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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님의 서재입니다.

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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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최근연재일 :
2023.08.15 19:04
연재수 :
3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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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778,318

작성
21.05.09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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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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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글자
23쪽

282화

DUMMY

“토하거라.”


“예?”


주리는 사모님이 갑작스럽게 하는 말에 놀라 눈만 멀뚱멀뚱 뜬다. 에이코는 대단히 진지한 얼굴이었다.


“너 얼굴이 싯누래. 그리고 손은······.”


그러며 에이코는 주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


“대단히 차갑고.”


그녀의 눈은 날카로웠지만, 주리는 그 속에서 걱정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딱 먹은게 소화 안되고 얹혔다는 거야. 간단히 말하면 체한 거지. 소화 안된 음식물이 위 속에 계속 남아있으면 나중에 병 돼.”


주리는 그 지적에 새삼 속이 느글거리며 구역질이 올라올 듯 했지만, 꾹 참았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좀 쉬면 나아질······.”


그런데 그때였다. 에이코가 갑자기 오른손 검지를 곧추세우더니, 갑자기 배 쪽의 어딘가를 푹 찔렀다. 주리는 결국 뱃속에서 뭔가 올라오는 역한 느낌을 참지 못했다.


“우웩! 우웨웨웨웩!”


변기를 붙잡고 속에 든 것을 다 토해내고 또 토해냈다. 안에 있는게 다 끝날 때까지. 요동치는 속 때문에 헉헉댈 때, 등 뒤를 토닥이는 에이코의 손길이 느껴졌다.


“입 헹구고.”


에이코에 의해 세면대로 이끌린 주리는 수돗물로 입을 헹궈 신물을 씻어내고 뱉는다.


“장 대인도 참 눈치가 없으셔. 어떻게 어제 피를 보시고도 붉은 음식을 아침으로 내신다니?”


에이코는 장 대인의 무신경함을 투덜거리듯 성토하며 주리의 등을 토닥이고 쓰다듬어준다.


“나가자꾸나. 바깥바람 좀 맞으면 기분이 나아질거야.”


마구 토악질을 하느라 대답할 힘도 빠져버린 주리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인다. 물론 입을 다문 이유는 단지 몸의 힘이 빠져서만은 아니었다.


양산빈관 앞바다의 백사장을 걸으며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니 속이 편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기분은 울적하여 침울한 얼굴을 한 채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옆에 누운 정우 귀에 과감하게 드로워즈를 입지 않았다고 속삭였던 그 장소를 지나면서도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역시 조용히 주리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던 에이코에게 처음으로 한 말은 이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이런 일로 사모님을 신경쓰고 걱정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그대로 드러났다.


“얘도 참. 전혀 죄송할 거 아니다.”


에이코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주리를 바라봐 준다.


“나나 우리 바깥양반이나 애들처럼 웬만큼 피냄새에 익숙한 사람들도 보기 불편한 장면이었잖니? 그런 광경 처음 보는 사람이 비위가 상하지 않으면 이상한 게지. 하여간 부부는 닮는다더니. 너도 이런 면에서는 정우와 똑같애. 괜히 남 걱정 안시키려고 속으로 끙끙 앓기나 하고.”


에이코는 그렇게 말하고는 “하지만 나와 애들아빠는 닮은 곳이 거의 없으니 그 말도 우리에겐 틀렸다고 해야 하나? 오호호호호!”하며 가볍게 덧붙인다. 주리는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사모님이 고마워 계속 울적하게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 생각하여 옅게나마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곧이어 얼굴이 진지하게 굳어진다.


“이런 일······. 상하이 가면 많이 겪을까요?”


“웬만큼은.”


그렇게 말하는 에이코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사라진다.


“어제처럼 요란스럽고 유혈이 낭자하지는 않겠지만. 대게 조용하게 끝내지. 수건으로 총구를 꽁꽁 싸맨 마우저로 머리에 한방 쏘거나 목을 매달아 버린 뒤, 자루속에 돌과 함께 넣어서 오밤중에 황푸강 바닥에 가라앉히면 끝나.”


에이코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주리에게는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제의 돤궁하이를 비롯한 밀정을 심판하는 자리에, 그녀가 방아쇠를 당길 자리에 있게 될 거라고 생각해보니 가슴이 떨려오는 것이었다.


