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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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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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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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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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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쪽

292화

DUMMY

그 카페에서 와타베 류사부로를 만난 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안호정 박사가 연단에 오르기 전 입을 축이며 생각한 것이었다. 와타베가 넘겨준 막대한 현찰뭉치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자극한 자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단 말. 이 두 개에 학술적 엄밀성과 학자적 자세에 눈을 질끈 감은 대가는 대단하였다.


안 박사의 강연장은 대학 강의실은 아니었다. 어디 번듯한 회관이나 극장도 아니었다. 체육관이라면 그나마 좋았다. 대부분 땀냄새가 진득하게 밴 창고나 하역장의 빈터가 강의장이었다. 첫 강연 때 내심 실망했던 안 박사는 그게 와타베 류사부로의 전략임을 머지 않아 깨달았다. 안 박사는 양지에서 이름이 오르내리면 안 되었다. 신문지상에 이름이 오르내려서도 안 되었다. 그가 아돌프 히틀러의, 더 나아가 히틀러의 바로 옆에 있던 작달막하고 다리를 절며 머리가 벗겨졌지만 가슴을 끓어오르게 하는 대단한 웅변술의 소유자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게서 영향을 받은 선동은 어디까지나 음지에서 해야 하였다. 그래야만 혹여 유혈사태가 빚어졌을 때 그 책임자로 안 박사 본인이 지목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었다.


또한 양지의 공간에서 오가는 사람들은 으례 유한계급 인텔리에 자신이 교양있다고 뽐내는 사람들이었다. 정제되지 않는 거센 말들이 오가는 곳에 그런 사람들이 올 리가 만무했다. 와타베는 물론이고 안 박사에게도 그런 사람들은 필요 없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사람은 두 부류였다. 첫째는 그 자신처럼 높은 학력을 가졌음에도 대공황 상황에서 펜데 굴리는 몇 개월간 얻지 못한 20-30대의 인텔리 룸펜들, 둘째는 이와 대비되게도 배운 거 하나 없는 동시에 불안정한 고용상태에서 공사판이나 하역장을 오가는 일용직 노동자들이었다. 와타베는 야쿠자인 만큼 그런 밑바닥 인생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속해있는 조직에 빚을 진 사람들, 그와 연관있는 회사의 육체노동자들이 동원되어 안 박사의 강연장에 들어왔다. 이들은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었지만 한 가지의 공통점이 있었다. 세상에 대한 불만이 누적될 대로 누적되어 계기만 생기면 폭발할 자들이지만 지금 그들을 그렇게 살게 만드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꿔야 할지는 모르는 사람들이란 점이었다.


“그런 자들은 본질적으로 희생양을 원합니다. 욕설을 퍼붓고, 악을 쓰고, 주먹으로 때리고, 심지어 칼로 찔러 죽일 분노의 대상을 말이죠. ”


와타베가 강연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알려줄 때 한 말이었다.


“문자 좀 쓰면 아이러니한 사람들이지요. 그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게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 세상 탓이라고 여기고 있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지금 사회의 가장 큰 전제인 제국의 조선 지배를 무너뜨리고 싶어하진 않습니다. 그러고 싶어해도 밖으로 말하거나 행동하지를 못하죠. 그들은 반복되는 일상을 하루하루 짜증과 염세와 분노 속에서 보냅니다. 그런데도 그 일상이 파괴되는 일은 원치 않고 있거든요. 소위 독립운동을 하다가 지금의 인생에서 더 굴러떨어지고 싶지는 않은 겁니다.”


안 박사는 와타베의 통찰력에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었다. 안 박사 자신을 포함해서 그의 단골 카페에서 만나는 룸펜 인텔리 잉여들의 심리를 놀랄 정도로 잘 포착하고 있지 않은가?


“와카가시라께서는 어느 대학에서 공부하신 겁니까? 학위가 있다고 해서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그렇게 보이셨나요? 소인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이 세계에 들어온 몸이라 학위는 없습니다. 그래도 독일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께 칭찬받으니 그저 영광입니다.”


“학위가 없다면 더더욱 대단한 겁니다!”


기실 중학교 중퇴라도 그마저도 못들어가는 사람이 내지나 조선이나 더 많은 사람인 실정이라 그도 나름의 학력을 갖춘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와타베는 안 박사의 칭찬에 기분 좋게 웃고는 말을 계속하였다.


“그저 업소나 대금업체를 몇개 운영하고 있다 보니 손님들 얘기나 채무자 상황 등 그런 걸 애들 통해 들을 기회가 많았습죠. 그리고 공장 등에서 빨간 물 든 노조 처리하기 위해 또다른 노조조직을 결성할 일도 여러번 하다 보니 하루 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 얘기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어쨌든 이건 그닥 중요한 건 아니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그들에겐 분노를 배출할 곳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총독정치에 그걸 발산할 수는 없지요. 그랬다가 돌아오는 대가가 무참하니 말입니다. 총독부 관리가 아닌 평범한 내지인에게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지나놈들을 거기 던져줘야 합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지나인은 안전합니다. 지나 외교관이 아닌 이상 쿨리 몇명 죽어나가도 총독부는 신경쓰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골치아픈 밀입국 지나인들을 처리해 줬다고 좋아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즉, 지나인이라는 희생양을 던져줌으로써, 우리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 말입니다.”


