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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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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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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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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8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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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277화

DUMMY

“다들 일이 바쁜 와중에 이 송별연에 참석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오! 그리고 여기 몸소 자리에 오신 루 총영사님과 저우 집행위원님! 우리보다 더 바쁘신 분들이 이 자리를 빛내주어 고마울 따름이오! 오늘은 나의 친애하는 의제(義第)이자 한인애국단 경성지부의 지부장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온 천남건과 그의 제자들이 이 조선에서 보낼 얼마 안되는 시간이자, 그리고 오늘 예기치 못하게 일어난 희대의 거사를 기념하기 위한 날이오!”


장카이셴 대인이 축사를 하는 말투는 대단히 정중하였다. 평소에는 상스럽게 아무 말이나 하는 장 대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대단히 예의를 갖추고 표현도 최대한 고급스러게 쓰려 노력하고 있다.


“내 자랑스러운 현제는 어려서부터 나와 의형제를 맺은 뒤, 불학무식한 이 장 아무개의 장자방이 되어 주었소! 한때 우리가 베이징에서 용호형제라는 위명을 얻고 한때 몸담았던 황성파를 거의 손에 넣기 전까지 간 것은 오직 현제의 공이었소. 애석하게도 하늘의 도움이 따라주지 않아 우리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주로 떠나야 했지만, 나는 한때 현제의 도움으로 베이징 강호를 손에 넣을 뻔했던 일을 잊지 아니하고 있고 앞으로도 잊지 아니할 것이오! ”


“지부장님, 뭔가 부끄러워 하시는 거 같아요.”


주리가 키득 웃으며 한 말이었다. 정우는 여전히 중국말을 모르는 주리에게 장 대인의 축사를 통역해 주다가, 이 부분에서 주리와 마찬가지로 천 지부장의 얼굴에 부끄러움이 드러남을 보았다.


“겸손하신 분이니까.”


정우는 천 지부장은 제자들에게 젊은 시절 장카이셴과 함께 황성파에 있을 적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을 생각하였다. 그는 『사기』와 『삼국지』, 『자치통감』 , 『명사』 등에서 보거나 길거리 이야기꾼이 들려준 『삼국연의』나 『수호지』속 인물들의 정치적 모략과 술수를 통해 적수들을 몰락시키며 의형이 대권에 근접하도록 도와주었다고 하였다. 천 지부장은 그 시절 자신의 술수가 얄팍했다고 느낀다며 후회의 감정을 제자들에게 술회한 적이 있었다. 그런 만큼 자신이 한고조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는 공신이 된 장자방 같은 인물에 비유될 자격이 없다 생각한 것이었다.


장 대인은 의동생의 생각은 모르고 계속 축사를 한다.


“그 이후 현제는 나 장 아무개도 만나 본 적이 있던, 위대한 투사인 홍범도 장군을 만나 조선독립에 투신하고 금분세수를 하여 강호를 떠났소. 내게는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으나, 현제가 강호에 머물 사람이 아님은 이전부터 깨닫고 있던 바였으나, 그럼에도 그때는 애석함을 감출 수 없었소. 그런데도 현제는 이 장 아무개를 언제나 대형이라 부르며 그 우의를 잊지 않고 있으니, 형이 된 자로서 참으로 기쁠 따름이오!”


이때 장 대인이 쉬느라 잠깐 말을 끊자, 옥룡회 사람들이 바로 박수를 친다. 박수소리가 짝짝 울리며 식장을 채운다. 천 지부장은 이러한 환대에 그저 얼굴을 굳히고만 있다.


“거 참, 좀 웃어주면 안 돼요?”


옆자리의 에이코가 슬쩍 핀잔을 주지만, 천 지부장은 “내가 이런 찬사를 받아도 되는 사람인지 모르겠소.”라고 음울히 말한다. 그런 남편의 반응에 에이코는 쿡쿡 웃으며 제자들에게 말한다.


