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PKKA 님의 서재입니다.

경성활극록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로맨스

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최근연재일 :
2023.08.15 19:04
연재수 :
332 회
조회수 :
107,904
추천수 :
3,801
글자수 :
2,778,318

작성
21.07.25 20:37
조회
259
추천
5
글자
35쪽

291화

DUMMY

안호정 박사는 자신이 특출난 줄 알았다. 경성이 한성으로 불릴 때부터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난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렸다.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7살의 나이에 다 뗴어버린 덕택이었다. 합방 이전이나 합방 이후나 나라가 어찌되건 부를 유지하고 불리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그리고 조상이 양반가가 아니라는 점에 은근한 콤플렉스를 가진 아버지는 큰아들을 자신 같은 장사꾼이 아닌 더 이름을 떨치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 했다. 그 덕택에 안 박사는 배고픔이라고는 모른 채 서양인이 세운 학교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아왔다.


안호정은 어려서부터 글선생에게 배우기 시작한 한학보다는 서양 각국에서 온 선교사들이 가르치는 각종 신학문들에 마음이 이끌렸다. 그는 신학문들을 접하며 좁은 조선을 떠나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학문을 배우고 싶어했다. 특히 모든 학문의 근본이라 생각한 철학은 그가 가장 매력을 느낀 분야였다. 철학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버지였기에 그게 대단한 것인줄만 알고 유학을 가 공부하고 싶다고 하니 흔쾌히 학비를 내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안호정은 독일로 갔다. 일본의 한 영어학교에서 유학에 필요한 외국어들을 익힌 후였다. 칸트와 피히테, 헤겔과 쇼펜하우어의 나라에 그는 지대한 매력을 느꼈다. 또한 비록 세계대전에서 적국이었다지만 여전히 독일 자체에 대단히 애호감정을 느끼는 일본 학우들이 많았다는 것도 큰 영향을 주었다.


수년간의 노력 끝에 박사학위증서가 손에 들어왔을 때, 그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조선에서 대학문턱을 밟을 수 있는 사람은 소수 축복받은 사람에 불과했다. 그리고 일본이나 중국 대학을 넘어서 근대문명의 중심지 유럽에서 유학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중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또 그중에서도 박사학위 소유자는 2천 3백만 조선사람을 통틀어 수십여명에 불과했다.


안 박사의 미래는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조선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그는 자신의 밝은 미래를 상상하였다. 어떤 기업이건 이력서를 내기만 하면 모셔가겠다고 하는 모습이, 경성제국대학이나 보성전문학교, 또는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수로 초빙하겠다고 하는 광경이. 장밋빛 미래가 그의 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여객선에서 손님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한 불길한 대화들, 미국 월가의 주식시장이 폭락했다는 이야기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 이야기가 자신의 미래를 얼마나 어그러트려놓게 되었는지는 조선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의 장밋빛 미래는 잿빛으로 뒤바뀌었다. 미국 주식시장 붕괴는 전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여파를 미쳤다. 그의 조국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의 집안에도 마찬가지였다. 계속 잘 나갈 것만 같았던 아버지의 회사는 창고에 쌓여만 가는 상품을 받아줄 곳이 없어서 도산하였다. 아버지가 2년 전 금융공황 때 기회라고 잔뜩 사들였던 주식들이 대폭락했다. 그간 쌓아놓고 세금을 포탈하기 위해 이곳저곳에 은닉한 재산들 덕에 당장 거리로 내몰릴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안 박사는 번듯한 사무실 안락의자에 앉아 직원들에게 호령하던 시절이 무너져 순식간에 사랑방에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탄식만 해대는 처지가 되버린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처지에 놓였다.


안호정은 이곳저곳에 원서를 넣었다.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대학과 전문학교들이라면 예나대학 철학박사인 그를 받아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원서를 받은 학교들은 그 어떠한 답신도 주지 아니하였다. 조교수는 물론이고 전임강사 자리를 맞겠냐는 제안도 오지 않았다. 유일하게 뭐라도 온 것은, 이름없는 지방소재 전문학교에서 온 시간제강사 제의였다. 안 박사는 독일대학에서 박사까지 딴 자길 뭘로 아는 거냐며 제안서를 박박 찢어버렸다.


그러나 그 시간제강사 자리라도 받아들일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든 시점은, 결국 전문학교에서 자리를 얻는 길을 포기하고 기업 사무직으로 다른 돌파구를 찾으려 애썼던 때였다. 갈 수 있는 학교가 없으면 아무 회사라도 들어가라는 부모님의 채근에, 그는 어쩔 수 없이 경성에 소재한 여러 기업들에 원서를 넣었다. 이력서를 수십 장은 쓴 것 같았다.