이 말에 안 박사는 그래도 마음 속에 가책을 느꼈다. 이것은 어려운 사정에 처해 마음이 곪아들어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비이성적인 방법으로 발산하게끔 만드는 방법이었다. 그가 공부해 왔던 소크라테스에서 니체에 이르는 모든 서양철학자들은 누구건 간에 한 목소리로 성토할 게 분명하였다. 대단히 비열하고 비겁하다고. 강자에게 치인 분풀이를 약자에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안 박사는 빠르게 가책을 지워버렸다. 그럼 뭐 어떻단 말인가? 일상을 영위하고 싶다는 건 인간의 본성이다. 일상에 위협을 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 감정을 발산하고 배출하고 싶어하는 것도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 본성을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위선이 아닌가?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은 그러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자 결국 자기정당화가 아니냐는 자조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것도 금새 사라졌다. 자기정당화가 뭐 어때서? 다들 하고 다니는 건데 철학 좀 공부했다고 그거 하면 안되나?


그래서 안 박사는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키고 싶었다. 잡생각이 들지 않도록. 와타베는 강연 내용 자체에 세세히 개입하지는 않았다. 단 몇몇 부분은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부분은 안 박사 본인에게는 꺼림칙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총독부에서 강연을 문제삼지 않고 오히려 장려받을 수도 있기에 넣어야 했다.


강연은 처음부터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어울리며 지내던 룸펜 몇 명과 와타베 류사부로가 동원한 사람들 50여명이 강연참석인원의 전부였다. 그러나 시간이 가며 와타베가 계속 강연장에 사람들 들여보내고 강연 내용을 퍼트리라고 장려 또는 지시하며 모이는 사람들이 계속 많아지기 시작했다. 강연에 대한 반응도 계속 열광적이 되어갔다. 안 박사는 자신의 열띤 언변에 사람들이 흥분하고, 얼굴이 시뻘개져 주먹을 휘두르고, 육두문자를 서슴없이 내뱉고, 바닥에 발을 쾅쾅 굴러대는 모습에서 희열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고라에서 연설하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같은 기분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가 지난 몇 년간 많은 돈을 쓰며 배워온 게 헛된 일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특히 그가 강연하며 더욱 신이 난 것은 어느새부터인가 청중들 중에 그의 말이 끝날 때마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라고 연호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는 점이었다. 와타베가 강연장에 들여보낸 사람 몇명이 외치던 말이었는데, 어느새인가 나중에는 청중 전체가 그 말을 소리 높여 부르고 있었다.


“소인이 만들어낸 말입니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


와타베는 그걸 알려주며 앞의 말은 일본말로, 뒤의 말은 조선말로 발음했다. 일본인 특유의 새는 발음이 있어도 그럭저럭 들어줄 만 했다.


“분노를 발산할 수 있으면서도 유쾌하게 들리는 말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조직에서 일하는 조선 사람들에게 그렇게 외쳐대라고 했는데, 반응이 참 폭발적입니다.”


안 박사는 잘 와카가시라께서 실로 잘하셨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나치 집회에서 지지자들이 외치는 “지크 하일!”보다는 모양새가 안 나긴 했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묵직한 것보다는 가벼운게 더 나아보였다.


그는 부모에게는 어디 전문대 강사로 자리를 얻었다며 다달히 와타베가 주는 돈의 일부를 주었다. 첫 돈봉투를 내민 이후 부모가 그를 보는 눈빛은 집안에 얹혀살고 박사까지 땄으면서 자리 하나 못 구하는 식충이에서 다시 예전의 자랑스러운 공부 잘하는 장남으로 돌아왔다. 그런 부모의 모습에 조소가 나왔지만, 그래도 그 바뀐 태도에 살맛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그는 신문지상에는 전혀 언급이 되지 않지만, 음지에서는 상당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라는 악에 받힌 구호가 터져나왔다.


그 절정은 작년 7월의 만보산 사건이었다. 안 박사는 만주에서 중국인 지주와 당국의 횡포에 죽어간 동포들의 복수를 소리 높여 외쳤고, 청중들은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를 연호했다. 일주일 간의 대난리가 끝난 후, 안 박사는 자신의 연단을 폭동에서 앞장선 사람들의 무용담을 자랑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그들은 짱꼴라를 붙잡아 어떻게 “착해지게” 했는지, 신문지상에서는 그게 폭동이라고 매도하지만 실은 얼마나 즐거운 축제였는지 신나게 떠들면서 각종 천박한 말을 늘어놓으며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안 박사는 괜히 자신도 나섰다가 경찰에 연행될 것을 우려하였고 와타베 또한 위험한 일은 피하라고 해서 그날은 방 안에 얌전히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뭔가 세상사에 거대한 한 획을 지었다고 희희낙락했다.


