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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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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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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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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22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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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295화

DUMMY

유언장을 조작했다. 그 지적 한 번에 한 참의의 머릿속에 12년 전 그날의 기억이 파도가 밀려들듯 몰아치기 시작했다.


1920년 2월, 겨울 끝자락의 일이었다.


“이놈의 촌구석은······..”


일본에 아무개 방직회사 경성지사의 영업사원 한덕만 대리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고향마을에 들어섰다. 경성에서 기차를 타고도 차를 구해서 겨우 들어올 수 있는 시골구석. 그는 경성에서 살게 된 후부터 항상 고향을 좋아할 수 없었다. 오가는 것도 불편하고, 흙 묻은 마을 사람들도 보기 싫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랄 때는 몰랐지만 경성에서 살다 보니 마을 들어서자마자 두엄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농한기라 아직 일을 시작하지 않은 채 밭두렁에 앉아 짧은 곰방대에 담배를 태우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던 작인들이 그를 바로 알아보았다.


“안녕하십니까유, 도련님.”


“설때 내려오셨는데 또 오셨습니까유?”


“아. 그래. 일이 좀 있어서.”


공손히 허리를 숙이는 그들에게 한 대리는 건성으로 답하고 고향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때탄 무명옷 차림의 작인들을 마주대하기가 싫었다. 그들의 불결함이 자신이 입은 깔끔하게 다린 양복으로 옮겨가는 느낌이었다.


구정설을 쇠러 10여일 전에 내려갔었던 고향집, 언덕 위에 서서 마을 전체를 굽어다 내려보는 수백년 된 그 기와집으로 가게 된 계기는 3일 전에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OO방직 한덕만 대리님 되십니까? 청주경찰서입니다.


“예? 경찰서요?”


한 대리는 놀라서 되물었다. 어째서 고향 청주의 경찰서가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온단 말인가? 바로 떠오르는 것은 아버지 한호성 진사에게 경찰이 찾아갈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한 대리가 생각하기로는, 아버지는 지금 시국에서는 상당히 위험한 사람이었다. 완고하고 강직한 아버지, 작인들의 절대적 존경을 받으며 인근 마을들 일대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한 진사 어른, 그리고 이른바 독립운동을 어둠 속에서 지원하는 부호.


만세운동이 전국을 휩쓴지 고작 1년이었다. 한 대리는 그때 경성거리를 휩쓴 만세 소리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일본의 회사였다. 조선8도가 혼란상태인데도 휴업하지 않고 계속 영업하는 베짱있는 회사이자, 직원이 거기 참여했다는 정보가 있으면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그런 회사였다. 상경하기 전에 혼인한 역시 지방 유력가 출신의 아내와 7살난 귀여운 딸이 있는 그에게는 기미년의 만세운동은 펄쩍펄쩍 뛰며 태극기를 흔들 그럴 일이 아니었다. 오직 이 일이 끝나가기를, 상사들이 “엽전은 어쩔 수 없어.”라며 그를 흘겨보는 이 혼란상태가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항일의식이 확고한 부친을 두고 있다는 건 그의 사회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명절 쇠러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열화와 같이 총독정치의 부당함과 적에게 둘러싸여 고난받고 있는 주상전하에 대한 비탄의 심정을 토로해내는 아버지는 취직하고 나서부터 지대한 부담의 대상이었다. 그럴 때마다 건성으로 답할 수 없어서 진심임을 가장하고 맞장구를 쳐 줘야 할 때마다 자괴감이 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불안에 가득찬 목소리로 물어보자, 상대는 상당히 부드럽게 답하였다.


-아, 안심하세요. 대리님의 부친 되시는 한호성 진사님을 체포한다던가, 또는 누님 되시는 한자청 씨를 체포한다던가 그런 얘기는 아니니 말이죠.


말투는 부드러웠고 일본 경찰답지 않게 존댓말로 말하였지만, 아버지와 손윗누이가 언급된 것 만으로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대리님에게 부탁드릴 게 있어서 이렇게 전화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무······. 무슨 부탁입니까?”


-실은 말이죠. 우리 서에서 진사님이 사시는 마을에 주재소를 하나 설치하려 합니다.


“주재소를요? 거기에요?”