“얘들아. 너희들 사부님이 부끄럽다는 걸 굳이 돌려 말하는구나. 더더욱 부끄러워 할 일이 많을 터인데 벌써 그러니 걱정이다.”


장 대인은 이 대화를 못들은 채 옆자리의 천남건을 향해 돌아보며 웃음을 지었다.


“이후 총타주께서 기쁘게도 내게 옥룡회의 조직을 맞기시어 인천으로 가라 하시고 현제가 나를 찾아와 도움을 청한 후, 현제는 우리 조카들과 함께 지난 4년 동안 사실상 사지인 이곳에서 목숨을 걸고 수많은 일을 해내었소! 또한 우리 옥룡회의 사업과 운영에 현제가 여러 조언을 한 것도 형제들은 기억할 것이오! 나는 솔직히 현제가 계속 조선에 머물며 이 형과 정리를 더욱 나누었으면 하나, 정부에서 상하이로 돌아오라고 명하였으니 붙잡을 수가 없소이다. 나로서는 서글픈 일이지만 또한 기쁜 일이기도 하오. 현제가 다시 중원으로 돌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해 싸우며 더더욱 큰 일을 할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오!”


장카이셴 대인은 이 대목에 이르러서 나름대로 정련하려 했던 어투를 평소처럼 거친 바꾸고 만다.


“일본의 웬 빌어먹을 놈이, 지난 사변을 주도했다는 관동군 장교란 놈이 꾸민 음모를 현제와 조카들이 드러내었소! 이름을 봐서 돌대가리가 분명한데, 터무니없는 잔꾀를 부렸단 말이지!”


그 말에 곳곳에서 가벼운 웃음이 터진다. 장 대인은 이시와라 간지의 이름에 돌 석(石)자가 들어있는 것을 비꼰 것이다.


“그 덕에 우리 정부의 중요한 분들이 하마터면 비명횡사할 뻔한 위기를 벗어난 거요! 현제가 우리 나라를 위해 이와 같은 큰 공을 세웠으니, 형이 되어서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소? 또한 오늘은 예기치 못한 경사를 맞이하였소! 현제가 속한 한인애국단의 단원이자 용맹한 투사인 윤봉길 씨가 우리 중화의 원수를 대신 갚아주었기 때문이오!”


그 말에 “와아아아!”하는 함성이 울린다. 윤봉길의 거사 소식은 이미 퍼질대로 퍼진 상태였다. 정우의 눈에 루춘팡 총영사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는 게 보인다. 저우스셴 집행위원은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붉히는 것도 보았다.


“윤봉길 씨가 내던진 폭탄에 그 망할 자라놈들이 나자빠졌단 말이오! 펑 하고 터지며! 시라카와란 놈하고 시게미쓰란 놈이! 제기랄! 그 꼴을 내가 못본게 참으로 애석하군! 윤봉길 씨는 마땅히 형가와 창해역사에 비유되야 할 업적을 남겼소! 사마자장(司馬子長, 사마천) 선생이 봤다면 「자객열전」에 이름을 올렸을 거라고! 몇달 전의 이봉창처럼!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 아우가 있는 조직의 길이 남을 업적이자, 조선이 우리 중국의 친구임을 보여주는 것이오!”


다시 박수갈채가 터진다. 크게 울린 박수 후에 장 대인이 마지막으로 입을 연다.


“나는 그래서,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그리고 우리 현제와 조카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대 옥룡회 형제들이 항상 현제를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자리를 열었소! 나의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강호의 영웅호한들이여! 현제는 큰 공을 세우고 며칠 내로 중원으로 돌아가오! 이 난세에 언제 다시 보게 될 지 모른다오! 그러니 내 부탁하건데, 부디 오늘의 주연을 즐기고, 현제를 높이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길 바라오!”