어제 탈출하며 마우저 권총을 쏴 일본군 여럿을 맞추었다지만 그건 사람을 맞췄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먼 거리에서 했던 사격이었다. 그리고 총알이 머리 위로 스쳐지나가는 상황에서 살기 위해서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기느라 사람이 죽어 나자빠지는 것에 무언가 감정을 느낄새도 없었다. 머릿속은 다른 사람들이 무사해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가득 차 있어서 다른 것이 비집고 들어갈 새도 없었다.


그러나 어제 밤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편곤이 휘둘러질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처절히 죽어가는 돤궁하이를 목도하자 시커먼 먹물이 마음 속에 번져나갔다. 상대를 눈 앞에 마주한 때 머리를 쏴야 할 그 순간이 왔을 때 자신이 과연 잘 해낼 수 있을지 회의감이 뭉글뭉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두렵니?”


“예? 아니······..”


주리는 부정하려 했으나, 사모님의 눈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하고 답하고 말았다.


“그래. 두려운 게 당연해. 죽음 앞에서 목숨을 구하려 절실하게 애쓰는 사람의 눈을 보면, 그 자의 생명을 거두는 게 과연 옳은지 번민하게 돼. 사살한 후 밤중에 잠을 처하려 눈을 감으면 처단당한 자의 마지막 얼굴이 눈꺼풀 속에서 떠올라. 괜히 사기에 영향을 줄 까봐 다들 그것에 대해 입 다물고 있을 뿐.”


주리는 그 말을 들으며 마음에 돌덩이가 얹히는 느낌이었다. 항상 가볍고 활기찬 사람으로 보이던 사모님까지 손에 피를 묻힌 자의 번민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우리 일이란다. 마찰요소를 사전에 제거하고 정부의 안전과 작업의 원할함을 보장하는 것.”


그 말을 하는 에이코의 눈이 일순간 무섭게 빛난다.


“독일의 군사이론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저서에서 군사작전의 수행에서 나타내는 마찰요소에 대해 언급한 바 있지. 기상상황, 군의 사기, 여러 이유로 인해 계획대로 움직이지 못한 휘하부대 등으로 계획한 군사행동이 예상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어긋나 버려. 아무리 훌륭한 계획을 세웠다 해도.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 첫째는, 어떤 예상못한 상황에도 즉시대응하는 임기응변 능력을 기르는 거지. 둘째는, 군사행동에 지장을 줄 마찰요소 중 제거가 가능한 것을 제거하는 거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찰요소의 제거야. 그 제거 가능한 마찰요소는, 밀정을 포함한 위험인자들이지.”


주리는 일순간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위험인자”란 표현에서 모골이 송연해지는 섬짓함을 느꼈다.


“위험인자란 건 밀정만 있는 게 아니야. 애들아빠가 조선으로 떠나기 전 나와 공동으로 작성해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보고서는 위험인자가 무엇인지 정의하고 있지. 적에게 정보를 제공하거나 의도적인 공작으로 정부의 와해나 요인암살을 노리는 밀정 뿐 아니라, 적과 직접적 연관이 없을지라도 피해의식에 찌드는 등 개인감정의 문제로 정부 사람들 내에서 부정적인 감정과 논리, 예컨데 국가와 정부의 모든 것을 부조리로 낙인찍는 등의 소리를 퍼트려 분열의 시작이 되거나 적과 잠재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자들도 위험인자들이야. 그리고 마찰요소인 위험인자에게 가할 수 있는 조치는 단 하나. 명확하고도 확실한 제거.”


그 말에 주리는 긴장되어 침을 꿀꺽 삼켰다.


“예를 들어 이런 일이 있었단다. 2년 전의 일이었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형편이 좋지 못하여 밥 한그릇 빵 한조각을 얻어도 며칠 동안 나누어 먹는 걸 고려해야 할 정도였지. 반찬이야 절인채소라도 구한다면 최고의 음식이었고.”


주리는 그런 말을 들으면 언제나 가슴이 텁텁해졌다. 자신은 그 때면 생각 없이 먹고 싶은 건 다 먹고 입고 싶은 건 다 입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라를 위해 고생하는 사람이나 적의 통치와 아버지 같은 부일배 떄문에 배를 곪는 사람이 수없이 많은데 자기가 참 생각없이 살아왔다는 마음은 여전히 마음 속에 덩어리진 채 자리잡아 있었다.


에이코는 주리의 표정을 쓱 살피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때 의경대에 새로 들어온 청년 한 명이 있었단다. 그런데 입단을 한 후부터 얼굴이 죽상이 되더구나. 이런 밥을 먹고 어떻게 독립운동을 하냐고 그러더라고.”


