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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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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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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22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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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22쪽

298화

DUMMY

“무슨 근거로 날 추포하오?”


오 진사가 그 경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사람을 이유도 없이 이렇게 잡아 끌어가는 게 당신네 법도요?”


“이유도 없이?”


경부의 얼굴에 비웃음이 흘렀다.


“이 봐, 우린 목격자 진술하고 관련 증거물 다 확보하고 이러는 거야. 그쪽 진작 잡아 유치장에 집어넣고 싶었는데 위에서 더 철저히 하라 해서 냅뒀던 거거든.”


의기양양한 태도를 과시하듯 보이던 경부는 손짓 한 번을 한다.


“자, 기왕에 온 김에 하나 가르쳐 주지. 당신네들 제보한 목격자를 말이야.”


그 손짓에 한 사람이 앞으로 나온다. 경찰 제복을 입은 사람이 아니었다. 한 대리는 그가 누군지 알아보고 입을 딱 벌렸다. 무표정한 얼굴의 그는 손을 들어 오 진사와 한 여사를 가리킨다.


“저들입니다.”


한 대리는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시뻘개진 자형과 누이의 얼굴이 급속도로 창백해짐을 보았다. 자신처럼 입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눈 앞에서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이상 그럴 수 밖에 없다고 느꼈다.


“저들이 보안법 위반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그렇게 또박또박 조선말로 말하는 사람은, 바로 오 진사와 한 여사의 외아들이자 한 대리의 외조카인 재두였다. 한 대리에게 오재두는 평소 말이 없고 무표정한데 간혹 얼굴에 섬뜩한 기운이 솓아나 거리감이 느껴지던 조카였다. 무엇을 물어보거나 말하면 말은 잘 하긴 했으나 절대 자기가 먼저 입을 열지는 않기에 명절 때 만나면 덕담 몇마디 정도만 해주는 정도의 사이였다. 자형과 누이는 조카가 한때는 철없이 굴어서 많이 혼내었으나 근래 아주 의젓해지고 품행이 방정해졌다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그 조카가, 자기 부모를 경찰에 고변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들 앞에서.


한 대리가 지금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 지 몰라 붙박힌 그때, “어어어억!”하는 거센 신음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네가······. 네가 어찌 이럴 수 있느냐아아아!”


아버지의 경악에 찬 고함이었다.


“재두 이놈아! 네놈이! 네놈이 어찌! 네놈이 어찌!”


오재두의 외조부이기도 한 한 진사는 손가락을 사시나무 떨듯 부들거리며 곧추세우고 있었다. 숨이 얼마나 가쁜지 흰 수염이 거칠게 파닥대는 게 보였다. 외손자가 사랑하는 딸과 사위를 배신하는 광경이, 아니 이미 배신한 것을 직접 확인해 주는 광경이 병든 노인에게 얼마나 큰 충격으로 다가올지는 상상이 어렵지 않았다. 이미 쇠약해져가는 노인에게는


핏발 선 눈으로 호령하던 한 진사는, “어어억!”하고 비명을 지르더니 일으킨 상반신이 뒤로 픽 쓰러져버렸다.


“아버지! 아버지!”


한 여사가 절규하며 눈물을 흩뿌렸다. 오 진사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한 채 사랑채로 달려들려 했으나 순사 둘이 한꺼번에 주는 힘에 몸부림만 쳤다.


“이거. 이거.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수사가 더 급해서······.”


경부와 순사들은 피식 웃으며 절규하는 둘을 끌고갔다. 그들의 계획을 완강히 가로막던 영향력 강한 늙은 유지의 급속한 건강악화는 오히려 환영할 일이었을 것이다.



끌려가던 부모와 그들을 빤히 보던 자식의 눈이 마주친 순간, 오 진사가 아들에게 달려들려는 듯 다시 용을 썼다. 물론 순사 여럿의 손에 잡혀있는 이상 부질없는 짓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던 재두는 이제 부모의 증오어린 눈을 피하지도 않고 차갑게만 바라볼 뿐이었다.