심지어 강연에 관심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 여자들까지 강연장에 와서 같이 구호를 외쳤다. 그 중 가장 눈에 띈 사람은 인천 사는 계전아란 이름의 고등보통여학교 중퇴생이었다.


성적과 행실 양쪽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퇴학당했다던 계전아는 그게 흠결이 되어 어디 시집도 가기 힘든 신세가 되었음에도 드센 성격 탓에 부모가 지청구를 하면 오히려 대드는 여자애였다. 매일같이 모던 걸 흉내를 낸답시고 화장하고 양장하고는 밖을 마구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그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 퇴학당한 16세 여학생은 어느 강연 후 찾아와 대뜸 “저, 박사님에게 반했어요!”라고 첫 마디를 시작했다. 그의 연설에 가슴이 마구 뛰었다고 하고는 뭐든 돕고 싶다며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고 꽤나 이쁘장한 자기 얼굴을 그에게 마구 들이대었던 것이었다.


안 박사는 10살은 더 어린데다가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전 여학생에게 연애감정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녀가 자기 집에서 살림하고 싶다는 등 서슴치 않고 보여주는 연정은 매우 곤란했지만, 그럼에도 계전아 양의 열성과 다른 이들 못지 않은 중국인들에 대한 증오는 대단한 도움이 되었다. 여자가 이들 틈에 섞여있다는 것도 한창 때 남자들을 불러모으는 데 도움이 되기에 안 박사는 계전아 양이 알고 지내는 여자들도 강연장에 데려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하나같이 공부는 뒷전인게 딱 보이는 여학생들이었지만, 그럼에도 쓸모는 많았다.


그로부터 해가 지나간, 5월 초에 이른 때의 저녁무렵의 강연장은 아직 공사가 시작되지 않은 공사장 터였다. 사무용 건물을 짓는다고 제법 널찍한 부지였던지라 최소 100여명이 바닥에 깔린 거적떼기들 위에 뭉쳐앉을 장소는 되었다. 안 박사는 이번 강연에는 제법 긴장하여야 했다.


“이번 강연에는 헌병의 밀정이 청중 중에 섞여 있을 겁니다.”


“예? 헌병이요?”


와타베 류사부로가 심각한 표정으로 강연 전날 한 얘기에 안 박사는 크게 놀랐다. 혹여 강연 속 내용을 헌병이 문제삼을까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게······. 우리 조직이 헌병과 협력할 일이 좀 있습니다. 거기 헌병대장님에게 박사님 강연에 대한 얘기를 피치 못하게 해야 했는데, 강연 내용이 어떤지 확인하고 싶다 하시는군요. 그······. 평소대로 하시되 헌병 분들 만족시킬 내용을 집중적으로 강조하는 게 좋겠습니다.”


어쩌다가 헌병과 연관된 건지 물어보았지만, 와타베는 그에게조차도 말해주기 힘들다며 어두운 얼굴이 되었었다. 그 때문에 안 박사는 연설 원고의 적지 않은 부분을 뜯어고치고 이 자리에 임할 수 있었다.


청중 중 누가 헌병의 밀정일까 하는 걱정에 아토베조가 마련해준 연단에 올라가기 전에 입 안에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하지만 연단 위에 선 순간, 그의 걱정도 뒤로 미뤄둘 정도의 폭발적인 목소리들이 터져나왔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안 박사의 마음 속에서 걱정은 사르르 사라졌다. 그 자리를 도취감이 가득 채운다. 이 사람들을 내 말 한 두마디로 움직일 수 있다. 내가 저자들의 감정을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이 자리의 나는 이들의 소크라테스요, 플라톤이요, 아리스토텔레스로다!


그는 여유롭게 손을 뻗었다. 일자형으로 오른팔을 곧추세웠다. 그가 독일에서 본 히틀러처럼. 그의 동작에 악을 쓰며 외쳐대던 청중들이 한꺼번에 조용해진다.


“여러분! 이 안 아무개의 자리에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 별거 없는 이야기나마 들어주러 와 주셔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열광과 관심 덕에, 이 안 아무개가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박수! 박수쳐요!”하는 여자아이의 앙칼진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계전아가 선망의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하는 소리였다. 그 말에 박수가 우렁차게 쏟아지고 환호가 울린다. 안 박사는 흐뭇한 눈으로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는 계전아 양을 한번 바라봐준다. 그 눈에 계전아 양은 “박사님이 날 보셨어!”라며 옆자리 여학생에게 호들갑이다.


