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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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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16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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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294화

DUMMY

보란 듯이 재기해 일어나 주마! 독립운동 한다는 인생 패배자들이 땅을 길때 그 위에서 실컷 비웃어 주마!


한 참의는 혜월 스님 앞에서 부르짖은 그 말을 실천하려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봤다. 4월 말에서 5월로 달력이 넘어가는 며칠 새 그가 알고 있는 은행장들과 지점장들을 있는 대로 찾아갔다. 저번 다이이치 은행 경성지점장과는 다를 것이라 확신했다. 그 지점장보다 더 많이 접대해주고 더 많이 비위를 맞춰주며 더 많이 선물을 보내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확신은 첫 번째 은행을 방문하자마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난 10년 넘에 기업을 운영해봤던 그였기에, 은행 관련자들이 그를 보는 눈이 어떤지 첫눈에 알 수 있었다. 물론 말은 부드럽고 대하는 태도는 정중했다. 상황을 잘 알겠다. 심심찮은 위로를 보낸다. 이 정도로 오래 거래한 분인데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냐.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모두 한 참의와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 참의는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 자신의 상황 때문에 결정이 어려울 것이지만, 이들은 다 잘 될 거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내부 검토 후 긍정적인 결과를 통보해 줄 수 있을 거라는 말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바로 오늘 방문한 조선식한은행에서, 한 참의는 무참한 현실을 깨닫고 말았다.


“참의님. 정말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그와 10년 이상 알고 지낸 조선식산은행 두취(대표이사, 은행장)은 대단히 솔직한 사람이었다.


“지금 이상의 대출은 어렵습니다.”


“어째서입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한 참의의 언성이 높아졌다.


“이른바 제가 사기를 당했다는 그 사건 때문입니까? 그건 분명 제가 오판한 게 맞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만회할 수 있는 손실입니다! 앞으로의 대출상환에도 문제는 없을 것이고 또······.”


“상환능력의 유무여부는 지금 중요한 게 아닙니다.”


두취는 말을 다 들어주지도 않는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그 돈이 불령선인들의 상하이 가정부로 넘어갔다는 게 더 문제입니다. 이미 상공과에서 공문이 내려왔어요. 참의님을 꼭 집어서요.”


그 말이 가진 의미에 한 참의는 순간 휘청거릴 뻔했다.


“전 사기당한 겁니다! 그 망할 것들에게요! 가정부에 돈을 가져다 바친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나 두취는 애석하단 표정을 지으면서도 말은 냉혹했다.


“경위야 어찌됬건 간에 돈이 가정부로 전달된 건 사실이 아닙니까? 총독부에서는 가정부와 어떻게 연관되던간에 연관 자체가 있으면 좋게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언급하여 유감스럽습니다만······.”


두취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연다.


“ 가정부에 사기를 당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쪽에서 참의님의 경영능력 자체를 의심케 하는 요인입니다. 저는 솔직히 현재까지의 대출도 참의님께서 제대로 상환하실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그 말이 한 참의를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나를······. 나를 금치산자 취급하는 거요! 이 한덕만이를!”


두취에게 거의 달려들 기세의 고함이 두취에게 쏟아졌다. 두취는 거의 사무실 집기를 떼려부술 기세로 성을 내는 한 참의를 말로 진정시킬 수 없자 경비를 불러야 했다.


한 참의는 돌아오는 길에 치솟는 혈압 속에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몰렸단 말인가? 조선은 물론이고 내지의 경제를 흔들 거물까지 될 꿈을 품은 내가 어쩌다가 금치산자 취급까지 받게 되었단 말인가?


그러나 그의 수난은 이것으로 끝나지 아니하였다.


“이······. 이게 뭐야!”


사장실 책상 위에 올려진 전문을 보고 그는 치솟는 분노를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가 방문했던 일본계 은행 중 하나가 대출금 상환일을 앞당긴다는 통보였던 것이다. 참의는 어떻게든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그 은행에 전화를 걸었다.


“이게 어찌된 겁니까? 어떻게 이리 일방적으로 상환일정을 앞당길 수 있단 말입니까! 이건 계약 위반입니다! 계약위반으로 경찰에 고발할 겁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말투만 친절했다.


