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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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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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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18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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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290화

DUMMY

작년 7월. 1931년 7월. 우딩웨이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순간 좌중이 조용해졌다. 우딩웨의 절규에 가까운 고함이 그 끔찍했던 나날을 담은 순간, 정우는 우딩웨이의 입에서 나올 말이 어떤 것인지 바로 눈치채었다.


“잊지 아니하였다!”


잠깐 멈칫했던 장카이셴 대인은 침통한 얼굴이 된다.


“정신나간 폭도들이 조선 곳곳에서 우리 동포들을 습격해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그 일주일 간의 사태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우리 또한 그 폭동에 뛰어들어 날뛴 조선인 조직들을 박살내고 처리하였거늘!”


장 대인 또한 그때 동분서주했음을 정우는 잘 알고 있다. 이미 옥룡회와 뒤에서 연결되어 있는 인천경찰서에서는 경성에서 배화폭동이 일어났다는 연락을 받고 중국인 거리에 저지선을 설치했지만, 폭동의 규모는 그 저지선을 압도할 정도였다. 순사들이 경성과 달리 폭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배치된 한 중국인 거리가 공격당하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했던 장 대인은 땅을 치고 후회했다.중국인에 대한 혐오가 축적된 상태에서 만주 동포가 중국인에게 죽고 다쳤다는 잘못된 보도 하나에 눈이 뒤집힌 폭도들이었다. 이들은 평소 보기만 하면 눈을 피하고 설설 기던 순사들도 무섭지 않았던 것이었다.


순식간에 “되놈을 죽여라! 짱꼴라를 죽여라!” 소리가 거리를 메우며 옥룡회 보호 하에 있던 가게 여러개가 파괴당하고 불탔으며 주인과 종업원들이 끌려와 몰매를 맞고 여자는 옷이 벗겨져 모욕을 당하였다. 이에 옥룡회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무기를 들고 오며 사태는 경찰이 며칠 동안 진정시켜야 할 유혈사태로 번져버렸다. 장 대인은 피해를 입은 사람들 한명한명을 찾아다니며 옥룡회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여야 하였다.


그러나 장 대인은 그때의 기억은 그저 예전 일로 몰아두고 싶다.


“하지만 그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우의를 훼손할 일은 아니었다! 천 현제와 대한민국 정부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 우리에게 곳곳에서 사과하고 다녔다!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으면서까지! 그들이 저지른 잘못도 아닌데 다른 동포들을 위해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너는 과거의 원한에 사로잡혀 이런 만행을 저질러? 대체 임시정부 분들이 너에게 뭔 잘못을 했더냐?”


장 대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의 덥수룩한 수염이 부르르 떨린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 기세에 눌려 납작 엎드릴 터였다. 그러나 우딩웨이에게서 위축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과거의 원한? 과거의 원한이라 하셨습니까? 고작 과거의 원한이라고요?”


우딩웨이는 그 말에 더더욱 눈에 힘이 들어간다. 그의 목소리가 더더욱 커져만 간다.


“예! 대인께는 작년 그 날이 그저 흘러간 일에 불과하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저 같은 놈에겐 말이죠, 그날이 바로 지금입니다! 그때 제가 당한 일은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 아니, 그날 빵쯔들에게 당한 사람들은 모두 그렇습니다! 대인께서 아무리 흘러간 일이라 넘겨도 말입니다!”


우딩웨이의 부르짖음이 장 대임의 고함 못지 않게 울린다. 이제 그는 시선을 장 대인에게서 아까까지 그를 죽이라고 연호하던 이들에게로 향한다.


“내가 한때 형제라 부르던 자들에게 묻겠소! 그대들은 작년 7월을 잊으셨소이까? 자칭 임시정부란 치들이 몇번 고개를 조아려서 잊으셨소이까? 빵쯔 한 놈이 천황에게 폭탄 하나 던진 것 따위로 다 잊으신 것이오이까?”


이봉창의 목숨을 건 의거를 저런 식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정우와 형제들에게는 필히 분개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저 자의 혀를 당장 뽑으라고 목소리를 높일 수가 없었다. 우딩웨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처절했기에, 깊디 깊은 한을 품은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소리기에 그리하였다.


잠깐 숨을 헐떡이던 우딩웨이는,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는다.