이것이 축사의 마지막이었다. 박수갈채가 터지며 “그러겠나이다, 대인!”, “천남건 형제에게 찬사를!”이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정우를 비롯한 제자들이 그 속에서 “찬사를! 찬사를!” 하며 거세게 박수를 치며 스승을 높인다. 경자가 활짝 웃으며 오빠들을 따라 “찬사를!” 하고 만세 동작을 하는 반면, 규일은 아버지처럼 굳은 표정으로 거세게 소리지르다시피 “찬사를!”하고 외치는 게 대조적이다.


이때 정우는 열렬히 박수를 치는 왕 채주와 호탕하게 웃는 마 채주와는 옆에서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을 보았다. 리 채주는 박수를 치면서도 고개를 숙이고 천 지부장을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차이 채주는 대단히 멋쩍은 얼굴로 식탁만 바라본다. 바오 채주는 천 지부장보다 훨씬 굳어진 표정을 한 채 부동자세로 앉아 있다. 그 외에 옥룡회의 여러 사람들이 부끄럽거나 수치스럽다는 얼굴을 한 채 있었다.


“흥! 자기네들이 이제 와서 박수치고 환호하기는 찔리긴 한가 보지?”


민호가 그걸 보고 코웃음을 친다. 이들은 하나같이 만보산 사건 이후 그들에게 비꼬는 말을 하거나 백안시하거나, 심지어 “빵즈”라고 뒤에서 욕설을 내뱉던 자들이었다.


박수가 잦아들고 전체요리가 나올 때 일어나는 사람이 있었다. 루춘팡 총영사였다.


“천남건 선생! 그리고 옥룡회의 모든 대협들! 저는 총영사로서 중화민국 정부를 대신하여 이 자리에 왔습니다! 오늘 있었던 한인애국단의 크나큰 공과 더불어, 천남건 선생과 그 제자분들이 세운 업적에 감사를 표하러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리고 인천으로 오기 전, 상하이에서 의로운 거사가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정부의 대표로서 저 또한 일구(日寇)의 만행에 분노하던 차에, 저들 천황의 생일에 대담무쌍한 거사를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인애국단의 위업에 찬사를 보냅니다. 또한 저는 우리 정부 요인들을 암살하려는 의 음모를 밝혀내 큰 빚을 지게 된 쑹쯔원 재무부장님이 저를 통해 보내오신 감사장을 이 자리에서 대독(對讀)하려 합니다.”


그 말에 다시 좌중이 조용해진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장제스 군사위원장의 인척이자 중화민국 각료의 편지인 만큼 그 무게감이 결코 작을 수가 없었다. 정우 또한 쑹쯔원이 어떠한 긍정적인 말을 편지에 담았을지 기대하며 루 총영사의 입에 시선을 집중한다.


루 총영사가 쑹쯔원의 편지를 꺼내어 읽는다.


“친애하는 천남건 선생! 저는 크나큰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감사장을 보냅니다. 평소 일구와의 타협은 절대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던 저나 다른 분들의 목숨을 언젠가 적이 노릴 거라고 생각은 해 왔으나, 이러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하였습니다. 이 일을 모르는 채로 있었다면, 저는 얼마 후에 쿵샹시 형이나 뤄원간 부장과 함께 불귀의 객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천남건 선생이 적의 음모를 드러내어 우리에게 알려준 덕택에, 이 일을 사전에 예방하고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이 한 장의 편지로 그 감사함을 어찌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중화민국의 각료가 스승에게 찬사를 바치자 제자들의 얼굴이 흥분으로 달아오른다. 그 반면 천 지부장은 더더욱 웃음기 없는 얼굴을 굳힌다.


“조선은 중국의 오랜 이웃국가이자 형제의 나라였습니다. 불운히 일구에 병탄되어 고통을 겪고 있어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러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는 한 언젠가 자주독립의 기쁨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나라의, 두 정부의, 그리고 두 정당의 우의로 인하여 이 쑹 아무개가 이리 살아서 편지를 쓸 수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은 천 선생의 업적을 잊지 않을 것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교분과 관계를 말할 때 항상 이 일을 염두에 둘 것입니다. 천남건 선생과 제자분들은 두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구나.”