그러나 역시 기회는 오지 않았다. 이력서를 제출한 회사들 중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한 회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면접장에서 그는 소크라테스부터 쇼펜하우어에 이르는 유럽 철학이론에 대한 지식들을 총동원해 자신의 학식이 회사에 도움이 될 거라고, 이 자리에 있기까지 얼마나 끝없이 노력을 기울였는지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았다. 면접을 본 회사들에서조차도 아무 말이 없었다. 참다 못해 회사에 전화하면 아쉽게도 불합격하였으니 다음 기회에 다시 도전하라는 말만 돌아왔다. 독일에서 박사학위까지 딴 인재를 못알아본다고 투덜대며, 조선에 너 받아줄 회사 많다던 부모님도 1개월이 지나고 2개월이 지나고 3개월이 지나고 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그를 대하는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식사 때마다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엄청난 학비를 들여 이역만리 독일에서 유학까지 한 아들이 그 만큼의 값어치를 하기는 커녕 집에서 밥과 용돈만 축내고 있다는 시선이 은근히 비춰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선은 동생들이 취업에 성공하면서 더 커져만 갔다. 형만큼 공부의 재능이 없었던 그들은 기술학교에 들어가며 정비기술을 배우거나 주판알 굴리는 법을 배워 계리사자격증을 땄는데, 그 덕에 졸업한지 얼마 안되어 극심한 불경기를 뚫고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이로서 그의 마음은 더더욱 엉망이 되었다. 자랑스러운 장남에서 밥벌레로 전락해버렸다. 그 많은 학비를 쓰고도 뭐란 말인가? 들어간 것보다 더 나와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고 있다. 지금도 내게 집안의 돈이 들어가기만 하고 있다.


내가 대체 왜 이꼴이어야 하는가? 내가 왜 이런 한심한, 잉여생산품과 같은 일상을 보내야만 하는가?


그러던 와중 회사 하나에서 아무 통보도 오지 않은 적이 있었다. 중추원 참의를 겸직하는 한덕만이란 사람이 운영하는 방직업체였다. 그는 홧김에 그 회사로 찾아가버리고 말았다. 그는 사전약속도 하지 않고 찾아온 무례한 손님에 놀란 직원들에게 내뱉었다. 난 박사학위 소유자다. 그것도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대체 내가 왜 여기 취업할 수 없는가? 내가 대체 뭐가 문제라고 나보다 못한 사람들도 얻는 자리를 얻지 못한단 말인가?


그때 저만치에서 문이 열렸다. 사장실이었다. 중추원 참의 한덕만 사장은 얼굴에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저 박사님에게 커피라도 타 드리지.”


한 참의는 그러며 사장실로 들어오라는 듯 손짓하였다. 직원들은 놀란 눈치였지만 그래도 씩씩거리며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안 박사를 안내해 사장실로 들여보냈다.


“공부 많이 하신 박사님. 공부하신 만큼 잘 알아들으실 것 같으니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소.”


한 참의는 안락의자에 털썩 앉아 비서가 타온 커피를 음미하며 말하였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박사학위 소유자 채용은 심각하게 부담스럽소.”


“이유가 뭡니까?”


안 박사는 그때 눈을 부라렸다. 그럼에도 한 참의는 실실 웃으며 커피잔에 각설탕을 하나 탄다.


“지금 살아남은 기업이란 기업은 다 허리띠를 꽉 조이는 때요. 우리 회사만 해도 대공황 터지고 인력을 30퍼센트나 감축했어요. 돈이 들어오기 어려우면 나갈 곳을 최대한 없애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박사학위 소유자를 취업시켜요? 현실을 모르는 모양인데, 솔직히 사무실에 앉아 하는 일은 전문학교까지 나올 필요도 없어요. 고등보통학교 정도만 나와도 그럭저럭 쓸만하지.”


“하지만 대학 나온 사람일수록 더 일을······..”


안 박사의 항변을 한 참의는 딱 잘랐다.


“내가 써 보니 그런거 없어요. 전문학교와 그 이상까지 공부한 사람들은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서 회사에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내 학력이 이 정도니 월급 올려달라 그딴 소리나 했소. 빨간물이 안들어도 말이지. 그래서 이번에 인력감축할 때 그런 소리 하는 친구들부터 다 잘랐어요. 실적이 괜찮은 직원들만 남겨놓고. 회사는 공부 많이 한 사람, 생각 많은 사람 뽑는 데 아니오. 시키는 거 군소리 없이 하면서 내 일 덜어주고 실적 챙겨오는 사람이 최고지. 그런 점에서 박사님은 대단히 부적격한 사람이외다. 박사학위는 서양 말로 그 뭐냐······. 아, 메리트가 없단 말이오, 메리트가.”


대학 나온게 메리트가 없다고? 그럼 내가 대학은 왜 나왔단 말인가? 독일까지 유학가서 그 고생을 하며 박사학위를 땄다. 근데 그게 다 쓸모없는 일이었단 건가? 그저 무의미한 일이었단 건가?


