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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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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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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27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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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287화

DUMMY

주리는 에이코와 내내 함께 보냈다. 어두운 이야기는 충분히 했으니 남은 건 밝은 이야기 밖에 없었다. 만주와 상하이에서 있었던 각종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주로 에이코의 엉뚱함과 기행으로 빚어지며 백범 선생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을 당황케 하고 천 지부장이 오른손으로 머리를 짚게 만든 일들이 주르르 나오자 주리는 내내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뭐니뭐니 해도 주리의 관심을 가장 끈 소재는, 어떻게 에이코가 천하에 둘도없는 목석인 천남건 지부장에게 어떻게 연정의 감정을 끌어냈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별 거 없었어, 얘. 그저 밭일하거나 싸리나무 울타리 손보거나 할 때 옆에 가서 ‘남건 씨. 남건 씨. 이봐요 남건 씨. 혼자 일해요?’하며 옆구리를 막 찔러냈지. 처음에는 아예 무시하던 양반이 시간이 지나며 짧게 ‘그럼 혼자 하지, 떼로 하오?’라고 대꾸라도 하거나 성을 내거나 하는게 얼마나 재밌던지!”


“예에? 무슨 관심있는 애 주의 끌려는 어린애 같아요!”


“그렇게 봐도 무방하겠다. 처음에는 나도 아버지 병원에 실려온 그 사람 보고 별 생각은 안들었었어. 그저 몹시 험상굿고 몸이 대단히 좋다는 좋다는 인상이 처음이었지. 깨어난 후에는 누가 습격이라도 할까봐 시종일관 주변을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쏘아보고 으르렁대는 게 꼭 상처 입은 맹수를 보는 것 같았지.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길래 이럴까 하고 측은한 생각도 들었고. 그런데 그 사람이 훈장님 댁, 그러니까 정우 아버지 집에서 기거하며 조용히 일 돕고 사는 거 보니 눈매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순해진 걸 보고 뭔가 관심끌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에이코는 그렇게 말하고 의기양양하게 콧대를 올린다.


“내 입으로 말하긴 조금 뭐하지만, 그때 나는 마을 청년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거든! 근데 그때 애들아빠는 내가 가까이 다가오는데 곁눈질도 한번 안하고 자기 일만 하는 거야! 살짝 골이 나더라고!”


주리는 어째 그 장면이 상상이 가서 킥킥 웃고 말았다. 젊은 사내들의 마음에 자리잡아 오며 그걸 즐긴 에이코가 자기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는 남자를 보고 얼마나 그의 관심을 끌고 싶어했을까? 그게 연정이 아니라도 말이다.


“그래서 옆구리도 찌르고 장난도 치고 하는데 이 양반이 불편해하기만 해서 어쩔 수 없이 속으로 툴툴대면서 그만하려 했는데, 글쎄 어쩌다가 내가 실수로 흘린 컬렉션이 그 사람 손에 들어갔지 뭐니?”


“엑? 그게요?”


주리는 대단히 당황하였다. 정우를 비롯한 마을 사내아이들에게 아동용 양복, 그것도 짧은 반바지에 무릎까지 오는 양말을 신겨 촬영하는 게 에이코의 취미가 아닌가. 주리는 에이코가 편지로 보내준 그때 찍힌 정우의 사진을 보고 신나고 좋아라 했지만, 이게 아무래도 일반적인 사람들이 보면 이 여자가 괴란쩍은 여자가 아닌가 하고 자연히 생각할 법 하였다.


“내 취미는 애들에게 사탕이나 과자 같은 걸 주고 절대 어른들에게 말하지 말라 하며 하던 건데, 그게 애들아빠 손에 들어간 걸 본 내 가슴은 말 그대로 쾅 내려앉았지. 그런데 그 자리에 굳어진 나 보고 애들아빠가 뭐라 했는지 아니?”


“저······. 뭐라 하셨는데요?”


그 질문에 에이코는 남편의 무뚝뚝한 말투를 흉내낸다.


“여자 중에도 변태가 있었군.”


