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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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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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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4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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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화

DUMMY

한 참의는 저 승려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저 일본 사람인지 어느나라 사람인지 모를 땡중의 흑색 가사 앞섶을 잡고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완력을 행사하기 직전, 텅 하고 울리는 소리가 그를 멈춰세웠다. 혜월 스님이 오른손에 잡은 석장을 갑자기 바닥에 내리친 것이었다.


그저 그런 소리라면 멈추지 않고 달려들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석장이 바닥을 치는 소리가 너무나도 위압적이었던 까닭이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단지 울리는 소리에 불과함에도, 한 참의의 분노로 뛰던 심장이 순식간에 묘한 경외감과 공포심이 뒤섞인 채로 뛰어버리기 시작했다. 스님이 흡사 고개를 한껏 처들어도 올려다 볼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산같이 느껴질 정도로 보였다.


“빈승은 참의님과 완력을 겨루고자 온 것이 아닙니다.”


묘엔 스님, 그러니까 혜월 스님은 이제 일본말로 말하지 않는다. 그의 입에서 명백히 조선말이 부드럽게 흘러나온다.


“그······. 그럼 뭣하러 온거요?”


분노의 기세를 살리지 못하고 순간 졸아든 한 참의가 말을 더듬는다.


“축하의 말씀을 드리러 왔죠.”


그 말이 순간 스님에게 압도되었던 그에게 다시 불을 질렀다.


“축하는 무슨 놈의 축하! 내가 당신네들에게 사기당한 걸 축하하러 온 거요?”


“축하드릴 일은 여러가지가 있지요.”


스님은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첫째는 참의님이 더 이상 따님 또래 여공들에게 몇 푼 안되는 돈을 던져주며 살인적인 노동을 강요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오, 둘째는 불의한 권력에 아부하고 굴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오, 셋째는 가지고 있는 걸 잃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고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참의님을 내세에 삼악도로 끌고갈 것도, 그리고 지금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드는 것들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될 길이 열렸습니다. 어찌 축하를 아니 드릴 수 있겠습니까?”


스님의 말에 한 참의는 더더욱 약이 오른다.


“지금 날 놀리러 온거요! 내 재산을! 내가 피땀흘려 모은 재산을 사기쳐서 가져가고 내 회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소!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쫓겨날 지경에 처했단 말이오! 그런데 축하?”


“빈승은 진심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스님은 여전히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는다.


“저는 여러 차례 참의님 댁에 드나들며 비유로도 말하고 방편으로도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집착이 있음으로 괴로움이 있다고 말입니다. 재물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하고, 악업을 쌓는데도 그게 악업이 아니라고 느끼게 만든다고 여러 차례 말씀드렸었습니다. 그런데 빈승이 수행이 부족한 탓인지, 아니면 비유를 너무 부드럽게만 해서 그런지 잘 듣지 않으시더군요. 참의님은 오직 제가 금전상의 이익을 가져온다고 믿으셨기에, 그리고 부처님께 복을 빌면 금전이 굴러들어온다고 믿으셨기에 제게 시주하고 불단 앞에서 절하셨을 뿐입니다. 재물을 얻고 싶으시면 내불단 자리에 불상이 아니라 에비스(恵比寿)의 신상을 가져다 놓으셨어야죠. 아니면 마몬의 상이라도 가져다 놓으셨던가요.”


에비스는 일본 신토의 재물신이고 마몬은 그리스도교 전승에 나오는 재물의 악마다. 스님은 어조는 부드러우나 한 참의의 탐욕을 이처럼 비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참의는 스님의 말을 들어 줄 생각이 전혀 없다.


“설교 따윈 집어치우시오! 내 돈 내놓으시오! 내게 사기쳐서 뜯어간 돈 당장 내놓으란 말이오!”


그러나 스님은 고개를 젓는다.


“그 돈은 이미 필요한 데로 갔습니다. 참의님 수중에 있는 것보다 훨씬 값지게 쓰여야 할 곳으로 말이지요. 길바닥에 떨어진 야채로 국을 끓여 연명하면서도 수양산의 백이와 숙제처럼 절개를 지키며 이 나라에 빛을 되찾아주기 위해 목숨을 건 분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 이놈이!”