굴욕감에 몸을 떨기 시작한 안 박사의 심정을 한 참의는 헤아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어디 경제학이라도 전공했다면 또 모르겠소. 그럼 투자전망이라도 분석하는데 쓸모가 있으니. 근데 철학? 솔직히 철학이니 주의니 요즘같은 시기에 뭔 쓸모요? 돈이 넘쳐나는 호경기라면 호사가들이 그런거 좋아하고 후원해줄 지도 모르겠는데, 지금이 그런 때요? 괜히 마르크스니 레닌이니 뭐니 하며 빨간 물 드는 치들이 파업 선동하며 철학 철학 그럴때만 쓸모가 있을거요. 필요도 없는 거 배워와서 취직시켜 달라고 하니 대단히 곤란하외다.”


안 박사는 이때 말문이 턱 막혔다. 그는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에 이르는 그 많은 유럽 철학자들의 책을 숙독했음에도, 그게 돈을 벌어다주는데 어떤 쓸모가 있는지 연결시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회사 사장에게 철학이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인지 갈파하기도 힘들었다. 당장 자신이 집안에 짐만 되고 있는데 플라톤을 논하고 헤겔을 논하며 사람이 어째서 어떻게 어떤 과정으로 사유하는지 분석하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렇게 안 박사의 머리 속이 엉망이 되어갈 때, 한 참의는 담배를 하나 물고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 그러니까 박사학위 가지고 학교 같은데서 선생노릇 하는 쪽을 찾아보던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기술이라도 익혀 보시오. 아, 참. 기술은 곤란하겠군. 그 나이 대 쓸만한 숙련공도 적지 않으니. 하여튼 내가 그래도 인정이 있어서 이런 말을 해 주는 거지, 다른 데서 이런 말이라도 해 주겠소?”


안 박사는 이를 악물었다. 한 참의의 얼굴은 그의 옛 지도교수와 같이 진심으로 조언을 해 주는 사람의 낯빛을 하고 있지 아니하였다. 그저 웬 시끄러운 놈 다시 오지 말라는 뜻에서 상대의 인생을 깎아내리고 조롱하고자 마음먹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박사는 아직 식지 않은 커피잔을 한 참의의 면상에 던지고 마구 주먹을 날리고팠다. 그러나 그에게 남아있는 현실의식이 그를 제지하였다. 큰 기업의 사장에 중추원 참의를 폭행한다면 감방이 그의 집이 될 터였다.


결국 “실례 많았습니다.”라고 숙여지지 않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이래서 먹물들이란.”이란 비아냥을 등 뒤에서 들으며 나갈 수 밖에는 없었다.


안 박사는 그날 하루는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열이 단단히 뻗친 머리가 진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어둑해질 무렵 그의 머리에 더더욱 열을 가할 일을 보고 말았다.


한 공사장이었다. 건물하나를 신축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막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한 줄로 서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저녁햇살에 비친 팔뚝과 풀어해친 앞섶의 가슴이 번들거리는 그들은 조선 사람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간간히 듣고는 했던 중국말을 하는 쿨리들이었다.


“오늘도 수고들 하셨소. 앞으로 완공까지 더 열심히 하란 뜻에서 사장님께서 오늘 특별 상여금을 지급한다 하셨소!”


공사장 인부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그리 말하고 그의 옆에 있는 중국인이 그 말을 전하니 쿨리들이 환호하는 모습이 보였다. 쿨리들은 “셰세! 셰세!” 하며 환한 얼굴로 굽신거리며 금일봉이 든 봉투를 받아갔다. 다른 때였다면 그러려니 하며 지나갔을 광경이었다. 그러나 안호정 박사는 가슴에 불이 일어났다.


그렇게 노력해서 외국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딴 내가 있을 곳은 없는데, 왜 저 더럽고 지저분하며 비위생적이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쿨리들에겐 자리가 있는가? 왜 나는 한 푼도 못버는데 쿨리들은 돈을 버는가? 왜 나처럼 수년을 투자해 공부한 사람은 취직하지 못하는데, 그만큼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 돈 버는 자리에 앉아 있단 말인가?


불공정하다! 부조리의 극치다! 망해버려라! 이딴 세상 망해버려라! 활활 불타 없어져버려라!


그날 이후 안호정은 밖을 쏘다녔다.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마음 속에 가득찬 불 때문에 견딜 수 없었다. 의미도 목적도 없이 그저 경성거리 이곳저곳을 배회하다가 밤 늦게서야 들어왔다. 그나마 안식처가 된 곳은 그저 취하고 싶어서 들어갔던 혼마치의 한 카페였다. 일본인이 마스터로 있으며 간드러진 목소리를 내는, 기모노에 에이프런을 걸친 예쁘장한 여급을 끼고 술을 마시거나, 혹은 카페 주인의 속삭임에 술 깨고 후회할 정도의 화대를 내고는 숨겨진 뒷방에서 욕구를 해소할 수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마시다 보니 자신과 같은 신세의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그처럼 박사학위 소유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유럽이나 일본에서 대학을 마쳤거나 또는 조선 내 전문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안 박사와 같은 이유로 자리를 얻지 못한 인텔리들이었다.


