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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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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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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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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1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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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300화

DUMMY

울다 지쳐 어느 새인가 잠드는 일은 한달도 더 전에 끝난 줄 알았는데.


주리가 아침햇살에 부어오른 눈을 뜨며 생각한 것이었다.


전날 밤, 우딩웨이가 독을 들이키고 일곱 구멍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진 직후부터 주리는 내내 울음을 터트렸다. 눈물로 시야가 흐려졌는데도 우딩웨이의 사체를 내려다보는 장카이셴 대인이 그 넓직한 양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음이 보인 기억이 난다.


장 대인은 무겁게 깔린 침묵 속에서 우딩웨이의 시신을 조용히 처리하라고 지시하였다. 어떤 도사 이름을 언급하며 부르라고 한 것을 보아 조용하게나마 장례를 치뤄줄 의사가 보였다. 이후는 계속 울었던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투견장을 같이 나올 때도 울고 차 안에서도 울고 방에 돌아와서도 울었다.


자신이, 그리고 한인애국단의 모든 사람들이 적의 손에서 독립시키려고 애쓰던 동포들이 한 가정을 완전히 파탄시켜 놓았다. 아들은 무자비한 폭행에 불구가 되고 사위될 사람은 죽었으며 아내와 딸은 입에 담지 못할 일을 당했다. 지켜주고 해방시켜주어야 할 동포들이 총독부의 만행에 못지 않은 무도한 야만을 저질렀다. 그 죄업에 마음속이 증오로 물든 우딩웨이는 임시정부 사업에 커다란 손해를 끼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택했다. 너무나도 끔찍하고 비통하다. 같은 조선 사람으로서 너무나도 미안했다. 그 죄책감의 강도는 작년 12월 내내 느꼈던 것에 비견할 만 하여 눈에서 계속 눈물을 쏟아냈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적이 지배하는 이곳에서 같이 힘들고 고통받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뭉치고 위로해야 하는게 옳은 일이 아닌가? 자기들보다 더 수가 적고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그렇게 무참히 짓이길 힘이 있다면 기미년에 그랬던 것처럼 탑골공원에 모여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러야 하는게 더 사리에 맞는 일이 아닌가? 왜 그러지 못하고 그런 금수만도 못한 짓을 저지르고 다녔단 말인가! 내 동포들이!


그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죄책감과 슬픔 속에서 울고 또 울었다. 자신이 힘들 때마다 그랬듯 정우가 꼭 껴안고 등을 토닥여줘도 이번에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정우의 앞섭을 적실 뿐이었다.


정우 또한 마음이 괴로우나 그 기색을 보여주지 않고 그저 말 없이 주리를 토닥였다. 업보로다. 증오에 날뛴 자들이 중국인 거리에서 만행을 저지른 업보가 같은 동포인 우리에게 돌아와버린 격이로다. 악업은 악업을 낳고 또 악업을 낳나니. 그 죄업의 무게가 우릴 짓누르는구나! 업이 자아내는 업의 원리는 참으로 잔혹하도다!


정우는 엉엉 목놓아 울던 주리의 울음소리가 훌쩍이는 소리로, 그리고 새근거리는 소리로 바뀌며 사라질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만 가득했다. 하나같이 어제 잠자리에서 번민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한 것 같았다. 그 누구도 가볍고 즐거운 말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어둡고 칙칙한 표정을 한 채 죽사발에 숱가락을 가져다댈 뿐이었다. 주리는 더 이상 울지 아니한다. 그러나 전날까지 마작판에서 보인 환호하고 즐거워하는 표정은 온데간데 없다. 매일매일을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 때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넘어가지도 않는 아침을 다 끝내고 그릇을 정리할 때, 정우가 이들 중 처음으로 입을 연다.


“사부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다. 천 지부장이 무겁게 “뭐냐?”라고 묻는다. 그런데 정우 입에서 나온 말에 주리는 놀라고야 만다.