이 상황에 그저 어안이 벙벙해 못박힌 듯 서 있던 한 대리는, 그들이 문 밖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미 사랑방 안에 하인들과 하녀들이 뛰어들어 “나리! 나리!”하고 주인을 부르랴 몸을 주무르랴 어쩔줄 몰라할 때였다. 한 진사는 눈을 뒤집고 입에서 허연 거품이 흘러나오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의학에 대해 잘 모르는 한 대리가 봐도 바로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빨리! 빨리 의원을 부르게!”


한 대리는 그래도 효가 몸에 각인되긴 했음을 느꼈다. 어제 자길 죽일 기세로 벼루를 던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아버지에게서 임종 직전까지 자리를 지킬 때 본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아버지가 눈 앞에서 저승길 문지방을 밟고 있음을 직감하자 눈 앞이 컴컴해지는 기분이었다.


후회의 마음이 물밑듯이 몰려왔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아버지에게 어제 그런 말을 했을까? 왜 진작 자형과 누님에게 경고해주지 못하였던가? 내가 뭣하러 어제 그렇게 굴어서 아버지 마음을 상하게 했던가?


그런데 후회감 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사랑방에 세워져 있는 장롱의 걸쇠가 걸려 있지 않음을 봤을 때였다. 그걸 생각한 그때, 한 참의는 어느새 청지기를 비롯한 아랫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들 물러나 있게. 아버지는 내가 직접 돌보겠네.”


“예? 하지만······.”


청지기가 놀라 되물었다. 한 대리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이리 떠들석하게 법석떨고 있으면 오히려 더 악화되실 것 같네. 내가 모실 터이니 다들 나가 있게.”


“예······. 예······. 알겠습니다.”


청지기와 노복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나 문을 닫았다. 방이 조용해지자, 한 대리는 아버지를 몇 차례 더 불러 보았다. 한 진사는 아들의 부름에도 아무 반응 없이 뒤집힌 눈으로 천장만 쳐다보며 거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아버지가 의식이 없음을 확인한 아들은 부친 머리맡에서 떨어져 있는 장롱으로 향했다. 걸쇠로 잠겨있지 않은 장롱이 한 대리의 손에 조용히 열렸다. 경첩에서 작은 삐걱 소리가 났다.


이 장롱은 한씨 집안의 당대 문서들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토지대장, 소작농들의 임차관련 서류, 소출량계산서, 세금계산서 등이 이곳에 다 들어있었다. 한 진사는 아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이 땅을 물려받게 될 것이니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알아야 한다며 이 문서들을 보여주어 가르친 바가 있었다. 그 때문에 장롱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한 대리도 알았다. 그런 서류들은 당장 지금은 필요가 없었다. 그가 찾는 건 단 하나였다.


바로 유언장이었다.


어제 아버지가 자신에게 퍼부은 격노, 그리고 집에 자형과 누이가 있음을 고려하면 유언장에 아버지가 손을 대었을 거라는 우려가 온 몸을 휘감아 왔다. 만약 그랬다면 분명 자신에게 돌아갈 몫의 상당 부분을 잘라냈었을 것이었다. 그래서 한 대리는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로 아버지가 유언장을 고쳤는지, 만약 고쳤다면 어떻게 고쳤는지 말이다.


장롱을 열자마자 그는 확인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다소 누런 빛을 띄는 서류들 가운데 맨 위에 최근에 쓴 것 같은 하얀 종이쪽이 있는 것을. 한 대리는 직감적으로 그게 유언장임을 눈치채었다.


그는 유언장을 바로 열어보자마자 분노로 몸을 떨었다. 바로 어제 쓴 듯 뻣뻣하고 하이얀 종이에 해서체로 쓴 글자는 상속인으로 누이 한자청의 이름을 똑바로 적어놓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 이외의 상속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 이렇게 나오셨단 말이지! 아들 생각 하나 알아주지도 않고 감정에 치우쳐 이런 판단을 내리셨단 말이지!


그러나 그저 몸을 뒤흔드는 분노에 사로잡힐 시간이 없었다. 하인들이 의원을 데려오기까지 남은 시간이 아직 있다. 이번 기회를 놓쳐버리면 유산을 모두 누이에게 빼앗기게 된다.


