······. 어떻게 인두겁을 쓰고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합니까! 애꿏은 애를 희생시켜 순교자로 만든다고요? 그렇겐 못합······.”


그러나 안 박사는 더 말하지 못했다.


쾅! 소좌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거세게 내리친 것이었다. 그 충격에 그릇들이 딸가락 흔들렸다.


“야 이 새끼야.”


소좌가 파충류 같은 눈으로 박사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네가 독일에서 박사땄다고 뭐라도 되는지 아는 모양인데, 여기가 어딘지 몰라? 여기 헌병대 조사실이야, 이 요보 새끼야! 네 생사여탈 내게 달렸어! 네가 여기서 몸 성히 나가느냐 마느냐가 내 결정에 달렸다고 이 새끼야! 박사까지 땄으면서 그렇게 분위기 못읽어? 엉!”


안 박사는 그 윽박지름에 벌벌 떨었다.


“너 예나대학 나왔지? 그것도 철학과 나왔지? 그럼 마르크스 알겠네?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 빨갱이놈들 조상 중의 조상!”


“저······. 저는······.”


“모르는 척 하지 마, 이 새끼야! 마르크스 네 대선배잖아! 내가 빨갱이 놈들 조사하며 빨갱이 사상 대충이라도 연구 안했을 줄 아냐? 마르크스가 예나대학 철학과에서 『헤겔 법철학 비판』 써서 박사학위 땄잖아! 난 말이야, 마르크스가 네놈 대학 대선배라는 것만으로도 너를 빨갱이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야. 알아 들어, 이 새끼야!”


안 박사는 가슴이 너무 울렁거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조금이나마 먹은 것도 다 토해낼 뻔했다. 공포가 그의 세포 곳곳을 사로잡았다. 저 눈 앞의 안경 낀 소좌는 그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자였다. 대학 시절 지도교수와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런 그에게 말대답을 했다는 것 만으로도, 저자에게는 자신의 목숨을 박탈할 권리, 그리고 조사실에서 끝없는 고문을 가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다른 방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죄······. 죄송합니다······.”


안 박사는 벌벌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 잘못했습니다······. 소좌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 태도에 소좌는 험악한 태도를 거두었다. 그의 입에서 상대를 굴복시켰을 때 나오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지어진다.


“진작 그렇게 말하셨셔야지. 괜히 밥맛만 떨어졌잖소.”


그러며 소좌는 된장국을 들이키고 입을 쩝쩝댔다.


“여튼, 그년 순교자로 만드시오. 그년을 그렇게 만들어서 당신 따르는 사람들 다 불타오르게 하란 말이오. 뒤는 생각하지 말고 지나정으로 돌격하게 만드시오. 거기서 지나놈들을 보는 대로 다 두들겨 패고 불지르라 그 말이오. 알아들으셨소이까, 철학박사 씨?”


안 박사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저 소좌는 종잡을 수 없는 괴물같은 자였다. 그 어떤 철학자들도 행동원리를 파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은 이제 저 소좌에게 목숨줄이 걸리게 되었다. 언제 자신을 마르크스와 엮어서 소련 간첩으로 만들어버릴지 모르는 자에게.


이 와중에 소좌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진다.


“이건 와타베 씨를 통해 전달할 수 있는 사항이었지만, 내가 박사를 여기 불러 저녁을 대접하면서까지 말해주는 이유가 있소. 와타베 씨의 보고를 보고 내 생각해 본 건데, 박사는 이런 선동과 사상전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이오. 그런데 박사 따고 귀국해서 지금까지 무직이란 말이지. 와타베 씨의 아토베조가 돈을 대줘서 딱히 취직할 필요가 없긴 하지만, 아토베조가 영원할 것 같소? 거긴 야쿠자조직이오. 구린 일을 하다 경찰에 잘못 걸리거나, 아니면 적대조직과 항쟁하다 몰락할 가능성이 늘 있지.”