“예? 정말요?”


독립운동가의 어려운 삶에 대해 익히 듣고 예상했던 주리로서는, 그 사람이 식사에 불평을 했다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어서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 그 사람이 얼마나 귀하게 살았으면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만, 의경대에서는 재정상황이 최악이니 부디 양해해 달라고 했었단다. 그런데 그자는 납득을 하지 않았어. 이해할 수 없다며 회계장부를 보여달라 했지. ”


역시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저······. 그거 막 들어온 사람이 얘기하기에는 좀 이상한 것 같아요.”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래. 대단히 이상한 말이었지. 그럼에도 독립운동 하겠다고 들어온 친구인데 괜히 불만을 가지게 할 수는 없다고 백범 선생님께서 판단하셔서, 입출내역 장부의 공개를 허락하셨단다. 그때 선생님이 재무부장이시기도 했고.”


주리에게는 아무래도 백범 선생이 생각없는 신입대원의 투정을 너무 받아준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회계장부라면 정부의 기밀로 다뤄질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그걸 멋대로 보여달라 할 수 있는가?


“그래서 그 사람이 장부를 보고 불만을 그만두었나요?”


“아니.”


“예에에?”


놀라 입을 쩍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그 친구가 조용히 납득할 거라 생각한 건 오판이었어. 오히려 이상한 소리들을 하더구나. 장부가 또 하나 있을 것이다. 분명 정부요인들이 뒤로 빼돌리는 게 있다. 윗사람들은 자기만 편하라고 하고 우린 생각하지 않는다. 권력 있는 높은 사람들은 다 똑같다. 하나같이 민중을 속이지 못해서 안달이다. 자기들 배만 불리고 우리들은 노예취급한다 등의 소리들을 퍼트리고 다녔지.”


“아니 뭐 그래요?”


주리가 듣다가 답답해서 성화를 낸다. 어떻게 속이 꼬여야 저런 생각들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엄항섭 씨가 내게 말하더라고. 저놈 뭔가 수상하다. 그냥 심사가 꼬인 친구일 수도 있지만, 적과의 접촉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지 아니하더라도 불평을 넘어서 대원들을 선동해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분자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내가 좀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지. 난 그자가 근래 외출이 잦았다는 첩보를 받고 직접 미행했단다. 놈이 프랑스 조계를 벗어나 공동조계의 영국 관리지역 내로 가서 한 다방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누굴 만나고 있던지 아니?”


“누구였는데요?”


에이코는 덤덤히 대답했다.


“일본 요미우리 신문 기자였단다.”


주리는 잠시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한 느낌을 느꼈다. 대체 왜 일본 신문기자를 만났단 말인가?


“그자는 신문기자에게 말하더구나. 임시정부는 부패했고 요인분들이 돈을 빼돌려 착복을 하며 아랫사람들에게 식사를 일부러 부실하게 주는 등의 부조리가 가득하다고 말이다. 그 신문기자는 그의 주장을 신나게 받아적고 있었지.”


“그래서···... . 어떻게 되었나요?”


“그 신문기자를 내가 직접 미행한 후 그날 밤에 우리 쪽 단원들과 함께 공동조계에 잠입해 납치해 왔지. 그놈은 붙들어 대질시켜 추궁했고. 처음에 부인하더니만 그 기자 면상 들이대니 얼굴이 파랗게 질렸지. 대체 왜 그런 짓을 하였냐고 묻자, 하는 소리가 이거였어. 윗대가리들은 한방 크게 당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했을 거라고 말이다.”


“어이가 없네요! 지가 밥투정 부려놓고!”


말로만 전해들은 거라도 주리의 마음에 이미 분기가 치솟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어쩌긴. 기자하고 같이 조용하게 처리했지. 마우저에 수건을 감싸고 정확히 한 방씩. 죽기 전에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국가폭력이니 내부고발자 탄압이니 뭐니 하며 몸부림쳤는데, 혀를 자를까 하다 그냥 재갈만 물리고 처리했어.”


“잘 됐네요!”


