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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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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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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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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296화

DUMMY

한 진사의 말, 정신이 어떻게 된 거냐는 말은 아들인 한 대리로서는 예상 이상의 강경한 말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네가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이더냐? 내가 잘못 들은 게냐?”


한 진사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멍한 얼굴이 되었다. 아들이 그런 말을, 경찰에 땅을 팔자고 말했던 것 자체가 현실이 아니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 대리는 아버지의 현실부정을 무참히 깨부수어 버린다.


“잘못 들으신 게 아닙니다. 그 땅을 팔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얼음장처럼 굳어져서 입도 뻐끔거리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였다.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생각해 주십시오. 지금 총독부나 경찰과 척진다는 것은 집안을 위해서 결코 좋지 아니한 일입니다. 저들은 지금 조선땅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이 다 그들의 관리하에 들어가 있어요. 놈들이 마음만 먹으면 이 집안을 풍비박산 내버리는 건 일도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 집안이 이 지역에서 명망이 있다 해도 경찰의 권세에 비할 바는 못됨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한 대리는 아버지의 얼굴이 기막힘이 번져가는 걸 애써 무시하고 고개를 숙인다.


“지배하는 자들이 누가 되던 간에 우리 집안은 계속 내려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수십대 째 내려온 집안이 선택 한 번으로 위기에 처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제 말뜻을 헤아려 주시어 보다 더 좋은 선택을 하심을 부탁드립니다.”


비록 험한 말을 하며 강경한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집안의 안위를 강조하며 상황이 어쩔 수 없음을 중점적으로 설득한다면 아버지가 막무가내로 반대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였다. 그는 배웠다. 본디 인간은 개개인이 경제적 주체로서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임을. 어떠한 도덕적 명분은 전부 이익을 추구하는 본성을 숨기며 더욱 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함을.


한 대리는 아버지 또한 자신과,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과 다 똑같은 존재라고 여겼다. 그가 보기에 아버지가 소작농들에게 답답할 정도로 낮은 소작료를, 대단히 비생산적이고 비현실적인 소작료를 부과해 왔다. 매일 아침마다 사당에서 제를 올리고, 5대조 이내의 모든 조상들의 기제사니 봉제사니 하는 제사를 챙기는 것은 언제나 말해온 공맹정주의 가르침을 충실이 이행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결국 작인들을 비롯한 이 고을과 청주 전체, 더 나아가 충청도 전체 유림들의 칭송, 그리고 이를 통해 한씨 일문의 명성을 얻는다는 심리적 만족감이란 이익이 더 많은 재물을 얻는 만족감보다 더 크기 때문이었다.


세인의 칭송을 늘 신경쓰는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는 때도 많았으나, 그저 추구하는 이익과 만족의 기준이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하니 납득이 되었다. 그 때문에 아버지가 중시하는 집안이 위기에 내몰릴 수 있다고 경고함으로서, 아버지가 이익을 얻는 근원인 집안 자체가 무너질 수 있음을 논거로 내세우면 충분히 설득이 가능하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가버렸다.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지 알기는 하는 게냐!”


아버지의 노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 직후 마른 기침을 여러번 토해내야 할 정도로.

“그 땅이 어떤 땅인지 알기는 하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게냐! 대체 이 건에 대해 뭘 듣고 온 게냐!”


“경찰이 우리 집안 소유 땅에서 작은 부분만 요구한다고 들었습니다.”


한 진사의 눈에 핏발이 섰다.


“작은 부분? 네 지금 작은 부분이라 하였느냐? 그 땅이 무슨 땅인지 전혀 모르는 게구나!”


다시 발작적인 기침을 여러 차례한 한 진사는 눈을 무섭게 흡떴다.


“잘 들어라, 이놈아! 그 땅은 그냥 땅이 아니야! 바로 우리 집안 사당 부지란 말이다!”


“예?”


이 말은 전혀 듣지 않은 말이라 한 대리를 충분히 당황케 하였다.


“감히 신위를 모신 사당을 놈들에게 팔아먹자는 말을 하다니! 대체 네가 무슨 저의로 그런 망발을 하는 것이냐!”


한 대리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협박하는 동시에 회유한 그 경찰은 그 문제의 땅이 집안 사당 땅이라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러면 다 틀렸다. 조상 제사를 중시하고 또 중시하는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인 만큼 사당 부지는 경찰에서 제시하는 가격이 얼마건 간에 절대로 팔지 않을 터였다.