천 지부장이 두 번째로 한 말이었다. 물론 에이코는 “허이구! 받아도 되요, 받아도!”라고 재차 핀잔이다.


“저는 쿵 형과 뤄 부장을 비롯, 천 선생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감사장을 올립니다. 다른 분들은 따로 감사의 편지를 부치지 못함을 미안하게 여기고 있음을 이 편지를 통해 알려드리는 바 입니다. 언젠가 중국에 돌아오시면, 그분들은 따로 천 선생을, 그리고 김구 선생을 찾아가 백배돈수 감사를 올릴 것입니다. 천 선생과 제자분들의 미래에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걸로 루 총영사가 입을 닫자 다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정우는 크나큰 기쁨에 저절로 웃음지었다. 중화민국의 각료가, 그것도 장제스 군사위원장의 인척인 쑹쯔원이 사부에게 감사장을 보냈다. 이것이 얼마나 정부에 큰 도움이 될 것인가? 오늘 윤봉길 동지의 의거까지 합하면, 중화민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어떻게 볼 것인지가 눈에 선하였다.


그런데 루 총영사는 박수와 환호를 진정시키는 손짓을 한다.


“아, 죄송합니다. 아직 글이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박수소리가 너무 높아 총영사의 말이 순간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장 대인이 입을 연다.


“형제들, 조용! 총영사께서 말씀하신다!”


그 말에 박수치고 환호하던 단원들이 일제히 긴장해 입을 다문다. 루 총영사는 헛기침을 한번 하여 목을 가다듬고 다시 목소리를 낸다.


“추신. 막 이 글월을 끝내려던 때 여기에 따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여기서 전달드리겠습니다.”


쑹쯔원 재무부장의 감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무슨 말을 전한다는 건가? 다들 총영사의 입에 집중한다.


“친애하는 천남건 선생. 나는 그대가 이룬 큰일에 감사를 드립니다. 일본의 장교가 우리 각료들을 모살하려 했다는 사항을 보고받고 크게 놀란 동시에, 이 정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우리의 국부이자 삼민주의의 창시자 쑨중산(孫中山) 선생께서는 항상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지하셨으며 독립운동에 뜻을 둔 많은 조선 사람들을 지원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저는 중산 선생께서 서거하신 후 조선의 사정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지 못하였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음을 지금 와서야 깨달았습니다. 저는 천남건 선생과,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 일로 보여준 우의의 뜻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또 항상 한량없는 감사를 보낼 것입니다. 이 짧은 글을 통해서라도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의 뜻을 보냅니다.”


그 다음 순간, 정우는 그 자리에서 주리에게 통역을 못하고 굳어져 버렸다. 이 추신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루 총영사 입에서 나온 까닭이었다.


“중정(中正) 올림.”


그 이름이 울린 순간, 식장에 침묵이 퍼져나갔다. 이 자리에 모인 중국인들은 모두 그 이름이 가진 엄청난 무게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빠, 무슨 일 난 거에요?”


주리는 정우가 통역하다 얼굴이 놀람으로 굳어지는 것을 본다. 정우가 무슨 일인지 대답해주기도 전에, 이전보다 더 큰 환호와 박수갈채가 식장을 뒤흔들었다. 민호는 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 “만세!”를 높여 부르고, 그 뒤를 따라 다른 형제들도 일어나 주먹을 흔들고 네 활개를 치며 거침없이 기쁨을 표한다.


그 소리가 다 지나가고 나서야, 정우는 어리둥절해 하는 주리에게 왜 이들이 환호하는지 알려줄 수 있었다.


“방금 추신을 보낸 사람은 말이야.”


정우는 환희에 겨워 잠깐 말을 잇지 못하였다.


“장제스 군사위원장이야.”


“예? 진짜요?”