“저는 지난 강연에서 예고했던 대로, 짱꼴라들이 어떻게 우리 민족을 노예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우리나라의 기득권세력과 기성세대가 중국발 노예근성에 찌들어 우리 청년들을 어떻게 노예로 부리려 하는지 이 자리에서 말하려 합니다!”


다시 열광적 박수가 이어진다. 안 박사는 오른손을 뻗어 박수갈채를 진정시키고 본론에 들어간다. 우선은 질문이었다.


“작년 7월, 여기서 그 축제에서 짱꼴라들을 착해지게 하신 분 손 들어보실 수 있으세요?”


그 말에 거의 반 이상이 열광적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안 박사를 따라서 오른팔을 앞으로 쭉 뻗는다. 계전아 양이 거의 펄쩍펄쩍 뛸 기세로 팔을 쭉 뻗는게 보인다. 계전아는 그 일주일의 첫 날 인천 중국인거리에서 중국 여자 한 명의 머리를 잡아채고 쥐어뜯었다며 무용담을 늘어놓고 “그 짱꼴라년 비명 꼭 돼지같았어요!”라고 깔깔댔었다.


“예. 여러분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훌륭한 행동이었습니다. 진정한 애국, 진정한 의로움의 실천이었죠! 더러운 바퀴벌레들을 때려잡아 집안의 청결을 유지하는 행위였습니다! 여러분들처럼 실천적인 사람들이 많았다면, 짱꼴라들이 감히 이 나라에 벌레처럼 기어들어올 수도 없었을 겁니다!”


이렇게 폭력행사에 적극 나선 사람들을 칭찬한 안 박사는, 낯빛을 흐리고 침통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나 참으로 슬프고 유감스럽게도, 이 나라의 지식인이란 사람들, 명사란 사람들, 이른바 민족지도자란 사람들은 여러분들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작년에 그 일이 잦아들어갈 때 안재홍이니 한용운이니 송진우니 이광수니 하는 사람들이 각 단체의 이름으로 결의했다던 헛소리를 보고 여러분과 함께 지극히 분노했었습니다. 그 기사 보신 분 있으신가요?”


손을 든 사람은 계전아 양을 비롯해 비교적 복장이 말쑥하고 얼굴이 햇빛으로 타지 않은 사람들 뿐이었다. 이들과 대비되는 땀과 떼로 절은 복장의 사람들은 신문을 볼 수 없던지라 얼굴에 물음표만 띄운다. 안 박사는 스크랩하여 연설 원고 틈에 끼워둔 작년 7월 9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꺼낸다.


“일. 지급히 성명서를 발표하야 유감의 뜻을 내외에 발표할 것.

이. 중국인을 하루바삐 점포를 열고 생활에 안도하도록 노력할 일.

삼. 피해받은 중국인의 구제방침을 진행할 일.”


그 말에 “개소리다! 헛소리다!”, “그게 민족지도자들이 할 말인가!”라며 분통을 터트리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중국인들을 린치하고 중국인 상점을 부수는 데 앞장섰던 이들이었다. 그런 마당에 안재홍이나 한용운 등이 “유감의 뜻”이니 “피해받은 중국인의 구제방침”이니 하는 말들은 그들의 정당성을 전면부정하는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여기에 성명서는 더더욱 기가 막힙니다. 유감의 뜻 운운은 물론이고 이딴 소리를 합니다. 우리와 짱꼴라들이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양민족이랍니다! 현재에서나 장래에서나 우의를 유지하고 서로 돕는게 필연임을 확신한답니다! 짱꼴라들이 반드시 우리 조선민족의 진의를 이해하여 이번 불상사의 기억을 잊어 달라고 아예 벌벌 떨며 설설 기고 있어요! 우리 땅에서 우리 동포의 손으로 불행을 당한 게 슬프답니다! 이 무슨 헛지랄이 또 있답니까!”


강연에 욕설을 섞자 바로 반응이 온다. “쳐죽일 놈들!”, “개새끼들!”, “짱꼴라의 노예들!”이란 거친 욕설들이 절제 없이 쏟아져 나온다.


“위선자들! 먹물 새끼들! 뒷짐지고 앉아 엣헴엣헴 하며 젠체하는 놈들! 짱꼴라들이 이 나라를 잠식하는 악행은 보고만 있다가 우리가 놈들을 착해지게 만드니 우리더러 잘못했다고 하는 놈들! 거악이 눈 앞에 있는데 행동하지 않고 행동하는 우리들을 비난하는 자들! 자유에 대해 입에 담으면서 짱꼴라의 만행에 대항하고 비판할 자유를 도덕을 들이대며 압살하려는 자들! 우리 조선의 비극은 이런 놈들이 민족지도자랍시고 설치고 있는 겁니다! 기미년에 만세 좀 불렀다고 그게 벼슬인 줄 아는 작자들이 민족지도자래요! 뭐가 민족지도자입니까? 여러분의 애국적 행동을 무시하고 짱꼴라들 역성이나 드는 위선자들이, 의로운 행동에 나서지 않고 정치적으로 올바르라고 훈수질이나 하는 놈들이 뭐가 민족지도자입니까?”