“계속 사당을 팔자고 하면 조상을 팔아먹자고 하는 걸로 알겠다! 설마하니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이 애비는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소리치던 한 진사는 헉헉 숨을 몰아쉰 뒤 어조를 조금 누그러트렸다.


“어디서 잘못된 소리를 듣거나, 또는 경찰에서 널 협박한 게로구나. 놈들이 살려고 하는 땅이 사당 부지임을 모른 것을 보아하니. 너도 반가의 자제인 만큼 이게 얼마나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지 충분히 알 게다. 앞으로 이런 말 하지 말고, 그런 말에 휘둘리지도 말아다오. 알겠느냐?”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한 대리는 “이제 들아가 쉬거라. 먼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라는 아버지의 따뜻한 말에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물러나면 아무것도 안 된다. 그 망할놈의 회사에 계속 다니며 일본인 후배들이 자기보다 더 앞서 승진하는 꼴을 보고 요보라서 저렇다며 비웃음이나 당해야 한다. 내 회사를 세워야 한다. 내가 마음대로 거리낌 없이 굴릴 수 있는 회사를 세워야 한다.


그러려면 저 종잣돈이, 약속된 종잣돈이 무슨 일이 있어도 필요하다!


“사당은 옮겨도 괜찮지 않습니까?”


그 말이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다시 누우려던 아버지는 “무어라고?”라며 놀란 눈을 한 채 상반신을 일으킨다.


“경찰이 원하는 건 사당 부지지 사당이 아닙니다. 사당은 어차피 집 근처 다른 데로 해체해서 다시 지으면 그만입니다. 우리가 풍수지리 따지는 집안도 아니고 사당 자리가 무슨 토지의 기를 받느니 뭐니 하는 말은 대대로 믿지 않았잖습니까? 그러니······.”


“야 이놈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호통이 날아왔다.


“이 한심한 놈! 단지 거기가 우리 집안 사당 부지여서 그러는 줄 아느냐! 놈들도 바보는 아니다! 괜히 우리 집안 사당 땅을 사겠다고 하는 게 아니야! 너도 알잖느냐? 사당이 어디 있는지 말이다!”


그제야 한 대리는 어릴 때부터 제사를 올리러 매일 올라가야 했던 사당의 위치가 기억났다. 사당은 돌계단을 여러개 밟고 올라가야 하는 언덕 위에 있었다. 그곳에 서 있으면 고을 전체를 굽어볼 수 있었다. 어느 집에 누구가 어디로 가고 어디에서 일하고 있는지가 세세히 보였다.


“놈들이 그곳에 주재소를 지으면, 고을 전체가 놈들 감시 안에 들어온다! 왜놈 순사 한두명 정도만 있어도, 그 망원경이란 것만 가져다 놓으면 고을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이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죄다 볼 수 있단 말이다! 상해 정부에 자금을 전달하러 우리 집에 들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순사에게 잡힐 수 있다! 그리고 고을에서 다시 만세운동이 시작되면 전화니 전신이니 하는 걸로 다른 곳에서 빠르게 순사들을 불러올 수 있어! 놈들은 그럴 의도로 그 땅을 사겠다고 한 게야!”


한 대리는 그 말을 듣고서야 경찰이 그 땅을 사겠다는 의도를 이해했다. 그들에게 한 진사와 그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는 소작인들은 지극히 위험한 자들이었다. 명망 높은 지역유지로 무시못할 권세를 누리며 충신의 집안이라는 명성을 지극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한 진사에게 소작농들이 바치는 충성도는 상당히 높았다. 대대로 한씨 집안의 아랫사람 노릇하는게 익숙하고 편해서 그렇다기에는 그들은 너무나도 열성적으로 한호성 진사를 옹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진사의 명망 때문에 그들을 건드릴 수도 없었다.