-대출신청하실 때 약정에 쓰여 있었습니다. 본점에서 채무자의 상환능력 여부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할 시 상환일정의 조정을 실시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 이 무슨!”


한 참의는 비서를 시켜 그 은행과 맺은 대출약정을 가져오도록 하였다. 그걸 보고서야 그제야 그때 읽었던 약정 내용이 기억나고야 말았다. 그때는 그저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하며 약정에 도장을 찍었었다.


-내용을 확인하셨다면 조정된 기한 내에 완납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통화는 그것으로 끊겼다.


“빌어먹을!”


수화기가 거세게 내리꽃혔다. 이 망할놈의 은행들은 죄다 날 금치산자, 무능력자 취급을 하고 있다! 개놈의 자식들! 내 상환능력이 의심된다고? 내 경영능력이 의심된다고? 그럼 보여주마! 하락하고 있는 주가를 상한가로 되돌리는 것부터 시작해 주마!


이후 한 참의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사무실에서 숙식했다. 주식 가격방어를 위한 대책과 이를 위한 현금확보를 위해서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질질 짜고만 있을 아내를 보기도 싫었다.


은행 대출과 융자가 모두 막힌 상태에서 어떻게든 실탄마련을 해야 했다. 은행 적금이 깨지고 가지고 있는 주식과 채권을 손해를 감수하고 모두 매매를 진행했다. 전라도에 소유한 토지들도 긴급한 현금마련을 위해 시가보다 훨씬 적게 내놓아야 했다. 이를 악물고 탈세를 위해 뺴돌린 은닉재산들도 비밀금고에서 빼내야 했다. 그것까지 다 쓰면서 어떻게든 가격방어를 해야했다.


그러나 한 참의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는 표현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수도 없이 회사 명의로, 그리고 자기 명의로 자기 회사 주식을 사들이고 또 사들였어도 떨어지는 주가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주가 하락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때가 오고야 말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더 이상 거래할 수 없다뇨!”


가장 큰 거래처 경성지사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본사 결정입니다. 우리 쪽에서 결정한 건 아닙니다. 계약서대로 위약금은 물어드리겠습니다.


“이제까지 거래 잘 해왔잖습니까! 납기일도 꼬박꼬박 지켰고요! 그런데 어떻게 이리 일방적으로 거래를 취소합니까!”


-글쎄 본사 결정이라 우리가 어찌 해 볼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본사 연락처를 남겨드려도 괜찮을까요?


한 참의는 자신의 살진 육체에서 힘이 주르르 빠져나감을 느꼈다. 추가대출은 안되고 상환을 재촉받는다. 회사 주가는 끝도 없이 하락하고 있다. 여기에 거래처까지 거래를 끊는다고 한다. 이보다 더 최악이 어디 있을까? 이보다 더 깊은 나락이 또 어디 있을까?


힘이란 힘은 다 빠져버린 그에게 올라오는 욕구는 휴식욕이었다. 더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았다. 무저갱이나 다름없는 구렁텅이에 들어왔는데 아무리 발버둥쳐도 위로 올라갈 수 없다. 그저 구덩이 바닥에 누워버리고픈, 그저 지친 몸을 누일 곳이 필요해졌다. 결국 지금 가고픈 곳은 자기 집 침대가 되었다.


이른 시간에 퇴근해 차에서 내려 터덜터덜 걸어 집 문을 열었을 때, 눈에 들어온 광경을 보고 멈칫했다.


“아이고! 부처님! 보살님!”


성 여사가 여전히 펑펑 울며 내불단 앞에서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가 옛날에 본 성황당 앞에서 치성드리던 마을 사람들과 똑같았다. 목적도 의미도 없이 잘되게 해달라고 신령한 존재에게 비는 그 모습. 그러나 그 내불단이 집안에 생긴 계기가 바로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드는 밑바탕을 만든 원흉의 속삭임이라는 생각에, 남편은 아내를 이해해 줄 생각이 없어졌다.


“이딴짓 집어치워!”


힘이 빠진 몸에 다시 힘이 돌아왔다. 한 참의는 울다가 놀란 성 여사를 밀쳐냈다. 그의 손에 내불단 앞에 피워진 향로가 엎어져 바닥에 잿가루를 뿌린다.