고향 마을에 경찰 주재소가 들어선다? 한 대리는 듣자마자 엄청나게 시끄러운 일이 일어날 것임을 직감했다. 일본이라면 분노조절을 하지 않는 아버지였다. 그 마을 대부분의 땅이 아버지 소유다. 주재소를 설치하기 위한 토지 판매 자체를 아버지가 안하려 들 것이다. 작년 가을부로 부임한 사이토 총독은 조선 치안의 책임을 헌병에서 일반 경찰로 넘기는 등 여러 유화적인 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터였다. 그런 판국에 경찰이 어떠한 법적 근거도 없이 그 땅에 주재소를 설치하려 들지는 못하기에 어떻게든 합법적인 해결을 보려 할 터였다. 그러나 합법적이고 온건한 수단으로는 절대 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을 게 당연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부친께서 참 완고한 분이셔서요. 어떻게 말씀을 드려도 안된다고만 하십니다. 서장님께서 직접 오셨는데도 내쫓기기만 하셨죠. 내일쯤에 군수님께서 가실 예정이신데 그래도 설득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제 아버지는 그러신 분이니까요.”


한 대리는 아마 도지사는 물론이고 사이토 총독 본인이 와서 설득을 시도해도 쫓겨나기만 할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우리는 말입니다.


전화 속 경찰은 잠깐 뜸을 들였다.


-한덕만 씨가 잠깐 고향에 내려가 아버님을 뵙고 설득해주실 수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예? 제가요?”


그 말에 한 대리는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그건 정말로 무리입니다. 그랬다가는 전 호적에서 파이고 집안에서 내쫓길 겁니다.”


-아, 예. 무리한 부탁인 건 잘 압니다.


“게다가 자식된 자로서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뭐합니다만······.”


한 대리는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몇년 만 더 기다려주셔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 토지를 상속받는다면 문제없이 매매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대리는 아버지의 건강상태가 요즘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 설에 내려갔을 때, 한 진사는 누워서 아들을 맞이했다. 한때 강건했던 그의 육체는 노쇠와 병으로 시들어가고 있었다. 한 대리는 어머니 임종 때 보았던 그림자를 아버지의 얼굴에서 보았다. 인간의 생명력이 빠져나가고 있는 증표인 그 그림자를.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는 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집안이 쌓아온 부의 원천인 그 드넓은 토지를 가지게 된다는 기대감이 마음 한켠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면 결국 그 땅은 자신의 땅이 된다. 지금 시점에서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긴 싫었다.


그러나 상대는 그럴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이미 예산편성과 배치인력 내정이 끝났습니다. 주재소 건물 공사는 늦어도 올해 안에는 시작되어야 합니다. 아버님께서 언제 작고······. 아, 죄송합니다. 대리님께서 언제 상속을 받으실지 정해지지 않은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한 대리는 잠깐이었지만 이 경찰의 말투가 “망할 늙은이. 빨리 죽어버리면 좋을텐데.”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느꼈다. 남의 아버지 가지고 왜 그런 말투냐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입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그때 상대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그리고 그쪽이 우리 부탁을 거절할 상황은 못될 겁니다.


“예? 그건 어째서입니까?”


다음 순간, 한 대리는 숨을 멈출 뻔했다.


-누님 되시는 한자청 씨가 남편분인 오세창 씨와 함께 조만간 보안법 위반행위를 저지르려고 한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이 소식을 회사에 알려드리면 매우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누님과 자형이? 한 대리의 눈 앞이 깜깜해졌다. 자형은 합방이 되자 재산을 풀어 자기 따르는 사람들 무장시켜 이른바 의병이라는 걸 일으켰던 사람이다. 비록 토벌당하기 전에 자진해산하긴 했지만, 일본의 지배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자형과 누님이 언젠가 자신의 걸림돌이 될 거라 생각해 항상 노심초사하던 차였다. 결국 이런 식으로 올 것이 와버린 것이다.


-우리는 한덕만 씨가 아버님이나 누님과 달리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 분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인 만큼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만들고 싶진 않습니다. 우리 뜻을 이해하겠지요?


“예······. 알겠습니다······.”


한 대리는 터져나오는 한숨을 막으며 힘없이 대답했다. 대체 이분들은 가족이 돼서 왜 내 앞길 막을 짓만 해댄단 말인가!


그런데 이 경찰이 다음에 한 말은, 그의 눈을 번쩍 띄이게 했다.


-물론 우리는 공짜로 사람을 부려먹진 않습니다. 설득에 성공한다면 소정의 보상금을 드리죠. 얼마 정도냐면······.


경찰이 제시한 그 액수에 침이 저절로 꿀꺽 넘어갔다.


-실패하신다 해도 수고비는 드리겠습니다. 제시한 보상금보다야 적겠지만요.