한 대리는 작년에 내려갔을 때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웃으며 하는 얘기를 들었다. 고을 사람들과 같이 만세를 외치고 청주 읍내까지 원정을 가서 태극기를 휘둘렀는데도 헌병이 얼굴만 굳어지고 보고만 있었다는 것이었다. 지역의 명망가들을 건드리기 보다는 회유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당국의 입장에서 이만큼 골치아픈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런 만큼 이 고을이 총독정치에 노골적으로 비협조적이라도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벌집을 건드린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청주군청과 청주경찰서 입장에서는 가장 눈엣가시의 존재일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견제책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도 무리한 방법이 아닌 합법적인 방법으로. 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요지에 주재소를 설치하여 불온한 일이 벌어지는지 감시하고 순사들로 하여금 마을을 순찰케 하여 사전에 단속하는 것이다. 때마침 한 진사는 건강이 악화되어 자리에 누워 있다. 이 골치아픈 노인네가 몸도 마음도 다 약해진 틈에 끈질기게 회유공작에 들어간다면 목적을 이룰 게 분명하다는 게 청주경찰서의 심산일 것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사당 부지일까? 거기가 물론 고을 전체를 다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이긴 하다. 하지만 더 마찰 없이 주재소를 지을 요지는 몇 군데 더 있다. 그런데 사당이 양반가에서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는 자들이 한 진사가 격노하여 땅을 절대 팔지 않겠다는 반응을 일으킬 곳에 굳이 주재소를 세운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건 일이 성사된 후 나중에 경찰에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경찰이 그러면 어떻단 말입니까?”


“무······. 무엇이?”


한 진사가 입을 쩍 벌린다.


“아버지는 작년 만세운동에 고을 사람들 이끌고 참여하신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시는 걸 알지만,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봐야 합니다. 만세운동이니 하는 것은 결국 무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저는 경성에서 그렇게 된 것을 여러 번 봤어요.”


사실 한 대리는 만세운동 하던 군중이 폭도로 돌변하여 일본인을 습격하였다는 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저 직장 상사들이 떠들어대던 소리를 직접 본 것처럼 말할 뿐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결국 경찰에 명분을 주게 됩니다. 만세 부르건 일본인을 때리건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족감 정도는 얻을지도 모르죠. 나라를 위해 훌륭한 일을 했고 칭송받을 만할 일을 했다는 만족감 말입니다.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감정일 뿐입니다. 그거 하나 충족하고자 더 많은 걸 잃는다는 것은 심각한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오히려 경찰이 이 고을에 있는 게 더욱 안전해지는 길······.”


“에라이 정신 나간 놈아!”


한 진사가 참지 못하고 노호성을 내질렀다.


“이놈이 보자보자 하니 못하는 말이 없구나! 작년 그날, 이 나라의 빼앗긴 독립을 되찾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그들이 너에겐 그저 폭도로만 보였다더냐? 왜놈 헌병에게 잡혀 고초를 겪을 것이 분명함임을 암에도 우리 깃발을 들고 떨쳐 일어난 그 수많은 사람들이 무뢰배들로 보였다더냐? 이 고을 사람들도 다 그렇게 보이느냐? 네가 태어나고 자란 이 고을이?”


그러나 한 대리는 아버지의 노호성을 무시하고 이렇게 말한다.


“독립을 되찾는다는 말도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아니하는 말입니다. 어차피 조선은 자주독립국이었던 적도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아버지는 “뭐야, 이놈아?”라며 뜨악한 표정이 된다.


“조선은 본디부터 독립국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나라였어요. 적나라하게 말하면 노예의 나라였다는 겁니다. 조선의 국왕은 명나라와 청나라에 사대하며 중국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려 책봉을 받아야만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국제법적으로 따지면 조선은 말만 독립국이지 실질 중국의 속국에 불과했어요. 그저 중국이 지배하던 게 중국의 힘이 약해져서 일본이 지배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냥 주인이 바뀐 것 뿐이에요. 그러니 나라를 되찾는다고 독립운동을 한다는 건 아예 성립할 수 없는 말입니다. 원래부터 되찾을 나라부터 국제적으로 인정을 못받았지 않습니까?”


한 진사는 이 말에 폭발하듯이 고함을 질렀다.


“이놈아! 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냐? 옛 명나라가 언제 이 나라에 총독부를 두었다더냐? 몽골 오랑캐들이나 정동행성을 두고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를 두었다! 하다못해 만주 오랑캐들도 원세개를 보내기 전에는 그러지 아니하였거늘!”


한 진사는 소리를 지르고는 탄식한다.


“이럴수가! 내가 만주 오랑캐들에 대해 이렇게 말할 날이 올 줄이야!”


그러나 한 대리는 물러날 생각 없이 계속 설득을 시도한다.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국제적으로 통하는 말이 아닙니다. 세계 나라들이 보기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으면 그건 자주독립국이 아니라 속국이에요. 국제법에 그렇게 나와 있다는 겁니다. 유리가 우리 스스로 자주국이니 뭐니 해도 애시당초 의미가 없어요. 지금 합방이란 것도 두분 임금께서 동의하신 거고 국제적인 인정을 받은 겁니다. 그러니 독립운동이라는 건 기실 무의미한······.”