“주리 데리고 잠깐 나갔다 와도 괜찮겠습니까? 대로변은 가지 않고 근처만 조금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그 말에 제자들은 일제히 천 지부장의 눈치를 본다. 때가 어느 때인데 그러려고 하냐는 불호령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천 지부장은 놀란 얼굴의 주리를 향해 고개를 돌려 처다보고는 몇 초 정도만 생각하나 싶더니 의외의 답변을 한다.


“그러고 싶으면 그리하거라. 변장 철저히 하고. 점심 전까지는 복귀하도록.”


이에 정우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표한다. 천 지부장은 다른 제자들에게도 “너희들도 그러고 싶으면 그러거라.”라고 하지만, “아뇨. 괜찮습니다.”, “둘이 다녀오면 좋지요.”라고 하며 물러난다.


그리하여 정우와 주리는 완벽히 변장한 채 “잘 나뎌와.”, “조심하고.”등의 배웅을 받으며 여관을 나섰다. 정우는 다 떨어진 갓에 낡아빠진 도포를 두르고 가짜 수염을 붙였으며 도수 없는 안경을 써서 영락없는 갓 상경한 시골 촌부처럼 보였다. 주리는 기운 자국이 여럿인 빛바랜 치마와 저고리에 머릿수건을 푹 눌러써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낙네처럼 위장하였다. 둘 다 햇살을 받으며 여관을 나서기는 처음이었다.


“나 때문에 그런 거죠?”


비좁은 골목길을 걷던 주리가 잠깐의 침묵 속에서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주리는 말 안해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다시 그 우울했던 나날로 회귀하지 않도록, 잠시나마 저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을 걷게 해주려는 정우의 마음을.


“그래. 이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네 마음이 풀리면 좋을 것 같아서.”


정우는 솔직하게 자기 생각을 감추지 않는다.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한 우울하고 암담한 감정만 키울 뿐이다. 이미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이 되어 있고 경험도 있는 자신에 비해 주리는 아직 여리고 민감하다. 그런 만큼 지금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주리는 그런 정우가 너무나도 고마워서, 말 없이 입술을 그의 뺨에 쪽하고 맞추며 답례하였다.


둘은 조용히 이곳저곳을 걸어다녔다. 평일인지라 뒷골목에서도 중국 사람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분주히 오가는 게 보였다. 하나같이 허름한 차림에 여자들은 전족을 하여 걷기 불편해 보였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에 골목이 살아닜는 느낌이었다. 향신료와 밀가루떡 굽는 냄새가 넘쳐났다.


화창한 햇살은 정말 어제 그렇게 울던 주리의 마음을 낫게 해주는 것 같았다. 침울함에 가득했던 얼굴은 한층 밝아지고 무슨 말을 하면 얼굴에 옅게나마 웃음이 깔린다. 주리는 이쯤 되자 자기가 어제 그렇게 울고 또 울었던 게 후회되었다. 자기가 그렇게 우는데 누군들 그 감정이 전염되고 신경쓰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 와중에 또 주리는 자기가 커졌을 때 펑펑 울어 만들어진 눈물의 연못에 몸이 작아지는 바람에 그 속에 빠져서 그렇게 많이 울지 말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앨리스가 생각나 쿡 하고 웃기까지 하였다.


둘은 이제 행정구역상 시나마치(支那町), 그러니까 중국인 거리의 끝자락까지 왔다. 슬슬 돌아가려던 그들은, 갑자기 앙칼진 목소리를 듣고 멈칫했다.


“지나정에 살고 있는 똥같은 짱꼴라 여러분!”


이 목소리는 분명 여자의, 그것도 아직 미성년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놀란 그들은 그 목소리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보았다. 그들이 있는 뒷골목에서 한블록 정도 앞에 있는 대로변이었다. 중국인 거리의 서쪽 입구였다.