안 박사는 같은 신세의 그들과 동병상련을 느끼고 어울렸다. 왜 세상은 우릴 알아주지 않는가? 왜 이 빌어먹을 나라 조선은 우릴 알아주지 않는가? 왜 이 망할 나라 사람들은 노력한 사람들에게 그에 합당한 자리를 주지 않는가?



그들은 세상을 성토하며 마시고 취하고, 자신들을 자조적으로 룸펜이라고, 사회의 잉여생산품이라고 칭하였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다 같은 룸펜 잉여생산물이란 점에서 서로서로 끈끈해졌다.


그들 중 몇 명은 과격한 소리를 하였다. 지배구조가 문제다. 총독부의 통치 때문이다. 조선민족이 자주독립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 원인이다. 그리고 일본의 지배에 굴하는 것을 넘어 결탁한 자들이 사회의 지도층을 형성한 결과가 대공황 상황에서 조선이 더더욱 가난해지는 결과만 낳은 것이다. 총독부가 조선의 가난을 해결할 리가 없으니. 그러니 총독부의 지배에서 조선이 독립하는 게 이 같은 상황을 해소하는 길이라고 하였다.


또 그들 중 몇 명은 마르크스주의를 접하였는지 또 다른 과격한 소리를 하였다. 결국은 끔찍하고 비정한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물건으로 보게 유도하는 구조가 만든 결과라고 하였다. 그 때문에 이들은 인간을 자본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물신화하지 않게, 그리고 반복되는 경제공황에서 세계 인류가 고통받지 않게하려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통한 자본주의의 완전한 파괴와 무계급사회의 도래가 필수적이라고 열변을 토했었다.


그러나 안 박사는 조선독립이니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학명이니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공산주의나 그 비슷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다. 독일 유학 시절에 그들은 거리에서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시끄러운 소리를 하여 자기 공부를 방해하던 자들이었다. 또한 과거 자본가였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르크스주의는 결국 자기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둘 다 위험한 소리였다. 그는 그들 말에 괜히 동조했다가 경찰에 잡혀가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취직도 안되는데 범죄이력까지 남긴다면 더더욱 최악이었다.


그래서 안 박사는 정치 얘기를 하고 싶으면 다른 데서 하라며 은근히 그런 사람들을 무리에서 소외시키려고 하였다. 예나대학 철학박사라는 직함 덕에, 그리고 나름대로 축적한 지식과 말솜씨 덕에 이 룸펜들의 무리에서 어느새인가 우두머리 격이 되어 있었다. 그 덕에 독립운동과 혁명을 말하던 사람들은 어느새인가 그들 틈에서 사라졌다. 상하이의 가정부로 갔다고, 어디서 공산주의 선전이라도 하는 모양이라고, 또는 그러다가 경찰에 잡혀갔다고들 했다. 그렇게 불편한 사람들을 치워버린 안 박사는 부모님의 눈총을 받으며 되지도 않는 취업활동 핑계로 용돈을 타며 카페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이곳에서 분노를 발산하고 같은 분노를 가진 사람들과 공명해야만 살아있다는 자각을 할 수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대공황 중 용케 살아남아 회사를 운영하는 아버지를 둔 한 전문대학 출신 룸펜이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해대는 것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심심하면 짱꼴라 놈들을 고용해대오. 조선 사람들보다 싸게 먹히는데 일은 더 잘한다고. 대공황 때문에 실업난이다 뭐다 하는데, 솔직히 그런 상황이면 짱꼴라들부터 싹 지네 나라로 쫓아내야지. 당장 우리 조선 사람들도 취직을 못하는데 짱꼴라들이 여기서 돈 버는거 그냥둬서 되겠소?”


“맞소! 맞소! 그 말이 맞소!”


혐오감 가득한 그의 말에 동조하는 목소리들이 생겨났다.


“게다가 짱꼴라놈들은 비위생적이라고. 통 씼지도 않고 냄새풍기고. 그리고 그놈들이 모이기만 하면 아편을 빨아대고 아편을 팔아먹는단 말이야. 당장 중국인들 가득한 황금정 가보시오. 거기 가기만 하면 아편냄새가 진동해.”


“근데 지들이 한때 우리나라 상국이었다고, 우리가 그놈들에게 조공바쳤다고 거들먹거리기는 엄청 거들먹거려. 그래서 결국 오랑캐에게 패했죠?”


“우리 조상이란 놈들이 병신 호구지. 그딴 놈들에게 머리나 숙여대고.”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라니까, 그놈들. 언제부터인가 조선 뿐만 아니라 세계 이곳저곳에 기어들어와서 지들 거리를 만든다는데, 대체 뭐 하는 수작인지 모르겠어. 사방팔방에 냄새나 풍기려고 그러나?”