그 말에 주리는 푸하하 폭소를 터트리고야 말았다. 이 와중에 사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고 하려다가 그건 너무 실례일 것 같아서 그만둔다. 에이코도 따라서 웃는다.


“지금이야 이렇게 웃어넘기지만, 그때는 부끄러운 마음에 감정이 폭발해서 변태라고 모욕한 걸 사과하고 취소하라며 길길히 뛰었지. 그 양반은 그때 변태를 변태라 하지 무어라 하냐며 응수했어. 나는 결국 못 참고 결투신청을 해버리고 말았단다.”


“예에?”


주리는 그 말이 결투까지 이어진다는 것에 더더욱 웃고 말았다.


“나는 그때 애들아빠가 얼마나 무공이 고강한지 하나도 몰랐는데, 내 실력에는 자신이 있었거든. 내 할아버지인 카라스마 반사이 백작이 1인전승으로 내려온다는 고류검술의 고수라는 건 너도 들어 알게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사이가 나빠지기 전에 그걸 배워두셨고, 내게도 가르쳐 주셨지. 내가 그거 가지고 어릴 적에 친구들 괴롭히는 동네 꼬마들 죽도로 두들기고 다녔지. 그때마다 우리 어머니에게 혼났단다. 날 어느 집에 시집보낼꼬, 하고 한숨이셨어.”


과연 카라스마 에이코는 백작님 댁 오죠사마로 살 사람이 결코 아님을 주리는 새삼 알고야 말았다.


“그건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니니 넘어가고. 내가 그날 밤 그양반과 얼마나 합을 겨뤘는지 몰라. 처음엔 내가 무슨 힘이 있겠냐고 설렁설렁 넘어가려던 사람이 내 1초에 머리를 얻어맞을 뻔하자 바로 진지하게 바뀌더라고. 처음에는 사과를 받아내고야 말겠다며 마구 덤볐는데, 글쎄 참, 달빛 아래서 합을 주고받고 있자니 어느새인가 화는 풀리고 즐거워지는거야. 내가 어느새인가 웃고 있더라고. 이 와중에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겨루다 보니 몸은 땀투성이에 온몸에 힘 다 빠지더니, 다리가 확 꺾여서 뒤로 자빠져버린 거야. 그런데 그 양반이 땅바닥에 벌러덩 넘어질 뻔한 나를 잡아주는 거 아니니? 바로 그때는 자존심이 상해서 분한 마음도 들었지만, 곧이어 고마워지더라고. 그 사람도 힘 빠져서는 변태라고 한거 취소하겠다고 하며 사과하더구나.”


주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천하의 장백대호와, 그것도 지금보다 훨씬 젊은 시절의 그와 밤새도록 무술을 겨루었다니. 사모님은 대체 얼마나 강한 것인가?


“이후 우리는 그냥 땅바닥에 누워서 이제까지 나눴던 대화들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 듣자하니 참 그 사람,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기구하게 살았더라고. 마을에 오기 전에 인간으로서 교류한 대상이 의형제인 장카이셴 대인이나 무공을 가르쳐준 스승인 린 사범밖에 없었어. 그 린 영감님은 지금 우리 애들 지도해주고 있고. 그 외에는 오직 부하거나, 조직 윗사람이거나, 거래대상이거나, 아니면 적 밖에 없었지. 그런 환경에서 살아왔으니 매사 무뚝뚝하고 무자비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거야.”


에이코는 그때의 추억을 회상하는지 얼굴이 진지하게 굳어졌다. 주리 또한 같이 안타까움을 느꼈다. 어느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친 삶 속에서 마모되고 날카로워지며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믿지 못하게 된 사람. 그게 과거 천 지부장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에이코는 진지함에서 벗어나 풋 하고 웃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애들아빠가 내게 밝히길, 솔직히 내가 그렇게 말을 걸어대고 놀려대는지 은근히 쌓였었다고 하더라고. 여자 상대하는데 말주변이 너무 없다 보니 그냥 짜증만 났다는 거야. 그래서 내 컬렉션을 보고는 주도권을 잡을 기회다, 해서 변태 운운한 거였다지 뭐니? 이 사람도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던 거야!”