“아. 예.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차후 설득 성공 여부를 보고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종료되었다. 한덕만 대리에게는 경찰의 은근한 협박보다는 제시한 보상금 때문에라도 움직여야 할 이유가 생기고 말았다.


그의 재정상황은 스스로 생각해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경성에서 다섯 칸 짜리 집에서 살며 유모 한명도 고용하고 살고 있지만, 이것은 그가 회사에서 받는 월급으로 해결한 게 아니었다. 귀하게 자란 딸이 고생하는 걸 원치 않은 처갓집의 지원으로 얻은 것이었다. 아버지의 뜻에 경성으로 올라와 신학문을 배운 그에게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닌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여지를 주는 불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 과장 승진이 누락된 그에게 있어서, 지금의 생활 유지도 조금씩 부담스러워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는, 그는 이곳에서 만년 대리로 회사생활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더 커지고 싶었고, 더 이름을 떨치고 싶었다.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그는 세상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조선이 얼마나 허약했는지 깨달았다. 근대화하지 못하고 계몽되지 못하여 뒤쳐지고 낙후되며 냄새 풍기는 조선. 그러니까 그가 상경하기 얼마 전에 일본이 이 땅 전체를 차지하게 됨은 당연한 것이었다. 더 많은 돈, 더 강한 힘을 가진 일본인들이 부를 뽐내고 다닐 때, 그는 분노보다는 동경을 느꼈다. 청주에서 나름 세도가라는 집안의 부도 그들의 화려함에는 절대 미치지 못해 보였다.


그래서 학교를 끝마치고 청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날이 갈 수록 새로운 벽돌건물이 우뚝 서고 곳곳에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한 경성을 떠나 조금만 어두워져도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고향으로 내려가기가 싫었다.


그래서 그는 취직을 결정했다. 경성에서 살며 돈 버는 법을 배우고, 촌구석에서 살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명성을 누리며 살고 싶었다. 그 방직회사는 조선에서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조선인 사원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선교사의 학당을 졸업하여 신식교육을 받은 것이 도움이 되어 어렵지 않게 취직할 수 있었다. 경성에 사는 평범한 사무원들보다 더 받으면서. 딸 주리가 태어나기 1년 전이었다.


그러나 회사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야 이 새끼야. 구정 쇤지 얼마 안됐는데 또 휴가 쓴다고? 너 정신이 있어 없어? 엉?”


일본인 과장이 그의 가슴을 쿡쿡 찔러대며 한 소리였다. 이 과장은 한 대리가 입사한지 6개월 후에 입사한 사람이었다.


첫 회사생활을 시작한 후 청주에서 도련님이라 받들어지던 그였기에, 높은 사람이 아닌 평범한 조선인 취급을 받는 게 정말로 불쾌하였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꾹 참으며 계속 일해 왔다. 그러나 갈 수록 버티기 힘들어지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가 평사원일 때 일본인 입사동기들은 2년여 만에 주임으로 승진했다. 그가 3년동안 평사원으로 있다가 주임으로 승진했을 때, 입사동기 몇은 이미 대리 직급이었다. 4년동안 주임으로 있다 대리를 달았을 때, 자신이 직접 일을 가르쳐준 후배들은 이미 대리였다. 자신 뿐만이 이런 일을 겪은 게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조선인으로 태어나서 입사한 게 죄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비참한 심사가 가슴 속에 뭉치고 응어리지고 있었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그렇습니다. 2박 3일 정도면 끝날 일이니 말미를 주시면······.”


“헛소리하고 자빠졌네. 뭔 일이길레 회사 일보다 중요하냐? 하여간 이래서 엽전은 안돼. 엽전은.”


과장이 그렇게 말하다가 숫제 서류철로 어깨를 툭툭 건드린다.


“쓸데없는 소리나 하지 말고 일이나 해. 하는 소리가 그따구니까 입사 8년차에 겨우 대리 달지.”


한 대리는 이를 아득 갈 뻔했으나, 겨우겨우 화를 다스리고 왜 내려가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어졌다.


“아, 한 대리! 경찰에서 내게 전화 왔던데.”


그가 일하는 부서의 부장이었다.


“경찰에서 일 부탁한 게 있어서 내려가야 한다며? 경찰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 다음주 중으로 갔다오도록 하게.”


“예. 감사합니다.”