주리는 장제스가 중국의 최고지도자임을 알기에, 몇초간 입을 쩍 벌리고 있게 되었다. 정우는 마음에서 넘쳐흐를듯한 환희에 오히려 자신이 압도되어 환호성을 지르지도 못한다. 사부를 모시고 나서 이런 경험은 전무후무했다. 존경하는 스승이 다른 사람도 아닌 중국의 최고지도자에게서 이런 편지를 받게 될 줄은 상상하지도 못하였다. 그가 아는 한, 스승이 최고의 반열에 서게 된 것이다. 기쁨이 혈관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에 흐르는 듯 하였다. 마침내 주리와 연인이 된 날에 느꼈던 그 기분과도 같았다.


“현제! 축하하네! 다른 사람도 아닌 장 위원장이 현제를 알아준 걸세!”


장 대인이 우렁차게 웃으며 의형제의 등을 거세게 친다. 천 지부장은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그 기색이 달랐다. 이전에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찬사가 부끄럽다는 낯이었지만, 지금에 있어서는 이 예상못한 감사편지에 충격을 받아 얼떨떨해하는 모습이었다.


루 총영사는 그 감사장을 잡고 천 지부장에게 다가왔다. 천 지부장은 루 총영사가 만면에 미소를 짓고 감사장을 내밀자, 순간 그걸 받길 망설여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천 지부장의 거친 손이 감사장을 받는다. 박수와 찬사가 잦아든 후, 천 지부장은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총영사님! 쑹쯔원 부장님과, 그리고 장중정 위원장님의 글을 대독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천 아무개는 그분들에 비하면 미천하고 하잘것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저에게 이런 분에 넘치는 감사의 말씀을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저 최고의 감사를 그분들께 보내주신다면, 저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겠습니다!”


“암은요. 반드시 보내드리겠습니다!”


루 총영사가 흔쾌하게 대답한 후, 천 지부장은 연회장에 모인 모두를 쭉 둘러보고 입을 연다.


“이 천 아무개의 송별연에 모여주신 옥룡회의 형제들이여! 나는 그대들처럼 내세울 만할 영웅호한도 아닙니다! 하지만 제 의형이신 장카이셴 대인의 환대와, 그리고 그대들의 환대에 마땅히 감사의 말씀을 드리기 위해 잠시 여러분의 시간을 빌리려 합니다.”


천 지부장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계속한다.