한 참의는 아버지의 작은 책상앞에 앉아서 새로운 종이를 꺼내고 서둘러서 먹을 갈았다. 옥색의 두꺼비 연적으로 화선지를 고정시키고 일필휘지로 아버지의 필체를 따라했다. 서예는 어린 시절부터 지겹도록 해 왔다. 아버지의 필적을 흉내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이 급함에도 필획이 흔들리지 않도록 대단히 주의하고 또 주의하느라 땀이 목을 타고 흘렀다.


새로운 유언장을 쓴 직후 남은 건 낙관이었다. 인주를 묻혀 낙관을 찍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네놈에겐······. 안 돼!”


누군가가 그의 왼팔을 틀어잡았다. 그 바람에 한 대리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한 대리의 팔을 꽉 잡은 것은, 바로 아버지 한 진사의 주름진 손이었다!


“네놈에겐······. 한 푼도······ 한 마지기도······. 못 줘! 이 불효하고······. 불충한 놈! 조상 팔아먹고······. 나라 팔아먹을······. 망종 노오옴!”


분노로 가득해 흡뜬 아버지의 눈과 마주친 순간, 한 대리는 그 자리에서 사형선고를 들은 것 같은 압도적인 공포를 느꼈다. 아버지 몰래 잘못을 했다가 걸려 회초리를 맞았을 때와는 비교도 안되는 공포감 때문에 심장이 옥죄어지는 느낌이었다.


온 몸에서 스르르 힘이 풀리며 기절하기 직전까지 갔을 때, 자신의 손을 수갑처럼 꽉 죄던 아버지의 손이 툭 떨어졌다. 그를 죽일듯이 노려보던 아버지의 눈은 초점을 완전히 상실한 채 다시 뒤집어졌다.


벌벌 떨며 숨을 헉헉 몰아쉬던 한 대리는 이제 아버지가 더 숨을 쉬지 않음을 깨달았다. 코 바로 앞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으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초점잃은 눈을 공허가 덮었다. 그는 직감했다. 아버지가 의식이 돌아온 그때 자신이 유언장을 조작하고 있음을 보았음을. 그 때문에 최후의 힘을 짜내 자길 막으려 들었음을. 그러나 그 마지막으로 짜낸 힘 때문에 그 자리에서 절명했음을 말이다.


한 대리는 아버지의 죽음에, 막 생명이 사라진 아버지의 육신을 옆에 두어 와들와들 떨면서도, 조작한 유언장에 낙관을 찍고 장롱 안에 넣는 걸 잊지 아니하였다.


의원은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도착하였다. 맥을 짚고 호흡을 살핀 후 공식적으로 사망선고를 하였다. 한 대리는 일생을 모셔온 진사 나리의 죽음에 곡하는 노복들을 잠깐 내버려 두고 자기 방으로 향했다. 부친이 방금 졸하였는데 자리를 지키지 않는 게 이상하게 보일거라 생각하였지만, 그럼에도 위험수위까지 뛰어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않으면 더더욱 이상하게 보일 터였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 나절이 지나도록 방에서 나오질 못했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나서야 장례를 진행할 수 있었다. 한 대리는 삼베로 지은 누런 상복을 입고 상주노릇을 하며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회사에는 부친상을 당했다고 전문을 보내고 관청에는 사망신고서를 제출했다. 아내에게는 괜히 내려올 필요 없다고 전문을 넣었다.


첫 경야 밤, 빈소를 지키는 한 대리는 친척들 중 밤을 지새주겠다고 한 사람들 덕에 빈소를 뛰쳐나가고픈 충동을 억누를 수 있었다. 혼자서 빈소를 지키다가는, 염습을 마친 아버지의 시신이 관뚜겅을 부수고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눈을 부릎뜨고 자기에게 다가올 것 같았다. 그리고 있는대로 고함을 지를 것 같았다.


이 불효하고 불충한 망종 놈! 조상 팔아먹고 나라 팔아먹을 놈!


그 때문에 한 참의는 경야 중 떨리는 심장 탓에 생리적 현상 해소 외에는 그저 똑바로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한 진사 댁은 이튿날부터 조문객들로 북적거렸다. 청주에서 이름을 떨치던 유림이자 유지의 죽음은 일대 사람들이란 사람들은 다 불러모은 것 같았다.