“그리고 여기 있는 조선인과 일본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둘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고 건물 그림자 속에 숨어 대로변을 향해 가까이 가보았다. 둘의 눈에 들어온 건 중국인 거리 접경 도로를 점거하다시피 몰려든 조선 사람들이었다. 학생도 있고 양복쟁이도 있고 육체노동자로 보이는 허름한 차림의 사람들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 가장 앞서있는 사람, 손에 새빨간 확성기를 잡고 입에 가져다 댄 사람이 특히 눈에 띄었다. 주리보다 몇 살은 더 어려보이는, 흰 저고리에 검은 몽당치마라는 고등보통여학교 교복 차림의 여자아이였다. 제법 예쁘장했을 그녀의 얼굴은 충격적일 정도로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얼굴이 일그러진 건 그녀 뿐만이 아니었다. 모두 다 일그러져 있었다. 열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여자애를 앞세운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정우와 주리는 그때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 수십명의 군중 앞에 검은 제복을 입은 순사들이 도열해 있다. 하나같이 초조한 얼굴을 한 채 군중들 앞에서 일자 형태로 나란히 섰다. 그 뒤에서는 중국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얼굴은 다양했다. 초조함과 불안감을 고스란히 보이며 움츠러드는 사람들도 있었고, 분노에 가득차 그들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이들도 있었다.


“저는 짱꼴라가 너무 밉고 싫어서 견딜 수 없습니다!”


여자아이가 내지르는 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쩌렁쩌렁 울린다.


“이젠 그냥 죽여버리고 싶어요! 상해에서 일본군대가 그랬던 것처럼!”


주리는 그 속에 담긴 증오와 혐오에 주리는 신경 끝까지 몸이 떨려옴을 느낀다. 대체 저 여자애는 뭔가? 왜 저런 말을 마구잡이로 내뱉는 건가?


“끝까지 그렇게 거만하게 군다면!”


이렇게 내뱉은 여자아이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더더욱 증오가 담긴 말을 내뱉는다.


“상해대학살이 아닌 지나정대학살을 일으킬 겁니다!”


뭐? 주리는 그 말에 아연실색하여 현기증까지 일어난다. 그 뒤로 여학생 뒤의 군중들이 “옳소!”라고 환호하는 말에 다리가 휘청이는 걸 정우가 잡아주지 않았으면 넘어질 뻔하였다. 이 말에 중국 사람들이 “니 슈오 션머!”하며 흥분해 달려들려는 걸 다른 사람들이 제지하는 게 보인다.


이들 사이에 도열한 순사 중 순사부장 계급장을 단 사람이 빠르게 호루라기를 잡고 분다.


“그만! 누가 그런 자극하는 발언을 하라 했나!”


그러나 확성기를 잡은 여자아이의 폭언은 멈추지 않는다.


“조선인의 분노가 폭발하면 그 쯤은 할 수 있습니다! 대학살을 일으킬 겁니다! 대학살을 일으키기 전에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세요! 여지는 조선입니다! 중국이 아닙니다!”


“그만 하라니까! 계속 이럴 거면 해산하라!”


순사부장이 고함을 지르는데 이 중 인텔리로 보이는 양복쟁이가 나와서 “우리는 인천경찰서에 집회시위 신고서를 제출하고 합법적으로 집회 중입니다!”라고 한다. 순사부장은 “이런 말을 할 거라고 사전에 신고하지는 않았다!”라며 역정을 낸다. 이 와중에도 여학생은 멈추지 않고, 이제는 반말을 하며 증오 가득한 고함을 지른다.


“제발 좀 돌아가 이 짱꼴라 새끼들아아아!”


그 말에 군중들이 한 목소리로 외친다. 그 드높은 소리에 주리는 다시금 휘청거릴 뻔했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이때 정우는 빠르게 주리의 귀를 막았다. 힘을 써서라도 주리에게 저 끔찍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고, 저 무도한 소리를 들려주고 싶지도 않았다. 만보산 사건이 일어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인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양산하는 것도 모자라 저렇게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자들이 있다. 자칫하다가는 이제까지 이뤄놓은 성과를 다 허사로 돌릴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것 같았다.


주리는 얼빠진 얼굴로 정우 손에 잡혀 끌려가다시피 걸어가다, 얼마간 대로변에서 멀어졌을 때 분통을 터트린다.