그 열변에 계전아 양이 벌떡 일어나 “다 죽여야 해요! 그 새끼들 다 패대기쳐 죽여야 해요!”라고 손을 쳐들자 “그렇다! 그렇다!”하고 환호가 쏟아진다.


안 박사는 달아오른 군중을 다시 오른손을 들어 제지시킨 후 연설을 계속한다.


“이들은 왜 이러는 걸까요? 단지 그들이 짱꼴라에게 잠식되는 이 나라의 현실을 몰라서 좋은게 좋은 거라고 하는 걸까요? 단지 그들이 친중세력에 위선자여서 그런 걸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안 아무개는 다 알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미 짱꼴라의 노예임을, 짱꼴라에게 다 종속된 자들이라서 그렇다고 말입니다.”


그는 대단한 비밀 얘기를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춘다.


“짱꼴라들은 돈에 환장한 족속들입니다. 돈이 된다면 이역만리라 타국이라도 가죠.

지금 짱꼴라들이 기어들어오지 않은 나라는 저 멀리 토인들 사는 아프리카일 겁니다. 세계 곳곳에 짱꼴라들이 침투해 있어요. 이 나라와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 영국, 불란서, 독일과 월남, 인도, 비율빈(필리핀), 신가파(싱가포르), 자와(자바) 등 그 나라 영토들 모두에요. 짱꼴라들은 그 나라에 이주해서 짱꼴라 거리를 만듭니다. 놈들의 소굴인 셈이죠. 그 으슥한 짱꼴라 상점들 안에서 무슨 추잡한 거래가 이루어지는지 아는 사람은 세계적으로 얼마 없을 겁니다. 우리는 알지만요! 물론 돈만 바라는 건 아닙니다. 돈은 놈들의 도구이기도 하죠. 놈들이 축적한 자본으로 세계를 주무를 도구, 세상 여론을 놈들에게 유리하게 바꾸기 위해 사상, 문학, 예술을 전부 그들 입맛에 맞게 바꾸기 위한 도구로 말입니다.”


사실 그가 유학한 독일에서 중국인을 본 적은 거의 없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안 박사는 그러며 연단 위에 올라나왔던 검은 표지의 두터운 책자 하나를 들어보았다.


“이것은 제가 입수한 한 애국적인 분께 얻은 장부입니다. 이 장부에는 짱꼴라 자본가들이 이 나라 민족지도자란 사람들에게 얼마나 돈을 먹였는지 다 적혀 있습니다! 짱꼴라들은 돈으로 다 매수하고 있습니다. 언론에서 짱꼴라를 불쌍하고 보호가 필요한 사람으로 묘사하도록, 명사들의 연설에서 짱꼴라와 우리 조선민족이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말을 넣도록, 소설이나 영화에서 짱꼴라 등장인물을 집어넣도록 말이죠! 이를 통해 놈들은 우리의 자유를 앗아가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여기 다 적혀 있습니다!”


그 장부라는 책자에는 기실 적혀 있는 것이라고는 무의미한 낙서나 연설 전에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써 놓은 메모들밖에 없었다. 맨 앞줄에서도 이 거리에서 장부 속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미 짱꼴라 박멸을 외치고 있는 청중들에게는 그게 정말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시금 증오 가득한 외침이 아우성친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안 박사는 거센 소음을 역시 오른손 한번 들어서 조용히 시킨다.


“짱꼴라들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이렇게 돈을 퍼부어서 이른바 민족지도자인 먹물들을 매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 전문 분야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로 철학이죠.”


박사는 남들이 모르는 비밀얘기를 한다는 듯 의미심장한 목소리를 낸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헤겔은 일찍히 중국을 ‘시간만 있을 뿐 역사는 없는 나라.’, ‘동양적 전제주의’라는 적절한 표현으로 일컬었습니다. 시간만 있을 뿐 역사는 없다란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중국은 다른 열강들이 발전할 동안 몇천년 동안 동일한 체제, 동양적 전제주의의 체제에서만 나라가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헤겔의 『역사 속의 이성』에 나온 중국에 대한 규정은 그가 독일에서 처음 헤겔을 접할 때 대단한 의문을 불러일으키던 것이었다. 그도 신학문을 하기 전에 한학을 먼저 배운 사람으로서 헤겔의 이러한 공격은 감정적인 거부감까지 일으킬 정도였다. 그러나 중국인에 대한 혐오를 부추겨야 하는 지금에 있어서 헤겔은 그가 단골로 인용하는 철학자가 되었다.


“짱꼴라들에게는 자유의 개념이 없었고 지금도 없습니다. 황제라는 전제군주가 국민 전체를 노예화한 상태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노예근성을 그들에게 뿌리밖에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노예화 철학의 대표주자인 공자와 그자가 만들어낸 유교가 있습니다!”