그러나 조문객들 중에는, 망자가 생전에 그렇게 아꼈던 사위와 딸은 찾아볼 수 없었다. 청주경찰서는 그들이 상을 치르건 말건 감금조사를 우선으로 하였다. 그들을 유치장에서 가두고 고문을 수반한 심문을 지시하게 한 청주경찰서장이 조문객 명단에 오른 것은 지극히 아이러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통곡소리는 장례식 내내 그치질 않았다. 한씨 집 땅을 부쳐먹는 이들은 한 진사가 얼마나 훌륭한 어르신이었는지 이구동성으로 말하며 눈물을 훔쳤다. 그들 모두 흉년에 어르신의 구황을 받아 목숨을 보전하고 배고픔 없이 어려운 시절을 이겨냈으며 작년 만세운동에 나섰을 때 어르신이 가장 앞장서서 태극기를 흔들었는데도 일본경찰이 그들을 감히 체포하지 못하였음을 너무나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기억이 생생한 만큼, 어르신 없는 마을에 대한 두려움이 슬픔과 함께 번져나가고 있었다. 이제 나리라고 여쭈어야 할 도련님은 적지 않은 세월 동안 한성에서 사셨고 머리를 서양식으로 깎고 서양옷을 입으셨다. 지금 한 집의 가장이 된 서른 넘어가는 축들은 어린 시절부터 도련님과 함께 뛰놀은 사이긴 했지만, 과연 도련님이 돌아가신 나리처럼 덕으로 이 땅을 가꾸고 그들을 보살필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가장 큰 문제인, 이 고을에 왜놈 경찰의 주재소가 들어서느냐의 일에서 과연 도련님이 나리만큼의 기개로 저들의 요구를 완강히 거부할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다.


그리고 한 대리가 아버지와 완전히 다른 사람임이 문상 자리에서 증명되고 있었다. 예의상 경찰모를 벗어 손에 든 채 얼마나 상심이 크냐고 짐짓 위로의 말을 내보이면서도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청주경찰서장은, 잠시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였다.


통역을 대동하려 했던 서장은 한 대리의 유창한 일본어 실력에 짐짓 놀란 것 같았지만 그 직후 바로 본론으로 돌아갔다.


“상이 끝나면 그쪽도 참고인조사를 받아야 하오. 누이 되는 한자청 씨와 인척 되는 오세창 씨의 보안법 위반사건에 대해 사정청취를 해야해서 말이오.”


“예. 경찰 수사에 성실히 임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땅, 확실히 우리에게 매매할 거요?”


“그렇습니다.”


한 대리는 덤덤히 대답했다.


“제시하신 가격대로 하겠습니다.”


“좋소. 확실히 한덕만 씨는 아버님과 다르시군.”


경찰서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앓던 이가 빠졌다는 듯 시원한 표정이었다.


“상 끝나는 대로 매매계약서를 공증인을 통해 보내겠소. 내 직접 보니 차량 통행하려면 신작로를 하나 더 내야 할 것 같은데, 그 문제도 차후 논의합시다. 추가적인 토지구매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소.”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한 대리는 한 가지 떠오르는 의문을 해결하려 했다.


“저는 어째서 여기 내려와야 했던 겁니까? 제 자형과 누이를 체포하고 그걸 빌미로 아버지를 압박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아, 원래는 일을 원만하게 처리하고 싶었소.”


그러며 서장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신임 총독각하께서는 어떤 일이건 최대한 부드럽게, 마찰을 최소화하는걸 좋아하셔서 말이오. 아무래도 작년의 만세운동을 또 겪고 싶진 않으신 거겠지. 그 지침 때문에 강압적인 방법은 피하고 대화로 해결하려고 하여 그쪽에게 부탁을 좀 했던 거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두 사람이 평소 요시찰인물이기는 해도 정말 보안법 위반행위를 저지르고 있었는지는 직접증거가 없었고. 그런데 바로 어제 밤에 우리 서로 오재두 군이 온 거요.”


그 말에 한 대리는 어찌 된 일인지 알았다. 조카 재두는 그날 늦은 시간에 청주경찰서를 찾아가 모든 걸 다 증언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외할아버지를 비롯한 청주의 유림들을 모아 작년 만세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제2의 만세운동을 일으키려 했다고. 자신은 그 유림들 사이의 연락책을 맞고 있었기에 누가 이 모의에 가담했는지 전부 알고 있다고 말이다. 또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금 외할아버지 집에, 문제의 한 진사 집에 있다는 것도 전부 증언했다.