소좌는 그 말을 끝으로 얼마 남지 않은 오야코동 그릇을 싹 비웠다. 안 박사의 그릇에는 한참이나 오야코동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본관이 제안하건데, 박사를 헌병대 문관으로 채용하도록 사령관 각하께 추천해 보려 하오. 박사가 가진 철학과 사상에 대한 지식을 우리의 사상전에 활용할 수 있게 해달란 것이오. 러시아가 빨갱이 천지가 된 이후 사상전은 지금의 전쟁과 미래의 전쟁 양쪽에 극히 중요해졌소. 분명 박사는 그 분야에서 대단히 유용한 사람이오. 엔간하면 종신고용이 보장되는 자리요. 아토베조에서 받은 돈보다는 적게 받겠지만, 여하튼 월급이 끊어질 일은 없다 그 말이오.”


그러나 그 제안은 안 박사의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오직 이곳을 떠나고픈 마음 뿐이었다. 저 무시무시한 괴물을 피해 방안으로 도피하고픈 마음 뿐이었다.


“물론 그쪽이 우리 일을 잘 해준다는 전제 하에서만 그런 것이오만, 여하튼 잘만 해주면 대가는 짭잘할 것이오. 알아 듣겠······”


이때 소좌의 말이 끊겼다. 조사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뭐야?”


소좌가 살짝 짜증을 낸다. 들어온 사람은 소좌의 부관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다.


“말씀 중에 실례하겠습니다. 지금 관동군 작전주임 이시와라 간지 중좌님이 도착해 본부장님을 찾고 있습니다.”


“뭐? 그 이시와라 나리가?”


소좌는 놀란 눈치가 되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사무실로 모셨나?”


“그렇습니다. 일단 기다리라고 말씀올렸습니다.”


“아. 그래. 당장 가봐야겠군.”


안 박사는 이시와라 중좌가 누군지 몰라서 그저 눈만 꿈적거렸다. 그런 안 박사를 소좌가 내려다보았다.


“박사. 나는 급한 공무 때문에 먼저 일어나야겠소. 내 부하들이 자택까지 태워다 줄 거요. 그리고 반드시 내 지시에 따르시오. 따르지 않았을 시에는 어떻게 될 것인지 말해도 알 것이니.”


소좌는 그러고는 쏜살같이 나가버렸다. 안 박사는 망연자실한 채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집에 안 갈 꺼요?”라고 헌병들이 채근하기 전까지.


헌병 승용차에 태워져서 집에 도착한 안 박사는 걱정하는 가족들도 뿌리치고 방에 틀어박혔다. 해답이 보이지 않았다. 상대는 헌병이다. 그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인물들도 다 나락으로 보내버릴 수 있는 존재다. 그런 자의 지시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안 박사는 괴로웠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소피스트들 앞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펼친 기개에 감탄했었다. 악법도 법이라며 의연히 독주를 받아들인 것에 감동했었다. 권력에 굴종하지 않는 그 태도에 찬탄을 보냈었다. 그런데 자신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배웠으면서도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부끄러움보다 생존욕이 앞섰다. 소크라테스는 그래도 고문을 받지는 않았다. 헌병의 어두컴컴한 조사실에서 몇날 며칠 간 몸이 지져지지도 않았다. 아테네의 감옥이 그런 곳이었다면 소크라테스도 그런 기개를 부릴 수 없었을 지 않았을까? 따지고 보면 위대한 철학자들도 모두 당대 권력과 밀접하지 않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위대한 정복왕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었다. 볼테르는 프리드리히 대왕과 밀접히 교류하고 후원을 받았다. 헤겔은 나폴레옹을 절대정신이라고 찬양했다. 꼭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기타무라 소좌가, 정확히는 아토베조의 와타베의 계략대로 했음에도, 내가 이제 짐승이 되어버렸다는 끓어오르는 감정은 아무리 잎궐련을 빼물어도 가시지 않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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