“시끄럽다, 이 한심한 것! 국제법이 뭐 어쩌고 어째? 총칼과 조약문과 협정문을 들이대며 남의 나라 땅 빼앗는 오랑캐들이 자기들 멋대로 만들어 낸 것이 무슨 국제질서라고? 내가 그런 소리나 하라고 네가 신학문 한번 배워보라고 그런 줄 아느냐? 오랑캐 소리나 하라고 신학문을 배우라 한 줄 아느냐?”


“아버지. 이건 성내실 것이 아닙니다. 명백하고 냉철히 봐야 하는 현실 그 자체에요. 그렇게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으로 화만 내셔 봤자 바뀌는 건 없습니다. 독립운동이란 건 본디 무의미한 거고, 거기 재물을 퍼붓는다는 것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집안재산을 무의미하게 쓰는 것이라 그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오직 한 진사의 화만 돋울 뿐이었다.


“뭐 이놈아? 현실? 이성? 냉철? 그래. 날 설득하겠답시고 찾아온 신학문 한다는 놈들이 그런 말을 잘 주워삼고 다니지! 인간의 심성과 그것의 이치치에 억지로 칼을 들이대어 사람 심성의 전개와 그것에 따른 움직임의 이치를 분리시켜놓고 말이다! 이성이니 합리니 말하며 불인과 불의를 보고도 일어나지 말고 손익부터 생각하게 만드는 것! ”


그러나 아들은 지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이 시대에 패배자로만 남을 뿐입니다! 중화니 오랑캐니 뭐니 하는 시대는 끝나버렸어요! 우월하면 이기고 열등하면 지는 적자생존의 시대입니다! 이미 아무리 발버둥쳐도 되돌릴 수 없는······.”


한 진사는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말을 끊는다.


“이놈! 네놈은 지금 나더러 시류에 영합하려 하는구나! 우리 집안이 시류에 영합하였다면 어찌 조정암과 송우암 옆에 섰겠느냐? 어찌 박태보 옆에서 압슬형을 받았겠느냐? 어찌 우리 집안이 세인의 존경을 받으며 지금까지 내려왔겠느냐? 우리는 항상 청류의 흐름을 타 왔다! 그런데 너는 이제는 탁류의 흐름을 타라 하는구나!”


“어차피 청이니 탁이니 하는 것도 원래부터 다 자기만족을 위하고 더 많은 걸 얻기 위해 굳이 구분하고 청류라 자처하던 게 아니었습니까? 아버지. 이제 그만 솔직해 지십시오. 과거에는 그런게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세계 사람들이 모두 삶의 본질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임을 알아버린 시대입니다. 구미인들은 그걸 일찍 깨달았기 때문에 경쟁하고 힘을 키워서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고 일본인들이 그걸 그 다음으로 깨달았기에 강해진 겁니다. 우리는 그걸 모른 채 시대에 뒤떨어졌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고요.”


“뭐라? 사람의 삶이 만인 대 만인의 투쟁?”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 사람과 나라의 본질이기도 하지요.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오직 공상 속으로 도망쳐 자기위안이나 하거나 또는 억지로 그런 걸 바꾸려다가 도리어 피해만······. 억!”


한 대리는 더 말하지 못했다. 그의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이 터져나왔다. 아버지가 작은 상 위에 올려진 벼루를 잡아 그의 머리에 내던진 것이다.


“이제야 알았다! 그게 서양 오랑캐의 소위 신학문이로구나! 사람 사이에 인과 의를 없애버리고 서로 싸우게 만드는 것이 진리라고 떠드는 게 바로 신학문이었구나! 강도들과 금수들의 학문이 바로 신학문이었구나! 내가 죄인이로다! 내가 크나큰 죄인이로다! 내가 네놈을 오랑캐 되는 길을 가게 만들었구나!”


한 대리의 이마에서 한 줄기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썩 나가라 이놈! 그딴 오랑캐 소리를 내 앞에서 지껄이다니! 당장 나가지 못할까!”


격노에 가득찬 호통 직후 거센 기침소리가 방을 메웠다. 아들은 상처를 감싸쥐고 씩씩거리며 일어났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읊조렸다.


“이렇게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이고 감정에 휘둘리니까 근대화도 못하고 나라가 망했지······.”


그는 그길로 자기 옛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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