“저 사람들······. 저 사람들 대체 뭐하는 사람들이에요? 맨 앞장 서 있던 그 못된 년은 또 뭐고요!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들을 입 밖으로 내뱉어요? 어떻게!”


정우는 바로 대답해주지 않는다. 지금 주리의 분노를 달래주는 것보다 시급한 일이 있었다.


“사태가 내 생각보다 더 심각해. 우선 지부장님께 보고드리자.”


주리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며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만 반복하며 정우를 따라 씩씩거리며 걸어간다.


빠른 걸음으로 여관에 복귀한 그들은 급하게 지부장부터 찾았다. 최대로 냉철해지려 애쓰면서도 문득문득 튀어나오는 흥분속에 쏟아져나온 두 사람의 보고에, 천 지부장의 표정은 극히 험악해진다.


“집단으로 뭉쳐서 그런 폭언을 그런 데서 내뱉어?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되었을 줄은 미처 예기치 못하였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인다.


“내 오판이로다. 작년 7월 이후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더 노력하고 그런 선동을 하는 놈들을 영원히 잠재웠어야 하는 것이었거늘!”


“지부장님. 어쩔 수 없었습니다.”


명수가 침통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때 분기 예산이 벌써부터 바닥을 드러내던 시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백범 선생님은 중국 사람들을 달래는 일은 정부 분들에게 맡기고 우리에게는 자금조달에 더 주력해 달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후회해도 이미 지난 일입니다.”


“오히려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재호가 한 말이었다.


“저 정도로 규모를 이루고 거리 목전에서 난리를 칠 정도로 세력화된 놈들이 설치는 이상 작년의 그 사태를 분명히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에이 씨! 그럼 또 우리만 엿먹는 거잖아!”


민호가 참지 못하고 격분을 터트렸다.


“작년에 그렇게 사과하고 그렇게 조아리고 그렇게 굽신대고 빵쯔 소리까지 들어도 참다가 올해 겨우 수습했는데, 중국인 혐오에 정신나간 새끼들 때문에 또 그래야 한다고? 웃기지 말라고 해!”


“쌍놈의 새끼들!”


대석의 입에서 험한 욕설이 나온다. 그의 덩치에서 거친 말이 나오니 더더욱 위압적이다.


“몇대 갈겨주면 입도 뻥긋 못한 놈들이!”


“맞아요! 그 못된 년!”


주리가 더더욱 흥분해 입을 연다.


“그 년 머리끄덩이를 확 잡아다 다 뽑아버리는 건데! 상황만 아니었으면!”


천 지부장은 제자들이 흥분해 떠드는 이야기들을 굳이 제지하지 않고 기다린다. 다들 분노에 지쳐 말이 잦아들 때, 종팔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귀환일자 늦춰야 할까?”


“그래. 그것도 좋은 방법이다.”


민호가 눈을 섬뜩하게 번뜩인다.


“저런거 뒤에서 조종하는 놈들 다 목메달거나 아니면 모가지 잘라서 대인께 바치고 가야지! 안 그러면 또 작년같은 일 일어난다!”


“맞아! 다 처리하고 가야 뒤탈이 없는 거야!”


대석이 맞장구를 친다. 하지만 명수는 신중론을 제시한다.


“하지만 복귀일 늦춰질수록 일이 더 꼬일 수 있어. 지금 윤봉길 동지의 거사로 프랑스 조계지도 안전하지 못해서 선생님들 이곳저곳으로 숨어다닐 텐데 너무 늦게 복귀하면 합류하기도 어렵다고. 게다가 여긴 적지야. 빨리 벗어날 수록 안전하지.”


“아. 씨. 그 문제도 있네.”


막 다 처리하고 가자고 목소리를 높이려던 재호가 인상을 찌푸린다. 더 이상 만보산 사건과 배화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애쓰고 싶지만 그러다가는 그들의 일정이 곤란해지는 것이다. 정우는 자신도 어찌 해야할 지 판단이 서지 않아 “사부님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라고 여쭌다.