“수천년 전, 우리나라의 국조 단군께서 이 땅에 터를 잡으신 후, 기자께서 이 나라에 오셔서 성인의 도를 처음 전파하신 이래로 중국과 조선은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비록 천년도 더 전에 수양제와 당태종이 고구려, 백제, 신라와 전쟁을 하였지만, 그 이후 두 나라와 두 민족은 서로를 형제로 대하며 세계 역사상 유래없는 우의를 보였습니다! 송나라와 고려가 그리하였고, 명나라와 조선이 그리하였습니다. 우리 조선은 중국에 크나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공맹의 도와 정주의 도가 이 나라에 들어와 백성들을 교화하고 뭇 사람들을 도로 이끌었습니다. 왜구의 침공으로 조선이 국난에 처했을 때, 명나라 신종황제는 군대를 보내고 물자를 보내어 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데 큰 힘을 보태었습니다! 이는 저 뿐만 아니라 조선의 모든 사람들이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만주 오랑캐들이 감히 중화를 참칭하며 자기네들을 중화로 받들라고 겁박할 때, 결단코 거부하였습니다! 비록 국운이 쇠하여 만주 오랑캐가 이 땅을 짓밟고 중원을 짓밟았기에 만청(滿淸)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 왕의 절을 받을지언정 우리 마음 속에서는 언제나 오랑캐에 불과하였습니다. 우리는 대보단을 세우고 만동묘를 세워 중화의 도를 잠시 우리가 맡을 것을, 그리고 명나라의 은혜와 신종황제의 덕을 기리며 천대 만대까지 잊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언젠가 한인이 한때 몽골 오랑캐를 몰아내었듯이 중원을 수복하고 만주 오랑캐도 몰아낼 때를 기다리며, 그리고 그 날 우리 조선이 함께 중화의 도와 덕을 회복하는데 동참할 때를 기다리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심지어 만주 오랑캐들조차도 대보단의 존재를 알고 조선이 의리의 나라라며 인정할 정도로, 우리 조선의 의는 강고하였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천 지부장의 목소리에 더더욱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한인은 결국 신해혁명으로 중화를 회복했습니다! 위대한 쑨중산 선생의 지도아래 만청은 무너졌고 중원의 강산이 한인의 품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 조선은 그 대역사에 동참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의 국운이 쇠하여 적에게 짖밟혔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러지 아니하였다면, 우리는 마땅히 만청을 몰아내는데 일익을 다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조선은 다시금 기회를 얻었습니다. 지금 일본은 오랑캐 황제를 내세워 동북을 빼았고 가짜 나라, 거짓된 나라인 위만주국을 만들었습니다. 일본을 뒷배로 둔 오랑캐 황제는 지금 위만주국의 집정이라는 허울좋은 자리에 올라 있습니다. 그자가 만청의 부활을 내세우며 중원을 다시 차지하려 함은 삼척동자도 다 알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적 일구가 만주 오랑캐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중원을 유린하려 들 것임도 모두가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정우는 천 지부장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았다. 그는 병자호란과 청나라의 중원 정복이라는 비극을 이 자리에서 상기시키고 있었다. 만주국의 등장을 청나라의 흥기와 대응시키며 그 당시의 역사적인 굴욕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옥룡회 사람들의 표정이 무서워진다. 루 영사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 천 지부장의 연설을 경청한다. 저우 집행위원도 표정이 굳어진다. 흔치 않은 열기띈 연설로 목소리가 거칠어진 천 지부장은, 잠깐 숨을 고른 뒤 즉흥연설을 계속한다.


“바로 다시 한번 중화와 조선이 하나가 되어, 오랑캐의 침공에 맞설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솔직하게 인정하건대, 중화의 도에 대해 회의를 가지고 중국인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조선에 여럿 있습니다. 과거 동학란과 그 이전에 오랑캐의 조정이 이 나라에 행한 내정간섭과 만행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근면히 일하는 중국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자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중화의 도가, 공맹과 정주의 도가 이 나라의 자주독립정신과 이른바 근대화로의 길을 말살하여 망국에 이르게 했다는, 대보단의 건설이 이 나라를 '근대의 문턱에서 좌절'시켰다는 대단히 잘못된 견해를 가진 사람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중화의 도를 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분들이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음을 망각하고, 그리고 우리가 중화를 이었음을 부정하고 서구와 일본의 '문명'에 혹하여 자존의식을 상실한 자들이야말로 적에게 빌붙어서 나라를 파는데 일조하였음을 무시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한 영향을, 두 민족간의 화합에 재를 뿌리려는 존재는 바로 일본 제국주의입니다! 적은 우리의 분열을 원합니다! 우리 조선 사람들이 쌓인 울분을 자신들에게 풀지 못하게 하는 대신, 그것을 중국 사람들에게 풀게 유도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교활한 선전이 우리 안에 독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거기에 넘어간 자들이 3년 전에, 그리고 작년에 야만적인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늘 그 일을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그 일을 막지 못하여 참으로 죄송하다고 생각합니다.”