이들은 비록 교육받은 인텔리였고 교육받았다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술에 절고 몇 개월간 속에 화만 가득한 상태였다. 교양을 갖춘 사람의 입에서 나올법한 말이 아닌 시정잡배나 할 상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안 박사는 좌중의 분위기가 중국인 혐오로 흘러가자 분위기를 맞춰주거나 더 띄워줄 생각을 해 보았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게 있었다. 독일 유학시절의 경험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독일 예나대학에서 수학하기 시작한 그는 상상 이상으로 혼란스러운 독일을 보았다. 카이저가 퇴위하고 공화정이 수립된 후 바이마르 공화국이라고도 불리는 독일은 마치 부글부글 끓는 솥과 같아보였다. 그가 독일에 도착했을 때는 패전의 충격과 프랑스군의 루르 점령이 말미암은 천문학적 배상금으로 인한 살인적 인플레이션이 한바탕 쓸고 간 후였다. 실패한 혁명단체인 스파르타쿠스단의 후신을 자처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한 각양각색의 주의주장과 정치적 견해를 가진 이들이 가두로 뛰쳐나와 거센 발언들을 해대었다.


그 시점에서 안 박사의 유학생활 동안 호기심과 매력을 느끼게 하는 한 정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갈색 제복 차림을 한 채, 붉은 바탕에 백색 원 속에 하켄크로이츠라 하는 갈고리 십자가를 그려넣고 행진하는 이들이었다. 민족사회주의노동자당, 또는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이라 하는 그들은 혼란스럽고 시끄러운 공산주의자들에 비해 대단히 질서정연해보였다. 그들의 당수 아돌프 히틀러라는 사람은 뮌헨의 맥주홀에서 지지자들과 함께 봉기했다가 실패해 감옥에 갇혔다고 했다. 루르 점령을 허용한 허약한 사회민주당 정부를 무너뜨리고 다시 강한 대독일을 세우려 했다는 그는 시간이 갈 수록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같이 공부하던 독일 학생들 중 민족사회주의노동자당의, 그리고 그들의 수장 히틀러에게 열정을 바치는 자들이 한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안 박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이끌려 히틀러의 연설을 직접 볼 기회가 있었으니까. 히틀러는 그에게 열광적으로 손을 뻗치는 청중들을 일거에 집중시키는 마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검은 머리에 일자 콧수염을 기르고 다른 지지자들과 함께 갈색 제복을 입은, 강건한 인상의 그 독일인은 우렁찬 목소리로 청중을 일종의 집단최면 상태에 몰아넣는 것 같았다. 단어 하나 하나 어조 하나 하나에 힘이 넘치며 독일이 처한 상황에 대한 비분강개를, 독일인도 아닌 안 박사 본인에게도 가슴을 불태우게 하는 느낌을 들게 하였다.


연설에 나선 히틀러, 그리고 히틀러를 지지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이 나라 독일의 패배는 유대인들 탓이라고. 유대인 혈통인 마르크스의 이념을 따르는 유대인들과 그들에게 물든 사회주의자들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독일제국의 후방에서 폭동을 선동해 베르사유 조약의 굴욕을 당하게 된 거라고. 국제 금융자본과 소련 볼셰비즘을 조종하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이 나라 독일을, 더 나아가 세계를 좀먹고 있다고 말이다.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는 이 유대인들을 이 독일에서 싹 쓸어버려서 유대인들로부터 독일을 구원할 구원자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학부생이었던 안 박사는 히틀러 개인에게 매력을 느끼면서도 그 주장에 황당함을 느꼈다. 유대인이라 함은 성서 속의 민족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밖은 죄로 천주교건 개신교건 정교회건 기독교 세계 전체에서 미움을 받고 있으며 지금은 나라도 없이 이곳저곳에 산재해 사는 자들에 불과하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그 정도의 힘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또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을 줄여서 ‘나치’라고 경멸해 부르는 다른 학생들과 동의한 게 있었다. 금융자본과 볼셰비즘은 상극인데 유대인들이 어떻게 그 두개를 동시에 조종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질문에 히틀러 지지자들은 미국의 금융재벌 로스차일드 일족과 볼셰비키당의 레닌과 트로츠키, 지노비예프와 스베르들로프 모두 유대인이라고 했다. 이들이 모두 유대인인게 유대인의 세계지배 음모가 아니면 무엇이겠냐는 것이었다.


안 박사가 그냥 우연이 아니냐고 하니 그들은 책 한권을 해답으로 내놓았다. 『시온 장로들의 의정서』, 줄여서 『시온의정서』라는 책이었다. 총 24장으로 구성된 책 내용은 기이했다. 100인의 유대인 장로들이 모여 만들었다는 이 “의정서”는 유대인들이 어떻게 세계를 지배할지 모의하는 책이었다. 유대인들이 세계의 금융자본과 문화예술 및 사상을 장악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논하고 있어서 상당히 그럴싸하게 보였다.