“대담한 친구였소. 뭘 원하는지 물어보니 그 대가로 순사 임용을 청탁하더군. 사실 난 일개 서장이라 순사를 선발하고 임용할 권한은 없다는 걸 조카분이 모르긴 했소만, 다행이도 난 경무국 인사과에 내지에서부터 아는 사람이 여럿 있다오. 이런 공적을 세웠으니 임용시험에 가산점을 부여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 직접증거를 확보한 이상 도주와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는 용의자를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겠소?”


한 대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그 말씀이 맞습니다.”라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런데 여긴 전화도 없는 곳이라 이 건을 그쪽에 통보할 수가 없었소. 그러다 보니 아침에는 조금 놀라셨을 거요. 앞으로 주재소가 세워진다면 여기 정보도 좀 빠르게 얻을 수 있겠지. 아, 그리고 부탁 하나 더 합시다.”


“뭡니까?”


서장이 담배연기를 훅 내뿜고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 대었다.


“용의자 둘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아직 다 번지진 않았을 것이오. 그걸 모르고 여기 문상하러 온 모의 가담자들이 있을 터인데, 이들을 오재두 군의 확인 아래 여기서 체포해도 괜찮겠소이까?”


그 말은 문상자리에서 경찰이 소란을 피우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한 진사의 집에 문상을 오는 동시에 그런 모의에 가담한 자들이라면 대게 아버지의 문객으로 본인과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임에 틀림 없었다. 한 대리는 이렇게 무례한 경우가 어디 있냐는 생각도 들긴 했으나, 이미 그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음을 더 잘 알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고맙소. 역시 아버님과는 다른 분이시로군.”


서장이 씨익 웃었다.


“앞으로도 협조를 부탁드릴 일이 있다면 연락하겠소. 아버님의 일은 심심찮은 위로를 보내는 바요. 그럼 이만···....”


그 말을 끝으로 서장은 경찰모를 쓰고는 담배꽁초를 버리고 발길을 돌리려 했다. 이때 한 대리는 마지막 의문을 입에 담았다.

“한가지 더 여쭤볼 게 있습니다.”


“음? 무엇이오?”


“어째서 우리 집 사당 부지였습니까? 이 고을을 내려다보고 감시하려면 다른 곳도 괜찮았을 텐데요?”


그 말에 서장은 피식 웃었다.


“간단하잖소. 그런 위치에 있는 곳 중 터가 닦여 있는 건 여기밖에 없었소. 나무 자르고 터 다지는 것보다 저 건물 하나 치워버리는 게 싸게 먹히지 않소?”


서장은 그 말을 마치고 가버렸다. 한 참의는 헛웃음을 짓고 그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에게 극히 소중한 존재인 저 사당 부지는 일본 경찰에게는 그저 주재소를 짓기 위해 미리 터가 닦여진 땅에 불과했던 것이다. 지금 시대의 지배자들은 옛 시대의 잔향을 이렇게만 여긴다. 그 시대에 남으려는 자들이 얼마나 그걸 소중히 여기는지는 알바가 아니다. 저 낡아빠진 몇 평의 사당 부지는 지금 시대에는 그저 작은 벽돌건물 하나가 지어질 땅에 불과하다. 아무리 무슨 갖은 의미를 가져다 붙여봤자 그 의미는 지금 시대에 통하지 않는다.


그럼 어찌해야 하나? 한 참의는 당연하고 명쾌한 답을 내렸다.


적응해야 한다. 진화해야 한다.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찰스 다윈이 확인했듯이. 그러려면 자신의 적응과 생존을 막으려는 거추장스런 것들을 전부 걷어내야 한다. 아직 대화를 제대로 나눠보지 못했지만, 필경 외조카 재두는 그 결론에 도달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부모를 고변한다는 대담하기 짝이 없는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이젠 빈소에 누워있는 아버지의 시신도 두렵지 않았다. 아버지가 관속에서 몸을 일으켜 쏘아본다 해도 자신있게 마주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불효하고 불충하다 해도 그에게는 더 이상 유의미한 말로 다가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하고 싶은 대로, 내키는 대로 하였다.