“난 말이오! 그 날 이전에는 이 나라가, 조선땅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소! 3년 전의 폭동은 내가 겪어보지도 못하고 해서 그랬소! 내가 여기서 일해 자리를 잡아서 이만하면 가족들도 여기 데려와 살면 좋겠다는 생각에 작년에 모두 조선으로 데려왔소! 내 아내, 내 아들, 내 딸···... 내 딸 좋다고 따라다니던 녀석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같이 왔지! 그런데······.”


“네놈 사연 따윈 관심없다!”


장 대인은 옛 부하의 토해내듯이 말하는 소리를 바로 잘라버린다.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른손에 잡힌 집게가 번뜩인다.


“혀를 뽑고도 계속 지껄일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보자! 저놈 입 벌려라!”


그 말에 우딩웨이를 잡고 있던 두 부하가 화들짝 놀라며 “예, 예!” 한다. 이 둘도 우딩웨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멍해져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대형! 잠시 기다리십시오!”


그 목소리에 일제히 시선이 집중된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옥룡회 사람들이 수근거린다. 그는 바로 천남건이었다.


천 지부장은 관중석을 박차고 일어서서 투견장 안으로 뛰어든다. 그의 얼굴은 늘 그렇듯이 굳어 있었다. 하지만 눈은 달랐다. 그의 호랑이 같은 눈은 더할나위 없는 침통함으로 가득하다.


“저자가 멋대로 말하게 내버려 두십시오.”


“뭐라?”


장 대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된다.


“저놈이 혀를 나불대며 우리들 안에 독을 풀어놓고 있네! 우리들과 자네들 사이 사이를 갈라놓고 분열의 씨를 뿌리려는 수작이 뻔하지 않은가? 저놈을 내버려뒀다가는 형제들이 동요할지도 모르네! 그런데 현제는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가?”


장 대인의 역정에도 천 지부장은 가만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아우가 형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인다.


“놈의 입을 지금 막으면 형제들이 더욱 동요할 것입니다. 대형은 옥룡회의 수장이십니다. 저자는 작년 그날의 피해자로 보입니다. 잘못하다가는 형제들에게, 그리고 또 소문이 자칫 잘못 번진다면 오룡회에까지 우리 동포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의 입을 틀어막는으며 조선 사람들 편만 든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장카이셴은 입에서 불편한 신음을 토해낸다. 장 대인은 의형제를 아끼는 자신의 태도가 간부들 사이에 불만을 일으키고 만보산 사건 이후에는 적잖이 위험한 지경까지 이르렀음을 기억하고 있다.


“비록 윤봉길 동지의 의거로 우리의 관계는 더할나위 없이 최고조라지만, 대형의 형제들 중에는 작년의 악몽을 지금까지 꾸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을 것입니다. 그 입을 틀어막았다가는 언젠가는 터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장 대인은 여전히 답답하단 기색이다.


“그래도······. 아우는 놈에게 화도 안 나는가?”


“납니다. 놈의 사지를 편곤으로 차츰차츰 박살내고 산채로 배를 갈라 생간을 씹어먹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마당에 보는 눈이 많은 상황에서 그리하면 의미없는 분풀이만 될 뿐입니다. 이익보다는 손해가 많습니다.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천남건은 그 말을 마치고 의형에게 고개를 숙인다.


“제기랄!”


장 대인은 거세게 욕지기를 한번 내뱉는다. 그는 씩씩대며 우딩웨이를 잠시 무섭게 노려보다가 입을 연다.


“어차피 죽을 놈, 멋대로 한번 떠들어봐라!”


장 대인은 그러며 팔짱을 끼고 으르렁댄다. 그 모습을 본 우딩웨이의 입에 냉소가 깃들며 “아우님 말씀은 참 잘 들으십니다.”라고 빈정거리는 소리가 나온다. 장 대인의 손이 움찔거리지만, 그의 입을 내려치지는 않는다.


한편, 주리는 정우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주리는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자금이 될 돈 10,000원을 횡령했다는 우딩웨이가 장 대인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당당히 자기 할 말을 하는 것에서부터였다. 그러나 더욱 결정적인 것은, 정우가 통역을 멈추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참 동안이나. 정우는 그저 얼굴이 창백해진 채, 당장이라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싶어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침통한 얼굴이 되어 입술을 깨물고 있다. 듣기 싫어도 반드시 들어야 하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듯한 아픈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처럼.