그때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그 말에 “그렇다! 그렇다!”하는 화답이 돌아왔다.


“그렇습니다! 공자는 예의법도를 운운하며 사람들을 노예화하고 자유를 죽이는 사상을 퍼트렸습니다! 공자와 그 제자들의 위선적인 글 속에서 황제의 전제적 권력에, 누가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권력에 굴종하게 만들었죠! 그에 따라 나라의 법이 사람 개개인의 의지에 지켜지지 않고 오직 무의미한 명분론에 따라, 누가 자신을 괴롭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의해서만 지켜지게 만들었습니다. 자율성, 창발성이 거세되고 복종만 요구받게 된 거죠! 손문이가 서구의 자유사상 영향을 받아 신해혁명을 일으켜 전제황권을 무너트리고 공화정을 세웠다고 합니다. 근데 결국 하나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손문이도 결국 황제노릇 하려고 원세개와 손잡고 거병한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장개석이가 사실상 황제노릇을 하고 있어요! 동방적 전제주의란게 여전한 겁니다!”


여기서 안 박사는 잠시 숨을 고르고 물을 한모금 들이킨 뒤 계속한다.


“솔직히 짱꼴라들이 자기들끼리만 그렇게 살면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을 겁니다. 지들끼리 그러며 지지고 볶으며, 냄새 풀풀나는 썩은 계란하고 썩은 두부나 처먹고 살면 그만이죠. 역겨운 놈들입니다, 아주. 썩은 음식이 맛있다고 처먹어대요!”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계란을 발효한 피딴과 두부를 발효한 취두부를 비하하자 좌중에서 웃음이 터진다.


“여튼 짱꼴라들의 문제는 지들끼리 그짓하며 살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전제주의의, 사람의 자유를 압살하는 전제주의의 확산이에요! 세상 전체를 다 지들식으로 살게 만들려는 겁니다. 전 세계를 지들 전제주의 아래에 무릎꿇리겠다는 게 놈들의 근본적인 목표입니다. 그 수단이 바로 유교입니다! 공자의 유교가 중국 뿐 아니라 동아세아 전체에 퍼지면서, 특히 불운하게도 우리나라에 퍼지면서 여러분의, 우리 청년 세대의 괴로움이 시작되었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거의 고함을 지르듯 연설한 안 박사는 잠시 숨을 고르고 강연을 계속한다.


“중국 전제주의는 사대주의라는 이름으로 우리 조선 사회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성계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후로 우리나라는 계속 중국의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조선민족의 유산을 도외시하고 중국 것만 제일이라고 떠받드는 양반들이 이 나라의 권력층, 기득권층이 되었습니다. 그 옛날 수양제, 당태종의 침략에 패기 있게 맞서던 고구려의 자주정신을 사대하는 양반들이 말살시켰습니다! 사대주의와 신분질서로 만백성의 자유를 압살하는 자들이 권력층, 지배층이 되어 이 나라를 지배해 왔습니다! 양반이란 놈들이 얼마나 마음 속까지 다 중국의 노예였는지 사례 하나를 들어보죠! 여기서 한글, 그러니까 언문 배우신 분?”


그 말에 인텔리인 사람들은 전부 손을 든다. 일용직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간간히 손을 드는 사람이 있다.


“이 한글은 우리 말을 쓰게 해 주는 우리 글자입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계속 짱꼴라 글을 써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짱꼴라가 의도한 대로 짱꼴라의 사상과 생각에 익숙해지며 거부감 없이 그 전제주의를 받아들여 왔습니다. 하지만 한글은 거기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세종임금이 한글을 만들 때 양반 사대부들이 반대했던 겁니다. 그들의 기득권을, 중국에 사대해서 얻는 기득권을 위해서였죠! 그래서 놈들은 한글을 폄하했습니다! 언문이라고요! 암클이라고요! 그래서 놈들은 한글을 쓰지 않고 한문만 고집했던 겁니다! 그 누구도 한글과 한문을 동시에 쓰자고 한 적이 없어요!”


이것은 그가 위당 정인보라는 국학자의 글에서 보고 기억해 둔 것이었다. 그리고 중국에 친근한 감정을 보이며 그들을 비난할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해 유용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 효과는 입에서 일제히 육두문자를 퍼붓는 사람들을 통해 유용함이 입증되었다.


“이렇게 사대하는 기득권세력은 지금 짱꼴라에게 매수당한 먹물들이 되었습니다! 놈들은 사대하는 조상들, 못난 조상들의 기득권을 물려받아 이 세상을 짱꼴라의 전제정치 아래 지배받게 하려 암약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조상이 양반이었던 자들만이 아닙니다. 여러 노동자 분들! 직장에서 이유도 없이 짤리거나 폭언을 듣고 심지어 폭행까지 당한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 말에 “그렇다! 그렇다!” 하는 말이 노동자들 입에서 나온다.