팔짱을 끼고 무거운 얼굴을 한 채 곰곰히 생각하던 천 지부장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굳이 우리가 나서서 손쓰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미샤가 있지.”


“아!”


제자들은 사부의 판단에 고개를 끄덕인다. 코민테른 요원이자 천 지부장의 전우인 미하일 아흐메토비치 가레예프는 소련 총영사관을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천 지부장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그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흔쾌히 들어줄 것이었다.


“미샤가 아직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코민테른 추종자들과 접촉했는지는 모르겠다만, 만약 되었다면 그 인력을 활용하여 이러한 선동이 어디에서 만들어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을게다. 더 나아간다면 그 주동자들이 누군지 알아내고 코민테른에서 직접 수를 쓸 수 있겠지.”


처음에는 전화를 써서 가레예프와 직접 통화하려 했으나 도청의 위험 때문에 그만두었다. 대신 천 지부장이 가레예프에게 쓴 편지는 다음과 같았다.


“친애하는 나의 미하일 아흐메토비치!


자네의 크나큰 도움 덕에 우리는 무사히 인천에 도착하였네. 보안상 상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우리는 적의 감시를 뚫고 상하이로 복귀할 길을 마련하였네. 다 영국 총영사관 운전수를 협력자로 데리고 있던 자네의 덕이라네. 나는 자네의 은공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이를 우리 정부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의 우호증진을 위해서 필히 우리 선생님들께 보고드릴 것일세.


하지만 상하이로 복귀 전, 자네에게 긴히 부탁할 게 있네.


자네도 알다시피 이 나라에서 중국인에 대한 배외주의적인 혐오정서가 기층민중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퍼졌으며 지금도 그러하고 있네. 그 때문에 이 나라에서 여러 차례 중국인 배척 폭동이 일어났으며 특히 작년의 폭동은 우리 정부와 중화민국간의 연대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네.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운동에 있어서 이런 무도한 배외주의적 감정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적임은 신실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인 자네가 누구보다 더 잘 알걸세.


내 수하들이 오늘 인천에서 다시 배외주의적 폭동이 일어날 조짐을 확인했네. 적지 않은 규모의 시위대가 중국인 거리 앞에 모여 배외주의적 구호를 외치고 중국인들이 떠나지 않으면 전부 학살하겠다는 망언을 내뱉었네. 약소민족간의 연대에 씼을 수 없는 상처를 줄 이 문제는 진작에 처리했어야 할 문제였으나,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우리 사정에 바빠서 그걸 신경쓸 여유가 없었네. 올해 들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우리 정부 사람들의 의거로 중국과의 관계가 크게 개선될 희망을 여기서 직접 보았으나, 또 이런 폭동을 막지 못한다면 전부 원점으로 돌아갈지도 모르네.


그래서 내 그대의 전우이자 옛 동지로서 감히 부탁하건데,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혁명적 정당과의 접촉과 정보망 재건 후에 이런 배외주의적 정서를 퍼트리는 자나 세력이 무엇인지 파악해 주었으면 하네. 그리고 파악한 직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근원을 제거해 주었으면 하네. 우리의 사업을 망치려 든 그 우스꽝스러운 선생을 반혁명분자들의 격리수용소로 보내버렸듯이, 그자들도 잡아서 그리 해주길 바라네. 내버려 두었다가는 그런 배외주의적 정서가 암세포처럼 번저나갈 걸세. 암세포를 제거하듯이 격리와 제거가 최선의 방법으로 보이네.


경과 보고는 우리가 일전에 만났던 그 중국요릿집 대백루에 보내주길 바라네. 자네도 알다시피 그곳 사장이 우리의 협력자라네.


자네가 내게 보여준 신실한 우정과, 그리고 대한독립을 비롯한 세계 피압박민족의 해방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생각하건데 분명 내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 믿네. 배외주의는 제거되어야 함을 자네가 지극히 잘 아는 이상, 반드시 행동할 것이라 생각하네.