그러나 이떄의 안 박사는 다른 친구들과 같이 코웃음을 쳤다. 유대인들이 정말 이런 음모를 모의했다면, 그럼 이 책 자체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게 아닌가? 유대인들이 정말 세계 금융자본과 국제공산주의를 배후조종할 정도로 암흑 속에서 막대한 힘을 휘두룬다면, 이런 문서가 노출될 일 자체가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말은 히틀러 지지자들을 순간 침묵시켰다. 그 중 성미 급한 자가 “이 유대자본의 노예!”라고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기 전까지는.


그런데 중국인을 성토하는 이 자리에 있다 보니, 웬지 『시온의정서』 속 세계지배 음모의 주체를 유대인에서 중국인으로 바꿔도 그럴싸한 얘기가 될 것 같았다. 그 본인도 인텔리들은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데 쿨리들은 잘만 자리를 얻는다는 분노가 누적되어 있기도 하였다.


“난 그 이유를 알 것 같소. 왜 짱꼴라들이 그렇게 설치고 다니는지 말이오.”


그 말에 술취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안 박사는 생각한 대로 말했다. 중국인들이 세계 곳곳에 진출해 장사를 하는 이유는, 그들이 궁극적으로 세계를 손아귀에 넣기 위해서이다. 실제 수많은 화교 장사꾼들이 각국에서 막대한 돈을 벌며 여러 나라의 경제를 음으로 양으로 장악해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축적한 자본으로 각국의 문화예술계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예술인들은 중국인에, 중국인을, 중국인을 위한 작품들을 쓰며 중국 화교 자본에 종속되고 있다. 그들의 영화에 중국인 인물을 집어넣거나, 음률에 중국 선율을 집어넣는다던가 해서 말이다. 이를 통해 중국문화를 가랑비에 옷 젖는 듯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하여 중국인의 세계지배를 자연스럽게 만든다. 과거 이조시대에 양반들이 명나라에 사대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미 화교자본에 종속되었고 중국인들이 던져주는 이익에 눈이 멀어 민족을 중국의 노예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쿨리들은 중국인 세계지배의 첨병이다. 저임금으로 무장한 쿨리들은 세계 곳곳의 노동시장에 끼어들어 기존 노동자들을 몰아내고 그곳의 주류가 된다. 쿨리들은 흡사 이방의 땅에서 핍박당하는 약자인 것처럼 가장해 그 지방 인텔리들의 동정을 사거나 또는 인텔리들을 매수하여 생존을 위해 쿨리를 몰아내려는 모든 움직임을 도덕적 비판의 대상으로만 만든다. 이를 통해 쿨리들은 화교자본을 배후에 둔 채 세력을 확장하며 중국인의 지배를 위한 교두보가 되어주는 것이다.


『시온의정서』속 이야기를 아는대로 그럴싸하게 변형시킨 이 이야기 동안 카페 내의 룸펜들은 그에게 완전히 시선을 집중했다. 안 박사는 이즈음 술이 조금 깨어 내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했냐며 자기 자신을 비웃었다. 그런데 반응은 그의 예상을 깼다.


“그래! 이게 다 음모였던 거야!”


“짱꼴라 놈들의 공작이었어! 이걸로 다 설명된다고!”


“더러운 짱꼴라들! 쿨리들을 내세워 세계지배를 하려 해?”


안 박사는 당황했다. 이건 그저 화풀이를 위해 지어낸 얘기인데 모조리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박사님! 그럼 우린 어찌하면 좋습니까?”


룸펜 중 한명이 눈을 번쩍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되놈들의 음모에 우리가 어찌하면 됩니까? 이대로 앉아서 당해야만 합니까?”


안 박사가 하도 당황하여 말을 못하는 그 새,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


“죽여버려야지! 짱꼴라 새끼들 벌레 죽이듯 이 땅에서 다 몰아내야지!”


그 말에 다들 일어나 소리를 지른다.


“그렇다! 쓸어버리자! 짱꼴라놈들 다 죽이자!”


“짱꼴라를 몰아내자!”


와아 하는 함성소리에 주변 손님들과 여급들이 놀라고 카페 마스터가 “손님들! 조용히 하십시오!”라고 소리를 지른다. 안 박사는 “아니······. 이건······. 그저······.”라며 당황해 손사래를 쳤다. 그저 장난으로 한 소리가 이렇게 번지니 도대체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그때 카페 으슥한 곳의 문이 열리더니, 험상궂은 얼굴의 사내들이 여러 명 나왔다. 하나같이 어깨가 딱 벌어진 다부진 체형을 하고 시꺼먼 하카마에 하오리 차림이라 대단히 위압적인 인상을 주었다.


“손님들! 우리 업소는 소란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더 시끄럽게 한다면 목덜미 잡혀서 밖으로 내던져질 줄 아십쇼!”


선두에 선 어깨 한 명이 일본말로 윽박지르자 룸펜들은 대번에 술이 깨고 쪼그라들어 자리에 앉았다. 안 박사는 이 업소를 관리하는 야쿠자들이라도 와서 상황을 진정시키니 그나마 안심하고 방금 말은 다 지어낸 거라고 밝히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흥분시켜 놓고 다 거짓이었다고 하면 모임에서 자기 입장이 어떻게 될지 곤란하여 끙끙대던 차였다.