한 참의는 다시 눈이 뒤집혀져 달려드려 하였다. 그러나 혜월 스님이 다시금 석장으로 바닥을 내려치자 다시 분노가 공포로 뒤바뀌며 얼어붙는다. 한 참의의 눈에는 스님의 그림자가 사장실 전체를 가득 채우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 돈이 참의님에게 있는 한 악도 가는 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미 회사를 차리고 공장을 굴리며 악업이 쌓이고 또 쌓여서 새로 선업을 쌓아 무마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실 터인데, 재물이 눈을 가리고 있으면 그게 아니 되지요. 참의님이 지은 업으로 말미암아 괴로운 삶에 허덕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참의님이 피를 빨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참의님이 소유한 토지와 이 회사의 공장이 있는 곳마다 있지요. 앞으로 참의님이 회사를 꾸리지 못하게 된다면, 그들의 증오를 받을 일도 없으니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한 참의는 스님 앞에서 마음이 위축되어 순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힘없어 보이는 노승이 어찌 이리 무섭게 느껴지는가. 그를 상대로 고함을 지르지도 않고 증오를 담아 노려보지도 않는데, 어찌 이리 속이 와들와들 떨리는가?


“빈승은 이 말씀을 전해드리러 온 것과 더불어, 편지 두어 장 정도를 전달해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무······. 무슨 편지 말이오?”


“주리의 편지입니다. 애석하게도 원래 그 아이가 하직인사 대신으로 쓰고 나오려고 했던 게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저를 통하게 되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딸의 이름이 나온 순간, 한 참의의 공포가 다시 분노로 바뀐다.


“당신이지! 당신이 그랬지?’


“무엇을 말입니까?”


“당신이 내 딸 꼬여냈지! 그 가짜 백작놈이랑 작당해서!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주리가 그럴 수 있소? 어떻게?”


“거기에 대해서는 설명드릴게 다소 많긴 하지만, 주리의 각성은 빈승으로부터 시작된 건 아닙니다. 스스로가 보고 들은 것에 괴로워하다 무엇을 해야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할지 알게 되면서 시작된 것이지요. 빈승도 어째서 그 아이가 지난 몇개월 동안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괴로워했는지 통 몰랐슴을 알려드립니다.”


“거짓말 마시오! 당신네들의 모략이잖소! 눈 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었소! 귀한 딸이었단 말이오! 그런데 그런 아이가 내 뒤통수를 치게 만들었소! 이 망할 땡중 같으니라고! 머리 깎고 승려라 자처하면서도 이런 비열한 수를 써?”


그러나 혜월 스님은 웃는 얼굴로 다시 뼈 있는 말을 한다.


“저런. 자신의 딸은 귀한 줄 아는데 남의 딸도 귀하다는 생각은 안 하신 모양이군요.”


“닥치시오! 남의 집안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무사할 줄······.”


스님은 이때 얼굴에 그려진 미소를 거두었다.


“빈승은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티끌 하나에도 우주법계가 담겨 있다고 말하는 게 부처님 법이라고요. 세상 만물이, 유정물이건 무정물이건 무관하게 모두 불성이 깃들어 있고 우주가 담겨 있다는 게 부처님 말씀이라고요. 참의님께서는 부처님 앞에 고개를 조아리면서도 그런걸 전혀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귀한 줄만 알지 남도 같이 귀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셨지요. 그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말입니다. 참의님의 조상들이 그리하였던 정도의 소작료를 책정하고 땅 뗀다 아니 뗀다로 작인들을 겁박하지 않으셨다면, 일이 오늘에 이르렀겠습니까? 납기일 맞춘다고 밤새도록 여공들을 부려먹고도 생계도 제대로 꾸리지 못할 주급을 대가라고 주며 관리자들이 누가 다쳐도 치료해 주지도 않고 공장기계 제대로 돌아갈지만 신경쓰게만 만들지 아니하셨다면 일이 오늘에 이르렀겠습니까?”


스님이 굳은 표정으로 목소리에 더 힘을 주어 이야기하자 한 참의는 떨리는 심장 탓에 입을 열지 못하였다. 저 증오스러운 사기꾼 떙중의 말이 왜 이렇게 마음 속을 예리하게 도려내는 것 같이 느껴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얼마간 그런 표정을 지은 스님은 다시 얼굴을 부드럽게 하고 미소를 짓는다.