자네의 남건이.”


다 쓰인 편지는 봉투 속에 들어가 옥룡회 사람이자 여관의 사환 손에 들렸다. 경성 정동에 체호프라는 러시아요릿집이 있는데 거기서 천남건이 보냈다고 하면 알 거라고 전했다. 사환은 고개를 숙이고 포권을 하며 알아들었다고 하고는 편지를 들고 사라졌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운 주리는 날뛰는 마음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자기보다 어린 여자애가 그런 끔찍한 말을 거침없이 입에 담고 거기에 환호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상황이 이렇지만 않으면 정말 그 여자애 얼굴을 손바닥으로 시원하게 치고 분노에 가득 찬 징치를 퍼부었을 것이다. 왜 그 여자애가 그렇게 중국인에 대한 증오로 가득차게 되었는지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사연을 들려준다 해도 듣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무리 세존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든 존재에 다 불성이 있다 설하셨을지라도, 그런 아이에게 불성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기의 저주스런 사촌오라비이자 지금은 시체조차 남지 않게 해체되어 사라진 오재두 경부보처럼.


정우는 잠도 안자고 씩씩대고 있는 주리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와중에, 거친 말이 나오는 걸 들었다.


“이적행위자에요, 그 년!”


주리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하다.


“뭐가 옳은지 생각도 안하고 지 감정 배설하는 거에만 정신팔려서 우리의 대의를 망치려는 년! 전 사모님께 다 들었어요! 우리 정부에 독립운동 하겠다고 들어와서는 맨날 이거 없다 저거 없다 권리 없다 대접 못받는다 노예 취급 받는다 뭐 때문에 힘들다고 합리적 비판을 빙자한 불평불만만 일삼고 자기 감정 해소를 우선으로 해서 부정적 감정을 이곳저곳에 퍼트려 분열의 싹을 뿌리다가 결국 적의 밀정이 된 것들! 그년이 그런 위험분자들과 무어가 달라요? 그런 년 목매 달아야 해요! 머리통에 총탄을 박아넣어야 해요!”


정우는 그런 주리의 마음을 알고 가만히 안아주기만 할 뿐이었다. 정우 또한 크게 분노하였다. 상황만 아니었으면 전부 무력으로 제압하여 땅에서 나뒹굴게 하거나, 주도적으로 선동하는 자의 얼굴을 기억해 추적하여 형제들과 함께 오밤중에 납치하여 무서운 방법을 쓰더라도 배후를 추궁해 그 배후를 섬멸할 계획을 고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항상 귀엽고 발랄하며 품 속에서 늘상 애교부리던 연인이 분노에 차 이런 말을 토해내는, 이전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이고 과격한 말을 토해내는 모습은 그런 말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심정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주리가 왜 분노하는지 알기에, 그리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하기 보다는 그저 그렇게라도 분노를 발산하는 게 주리로서는 더 후련할 것임을 알기에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라고 하며 들어주며 어깨를 토닥여주기만 하였다.


그렇게 잠을 이루지 못하던 둘은 다음 날 나란히 늦잠을 자버리고야 말았다. 그 결과 일어나자마자 전날 새벽기차로 복귀한 여관 사환의 보고를 들을 수 있었다. 사환은 정동의 그 체호프란 러시아요릿집에 가서 천남건의 이름을 대며 가레예프를 찾으니 그곳 사환들이 러시아말로 뭐라 수근대더니만 기다리라고 하였다. 잠시 후에 그 가레예프란 러시아 사람이 나와서 편지를 받았다. 천남건의 편지라며 기뻐하며 봉투를 뜯은 가레예프는 편지를 읽고 얼굴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가레예프는 바로 그 자리에서 답장을 써서 사환에게 맞겼는데 그 내용은 이리하였다.


“친애하는 나의 친구 남건에게!


자네와 자네 제자들의 무사무탈함을 들으니 기쁘기 그지없다네! 항상 자네가 무사하고 또 큰 일을 이루기를 기대하고 있다네.