한 대리는 부장에게 꾸벅 인사를 올리고, 그를 밉살맞은 표정으로 노려보는 과장은 무시한 채 자기 자리에 앉았다. 이런 일은 한 대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일이었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그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해도 상관 없다는 태도. 그는 처음으로 그러한 모독을 당한 뒤 홧김에 사표를 썼었다.


그러나 그 사표는 그의 서랍 안에 있은 채 벌써 7년이 넘었다. 여기서 나가버리면 아무것도 안된다는 공포가 사표를 제출하기 직전에 그를 사로잡았었다. 그리고 신학문을 배운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사무실에 앉아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자리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 이 회사 사람 중 누군가가 그를 골탕먹이기 위해 아는 회사마다 그가 중도퇴사했다고 알리고 다닌다면, 그는 경성에서 아무 자리도 얻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자기 회사를 가지고 싶었다. 7년 넘게 근무하며 사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흐름을 완전히 파악했고 이곳저곳에 인맥도 생겼다. 더 많은 걸 알려 노력하다 보니 보이는 게 제법 많아졌다. 회사 임원들의 결정에서 문제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굳이 말해봤자 욕만 먹을 게 뻔하니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런 그였기에 이 망할 놈의 회사를 떠나 자신의 회사를, 자신이 마음대로 주무르고 그가 당했던 만큼 남을 부릴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오르고 싶었다. 조만간 총독부에서 허가제였던 회사설립을 신고제로 바꾸며 기준도 많이 완화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문제는 역시 자본금이었다. 회사설립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본금을 넘어서서 몇년 간 사업을 안착시킬 정도의 자본이 필요했다. 사실 그 자본은 앉아서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외아들이자 상속자이니. 아버지는 자형과 누이를 아끼기에 아마 그들에게도 따로 상속을 마련하였을 것이지만, 아무튼 아들에게 더 많은 몫을 상속하는 게 일반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이 계속되었다. 아버지가 내게 그 재산을 온전히 상속하실까? 아버지는 이미 자형의 의병활동에 상당한 비용을 지출하신 바가 있다. 여기에 더불어 작년 만세운동 이후 중국 상해에 세워졌다는 자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인 가정부를 위해 또 한 뭉텅이의 재산을 보냈다고 들었다. 냉혹하게 말하자면, 아버지가 오래 살아있을 수록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이 갈수록 적어질 것 같았다.


게다가 아버지가 유언장을 어떻게 쓸지도 문제였다. 아버지가 유언장에서 그에게 돌아갈 몫을 또 크게 떼어갈 것임을 보장하지 못하였다. 신하된 자의 도리인 선공후사를 내세우며, 돈을 집안의 사사로운 일에 쓰기보다는 나랏일이라는 공의에 쓰는게 더 좋은 것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와중이라, 경찰에서 보장한 금액은 대단히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불어 아버지가 계속 땅 안팔겠다고 버티면서 경찰이 제시하는 토지판매가도 상당히 올라갔을 것이었다. 일만 제대로 성사된다면 당장 사업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현금을 얻는 모습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그는 청주로 내려가는 기차를 타고 여러 차례 자신의 설득논리를 고민하고 고치기를 반복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아들인 자신의 말을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래도 이 시대의 노인네들 중에는 제법 깨인 사람이 아닌가. 이 나라가 왜놈에 손에 들어간 것이 개화당에서 그렇게 떠들어대던 개화를 아니하여서, 신문물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계몽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한탄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성으로 올라가 신학문을 배우고 싶다는 그의 말에 흔쾌히 승낙하며 학비가 필요하다고 편지를 쓸 때마다 기탄없이 보내주었던 사람이 아버지였다. 머리 깎고 양복 입은 모습에 다른 어른들이 혀를 차는 것과 달리 복색이 서양식인 것과 공맹정주의 가르침을 따르는 게 무슨 상관이냐고 하던 사람이 아버지였다.


비록 지금은 저렇게 버티고 있다. 그래도 과학과 이성과 합리성을, 그가 신학문에서 배운 근대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을 통해 설득한다면 분명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였다.


물론 어느 정도는 경찰에서 제시한 액수에 들떠서 낙관적인 방향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자각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최악의 수를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고향집 문을 두드리자마자 하인들이 문을 열어주며 고개를 숙이고 그 중 한 명은 코트를 받아들었다. 미리 온다고 연통을 하고 왔기에 그를 맞이할 준비는 다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나리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시지요.”


집안을 모셔온 청지기가 허리숙여 인사하고는 사랑채로 안내하였다. 한 대리는 “음.”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랑채 마루로 올라가 엎드렸다.