“왜 이러세요! 부처님께 우릴 지켜달라고 기도하는데 왜 이러세요!”


성 여사가 눈물을 흩뿌리며 말리지만 이미 늦었다. 한 참의의 성난 손길이 내불단을 뒤엎고 작은 금불상을 바닥에 내팽개친다.


“이 망할 것 때문에 이 꼴이 됐어! 머리깎은 땡중놈 떄문에! 근데 당신은 부처 따위에게 빌 생각이 들어?”


“이게 무슨 말이에요? 부처님이 뭔 잘못을 하셨다고 그래요?”


남편의 행동은 아내에게 맥락이라고는 없는 난폭한 행위로 보일 뿐이다. 한 참의는 자신이 사기당한 경위에 대해 아내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에.


“시끄러! 저 망할 거 당장 버리겠어!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는 게 무슨 소용이야! 아니, 그래도 명색이 금 입힌 거니까, 팔아치우면 급전이라도!”


그때 뒤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이 현장에 개입한다.


“넌 여전히 그런 생각밖에 하지 못하느냐?”


그 순간, 한 참의는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12년 전에 마지막으로 들은, 영원히 듣고 싶지 않은 그 목소리였다.


그의 목이 뻣뻣하게 뒤로 돌아간다.


“누······. 누님!”


한 참의의 손윗누이, 한자청 여사가 들어온다.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동생을 주시하며. 그녀의 옆에는 역시 한 참의가 12년 전 이후로 평생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같이 있다.


“얼굴 보는건 오랜만일세, 처남.”


한 참의의 자형, 오세창 진사였다. 그의 눈 또한 단단히 굳어져 있다.


“여긴······. 어떻게······.”


“소식 듣고 왔다. 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해 큰 공을 세웠다기에 칭찬해주려 왔지.”


“뭐······. 뭐라고요?”


한 참의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간다. 저들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자신이 가정부 사람들에게 사기당해 20만원 넘게 바쳤다는 건 신문에 공개되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 은행만큼이나 공을 들인 곳이 신문사들이었다. 주식취인소에 돈 소문은 다 헛소문에 불과하니 보도했다가는 고발하겠다고 윽박지른 것도 공들였다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여하간 그 사건에 대해 보도한 신문사나 잡지사는 없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이, 체포당한 이후 시골 촌구석에 처박혀 있는 자들이 그건 어찌 알았다는 건가?


그 순간, 한 참의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누님도 한패거리였던 거요?”


한 여사가 자신이 사기당한 걸 알고 있음이 그런 결론으로 연결되기에는 비약임을 본인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정신이라 감정을 분출할 말이 저절로 토해져 나온다.


한자청 여사는 코웃음을 친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들어서 알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그 훌륭한 사람들에게 그래도 상관 않겠다고 말했을 뿐이지.”


그 말에 한 참의가 부들거리는 검지손가락을 곧추세워 삿대질을 한다.


“고발하겠어! 사기방조죄로 고발하겠어!”


그러나 손윗누이와 자형에게는 아무 타격이 없었다.


“그러하고 싶으면 그리하시게. 우리는 집 안방보다 형무소 감방이 더 편하니까 말일세.”


오 진사가 그러며 허허 웃는다. 한 참의는 새삼 기억해 냈다. 자형이건 누님이건 자신의 사고체계로 접근하면 말 자체가 안통하는 사람이라는 걸. 정말로 경찰을 불러도 입을 다물지 않고 출동할 때 까지의 시간간격 동안 자신을 짜증나고 화를 토해내게 하는 말을 잔뜩 할 사람들이었다.


“뭣하러 여기 온 거요?”


“비웃으러 왔다, 이 못난 놈아.”


한 여사가 차갑게 웃는다.


“네놈이 반가의 소임을 저버리고 각종 헛짓거리를 하다 이 꼴이 된걸 비웃으러 왔다.”


그 말에 한 참의의 눈이 뒤집어진다.


“무슨 자격으로! 무슨 자격으로 날 비웃겠다는 거요? 누님이!”


“네 하는 꼴 보고 비웃지 아니할 사람을 찾아보는게 더 쉽지 아니하겠느냐?”


그러자 한 참의는 격렬한 목소리를 토해낸다. 그의 입에서 침방울이 된다.