“허나 그러한 과보를 과거의 유산으로만 만들 기회가 왔습니다. 눈을 가리던 재물이 없어졌으니 이제 새롭게 시작할 기회가 온 것입니다. 이제 욕망 그물에 걸린 채 허덕이며 스스로를 옭아매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 참의는 스님의 부드러운 태도에 다시 눈을 부라린다.


“욕망 그물? 욕망 그물이랬소?”


한 참의가 이제까지 심하게 눌려왔다는 듯 열변을 토한다.


“그 욕망이 지금 이 세상을 발전시키고 있는 거요! 그걸 모르시오? 당신은 도쿄도 안 가 보았소? 오사카도 안 가 보았소? 요코하마도 안 가보았소? 고베도 안 가보았소? 아, 가본 적 없겠지! 일본인인 척 사기치고 다니는 조선인이니까! 난 다 가봤소! 그곳들 다 가봤단 말이오!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들이 휙휙 들어선 그곳들이 얼마나 휘황찬란한지, 문명이란게 뭔지 다 봤단 말이오! 그리고 그 문명은 인의도덕이니 그런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것, 사람 자유에 멍에를 씌우는 것으로 만들어진게 아니오! 더 잘 살고 싶다는 욕망, 더 편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 더 돈을 벌고 싶다는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거지! 그리고 그 욕망으로 쌓은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근대화된 제도에 의해 만들어진 거지! 빨갱이 같은 놈들은 내가 노동착취를 하니 어쩌니 하지만, 그럼 뭐 어때서! 내가 내 재산 만들고 더 크게 만들겠다는게 뭐 어때서! 모두에게 불성이 있고 티끌에도 우주법계가 있어? 그딴건 난 신경 안 쓰오! 협력업체와 계약한 대로 딱딱 맞추고 은행 융자금 제깍제깍 갚으며 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아무 문제 없는데 왜 그딴 소리요!”


혜월 스님은 자신에게 달려들 듣 목소리를 높이는 한 참의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래! 그리하였소! 난 더 잘 살고 싶어서 그렇게 살았소! 인의고 뭐고 하는 춘추시대 공리공담 따위 안 듣고 살았소! 근데 그게 뭐 어때서? 난 그 두엄냄새 나는 시골구석에서 나와 문명사회의 일부가 되었소! 지금 경성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도 그것 때문 아니오? 그리고 지금 경성이 밤마다 불야성을 방불케 하는 네온싸인이 빛나는 것도 그것 때문 아니오? 나 같은 사람들, 욕망을 가진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문명화되고 발전하는 거요! 냄새나고 낙후되고 뒤떨어진 전근대시대에서 벗어나 근대로 가는 거다 그 말이오! 문명의 시대로! 그런데 그런 내가 욕망을 가졌다고 무슨 그물에 걸려 헤어나오지 못한다고 해? 그럼 당신은 과거로 가서 살던가! 그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삼강오륜이니 하늘의 이치니 뭐니 하는 거에 얽메이던 전근대 시대로 가서 살던가! 꼭 그러지도 못할 놈들이 내 재산이 부럽고 질투나서 노동착취니 뭐니 하는 개소리나 지껄인단 말이오! 왜 내 재산을 빼앗고 나를 모독하는 건데! 왜!”


한 참의는 쌓였던 할 말을 다 퍼붓고 헉헉거린다. 그렇지만 앞서 보인 태도보다는 훨씬 당당해 보였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다는 거냐? 나는 이 시대에 맞게 행동하였을 뿐, 근대 자본주의의 시대에 맞게 행동하였을 뿐이라는 당당함이 그의 허리를 세우게 하였다.


스님은 그 고성을 조용히 들어주고는 입을 연다.


“참의님. 그러한 말씀은 빈승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의 시간관념은 사람의 이해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지요. 예전에 참의님께서 항하사(恒河沙), 나유타(那由他), 불가사의(不可思議), 무량대수(無量大數)의 개념에 대해 설명해 드리자 크게 놀라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부처님 법에서 관조하는 시간의 규모는 그 정도지요. 그 속에서 근대니 전근대니 하는 건 대단히 무의미한 것입니다. 최근의 시대가 불과 100여년 전의 과거의 시대를 비웃고 폄하하는 특권이 있는 양 구는 것은 더더욱 무의미하고요.”