그렇게 말한 주리는 순간 자기 자신에게 놀랐다. 사람을 사살했다는 말에서 섬짓함을 느끼거나 소름이 끼쳐지지 않았다. 정부에 해를 끼치려던 자가 제거되었다는 말에 통쾌함을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그 외에도 다른 자가 있었지. 로크와 루소를 너무 많이 읽은 것 같은 안경낀 친구였는데. 그 친구는 앞서 제거당한 자처럼 임시정부가 의경대를 비롯한 청년들을 노예처럼 생각한다고 말했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정부가 정부에 기용된 사람들에게 대가를 지불하는게 아니라 정부 소속 사람들이 정부에 돈을 바쳐야 하는 부조리가 있을 수 있는 거냐고 말이다.”


“정부에 예산이 없는데 어쩌라구요?”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도 그자는 오랫동안 조선 사회가 봉건사회와 노예제사회가 혼합된 상태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주권의식과 시민의식이, 그래고 개인권리에 대한 의식이 희박한 상태의 결과라고 말했지. 우리 헌법에서 구황실 사람들을 존중한다는 소위 봉건적인 조항이 있는 게 그 증거라고 말이다. 구성원 모두를 사회계약을 통해 주권을 행사하는 정당한 주권자로 다루라고 요인분들을 성토하더구나. 재정상황이 얼마나 열약한지 알려줘도 역시 들으려 하지 않았지.”


역시 기가 막히다고 느끼는 주리였다. 어떻게 어려운 사정은 이해하지도 않고 자기 생각만 하는 그런 사람이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찾아올 수 있단 말인가?


“그럼 그 사람도 밀정짓을 한 건가요?”


“그래.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니 정부가 부조리로 가득차 있는데 그걸 고치려 하기는 커녕 자기 입을 막는다고 소릴 질렀지. 개인권리 탄압, 개인자유 탄압, 표현의 자유 탄압이라고 고함을 지르더군. 요인분들이 언로를 틀어막고 비판에 귀를 막는 봉건적 전제주의자, 권위주의자라고 악을 썼어. 정부 요인분들이 어디로 은신처를 옮기는지 아는 사람이 그런 말을 계속 하고 다니려 하니 어찌해야겠니?”


그 말에 주리는 이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던 말을 입에 담았다.


“조용하게 만들어야죠.”


“그래. 우리 일을 잘 이해하는구나.”


주리의 대답을 들은 에이코의 눈에 두 가지 감정이 뒤섞였다. 첫째는 대견함이었고, 둘째는 안타까움이었다.


“마찬가지인 자가 있었지. 우리 소속은 아니고 프랑스 조계에서 부유하게 살던 자였는데 투자로 돈 좀 만졌다고 자랑하던 자였어.”


그자에 대해 떠올린 에이코는 앞선 두 사람에 비해 얼굴에 노골적으로 짜증을 드러낸다.


“돈이 많고 사람 사귀길 좋아해서 우리 청년들하고도 자주 술자리를 가졌는데, 하던 소리가 가관이었지. 조선에 있는 자산 다 뺐다고 하더구나. 어차피 조선은 자원도 없고 국제무역체제에서 별반 중요한 곳도 아니고 근대화도 안되는 곳이며 중국과 일본에 둘러싸여 있는 이상 미래 성장동력도 없고 성장잠재력도 턱없이 낮은 곳이라고 했지.”


주리는 에이코처럼 짜증이 났다. 그럼 조선은 독립할 가치가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말이 아닌가?


“그런 말을 왜 한데요? 독립운동하는 분들 앞에서!”


“자기자랑이었지. 자기는 이렇게 머리가 깨어 있고 뛰어난 투자자라고 말이다.”


그녀는 세상에는 참 별별 사람들이 다 있다고 자연스레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네 말대로 우리 사람들이 왜 그런 소리를 하냐고 물으니 그냥 자신은 사실을 말한 것 뿐인데 왜 감정적으로 반응하냐고 도리어 묻더라고. 사실을 말하는 걸 기분나빠하면 유치한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화내는 사람에게 사실을 부정하며 부들부들 떠는게 웃기다고 하다가 주먹다짐이 일어날 뻔했지.”


주리는 이미 에이코가 제시한 두 개의 사례 때문에 바로 말한다.


“그놈 밀정이죠? 그렇죠?”


그러나 예상 외에 반전이 일어났다.


“아니. 오답이야.”


“예?”


“나도 놈을 심문하다 어이가 없었다만······.”


에이코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오밤중에 집으로 쳐들어가 손가락 몇개 꺾어놓으니 토설하더구나. 단지 남을 화나게 하면 상대의 감정을 지배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게 즐거워서 그랬다는게 놈의 대답이었단다.”