하지만 자네가 가져온 소식은 확실히 불유쾌한 일일세.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와 피압박민족의 연대와 단결을 저해하고 해치는 그런 배외주의는,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 같은 이른바 ‘사회민주주의’를 자처하는 배신자들이자 사회파시스트 수정주의자들인 자들이 그들의 본성을 숨기지 못하고 표출한 그런 배외주의는 항상 혁명의 적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일세. (지금 당의 노선은 파시즘을 막기 위해 수정주의자들하고도 연대하는 것이지만 그 원죄를 그들이 어찌 지우겠나?) 나도 그러한 배외주의가 조선에 있음은 익히 알았고 작년에 그런 사태를 촉발한 것도 알았으나 그게 지금도 그렇게 심각한 줄은 자네의 편지로 알았네.


마침 운이 좋게도 나는 어제부로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와의 접촉에 성공하였네. 재건위의 동지들은 현재 제국주의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파괴된 조직과 정보망을 서서히 복원중이라네. 오늘은 재건위의 이현상이란 동지를 접촉했는다네. 중앙당의 지도에 어딘가 냉소를 띄는 모습이 다소 불안해 보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아주 열성적인 투사라네. 몇 개월 이내에 형무소에서 당의 핵심인물인 이재유란 동지도 출옥할 예정이니 당의 재건사업은 앞으로도 더 활기를 띄게 될 것 같네.


요는 당조직이 재건절차를 밟아가고 있는 이상 조선 프롤레타리아트에 이런 배외주의가 얼마나 침투했는지, 배외주의를 퍼트리는 배후가 어디인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일세. 자네의 상황상 그런 배외주의자들을 직접 처리할 수 없는 이상, 내가 그 일을 기꺼이 맞도록 하겠네. 자네가 부탁한 이상 그 배외주의적 선동꾼들의 운명은 일전 그 돼지처럼 울부짖으며 끌려갔던 선생놈처럼 반혁명분자들의 격리시설로 가게 되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니 안심하시게.


앞으로 상하이에서도 연락할 길이 있으면 언제든 체호프로 연락 주시게. 이 미하일 아흐메토비치는 늘 자네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으니!


앞으로도 무사무탈하며 행운이 함께 하길 바라며 이만 줄이네!


자네의 M. A.”


“좋았어! 이제 놈들은 잡히면 평생 시베리아에서 나무나 세개 생겼다!”


민호가 통쾌해하며 웃음을 터트리자 천 지부장과 정우를 제외한 모두가 유쾌히 웃는다. 주리도 들떠서 뭐라 재잘대려 한 순간, 갑자기 여관 문이 확 열렸다.


“대협! 대협! 형님들! 큰일 났습니다!”


들어온 사람은 장 대인의 심부름꾼, 웨이샤오바오였다. 그는 손에 신문쪽 하나를 꽉 잡고 있었다.


“샤오바오! 뭐냐? 호떡집에 불났어?”


재호가 낄낄대며 묻다가 얼굴이 굳는다. 샤오바오는 평소 그 촐싹대던 경박한 태도는 온데간데 없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던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천 지부장이 엄중히 묻자, 샤오바오가 벌벌 떨며 말한다.


“그······ 어제······. 거리 서쪽 입구에서 웬 놈들이 망언을 퍼부었었습니다.”


“그래. 나도 보고받아서 알고 있네. 근데 그게 왜?”


“글쎄······. 그놈들 중 맨 앞장선······. 그 미친년이······. 오늘······.”


샤오바오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구겨진 신문쪽을 펴서 주었다. 펼쳐진 신문을 본 순간, 주리는 경악해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신문에는 자신이 어제 보 았던, 증오에 가득 차 확성기로 대학살을 일으키겠다고 악을 쓰는 그 여자애의 얼굴이 똑똑히 박혀 있던 것이었다. 그 얼굴이 실린 기사의 표제는 이리하였다.


-꽃다운 16세 소녀, 인천 지나정에서 무참히 피살된 채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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