천 지부장이 ‘귀엽다’는 에이코의 말에 주리는 순간 정신이 멍해지고 말았다. 그 말에서 에이코가 사나운 호랑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다듬다가 숫제 올라타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그날 이후로 그 양반도 좀 말수가 늘었어. 말투에 친근함이라고는 없던 게 좀 불만이었지만, 그런데로 장난을 걸면 받아치기도 하고 뭘 말하면 길게 대답해주기도 하고.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새인가 생각이 하나 들더라고. 이 사람 옆에는 내가 있어줘야 겠구나 하고 말이다. 나라도 없으면 평생 세상 즐거움이라고는 하나도 모른 채 살다가겠구나 하는 생각 말이지.”


“어머······.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동정인 줄 알았는데, 그렇다면 내가 왜 그 사람 일하는 데 내내 붙어다니며 이러는지 생각하다가 순간 깨닫고 당황했단다. 깨닫고 나니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갑자기 예전처럼 천연덕스럽게 말장난칠수가 없더라고. 무슨 말을 걸고 싶은 데 목소리가 안나오기도 해서 휙 돌아가 달음박질치기도 했고. 내 나이 이미 스물다섯을 넘기며 남자 생각이라고는 하나도 안하고 아버지 밑에서 마을 사람들 돕고 하고 싶은 거 하며 살다가 이제와서 웬 주책이냐는 생각도 들었지. 그 때문에 얼마간 애들아빠에게 다가가지 못하다가, 홍범도 장군이 마을에 왔어.”


주리는 그때 기억해 냈다. 천 지부장이 홍범도 장군을 모셨으며 홍 장군의 대한독립군 소속으로 적과 싸워왔음을 말이다.


“애들아빠가 마을에 흘러들어온 계기인 무기거래 대상이 홍 장군의 대한독립군이었어. 그때 적군이 거래장소를 습격했을 때, 홍 장군은 애들아빠의 싸움실력을 눈여겨 보고 있었지. 그때 애들아빠는 훈장님과 우리 아버지가 가진 책이란 책은 다 보고 가르침이란 가르침은 다 받으며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어. 자신이 무공 좀 하는 하류 잡배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위해 더 나은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꽉 차 있었는데, 홍 장군이 그 길을 열어줬던 거야. 홍 장군의 제의에 애들 아빠는 그 자리에서 독립군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어.”


“잠깐만요! 그럼 그건 지부장님이 마을을 떠난단 거잖아요!”


“그래. 그것도 독립군이 되어서. 언제 죽을 지 모를 곳으로 간다는 거야. 그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 상상이 갈 게다. 소설책 속에서 나오는 마음이 찢어진다는 표현이 이런 것인줄 그제야 알았지. 그래서 그날 밤, 내일 떠나기로 되어 있는 애들아빠를 불러냈어. 오늘이 아니면 영영 못볼지도 모른다고. 부끄러움이 폭발하는 것도 다 견뎌내고 마음을 고백했는데, 글쎄 그 사람이 뭐랬는지 아니? 사실 병원에 실려와 처음 눈을 떴을 때, 그때 옆에 있던 날 보고 선녀인 줄 알았다는 거야!”


“예에? 지부장님이 그런 표현을 썼어요?”


주리는 한참 낭만적인 장면인데도 천 지부장의 말에서 그런 시적 표현이 나왔다는 것이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다시금 웃음을 터트린다.


“그래. 애들 아빠가 쓸 수 있던 몇 안되는 문학적 표현이었지. 그 사람도 아버지가 소장한 책들 다 읽었으면서 어떻게 그리 표현력이 부족한지 모르겠어.”


에이코는 툴툴거리고 말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옛날 경험도 그랬고 『사기』를 비롯한 여러 중국 역사책들 내용들 때문이기도 했고 여자를 경계하는 습성이 워낙 뿌리박혀서 자기 마음을 부정하고 계속 차갑게만 대했다는 거야. 너도 사서(史書)를 좀 봤다면 알겠지? 맨날 여자 때문에 군주와 영웅호걸이 나라 망치고 신세 망치는 이야기 한가득한거. 게다가 한때 장 대인이 여자 때문에 대업을 망친 일이 있기도 해서 더욱 그랬다지 뭐니.”