주리는 할 말이 없어져서 몇 초간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뭐 그런 자가 다 있단 말인가?


“어떻게 처리하셨나요?”


“ 입을 틀어막고 사지를 묶은 뒤 황푸강에 던져서 처리했어. 편하게 끝내 줄 생각이 안들더구나.”


주리는 하마터면 “잘하셨어요!”라고 외칠 뻔하였다. 그 말이 턱밑까지 왔다가 잦아든 이유는, 그렇다 해도 사람을 처치한 걸 잘했다고 기뻐하는 건 너무 진지함이 떨어지는 행동 같아서였다.


에이코의 얼굴은 더욱 진지해졌다.


“만약 이 나라가 독립되고 안정을 찾은 때라면, 저런 말들이 용인될 수도 있을 게야. 의도가 어쨌건 깊이 생각해 볼 화두를 던졌다고 할 수도 있겠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잘못된 것이 있는지 생각해 볼 거리를 말이다. 그래서 그런 자들을 처리한 이후 우울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단다.”


주리는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는 말을 너무 생각하시는거 아녜요?”라고 말하려다가 잠자코 사모님의 말을 듣는다.


“하지만 지금은 진지한 비판이 아닌 힘들다고 투정부리며 주변 사람들 다 힘들게 하는 이기주의와, 그리고 자기 잘난 감정에 빠져 비관주의와 냉소주의와 비꼬기를 일삼으며 사람들에게 부정적 감정을 일으키고 선동하려는 자들을 용인할 때가 아니란다. 우리는 포위상태야. 프랑스 조계 바깥은 모두 위험지대야. 일본 총영사관과 헌병 특무대들은 자체 경찰뿐만 아니라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밀정을 동원해서 우리를 포위하고 있지. 프랑스 조계지도 안전지대는 절대 아니고. 프랑스 조계지는 언제든지 밀정이 침투할 수 있는 곳이야. 프랑스 경찰과 우리 의경대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해. 그리고 프랑스 조계당국은 일본 영사관의 수사협조요청이 있을 때마다 순사들의 진입을 허가하지. 비록 프랑스측에서 사전에 우리에게 알려준다 하지만, 정보전달의 시점이 조금만 어긋나더라도 최악의 사태가 일어난단다.”


주리는 그 위험이 얼마나 무서운지 상상이 되어 침을 꿀꺽 삼킨다. 적이 득시글거리는 곳, 민족도 인종도 전부 다름에도 일본 총영사관에 기용되어 감시의 눈을 치켜뜨는 밀정들. 그곳이 상하이다.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과 공산당 지도부는 자기들이 제국주의의 포위상태에 놓여 있다고 선전하고 있던데, 그 자들도 우리 정부의 포위상태에 비할 바는 아니지. 우리는 혁명 당시의 볼셰비키보다 더 끔찍할 정도로 포위되어 있어. 우리 바깥양반은 그 상태에서 소비에트의 방첩기관인 체카가 행한 여러 무서운 일들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 무참하고 끔찍한 일들이 많이 있었어. 하지만, 나나 바깥양반이나 동의하는 건, 최악의 포위상태에서는 체카가 했던 일들이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마찰요소의 제거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는 거야.”


에이코는 그 말을 하며 눈을 날카롭게 뜬다.


“앞서 처치한 인자들은 마찰요소야. 그것도 기상상황 같은 불가항력적 요소가 아니야. 인위적으로 통제가능하고 조절할 수 있는 요소지.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제거할 수 있는 그런 요소 말이다. 그자들은 모두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우리 안에 분열과 비효율, 그리고 작전실패를 만들수 있는 위험인자, 당장 그렇지는 않더라도 잠재적인 위험인자들이었어. 개인의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며 내버려 둘 인자들이 아니었지. 우리의 일은 그런 자들을 사전에 파악해서 제거하는 거다.”


주리의 눈이 에이코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친다.


“애들아빠와 나와 우리 애들은 백범 선생님을 비롯한 요인분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안전을 위해 위험을 야기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기 위하서려면 얼마든지 손을 더럽히자고 맹세했단다. 백범 선생님이 10여년 전에 김립을 처단했듯이. 거기에 대해 번민하고 고민하고 힘들어할 일이 적지 않을 게다. 처단한 사람이 정말 위험인자였는지 후회할 날이 올지도 몰라. 자신의 생각과 말이 정부의 통합성에 해가 되지 않는지 분간이 안가서 답답할 때도 있을 게야. 하지만, 그게 우리 일이고,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야. 너는 그 일에 들어섰고.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니?”