“그러면서도 아무 말도 못하셨을 겁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분하셨습니까? 하지만 이건 결국 짱꼴라들과 사대하는 기득권세력이 우리 민족에게 심어둔 노예근성 때문입니다! 신분적으로 위에 있다는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당하고만 하게 되는 노예근성! 유교라는 이름의, 예의범절과 삼강오륜이란 이름의 기득권 꼰대들에게 굴종하는걸 당연하다는 듯 가르치는 노예근성 말입니다! 그 노예근성이 여러분을 불행으로 빠트렸습니다! 짱꼴라 쿨리들이 앗아간 건 여러분의 일자리 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자유, 여러분의 생존, 여러분의 권리인 것입니다!”


그 말에 “와아아!”하는 함성이 울려퍼진다. 하루 하루 벌이로 힘들게 사는, 희망없는 사람들에게 욕하고 때려부술 누군가가 주어진다는 것은 삶의 활력소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힘든 상황을 누구의 탓으로 만드는 것 만큼 훌륭한 해방구를 찾긴 힘들었다.


이때 안 박사는 어제 원고에 추가한 부분을 시작하려 한다. 와타베는 원고를 검토하며 이렇게 주문했었다.


“박사님은 지나인에 대한 증오를 끌어오기 위해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방법을 써 오셨습니다. 이건 물론 유용한 방법이지만 자칫하다가는 총독부의 의심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 민족의식의 방향이 지나인 뿐만 아니라 내지인으로도 향하면 대단히 곤란해지니까요. 그래서 확실히 내일은 헌병 쪽에서도 박사님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고 만족할 만할 내용을 추가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박사는 이제까지 연설에서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입에 담으려 한다. 그 또한 이게 정말 옳은 건지 1시간 정도는 고민하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정해진 이상, 그리고 여기 어딘가에 숨어있는 헌병 밀정이 자신에 대해 불리한 보고를 하지 않게 위해서라면 하는 것 외에 방도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여러분! 이 기득권 세력, 청년들에게 삼강오륜이란 노예근성을 주입하고 부려먹으려며 자유와 권리를 박탈하려는 기득권 꼰대들은 곳곳에 있습니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 바로 상해의 이른바 대한민국 임시정부인 가정부입니다!”


그 순간, 당황스런 침묵이 좌중을 덮었다. 앞장서 소리치던 계전아 양조차도 손에 입을 가져다대며 눈을 크게 뜬다. 안 박사는 자신들의 중국인 린치를 비판하고 중국인에게 사과하던 유지들을 기미년에 만세 좀 불렀다고 뭐라도 되는 줄 안다며 비난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가듯이 한 말에 불과했고 그들에 대한 청중들의 분노가 더 강했기에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차원이 달랐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도 상해 가정부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건 알음알음 알고 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안 박사는 예상한 반응을 확인하고 연설을 이어간다.


“가정부에 대해 제가 이런 말을 해서 놀라셨을 겁니다. 그 머나먼 상해까지 가서 민족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을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당연하겠죠. 하지만 말이죠, 저는 진실을 알았습니다. 상해가정부 사람들이 어떤 자들인지! 결국 유교 기득권 꼰대 친중 사대주의자라는 점을 다 알아버렸단 말입니다!”


그 말에 좌중이 술렁거린다. 안 박사의 연설에 열광하던 그들이었기에 상당한 충격파가 번져나가기 시작한다.


“상해가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자처한다고는 알 만할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그런데 이 ‘대한민국’이란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십니까? 바로 짱꼴라들의 자칭 국명, 짱꼴라들의 유사국가가 내세우는 국명, 바로 ‘중화민국’입니다!”


그 말에 경악에 가득한 탄성이 청중들에게 번져나간다.


“저도 알고 놀랐습니다. 대한민국이란 말이 중화민국에서 온 것이었다뇨! 믿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냥 우연의 일치거니 하고 넘길 수도 있었죠! 하지만 상해가정부와 짱꼴라 유사국가 사이의 더러운 연결점을 하나 더 찾을 수 있었습니다! 상해가정부가 내세우는 이념, 가정부의 조소앙이가 만들었다는 삼균주의입니다! 무슨 세 개의 균등이 어쩌고 하는 주의인데, 이 삼균주의가 어디서 나온 건지 아십니까? 바로 손문의 삼민주의입니다! 민 자를 균 자로 바꾸면 삼민주의가 삼균주의가 되는 겁니다!”