답답하고 안달이 났지만, 직감적으로 이건 자신이 들으면 안되는 말이라 느낀다. 우딩웨이의 입에서 쏟아지는 저주어린 말을 통역하기에는 정우도 힘들 것을 알기에. 그래서 주리는 통역을 부탁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만다.


우딩웨이는 장 대인의 반응이 없자 고개를 처들고 말을 시작한다. 가슴 속에 품어왔던 말들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근데 말이오, 형제들! 나는 내 인생에서 그 날이 가장 저주스럽소! 가족들에게 조선에 와서 같이 살자고 옌타이에 편지를 부친 그 날이 말이오! 가족들과 짧게 만난 후 나는 일 때문에 광저우에 가야 했었소! 그게 작년 6월 중순이었지! 일이 차질없이 진행되어 예정된 날짜에 인천에 돌아온다고 전보를 부쳤소. 그래서 인천 입항하는 날에 가족들이 나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지! 형제들 중 여기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오! 일 마치고 돌아오며 부두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는 걸 기대하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얼마나 기대되는지! 근데 내가 인천 도착했을 때 아무도 없었소! 불길한 마음에 달려가 보는데, 멀리서 소리가 들리더군! 조선말로 떠들어대는 그 소리!”


우딩웨이는 그러며 중국어 억양 가득한 조선말을 내뱉는다.


“되놈을 죽여라! 짱꼴라를 죽여라!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 짱꼴라를 착해지게 만들자!”


그 말에 정우는 귀를 막고 싶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소리인가! 적의 핍박 아래 신음하고 허덕이는 동포들이, 제국주의의 피해자에서 또다른 가해자로 변모했던 그 날에 울려퍼진 저 추잡한 말들을 어떻게 잊을 것인가?


“난 똑똑히 보았소! 우리 마누라의 식료품점이 박살나고 있던 거! 빵쯔 놈이 우리 집에 불지르는 거! 마누라의 가게이자 우리 집은 우리나라 사람 거리의 제일 끄트머리에 있었거든! 그래서 구이쯔 순사들 저지선 바로 뒤에 있어서 놈들 표적이 된 거요! 그리고 또 똑똑히 보았소! 빵쯔 새끼들이 내 아내와 딸을 끌어내고 있던 거! 끌어내어 옷을 벗기고 있던 거! 내 아들과 사위 될 녀석을 한꺼번에 짓밟고 있던 거!”


그 절규가, 중국말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가슴을 떨리게 하는 그 절규가 투견장 곳곳에 퍼져나갔다. 짓어대던 투견들조차도 꼬리를 내리고 움츠러들어 낑낑댄다.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소! 근데 내가 무공을 좀 익혔서도 놈들 수가 너무 많더이다! 그 새끼들에게 붙잡혀 뒷통수에 뭔가 맞은 느낌이 든 후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소! 마누라와 애들부터 찾았지! 아들과 사위 될 애는 같은 병원에 실려와 있었소. 아들아이는 혼수상태였고 사위 될 아이는······. 숨이 끊어졌었소. 의사 말로는 얼마나 맞았는지 내장이 다 파열되어 손쓸 수가 없었다더군. 딸아이 좋다고 따라다니다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군식구로 눌러앉아서 허구한 날 구박해도 헤헤 웃고 말던 놈이었는데······..”


이때 우딩웨이의 목소리에 흐느낌이 섞여들어갔다. 그러나 바로 독기와 저주가 목소리에 실린다.


“아내와 딸아이는 소식을 듣지 못했소! 구이쯔 경찰들이 유가족 확인이랍시고 경찰서 마당에 시신들 모아놓고 대질하기 전까지. 이미 짐작은 했었소. 정신나간 놈들에게 끌려갔으니. 옷이 찟겨지고 벗겨진 채 끌려갔으니 어떻게 되었을 지는 뻔하지 않겠소? 막상 보니까, 하복부에 벌겋게 부어오른 자국 보니까 눈물도 안나더이다! 이미 흘릴 눈물 다 써버려서! 하지만 그래도 바랬소! 기적이라도 일어나길 바랬소! 기적을 바라며 알고 있는 신들에게 다 빌었소! 태상노군에게도 빌었고 영보도군에게도 빌었소! 이랑진군에게도 빌었고 나타삼태자에게도 빌었고 제천대성에게도 빌었소! 관세음보살께도 빌었고 관공(관우)에게도 빌었소! 근데 다들 안들어주시더만!”