천 지부장은 이 대목에서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여러 차례의 배화폭동이 있을 때마다 그래왔던 진심어린 사과를 다시금 꺼냈다. 그 직후, 천 지부장은 자신의 끓어오르는 말에 기름을 넣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모두의 감정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적의 음모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합니다!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의 국민혁명을 늘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지지해 왔으며, 국민혁명의 완수가 곧 대한독립으로 이어질 것임을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즉, 우리는 중화의 완전한 회복과 우리의 독립을 위해 하나로 뭉칠 기반을 갖춰온 것입니다! 지금의 적은 강합니다. 우리 조선은 나라를 잃었습니다. 일구가 만주 오랑캐를 내세워 입관(入關)하여 명나라 숭정황제의 비극을 반복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로 뭉쳐 적에게 굴하지 않는다면, 혹여 중원이 다시 짖밟히게 되더라도 언젠가 다시 일어날 것임이 분명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화민족의 영광스러운 투쟁과 함께하여, 오랑캐를 몰아내는데 힘을 보탤 날에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바로 그날, 우리는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동북을 회복하고 청천백일기를 휘날리며, 적의 압제에 신음하는 모든 조선 동포들을 해방시킬 것입니다!”


박수갈채와 함성이 우르르 쏟아진 건 그때였다. 그의 연설에 압도되어 집중하던 사람들이 참다가 감정을 폭발시킨 것이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은 책 한권 읽은 적이 없는 무뢰배라 천 지부장이 말하는 역사 이야기들이 어떤 의미인지, 명나라 신종황제가 누구고 숭정황제가 누구이며 대보단이 뭐고 만동묘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천 지부장의 끓어오르는 목소리가 가진 호소력, 일본에 대한 누적된 적대감, 그리고 동북을 빼앗겼다는 분노가 그들을 끓어오르게 하였다.


이제 자기 연설에 본인조차 흥분해 버린 천 지부장은 고함을 지르듯이 목소리를 토해낸다.


“중화민국과 대한민국의 연대여, 영원하라! 국민혁명과 대한독립에 영광 있으라! 오랑캐들의 음모에 맞서 싸웁시다! 우리만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만세!”소리가 터져나온다. 다들 흥분에 겨워 일어나고 주먹쥔 손을 휘두르고 난리가 났다. 흡사 태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우렁찬 소리 때문에, 방음장치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소리가 새어나갈 것 같았다. 정작 모두를 격양시킨 천 지부장은 가쁜 숨을 내쉬며 주저앉듯이 앉아 버린다. 이 일장연설에 그가 가진 모든 기력을 다 써버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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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활극록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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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304화 +14 21.11.14 282 8 19쪽
303 303화 +12 21.10.31 268 5 19쪽
302 302화 +8 21.10.24 253 6 17쪽
301 301화 +8 21.10.17 276 4 35쪽
300 300화 +8 21.10.11 245 7 26쪽
299 299화 +14 21.10.04 252 6 16쪽
298 298화 +8 21.09.22 257 5 22쪽
297 297화 +5 21.09.12 257 5 16쪽
296 296화 +14 21.08.30 251 5 17쪽
295 295화 +6 21.08.22 247 8 22쪽
294 294화 +10 21.08.16 237 8 19쪽
293 293화 +10 21.08.08 254 3 25쪽
292 292화 +12 21.08.01 256 3 39쪽
291 291화 +16 21.07.25 260 5 35쪽
290 290화 +8 21.07.18 290 8 23쪽
289 289화 +16 21.07.11 308 6 18쪽
288 288화 +10 21.07.04 332 8 18쪽
287 287화 +12 21.06.27 314 8 18쪽
286 286화 +8 21.06.20 364 6 20쪽
285 285화 +10 21.05.30 345 10 21쪽
284 284화 +10 21.05.23 329 10 21쪽
283 283화 +6 21.05.18 316 6 18쪽
282 282화 +6 21.05.09 350 7 23쪽
281 281화 +4 21.05.05 310 8 18쪽
280 280화 +6 21.05.02 334 8 17쪽
279 279화 +10 21.04.26 313 7 20쪽
278 278화 +6 21.04.22 324 8 16쪽
» 277화 +10 21.04.18 309 7 25쪽
276 276화 +10 21.04.11 335 10 16쪽
275 275화 +12 21.04.04 319 1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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