“천만에! 누님하고 자형은 실패했소! 자기신세도 망치고 자식농사도 망쳤소! 그 잘난 독립운동 한답시고 감방을 밥 먹듯이 들어가며 생산적인 거라고는 한 번도 안했지! 난 경성 올라올 돈이 누님에게 있다는 게 더 신기하오!”


“그렇다면 넌 무슨 참 대단한 성공이라도 했다는 게냐? 불효하고 불충하며 불인하고 불의해 성학을 등지고 적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살펴줘야 할 고을 사람들의 원성을 받은게 참 대단한 성공이로구나.”


“공자님 소리 따위 집어치우시오, 누님! 내겐 그딴 건 개인의 자유를 옳아매는 헛소리 뿐이니! 아, 공자건 맹자건 주자건 정자건 누님과 자형이 그렇게 떠받드는 사람들은 ‘개인’이니 ‘자유’니 하는 개념을 말한 적도 없고 생각한 적도 없지!”


“그래. 넌 참 자유롭구나.”


한 참의의 도발은 그저 손윗누이의 비웃음만 자아낸다.


“조상들의 뜻을 저버리고 작인들에게 6할 5푼이라는 말도 안되는 소작료를 물릴 자유. 그거 못내면 땅을 멋대로 빼앗을 자유. 흉년이 들 때 고을 사람들을 구휼하지 않을 자유. 네 딸 또래의 애들에게 1원도 안되는 일당을 던져줄 자유. 참 대단한 자유야. 너의 자유에 찬사를 보내주마!”


한 여사는 그러며 배꼽을 잡을 기세로 소리높여 웃는다. 한 참의는 “이······.! 이 망할!”이라며 욕지기를 내뱉는다.


이때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다.


“형님! 어떻게 그리 말하세요!”


성 여사가 울음섞인 말을 꺼낸다.


“두 분이 서로 뵌지 10년도 넘었는데, 어떻게 이리 상처주는 말만 하시고······.”


그 말에 한 여사는 웃음을 멈추고 싸늘한 눈빛을 올케에게 보내며 호통을 친다.


“자네는 그간 뭐 했어? 지아비가 이지경이 될 동안 그저 예 예 하고 따르기만 했나? 지아비가 잘못된 길로 가면 꾸짖고 바로잡아 줘야 하는 게 지어미의 역할이거늘!


그 호통에 성 여사는 벌벌 떨며 입을 열지 못하고 흐느끼기만 한다. 그녀는 이 무서운 시누이에게 무슨 말이라도 꺼냈다가는 더 호통을 들을까봐 입을 열지 못한다.


한 여사가 올케에게 신경을 돌린 틈을 타 한 참의의 입이 열린다.


“무슨 자격으로 날 비웃어! 패배자들이! 인생 실패자들이 날 보고! 그럴 자격은 내게 있다고! 누님이 아니라!”


한 참의는 이제 반말을 서슴치 않고 한다.


“난 자격이 있어! 욕망을 거세해서 망한 이 멍청한 나라 조선을 비웃을 자격이 있다고! 누님과 자형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썩어들어가는 전통에 매달려서 충주 촌구석에 처박혀 공자왈 맹자왈이나 하며 미개한 전근대적 사고관에 사로잡혀 재산 까먹고 감방 갈 동안 나는 근대화되는 경성에서 성공했다고!”


그의 목소리는 이제 고함이 된다.


“당신들이 두엄냄새 풍길 때 난 향수냄새 풍겼다! 조상들처럼, 선비라는 것들처럼 깔끔한 척 위선떨 필요도 없이!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었어! 율곡이건 퇴계건 우암이건 다 입으로는 청빈과 검약을 떠들어대면서도 재산 모으고 노비 부리며 위세떨었잖아! 그딴 위선자들에 비해 난 얼마나 떳떳하냐고! 근데 날 비웃으려 들어? 나를 못난놈으로 만들려 들어? 이런 헛짓거리가 또 어디 있어!”


“이보게, 처남.”


한 참의가 마구 쏟아내는 말들을 조용히 들어준 오 진사가 입을 연다. 그는 처남을 딱하다는 듯 쳐다본다.