이때 우딩웨이의 쳐든 고개가 향한 곳이 있었다. 주리였다.


“그때 내 딸아이 나이가, 저기 있는 빵쯔 여자와 비슷했소이다!”


우딩웨이와 눈을 마주친 그 순간, 주리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져나온다. 정우가 통역해주지 않았으니 우딩웨이의 한풀이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쏟아내는 목소리의 음색만으로도, 그리고 그 눈에 서린 원한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주리의 마음은 그것이 감응하여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들은 혼수상태에서 며칠 후에 깨어났소. 근데 말이오······. 다리를 못쓴다는군. 죽을 때까지. 어디 뼈가 부러지며 신경을 어떻게 했다는데 이젠 기억도 나지 않소. 아들아이는 제 어머니와 동생과 매제될 애가 다 그렇게 되었다고 하자 몇날 며칠을 통곡했소. 그리고 영영 걸을 수 없다고 하자, 간호사가 없는 틈을 타 링거 병을 깨뜨리고 그 조각으로 자기 목을 베었지. 간호사가 빨리 달려오지 않았다면 그 날로 죽었을 것이오! 불효막심한 놈이오, 그놈! 아비가 아들을 묻게 만들 뻔해? 크흐흐흐······..”


이제 우딩웨이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나온다. 그 울음에 장 대인의 얼굴이 있는 대로 일그러진다.


우딩웨이의 흡뜬 눈이, 눈물 고인 눈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그 눈이 향하는 곳은 질린 얼굴로 이것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한인애국단 형제들에게 향한다. 그의 입에서 조선말이 나온다.


“네놈들이 항일의 아군이라고? 구이쯔들에게 핍박받는 불쌍한 민족이라고? 개잡종같은 소리 집어쳐! 너희들은 구이쯔와 똑같은 놈들, 두 번째 구이쯔, 얼구이쯔(二鬼子)들이야! 얼구이쯔라고 이 새끼들아!”


정우는 이때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흐느끼며 치맛자락에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는 주리를 달래야 한다는, 마음 속의 핑계도 있었다.


우딩웨이의 눈은 이번에는 장 대인을 향한다.


“그래도 전 대인께 기대했습니다! 대인께서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계투(械鬪)를 선언하실 거라고요! 빵쯔놈들 죄다 토막내 죽이고 목을 내걸어 동포들의 한을 풀어주실 거라고요! 대인께서 계투 두 글자만 말씀하셨다면, 저는 가장 먼저 앞장서서 빵쯔들 대가리를 깨버렸을 겁니다! 그런데 대인께서는 그러지 아니하셨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우의와 거래가 계속될 거라고 다른 채주들 앞에서 선언하셨죠! 아우님께서 무릎꿇자 그러지 말라고 일으키며 오직 문제가 일어나지만을 않기를 바라셨죠!”


원한 가득한 눈이 장 대인을, 그가 한때 존경하고 따르던 이를 향해 향한다. 장 대인은 그 눈을 피하지는 않았으나, 몸이 떨려오는게 보인다.


“그럼 제가 뭘 어찌해야 했습니까?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데 뭘 어찌해야 했습니까? 흘러간 옛일로 치부하며 잊고 용서했어야 했습니까? 전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때를 기다렸습니다! 상하이로 송금할 일이 있을 때를요!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 아들아이를 돌보면서요! 올해 3월에 그 만원이나 되는 돈을 경성채에서 송금하는 그때 제가 마침 일이 없었을 때, 항상 나를 외면해 왔던 하늘이 드디어 내게 빛을 비춰주는구나 했습니다! 그래서 저질렀습니다! 경성채에서 온 그 불쌍한 형제들에게 술에 약을 타서 먹이고 돈가방 들고 날랐죠! 그게 대인께서 궁금해하셨던 이 일의 전말입니다! 이제 속이 좀 시원하십니까?”


그 말을 끝으로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하나같이 무거운 얼굴로 발치를 바라보고, 낑낑대던 개들은 이제 소리 하나 내지 않는다. 유일한 소리가 있다면 주리가 참지 못하고 흐느끼며 입에서 내는 소리였다.