“아버지. 소자 덕만입니다.”


여닫이문 뒤로 “오! 그래! 들어오거라!”하는 가래끓는 목소리가 들렸다. 청지기가 문을 열자 이부자리에 누워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문이 열리자 들어온 찬바람 때문인지 몇 차례 기침을 하고 있었다. 한 대리는 일어서서 들어온 뒤 아버지에게 절을 올렸다. 하얗게 샌 머리를 상투를 틀고 얼굴에 검버섯이 자란 한 진사는 누워서 아들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는지 상반신을 일으킨다.


“설에 내려온지 얼마 안되어서 갑자기 온다 하니 놀랐느니라. 명절 쇨 때 외에는 통 내려오지를 않았는데 이번에 이리 내려오다니 말이다.”


한 진사가 아들을 보는 목소리에는 반가움과 섭섭함이 섞여 있었다. 명절 아니라도 내려와서 얼굴 좀 보면 좋겠다는 아버지의 편지에 한 대리는 항상 공부가 바쁘거나 회사 일이 바빠 시간이 나지 않는다며 내려가지를 않았었다. 번화한 경성을 보며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지는 고향을 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한 대리는 우선 이런저런 잡담으로 아버지의 기분을 떠보려 했다. 회사생활 잘 하고 있다. 주리가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데 벌써부터 절색의 모습이 보인다. 아버지의 병환이 걱정이 다 등등. 한 진사는 “음. 음. 그래.”, “명절에는 혼자 오지 말고 며늘아가하고 주리 좀 같이 데려오거라.”라며 허허 웃었다. 한 대리는 엔간하면 부인과 딸을 같이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귀한 집 아씨이자 식모에게 사모님으로 불리는 사람이 이곳에 내려오면 여러 집안 여자들 중 한 명에 불과하여 매번 고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작년 추석부터 혼자만 내려왔다.


한 대리는 아들이 찾아와 기분이 좋다는 아버지의 모습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무슨 일이더냐?”


한 대리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주경찰서에서 집안 소유 땅을 팔라고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알았느냐?”


경찰서 얘기가 나오자 한 진사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


“그래. 왜놈 경찰이 그딴 소리나 하고 있지. 백날 그래 봐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그럴 수 있을지!”


한 진사는 바로 언짢은 기색이 되어 코웃음까지 친다. 아버지의 그 태도에 한 대리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미 꺼낸 말이었다.


“근데 그건 어째서 말하느냐?”


아버지의 물음에, 한 대리는 막힘없이 말했다.


“그 땅, 파시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 한 진사의 눈이 꿈쩍 벌어졌다.


“상대는 경찰입니다, 아버지. 아무리 애를 써도 당해낼 수가 없는 상대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버지가 무사하겠지만, 계속 버티다가는 더 많은 걸 잃게 될 겁니다. 저들이 지금은 그래도 온건하게 들어와서 땅을 팔아달라 그러고 있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치들이 가진 권력으로 조선팔도에서 못할 게 없습니다. 무슨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아버지 재산을 강탈하거나 저나 누님이나 여타 주변 사람들에게 없는 죄를 만들어내어 감옥에 가두거나 그러는 방법으로 아버지를 압박하려 들 겁니다.”


아버지가 눈을 큼지막하게 뜬 채 말을 못하는 틈을 타 계속 말을 이었다.


“주재소는 그렇게 큰 건물도 아닙니다. 제가 한성 살면서 보니 경찰 주재소라는 게 그저 우리 집 헛간만큼의 크기입니다. 경찰도 몇명 들어가지 않고요. 경찰을 싫어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은 이해 가지만, 그 정도 땅을 파는 건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이 일로 더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는 것보다는 나은······.”


“덕만아.”


아버지가 갑자기 부르는 바람에 그의 말이 끊겼다. 한 진사가 아들을 보는 눈에 핏발이 서리기 시작했다.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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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 284화 +10 21.05.23 329 10 21쪽
283 283화 +6 21.05.18 316 6 18쪽
282 282화 +6 21.05.09 351 7 23쪽
281 281화 +4 21.05.05 310 8 18쪽
280 280화 +6 21.05.02 334 8 17쪽
279 279화 +10 21.04.26 313 7 20쪽
278 278화 +6 21.04.22 324 8 16쪽
277 277화 +10 21.04.18 309 7 25쪽
276 276화 +10 21.04.11 335 10 16쪽
275 275화 +12 21.04.04 319 1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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