다시금 경악의 탄성이 번져나간다. 임시정부의 이념이 결국 그들이 혐오해 마지않는 짱꼴라의 이념을 바꾼 것에 불과했다니. 그들의 눈에서 임정에 대해 약간이나마 남아있던 존중이 사라져간다. 안 박사 본인도 삼민주의와 삼균주의의 연관성에 대해 그래도 철학박사로서 지적받을 수 있는 사항임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이 청중 중에 없기에 말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자들이 작년 그 일주일간의 ‘축제’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글쎄 우리들이 잘못했다는 겁니다! 짱꼴라의 횡포에 맞선, 우리의 생존과 권리를 위해 싸워온 우리가 잘못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가정부의 요인이라는 사람들, 김구니 조소앙이니 안창호니 이동녕이니 이시영이니 김철이니 하는 사람들, 그때 뒈진 짱꼴라들을 추모한답시고 유난을 떨었어요! 놈들은 독립운동을 한다고는 하지만, 실은 진짜배기 매국노들입니다! 친중사대를 하며 짱꼴라 전제주의에, 장개석이에게 나라를 가져다 바치려는 놈들이에요!”


그 말에 이르자 다시금 “쳐죽일 놈들!”이라고 증오와 분노, 그리고 배신감이 발산된다. 나라를 위해 애국애족하던 사람들이 실은 중국에 나라 팔려는 놈들이었구나! 하나같이 짱꼴라 자본의 노예들이었구나! 이들 중에 안 박사의 말에 정말 그러한지 묻고 싶은 자들도 있었다. 그저 이름자가 비슷한 것 가지고 정말 둘이 연관성이 있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안 박사의 강렬한 목소리, 그리고 이제까지 안 박사를 철썩같이 믿어왔던 마음, 그리고 중국에 대해 어떠한 우호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라고는 누구든 증오해 왔던 그들이기에 의문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안 박사는 이제 강연의 절정을 내려 한다.


“우리는 이 민족운동가들이란 자들을 믿을 수 없는 겁니다! 믿으면 이렇게 배신당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어야 하는 건 무엇인가? 바로 짱꼴라들이 이 나라, 더 나아가 이 세계 전체의 기생충이란 겁니다! 놈들을 편드는 먹물들 또한 같은 기생충들이란 것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짱꼴라 자본의 지배에, 짱꼴라식 전제주의의 지배에 저항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구호!”


그 말에 청중이 한 목소리로 외친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안 박사는 군중이 뿜어내는 엄청난 에너지, 히틀러가 유대인의 음모에 대해 열변을 토할 때 같이 “지크 하일!”을 외치던 나치 지지자들 틈에서 느낀 에너지에 전율하면서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의 발언이면 헌병도 넘어가 줄 것이 확실할 것 같았다. 조선의 민족의식 자극은 총독부를 겨냥한 게 절대 아니라고, 상해가정부조차도 중국인에 대한 혐오정서를 부추기기 위해서는 공격할 수 있음을 보여준 이상, 헌병이 그에게 트집잡을 건 없는 것이다.


청중들이 목청껏 외쳐대던 소리가 그들이 슬슬 지쳐가며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열광의 시간이 끝나자가 안 박사는 슬슬 강연을 마무리지으려 한다.


“여기 와주신 모든 분들! 정의의 실현자 분들! 이 안 아무개의 별것 아닌 말이나마 들어주려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작년의 대축제때 그랬던 것 처럼 언제든지 짱꼴라들에 맞설 준비를 하시고······”


그런데 그때였다.


“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


누군가가 터트린 웃음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안 박사는 그 웃음에 멈칫한다. 쩌렁쩌렁 울리는 그 웃음은 제법 나이가 있는 남성의 웃음 같았다. 그것도 무언가 사람을 압도할 수 있는 위엄을 갖춘 자의.


그 웃음에 놀란 청중들이 두리번거리다가 한 곳에 닿는다. 맨 뒷줄에서부터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 웃음 소리의 주인 같았다. 말총갓을 쓰고 백색 도포를 흩날리는 초로의 사내였다. 오른쪽 다리가 불편한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 다리를 질질 끌고 있었다. 그 옆에는 그의 부인으로 보이는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가 있었다. 비녀를 꽃은 머리가 희끗히끗하다. 사내가 웃는 반면 여인은 그들 전부를 쏘아보고 있다. 참으로 한심하다는 듯이.


“누······. 누구시오?”


그자의 출현에 안 박사는 당혹한 목소리를 낸다.


“지나가던 선비요. 그냥 오 아무개라고 칭하겠소이다.”


그는 입은 빙긋 웃고 있었지만 눈은 아니었다. 이 선비의 눈은 준엄하기 짝이 없어서 그와 눈이 마주친 안 박사는 일순간 고개를 돌릴 뻔 했다. 이상했다. 어쩐 일인지 갑자기 튀어나온 이 선비의 눈을 마주대할 자신이 사라져가는 느낌이었다.


“갈 길이 있어 지나가던 와중에 말씀하시는 바가 꽤나 흥미로워서 들렀소이다. 이 오 아무개가 무슨 유세객이나 변설객은 아니나, 묻고 싶은 바가 여럿 있소. 시간 괜찮겠소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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