“손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정중한 일본말이었다. 돌아보니 야쿠자들처럼 검은 하오리에 하카마 차림의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전반적으로 미남자였으나 왼쪽 눈썹에 그어진 베인 상처 때문에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소인은 이 가게의 사장인 와타베 류사부로라고 합니다. 손님께 특별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시간 괜찮으시겠습니까?”


딱 봐도 야쿠자였다. 그가 등장하자 다른 거한들이 일제히 예를 표하고 있는 걸 보아 높은 사람처럼 보였다. 분명 소란의 근원인 자신을 벌하러 온 것 같았다.


“죄······. 죄송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안 박사는 빠르게 고개를 숙인다. 하라고 한다면 방바닥에 엎드린 기세였다.


“아니, 손님께 화내거나 그려려는 게 아닙니다.”


와타베는 손사래를 쳤다.


“그저 드릴 말씀만 있어서 그러니 뵙자는 것입니다. 시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의 태도는 사근사근했다. 위협을 주려는 태도는 전혀 아니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위험한 사람 같아 보였지만, 그만큼 와타베 류사부로의 제의를 거절했다가는 무슨 일이 날 것 같아 두려웠다.


결국 안 박사는 이 야쿠자를 따라가고야 말았다. 문을 두어개 쯤 거쳐야 있는 사무실에 들어가자, 와타베가 소파에 앉기를 권하였다.


“성함이 어떻게 되셨죠? 안 박사님으로만 알고 있습니다만.”


“안호정······.. 안호정입니다.”


“아, 그렇군요. 계속 박사님으로 여쭙겠습니다.”


이 야쿠자 간부는 싱긋 웃으며, 손수 말차를 타며 계속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단골로 와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다른 손님들도 안 박사님 옆에 자주 모이는 것 같다 등등의 말이 오갔다. 위험한 사람이란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이리 친절하게 구는 게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저도 우연히 바에 나왔다가 박사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늘 하신 말씀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지나인들이 그런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니요!”


“아니, 그건 지어낸 말입니다!”


안 박사는 얼굴이 빨개져서 한숨을 쉰다.


“그저 독일 유학시절에 본 이상한 음모이론 서적의 내용을 조금 바꾼 것 뿐이라고요. 그런데 다들 그걸 곧이곧대로 믿고 날뛸 줄은 몰랐습니다. 가게에 폐를 끼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 순간이었다. 와타베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게 지어낸 말이던 아니던,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와타베는 그 질문에 이 같이 대답했다.


“저도 지나놈들을 싫어하거든요. 박사님도 그렇고 다른 손님분들도 그렇고. 저야 내지 사람이니 지나인이 조선인 일자리를 빼았느니 뭐니 하는 건 잘 모르지만, 지나놈들이 우리 구역에서 시끄럽게 굴고 소란을 일으킬 때면 혐오감이 솟습니다. 당장 붙잡아 한 명씩 목을 치고 싶을 정도라니깐요!”


그러며 와타베가 재밌는 말을 했다는 듯 박장대소한다. 안 박사는 이 자라면 분명 사람 목을 쳐봤을 거라는 생각에 몸이 저절로 떨려왔다.


“그래서 그런데, 이제 여기 모셔온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와타베는 웃음지으며 안 박사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오늘 했던 그 이야기, 계속 퍼트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예? 어째서입니까?”


안 박사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 야쿠자는 무슨 생각으로 지어낸 말을 퍼트려달라고 부탁하는 건가?


“제가 지나놈들을 싫어한다고 앞서 말씀드렸었죠. 단지 우리 구역에서 일어나는 소란때문만은 아닙니다. 저와 우리 조직은 지나놈들을 이 땅에서 영구히 몰아내고 싶습니다. 무슨 정의감 때문은 아닙니다. 우리 사업을 확장하는 데 자나놈들이 너무 방해되거든요. 그리고 지나놈들을 몰아내는 건 조선 사람들에게도 좋은 일로 생각합니다. 업소들을 여럿 운영하다 보니 조선 사람들이 지나놈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 알게 되었거든요. 이는 우리를 위해서, 더 크게는 조선 전체를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잠깐만요, 그 말씀은······..”


안 박사는 뺨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었다.


“저보고 일종의 반중국인 선전을 하란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하신 내용대로요. 거기에 양념을 더 치셔도 좋고요.”


와타베는 그러며 찻물을 홀짝 들이킨다. 찻잎 하나가 똑바로 선 차였다.