“그럼···.... 왜 죽으러 온 거냐?”


장 대인의 목소리는 지극히 무거웠다.


“어째서 도주하지 않고 죽으러 왔지?”


“원래는 도망가려 했습니다. 이미 아들아이를 옮길 사람도 사 놓았고요. 베이징에······. 오룡회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그곳에 용한 의원이 하나 있다고 들었습니다. 거기라면 평생 다리병신이 된 아들을 치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현대의학이란 게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데, 그 정도 돈이면 그런 의원 쯤 무리 없이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말 직후, 그의 입에 허탈한 웃음이 감돈다.


“그런데 아들이 계속 묻더라고요. 갑자기 왜 베이징으로 가냐고요. 베이징으로 갈 돈은 어디서 났냐고, 내 치료비 어디서 나온 거냐고 말이죠. 아마 그 녀석은 직감했을 겁니다. 내가 뭔지는 뭘라도 야밤에 텐진행 밀항선을 타야 하는 뭔가 큰 일을 저질렀다고 말이죠. 그리고 그걸 저지른 이유가, 바로 자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 녀석은 선실에서 내가 자는 틈을 타 두 팔로 기어나오더니만 바다에 몸을 던졌습니다. 유서 한장 딱 남기고요. 그놈 진짜로 불효막심한 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크흐흐흐······..”


그의 입에서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날 이후 텐진에서 그 저주받을 돈을 있는 대로 다 쓰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느 정도는 아들녀석 노잣돈하라고 태워보냈죠. 그러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돈이 다 떨어질 즈음 되니까, 더 이상 사는 게 의미가 없는 것 같더군요. 그리고 여기 더하여 좀 웃기는 생각 하나 떠올랐습니다. 옥룡회로 돌아가 온몸이 찢겨죽는다면, 내가 원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고통 속에 죽어 원한으로 가득한 채 혼령으로 남아 빵쯔들을 저주하며 죽을 수 있다면, 그게 더 이득이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돌아왔습니다. 대인께서 제 생간을 꺼내실 걸 알고도 돌아왔습니다!”


우딩웨이는 이제 냉소를 터트린다.


“자! 이제 제 할 말은 다 끝났습니다! 하고 싶은 데로 하십시오! 저를 썰고 쪼개고 부수고 자르고 간을 꺼내십시오! 그것이 이 우 아무개가 대인께 드리는 마지막 주청입니다!”


그러며 우딩웨이는 미친듯이 웃기 시작하였다. 할 일을 다 마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후련한 웃음이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극도로 일그러진 장 대인의 얼굴에 침통함이 감돈다. 장 대인의 첫 마디는 이리하였다.


“미안하다.”


그 말에 우딩웨이는 놀랍다는 듯 웃음을 멈추고 장 대인을 본다.


“내가 형제 한명한명의 사정을 헤아리고 목소리를 들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네가 품고 있는 그 원한을 알기만 했다면, 네가 그런 마음을 품지 않았을수도 있었다. 명색이 너의 윗사람으로서 그러지 아니하였던 내 잘못이 일을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그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과의 말 뒤에, 장 대인은 다시 눈이 매서워진다.


“하지만, 왜 대한민국 임시정부였지? 왜 원한을 그곳에 풀어야 했지? 너의 가족들을 해한 원수들은 따로 있다. 천 현제와 임시정부 사람들은 작년의 참사에 대해 계속해서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왔다. 그런데 왜?”


그 질문에 우딩웨이가 웃음을 흘린다.


“그건 말입니다, 대인. 제 원수들은 너무 많다는 게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고, 어디서 뭔짓 하고 다니는지도 모릅니다. 그놈들을 다 찾아서 조선팔도를 다 뒤지다가는 그 전에 제가 늙어 죽고 말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다르죠. 이름도 있고 거기 사람들 누가 있는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제게는 그 폭도들이나 동포의 잘못을 사과한다 하면서도 그 원인이 다 구이쯔의 분열책동이라 주장하는 그 위선적인 정부나 다 같은 빵쯔였습니다. 아는 빵쯔를 엿먹일 기회가 있는데, 기다릴 이유가 없지 않았습니까?”


“그런 이유였더냐?”


장 대인의 일그러진 얼굴에 싸늘함이 감돈다.