“그게 뭐 어떻다는 거요?”


한 참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생각이 없어서 역정부터 낸다.



“하기사, 참의님에게는 그 말씀이 잘 와닿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의님 본인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지요. 주리가 대오각성하게 된 계기부터 말입니다.”


“그건 당신네들이 꼬여내서······.”


“빈승부터 시작되지 않는다고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스님의 표정은 잠깐 답답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바로 풀린다.


“주리가 제게 말해주었습니다. 청주의 참의님 고향집에 요양갔을 때 다 보았다고요. 참의님 땅의 작인들이 얼마나 비참한 지경에서 살고 있는지, 참의님 공장의 여공들이 얼마나 끔찍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말입니다.”


그때 한 참의는 명치께에 한 방 크게 먹은 표정이 되었다. 그제야 새삼스럽게 생각났다. 그 발랄하고 애교 많던 아이가 극도의 우울증 증세를 보이게 된 때는, 고향집에 결핵을 치료하러 요양보냈다가 돌아온 후였다고!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 했었는데. 그리고 청지기와 하인, 하녀들에게 한사코 내보내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 두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주리는 그걸 보고 헤어나기 힘들 정도의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자신이 이제까지 누려왔던 행복이 결국 남의 행복을 짓밟은 결과임을 알고 말이죠. 그 결과 한때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번뇌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이 업보를 직접 짓지 않았더라도, 부친인 참의님의 업보로 삶을 영위했으니 그게 곧 자신의 업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참의님의 허물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불효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참의님의 재산으로 살아온 자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거기에서 시작되었단 말인가! 한 참의는 눈이 컴컴해지는 걸 느꼈다. 주리를 고향집으로 내려보낸 것 자체가 엄청난 실수였다. 빨리 주리를 격리시키지 않으면 자신도 부인도 다 전염될 위험이 크다는 의사의 경고에 너무 서둘렀다. 주리가 말을 잘 듣고 또 하인들에게 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연통을 넣어 놓았으니 괜찮을 거라고 여긴 게 최악의 오판이었다.


“여기서 돌아오는 건 이 문제입니다. 왜 주리를 집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셨습니까?”


한 참의가 그때 정신이 번쩍 든다. 그 질문에 자신이 범한 심각한 모순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오?”


한 참의는 애써 무시하려 하지만, 스님은 순간 한 참의가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모습을 놓치지 않는다.


“참의님께서는 욕망이 세상을 발전시키고 문명을 만들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덕에 의한 비난은 오직 참의님의 부에 질투심을 품은 자들이 하는 헛소리라고 하시며 당당해하셨죠. 그런데 그렇다면 말입니다.”


스님의 눈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왜 주리가 참의님처럼 살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순간이었다.


“에이잇!”


한 참의가 참지 못하고 탁상 위의 재떨이를 잡아 스님에게 던져버리고 말았다. 한 참의는 그 재떨이가 스님의 깎아서 번들거리는 머리를 무참히 부수길 바라였지만, 애석하게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스님이 왼손을 전개해 빠르게 재떨이를 잡아친 것이었다.


“화를 내시는 걸 보니 빈승이 정확히 짚은 모양이군요.”


“이······.! 이······! 이 빌어먹을 땡중놈아!”


한 참의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지만 스님은 전혀 내색하지 않는다.


“참의님 본인부터 아셨을 겁니다. 자신이 세상 보기 부끄러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요. 아무리 욕망이 문명을 발전시키고 근대에 이르게 했다고 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더라도, 마음 속에 그러한 의식을 절대 지울 수 없음을요. 그래서 착한 딸아이에게 자신의 치부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그리고 동시에 주리가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랬던 것이고요!”


“닥쳐! 그 입 닥쳐!”


“스스로가 당당하다고 아무리 되뇌일 지라도, 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건 싫다고 느끼셨을 겁니다. 그렇게 느끼지 않으셨다면, 주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보다 재물욕을 충족하는 게 더 중요하며 그게 문명을 발전시킨다고 여기며 살았겠죠. 그리고 주리가 고향집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게는 아니하셨겠지요.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고도 자기 욕망만 추구하고 살았을 터이니 말입니다.”