상이 끝나자마자 청주경찰서와 토지매매 계약서를 체결했다. 사당은 헐어버리고 신위들은 창고에 집어넣었다. 청지기와 노복들은 그 지시에 그러다가 횡액을 당할지도 모른다며 덜덜 떨자 죽은 조상들보다 살아있는 자신을 더 두려워해야 함을 가르쳐주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더 크게 동요할까봐 신위를 불태우라는 지시는 내리지 않았다.


차량이 주재소로 오고갈 신작로 부지 매매도 합의했다. 신작로 부지 내에 있는 농가들과는 임차계약을 종료해버렸다. 비현실적으로 작은 소작료는 합리적으로 인상하였다. 이에 항의가 끓어오를 것을 예상하고는 사당을 헐고 주재소가 완공되기 전에 사전에 순사들을 행랑간에서 머물게 부탁하며 고을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있을 시 얼마든지 진압하라고 청원하였다.


본인은 이곳에 더는 내려오고 싶지 않아서 집 관리는 청지기에게 맡기고 토지를 관리하고 소작료를 징수할 마름들을 고용했다. 고을에서 가장 문제를 일으키고 불량기가 있는 자들만 골랐다. 괜히 착한 척 하고 고을에 일체감이 강한 자라면 비이성적인 인정에 휘둘려 제대로 일을 못할 것이 뻔했으니.


그리고 부지 판 대금을 수령하자마자 수년동안 서랍에만 묵혀 놓았던 사표를 시원하게 제출했다. 자본금은 충분하고 사업에도 자신이 있었다. 그의 자신처럼 사업은 잘 나가기 시작했다.


자기 땅에서 소출량이 기대 이하인 농가 여럿을 쫓아버리고 그 자리에 첫 공장을 새웠다. 인건비를 후려칠 수 있도록 10대에서 20대 사이의 여자만 고용했다. 이후 이곳저곳에 공장을 설립하거나 대공황으로 대타격을 입은 경쟁업체를 삼키며 공장을 차지했다. 일정 수준 질을 유지하며 원가를 최소한으로, 특히 인건비를 최소한으로 절감한 덕에 찾는 의류회사들이 여럿이었다. 그리고 벌어들인 돈은 괜찮은 투자처나 오를 가능성이 높은 땅에 쏟아부었다. 임금인상과 노동현장 개선, 8시간 노동을 부르짖는 빨간 물 든 노조들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해산시켰다.


이제까지 친하지 않았던 조카 재두는 그에게 가장 유용한 존재가 되었다. 조카가 근무하는 종로경찰서에서 경부급 이상 쯤 되는 사람들은 모두 한덕만 사장이 얼마나 통이 큰 사람인지 알았다. 고등경찰 인척을 두었다는 것 만으로도 많은 것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비록 이 외조카가 후견인격인 자신에게도 영 좋다 싫다 감정을 내비치지 않으며 늘 그 섬뜩하게 굳은 얼굴을 유지한다는 게 대단히 꺼림칙하더라도.


그렇게 한 사장이 된 한 대리는, 이제 한 참의로 불리게 되었다. 총독부 고관들과 이곳저곳에 연줄을 만들어놓은 대가였다. 한 편에서는 경외와 존경을 받고, 한 편에서는 한 모르는 증오를 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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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 290화 +8 21.07.18 291 8 23쪽
289 289화 +16 21.07.11 308 6 18쪽
288 288화 +10 21.07.04 333 8 18쪽
287 287화 +12 21.06.27 314 8 18쪽
286 286화 +8 21.06.20 364 6 20쪽
285 285화 +10 21.05.30 346 10 21쪽
284 284화 +10 21.05.23 329 10 21쪽
283 283화 +6 21.05.18 316 6 18쪽
282 282화 +6 21.05.09 351 7 23쪽
281 281화 +4 21.05.05 310 8 18쪽
280 280화 +6 21.05.02 334 8 17쪽
279 279화 +10 21.04.26 313 7 20쪽
278 278화 +6 21.04.22 324 8 16쪽
277 277화 +10 21.04.18 309 7 25쪽
276 276화 +10 21.04.11 335 10 16쪽
275 275화 +12 21.04.04 319 1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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