주리는 무겁게 입을 땐다.


“예. 알겠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굳은 목소리가 나온다.


“저는 절대로 어떠한 회의도, 어떠한 냉소도, 어떠한 이기적인 행동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과 주저하지 않고 맞서 싸우겠습니다.”


사모님의 말을 들으면서, 주리는 자신의 마음이 다잡히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두려움은 이제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혜월 스님이 대원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우리가 아니라면 누가 지옥에 가겠냐고 격려한 말이 떠오른다. 비록 그 행위의 결과로 지옥행이 확정된 악업을 쌓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존재가 안전할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고양감이 온 몸을 휘감기 시작하였다.


또한 사모님에 대한 존경심이 더더욱 차올랐다. 일본 화족의 딸임에도 보장된 미래를 거부하고 사지로 뛰어드는 용기. 무시무시하고 대하기 어려운 천 지부장을 당황하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 과감하고 당당하게 중국인들 앞에서 대국인처럼 행동하라고 지적할 수 있는 풍모, 장난기 가득한 태도의 이면에 있는 사려깊고 진지한 모습.


주리는 그런 사모님이 밀정들과 위험인자들을 처치하며 얼마나 고뇌하고 힘들어했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찡해졌다. 정우와 오라버니들, 천 지부장 뿐만 아니라 사모님의 짐도 덜어들이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을 꽉 채운다.


에이코는 주리의 결연한 눈빛을 보고 옅은 미소를 짓는다. 에이코의 두 손이 주리의 손에 맞잡아진다.


“하지만 분명 힘들 때가 있을 거야. 너는 오늘 토하고 싶은 거 참았던 것에도 알았지만, 힘든 기색을 보이면 정우나 다른 애들에게 폐를 끼친다는 의식이 강고해. 이건 애들아빠가 약한소리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라 그러기도 하지만, 네가 워낙 심지가 굳기도 하니까. 하지만, 참기만 하다가는 병이 돼. 누구에게도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면, 토한 것처럼 내게 말해주려므나. 알겠니?”


주리는 사모님의 마음씀씀이에 고맙기 이를 데 없어 눈물이 핑 도는 것 같았다. 하마터면 사모님에게 달려들어 껴앉길 뻔하였지만, 그건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아서 참았다.


“알겠습니다. 그리할게요.”


“그래. 그래. 잘 부탁하마.”


그때 에이코의 얼굴이 평소의 장난기 가득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자, 그럼 진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그렇게 말하더니 눈을 밝히면서 입꼬리를 올린다.


“정우와 연애한 얘기 나한테 좀 해다오! 어젠 물어볼 기회가 없었는데, 궁금해 죽겠다, 얘!”


한참 마음을 굳세게 먹겠다고 다짐한 와중에 사모님이 이렇게 나오니 주리는 그만 웃음을 터트려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다음, “아 그 전에, 정우가 잠자리에서 잘 해주니? 오호호호호!”라고 하자 결국 “아이 참, 사모님!”이라며 얼굴이 새빨개지는 주리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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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28 기병사단
    작성일
    21.05.09 19:40
    No. 1

    에이코의 유사 정신 교육 및 정훈 끝

    김립 선생의 비극은 자금 문제로 인한 구석도 있었고 코민테른의 그 자금이 어디에 써야 하는가에 대한 갈등도 있었으니요. 사실 코민테른 관점에서 고려공산당에게 주는 것이 맞다고 봤을 것으로는 보입니다.

    찬성: 2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KKA
    작성일
    21.05.09 19:48
    No. 2

    1:1 정신교육의 효과는 좋았읍네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1 봉산하차장
    작성일
    21.05.09 21:08
    No. 3

    저런 상황에서는 강령적 통일성, 철의 규율로 가는게 맞긴 하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KKA
    작성일
    21.05.09 21:35
    No. 4

    독재로 치달을 가능성은 항상 경계해야하겠지만, 생존이 우선인 마당이라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7 PnPd
    작성일
    21.05.27 00:36
    No. 5

    사실 독립운동이 어떤지 생각해보면, 멀쩡한?보통? 뭐 어쨌든 그런 감성으로는 힘들겠지요...임시정부를 둘러싼 수많은 과격한 행동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KKA
    작성일
    21.05.27 09:53
    No. 6

    포위상태에서는 생존이 최우선이 되다보니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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