“지금 처남 꼴부터 좀 보시게.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말이 많은가? 그저 우리를 실패자 취급하고 무시하면 그만일 게 아닌가?”


“자형하고 누님이 머리 돌게 하잖소! 날 말같지도 않은 소리로 비웃는데 나더러 한 마디도 하지 말란 말이오?”


“그런 말은 안 하였네. 그저 처남 태도가 이상할 뿐이지.”


오 진사가 논변을 전개한다.


“처남은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기 행동이 옳고 합당한 것인줄 알게 하려고 부단히 애를 쓰눈구먼. 옛 사람들을 자네와 같은 수준으로 만들면서까지 말일세. 옛날 분들의 청빈과 검약은 어디까지나 무익한 곳에 재산을 쓰지 않겠다는 뜻이었지 전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먹고 연명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었네. 가솔들의 삶을 책임지고 고을에 큰 일이 있을 때 써야 할 재산은 늘 있어야 했지.”


“어쨌던 청빈 검약 운운하면서도 땅 모으고 쌀 모으며 위선 떨던 건 사실이잖소!”


한 참의의 고함에도 오 진사는 그저 눈썹을 한번 씰룩거리고 만다.


“그래서 처남이 장인어른이나 그 윗대 분들처럼 재산을 쓰셨는가? 아니었잖는가! 작인들에게 그렇게 거둬가고도 뭘 해줬나? 홍수를 대비해 둑을 보강하는데 쓰기라도 했나? 고아와 과부와 자식없는 노인을 돌봐주기라도 했나? 흉년이 들었을 때 모아놓은 곡식으로 진휼을 하기라도 했나?”


차분하게 말하던 오 진사의 눈이 날카로워진다.


“그 정도는 해야 위선이란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지 않겠나?”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한 참의는 전혀 듣지 않고 자형에게 눈을 부라린다.


“왜 무능력자들을 위해 돈을 써야 하는데? 왜 내가 그런 빨갱이짓을 해야 하는데!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이 세상을 발전시키는 거라고! 경쟁사회에서 도태될 놈들에게 불쌍하다고 돈 쓰는 것이야말로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며 비경제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오 진사는 더 들어주지 못하겠다는 듯 중간에서 말을 끊는다.


“그 소위 공정한 기회라는 걸 그 사람들에게서 박탈한 건 바로 처남일세.”


“그럼 뭐 어쩌라는 거요?”


그 지적에도 한 참의는 당당하게 굴려 한다.


“지금 안 그러는 사람 있으면 자형이 한번 나와 보라고 하시오! 나보다 더 성공한 사람, 나보다 더 번 사람들 다 그렇게 하고 있소! 지금의 경쟁사회는 그러지 않으면 진화할 수 없고 발전할 수 없단 말이오! 열등해지고 도태되는 거지! 난 열심히 살았소! 내 힘으로 여기까지 올라왔소! 자기들도 욕망이 있으면서 욕망을 부정하는 위선자들의 말 따위 듣지 않으면서! 앞으로도 그럴 거고!”


“하!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구나!”


한 여사가 코웃음을 친다.


“너는 말 끝마다 개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 운운하는데, 결국 하는 말은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는 게 아니냐? 난 네가 12년 전에 우리더러 성인 말씀만 주워섬기고 거기서 자유롭지 않다고 한 걸 아직도 기억한다. 그런데 그렇게 치면 너도 마찬가지 아니더냐? 남들 다 하니까 나도 한다는 게 참 자유로운 게로구나! 한 수 가르쳐줘서 고마울 따름이로다.”


“이······! 이······.!”


누이의 노골적인 비꼼에 한 참의가 부들부들 떨며 주먹을 꽉 쥔다.


“처남. 처남은 자기 힘으로 여기까지 올라왔다고 했는데, 그것 또한 내가 듣기에는 참 기이한 말일세.”


“뭐가 그렇다는 거요?”


역정을 낸 한 참의는, 바로 다음 순간에 이들을 그 세월 동안 영원히 보고 싶지 않았던 이유를 자형의 입에서 직접 듣고 말았다.


“장인어른께서 본디 내 부인에게 상속하려고 했던 유산, 그것까지 처남이 받지 아니하였는가? 유언장을 조작하면서까지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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