“네놈의 원한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이 있는 자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누구든 복수를 위해 칼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네놈은 칼을 휘두를 방향을 엉뚱한 쪽으로 잡았어. 너에게 어떤 폐도 끼치지 않았던 사람들 말이다. 그걸 위해 강호의 규칙을 어기고 옥룡회를 망신시켰다.”


장 대인은 그렇게 말한 후 천남건을 돌아본다. 천 지부장의 얼굴은 겨우겨우 특유의 냉철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의형 장 대인의 얼굴 만큼이나 일그러져 있었다.


“현제는 놈을 어찌 처결하였으면 좋겠는가?”


의형의 물음에 아우가 답한다.


“우딩웨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고 이후의 총독 암살공작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든 단초를 만들었습니다. 살려둘 수는 없습니다. 허나······..”


천 지부장이 잠시 침묵하다 말한다.


“놈의 원한은 결국 우리 동포들의 크나큰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또한 앞서 말하셨듯이 그런일을 당한 사람 중 그 누구도 복수를 부르짖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자의 말에 형제들 중에서 마음이 동한 자들이 있을 터입니다. 그러니, 놈에게 혹형을 가하지 말고 육체를 보존하며 죽게 하소서.”


그 말에 장카이셴이 깊은 한숨을 쉰다.


“현제의 뜻이 내 뜻과 같도다.”


장 대인은 그러고는 “누가 약 한병 가져오너라. 술 한병하고.”라고 명령한다. 투견장에서 보관하고 있는, 너무 늙거나 심하게 다쳐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개를 처리하는 독약이 대령한다. 장 대인은 술잔에 독을 붓고는 손수 술을 따른다.


“마셔라. 분타주로서 주는 마지막 잔이다.”


팔을 단단히 붙잡고 있던 자들이 물러나다, 우딩웨이는 손으로 그 잔을 받고 다시 냉소한다.


“실망스럽습니다, 대인. 제 마지막 주청도 거부하시는군요!”


우딩웨이는 그러면서 흔퀘히 독주를 들이킨다. 아직 독기가 몸에 돌기 전, 천남건이 무거운 목소리를 낸다.


“우 형제. 이미 그대에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은 없소. 허나 꼭 말해야겠소.”


천 지부장은 우딩웨이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미안하오. 내 동포들이 저지른 죄과를 사과하겠소. 우리 동포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용서하시오.”


우딩웨이는 코웃음을 친다. 독이 도는지 이제 그의 코에서 시뻘건 피가 흘러나온다.


“하! 끝까지 위선적이시군! 정인군자인 척 하지 마시오, 천남건 씨. 아무리 용서해달라 해도 난 못하오! 나는 지옥에서······.”


독이 그의 내장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그의 입에서 토혈이 왈칵 터져나온다.


“영원히······. 당신네······. 빵쯔들을······. 저주······.”


그것이 우딩웨이가 이승에서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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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 299화 +14 21.10.04 252 6 16쪽
298 298화 +8 21.09.22 257 5 22쪽
297 297화 +5 21.09.12 257 5 16쪽
296 296화 +14 21.08.30 251 5 17쪽
295 295화 +6 21.08.22 248 8 22쪽
294 294화 +10 21.08.16 237 8 19쪽
293 293화 +10 21.08.08 254 3 25쪽
292 292화 +12 21.08.01 256 3 39쪽
291 291화 +16 21.07.25 260 5 35쪽
» 290화 +8 21.07.18 291 8 23쪽
289 289화 +16 21.07.11 308 6 18쪽
288 288화 +10 21.07.04 333 8 18쪽
287 287화 +12 21.06.27 314 8 18쪽
286 286화 +8 21.06.20 364 6 20쪽
285 285화 +10 21.05.30 346 10 21쪽
284 284화 +10 21.05.23 329 10 21쪽
283 283화 +6 21.05.18 316 6 18쪽
282 282화 +6 21.05.09 351 7 23쪽
281 281화 +4 21.05.05 310 8 18쪽
280 280화 +6 21.05.02 334 8 17쪽
279 279화 +10 21.04.26 313 7 20쪽
278 278화 +6 21.04.22 324 8 16쪽
277 277화 +10 21.04.18 309 7 25쪽
276 276화 +10 21.04.11 335 10 16쪽
275 275화 +12 21.04.04 319 1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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