“입 닥치라고, 중놈아!”


“하지만 참의님은 그리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치부를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하셨죠. 대신 감추셨습니다. 집 안에만 두고 바깥에서 그대 아래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지 못하게 하셨죠. 대단한 모순이 아닙니까?”


“그! 입! 닥치라고!”


한 참의가 스님을 상대로 손가락을 내밀며 부르르 떤다.


“당신도 내 아버지랑 똑같아! 내 하고 싶은 거 사서삼경이니 주자대전이니 들이대며 못하게 하고, 날 망종이라고, 집안 말아먹을 놈이라고 모욕하던 아버지하고 똑같다고! 그딴 쓰레기 같은 공리공담으로 내 목을 옥죄고 자유를 빼앗게 하려는 거라고! 당장 내 회사에서 나가! 네놈들이 내게 사기친 것보다 곱절로 벌어 볼 테다! 그 정도 손실은 얼마든지 충당할 수 있어! 나와 거래튼 은행이 한두곳인줄 알아? 내 거래처가 얼마나 많은 지 알아? 보란 듯이 일어나 주마! 결국 내가 옳았음을 보게 될 거다! 그리고 너희 독립운동 한다는 떼강도 같은 놈들이 비참하게 땅을 길때 그 위에 서서 실컷 비웃고 말겠다!”


하지만 스님은 그 분노에 가득 찬 폭언에 그저 허허 웃을 뿐이다.


“뭐가 그리 우습나!”


“기뻐서 그렇습니다.”


“그래! 기쁘기도 하겠구나!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서!”


“아닙니다. 그래서가 아니에요.”


그때 스님은 그 어느때보다도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참의님이 자신의 악업을 부끄러워 한다는 것에서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한 참의가 눈을 부라리는 가운데 스님은 술술 논지를 전개한다.


“자기정당화에 충실한 자들은 악업을 숨기려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게 자랑스럽다는 듯 내세우죠. 그리고 자신이 진정 자유롭다고 여기며 온갖 비행을 다 저지릅니다. 그 길로 가면 진정 현생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상태가 되지요. 삼악도에서 여러 차례 태어나며 고통 속에 악업을 씼어야 하고, 또 그나마 악도를 벗어나더라도 인간계에서 고통스러운 존재로 환생하여 업을 씼어야 합니다. 하지만 참의님은 그런 지경은 아니에요.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다고 여기는 것은 참회의 첫걸음입니다. 교수대에 목이 걸리고서도 그러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참의님은 대단히 양호한 것이죠.”


순간 한 참의는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이 승려는 증오스러웠다. 그에게서 풍기는 위압감이 없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그는 몸을 떨리게 하는 사실 하나를 알았다. 저자의 말로 분노에 요동치던 마음이 가라앉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온화한 목소리에서 기이한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 기회가 있다는 말이, 왜 그렇게 포근하게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한 참의의 마음 속에서 다시 오기가 발동했다.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저 중놈의 말을, 이미 오랫동안 자신을 속인 저자의 말을 도무지 듣기가 싫었다.


“닥쳐! 당장 나가! 그딴 소리 더 들어주고 싶지 않다! 안 나가면 이 자리에서 경찰을 부르고 말겠다!”


스님은 한 참의의 태도에도 실망감 하나 내보이지 않고 그저 웃는다.


“허허. 아직 시간이 필요하신 모양이군요. 시간은 많으니 빈승의 말을 더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주리의 편지도 읽으시고요. 아 하나 더 있군요. 그것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스님은 벗어놓은 삿갓을 썼다. 품 속에서 편지봉투 두 개를 꺼내 탁상 위에 올려놓고는 사장실 문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때 스님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긴다.


“추후 참의님께 큰 도움이 될 구절 하나를 기억해 두시면 좋겠습니다. 반야심경의 구절이지요. ‘보살은 얻을 것이 없어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다.’입니다. 그 뜻은 여러 번 강론하였으니 아실 거라 믿습니다.”


스님은 그 말을 끝으로 사장실을 횡하니 나가버렸다. 남은 것은 고함을 지르며 자기 책상 위에 모든 걸 쓸어내는 한 참의 뿐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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