“장 대인께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렇다고 하더구나. 베이징 시절에 그러다가 결국 애들아빠하고 같이 만주로 도망가는 계기가 되었다는데 이건 여기서 할 말은 아니니 넘어가고. 아무튼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한 순간, 나는 참지 못하고 달려들어 가슴에 주먹 좀 팡팡 때리고, 입술에 확 달려들었지.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에이코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검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상상에 맡기마.”


차암! 좀 자세하게 들려주시지! 주리는 에이코가 중요한 대목에서 끊어버리자 지극한 아쉬움에 속으로 툴툴대었다.


“아무튼, 이후에도 여러 곡절이 있었는데 그건 나중에 들려줄 기회가 있을 거고. 이 이야기에서 한 가지 끌어낼 점이 하나 있단다. 뭔지 알겠니?”


“예?”


주리는 사모님이 얼굴이 다시 진지함이 서린 걸 보고 무슨 뜻으로 한 질문인지 몰라 잠깐 끙끙댄다.


“음······.”


“무엇인 것 같니?”


주리가 나름대로 고심해서 답한 것은 이것이었다.


“무뚝뚝한 남자를 잡으려면 적극적이어야 한다?”


그 말에 에이코의 입에서 풉 하고 웃음이 나온다.


“하기야. 지금까지 한 이야기 전체가 그런 것이니 그렇게 생각할 만 하지. 하지만 틀린 답이란다.”


“예에? 그럼 뭔가요?”


에이코의 표정이 다시금 진지해진다.


“내가 애들 아빠와 밤새도록 겨루었다는 것이지.”


주리는 그 말에 “아!”하며 벌린 입에 손을 가져다댄다. 에이코가 굳어진 얼굴로 논변을 전개한다.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 중 많은 사람들이 무력을 갖춘 사람이 아니야. 성재 선생님, 석오 선생님, 도산 선생님, 소앙 선생님 같은 말과 글과 머리로 독립운동을 하는 분들이 많지. 백범 선생님도 동학군이었던 적이 있었고 체구가 크신 분이지만 그렇다고 무투파는 아니야. 하지만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몇 안되는 무력이야. 백범 선생님의 지휘에 따라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고 적 밀정과 적군의 공격을 막아내야 하지. 나는 애들아빠가 없을 때 그 임무를 단독으로 해내거나 알아서 적들을 사전에 처단해 왔어. 이런 일에 얽히는 강호의 여러가지 사건들에 얽히며 여러 사람들을 상대하다, 내가 말하기에 좀 부끄러운 칭호지만 여협이라 불리기도 했고. 애들을 돌봐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상하이에 남았지만 그 동안 정부를 보호하기 위한 모든 일들을 나 혼자 해야 했단다. 그 누구에게도 걱정과 폐를 끼치지 않을 정도로 해 왔다고 자부한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우리 바깥양반 못지 않은 무공을 익혔기 때문이지.”


에이코가 그 말 직후 주리를 정면으로 처다본다.


“그 만큼, 무공을 전혀 못하고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네가 애들 발목을 잡을 수 있음은 너도 잘 알겠지?”


사모님의 직접적인 말이 주리의 아픈 부분을 맹렬히 찌르고 들어온다. 이제까지는 잘 해왔다. 마우저 권총 쓰는 법을 배우고 그걸로 어제 있었던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민폐 하나 끼치지 않고 잘 싸워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우가 옆에 있으며 잡아 이끌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정우는 내내 자신을 옆에 붙이고 다니며 늘 신경쓰며 전투를 벌였다. 만약 정우가 자신을 보호하는데 정신이 팔린다면? 그 상태에서 적의 공격을 허용한다면? 이는 상상도 하기 싫은 사태였다.


“알고 있습니다.”


주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이때 에이코의 입에서 기왕 말이 나온 이상, 정식으로 머리를 숙여야 할 때가 왔음을 알았다.