“지나놈들을 효과적으로 몰아내려면 우리 조직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조선인들이 지나의 물건을 사지 않고, 지나 쿨리들을 고용하지 않아야죠. 좀 더 나아간다면, 조선인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얼마 안되는 지나인들에게 실력행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는 안 박사님의 화술과 논리가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 야쿠자가 계속 권하자 안 박사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도 중국인들이 싫다. 자기처럼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저임금이란 이유로 간단히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쿨리들이 경멸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지어낸 말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건 옳은 일인가? 그도 박사학위 소유자였다. 학문적 양심과 정합성에 대해서는 교수들에게 배우도 또 배웠다. 이것은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짓이 될 수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그건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입니다. 저도 물론 중국놈들이 싫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없는 사실을 만들어서 선동을 한다는 건······.”


그때 와타베가 박수를 두번 짝짝 쳤다. 그러자 잠시 후, 야쿠자 한 명이 가방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와타베가 손수 가방을 연 그 순간, 뻣뻣한 지페뭉치들이 안 박사의 눈 앞에서 빛났다.


“우선 선불로 드리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박사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박사님은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실 분입니다. 이 정도는 드려야지요.”


안 박사는 눈 앞의 지폐들에 너무 눈이 부셔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이 돈들은 계리사와 정비사로 일하는 동생들이 이제까지 탄 월급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액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마음을 움직인 건, 자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지난 몇 개월 간 부모님의 한심하다는 눈총 속에서 살아왔다. 취직하여 건실한 직장에서 일하는 동생들에 대한 자격지심 속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이 불경기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철학을 공부하는데 써버린 돈과 시간을 저주하며, 쓸모없는 잉여가 되었다며 자조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 사람은, 비록 야쿠자라 할 지라도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해주고 있었다. 그 말이 돈보다 더 값졌다.


“하······. 하겠습니다!”


안 박사가 겨우 숨을 고르며 말했다.


“좋습니다, 박사님. 사람은 돈을 써서라도 모아드리겠습니다. 박사님의 말을 들을 사람을 계속 모으겠습니다. 더더욱 좋은 말씀을 여러 사람들에게 들려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며 와타베는 돈가방을 닫은 후 안 박사에게 넘겨주었다. 안 박사는 그러겠다고 했다. 학자적 양심 따위, 지금의 시국에서는 소피스트들의 궤변만큼이나 쓸모없다. 내가 쓸모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더 이상 잉여에 룸펜이라고 불리지 않기 위해서는 이렇게라도 해야 한다. 누가 그걸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해도 상관없다. 그런 사람은 내 처지가 한번 되 보라지! 그러고도 내게 뭐라 할 수 있는지 보라지! 중국인은 4억이 넘는다고 한다. 조선에 사는 놈들 다 죽는다고 해도 뭐가 대수란 말인가? 내가 직장 하나 얻지 못해서 괴로울 때, 쿨리놈들은 자기 자리를 잡고 금일봉을 타먹고 있었다. 이 불공정한 상황을 개선해야 한다. 노력한 사람이 진정 위에 올라가고 자리를 잡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나라의 중국인, 아니 짱꼴라들부터 사라져야 한다.


그것으로 시작한다. 이 빌어먹을 세상, 이 빌어먹을 나라, 짱꼴라를 다 청소하며 새로 시작하는 거다!


그러나 안 박사는 알지 못하였다. 그가 학자적 양심을 넘어서서, 더 큰 양심을 이미 팔아버렸음을 말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경성활극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04 304화 +14 21.11.14 281 8 19쪽
303 303화 +12 21.10.31 266 5 19쪽
302 302화 +8 21.10.24 251 6 17쪽
301 301화 +8 21.10.17 275 4 35쪽
300 300화 +8 21.10.11 245 7 26쪽
299 299화 +14 21.10.04 252 6 16쪽
298 298화 +8 21.09.22 257 5 22쪽
297 297화 +5 21.09.12 256 5 16쪽
296 296화 +14 21.08.30 250 5 17쪽
295 295화 +6 21.08.22 247 8 22쪽
294 294화 +10 21.08.16 236 8 19쪽
293 293화 +10 21.08.08 253 3 25쪽
292 292화 +12 21.08.01 255 3 39쪽
» 291화 +16 21.07.25 260 5 35쪽
290 290화 +8 21.07.18 290 8 23쪽
289 289화 +16 21.07.11 307 6 18쪽
288 288화 +10 21.07.04 332 8 18쪽
287 287화 +12 21.06.27 313 8 18쪽
286 286화 +8 21.06.20 363 6 20쪽
285 285화 +10 21.05.30 345 10 21쪽
284 284화 +10 21.05.23 328 10 21쪽
283 283화 +6 21.05.18 315 6 18쪽
282 282화 +6 21.05.09 350 7 23쪽
281 281화 +4 21.05.05 310 8 18쪽
280 280화 +6 21.05.02 334 8 17쪽
279 279화 +10 21.04.26 312 7 20쪽
278 278화 +6 21.04.22 323 8 16쪽
277 277화 +10 21.04.18 308 7 25쪽
276 276화 +10 21.04.11 334 10 16쪽
275 275화 +12 21.04.04 319 10 2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