“그러니 부탁드리겠습니다. 편지에서 쓰셨던 대로 제게 무공을 가르쳐 주세요! 저는 정우 오빠와 다른 분들의 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에도 에이코의 표정은 엄격하다.


“물론 그럴 생각이다만, 여기서 네가 말한 것보다 더 큰 각오가 필요하단다. 내가 2년 정도 너를 가르치겠다고 말했었는데, 그때 말이다······.”


그 직후 에이코의 입에서 나온 말에 주리의 긴장으로 뛰던 심장이 쾅하고 내려앉는다.


“정우와 그 동안 계속 떨어져 지내야 할 게다.”


그 말 한 마디에 주리의 전신이 떨려온다.


“애들아빠는 정우와 애들을 5년동안 가르치며 무공을 전수했어. 성장기 애들에게는 가혹한 과정이었지만 모두 그 수련과정을 버텨내며 중원강호에서 동년배 누구에게도 떨어지지 않을 무공을 갖추게 되었지.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그 정도 시간을 투자해 너를 훈련시킬 여유가 없어. 그때는 외진 마을에서 애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훈련시킨다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지. 그래서 너는 애들이 받았던 훈련을 한층 더 압축해서 받아야 해. 내가 하도 잔소리를 해서 애들아빠가 수련과 동시에 충분한 휴식시간을 주었지만, 그건 애들이 그때 성장기여서 그랬던 거였고 너에게는 그럴 시간도 부족함은 잘 알겠지? 시간부족 때문에 정우와 비슷한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겠지만, 발목 잡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내 밑에서 수련을 마칠 때까지는 수련 외에 모든 것과 일시적으로나마 연을 끊어야 할 게다.”


정우를 앞으로 2년 간 볼 수 없다. 이 말을 듣자마자 눈 앞이 캄캄해졌다. 어떻게 그와 그리 오랜 시간동안 떨어져 지낼 수 있는가. 그의 모든 것을 그 시간 동안 볼 수 없단 말인가? 그 시간 동안 정우에게 무슨 변고라도 일어난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2년이 아니라 20년, 아니 200년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그 감정도 잠시, 주리는 마음이 굳어짐을 느낀다. 정우와 앞으로 보낼 더욱 긴 시간을 생각하면 2년은 그저 쏜살같이 지나갈 시간에 불과하다. 2년 동안 엄격한 수련을 받지 않은 채 매일매일이 전쟁인 상하이 거리에 배치된다면 결국 적을 상대하지 못하여 모두에게 폐만 끼치게 될 것이었다. 그런 상황이 오면 바로 마우저 권총 총구를 자신의 관자놀이에 갖다대고 싶어질 것이 분명하였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리 하겠습니다.”


주리가 굳은 목소리로 다짐한다.


“수련을 마칠 때까지 정우 오빠를 보지 않고, 사모님의 가르침 외에는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그 대답에, 에이코의 엄격한 표정이 풀리더니 바로 “오호호호호!”하는 특유의 콧대 높은 웃음소리가 튀어나온다.


“좋아! 좋아! 네 뜻 잘 알았다. 분명 우리 바깥양반이라면 ‘행동으로 보여라.’라고 했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양반보다 더 부드러워서 네 말만으로도 결의를 느낄 수 있으니 그런 말은 안하마!”


주리는 말만 그렇지 이런 면에서는 확연히 천 지부장과 사모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에 대해서는 극히 엄격하며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장난기 많고 잘 웃는 사모님이라 할지라도.


물론 차이점들이 더 명확했다. 기껏 진지하게 말해놓고는 이런 소리를 하는 것처럼.


“솔직히 니들은 좀 떨어트려 놔야 해. 아직 내가 마흔도 못넘었는데 벌써 사조모(師祖母)님 소리 듣고 싶진 않거든! 애들아빠가 사조님 소리 들었을 때 어떤 표정이 될지 매우 궁금하긴 하다만, 그래도 내가 할머니 소리 들을 나이에 할머니 되고 싶은데 어쩌겠니? 오호호호호!”


그 말에 주리는 어김없이 얼굴을 붉히며 “아이 참, 사모님!”하고 항의하고 만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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