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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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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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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4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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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235. 로그 오프Log off2

DUMMY

*


“아우우우우······.”


제냐 킴은, 찌뿌두둥한 몸을 뒤틀면서 기지개를 켰다. 누워있던 몸이다. 잘 때의 느낌은 나쁘지 않았지만, 사람의 몸은 쓰지 않으면 녹슨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 같은 자세로 가만히 있다가 움직이면 침대가 얼마나 고급이던 상관없이 뻐근했다.


그냥 스스로의 컨디션 탓일 수도 있었긴 하고.


“크흠.”


제냐 킴,


아니 김서원은 마른 세수를 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대강 문질렀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외견은 제냐 킴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걸치고 있는 장비나 복색은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고.


김서원이 일어난 곳은, 자신이 누웠던 그 자리다. 익숙하다 못해 따분한 원룸 방 안. 그 안에 있는 캡슐형의 기기 한 개.


침대 대용으로도 쓸 수 있는 녀석을 샀고, 내부에 누웠을 때의 안정감은 제법 푹신하기는 했다. 게임을 하도 하다 보니, 그 내부가 어쩐지 질려서 요새는 잠을 잘 때 쓰진 않는다.


메마른 방 안의 풍경이 그를 반겼다.


오전 수업이 없는 날이었다. 평일, 아침.


다섯 시간이 빠른 콘란드 대륙의 시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중부 대륙, 중부 지방 근처의 시간으로.


대공령에서 새벽에 벌어질 지도 모르는 웨이브를 위해서 제냐는 결국 밤을 조금 새야 했다. 일찍이 자고 새벽녘에 일어나 게임에 접속한다는 게, 말은 쉽다만. 자기 의지대로 그렇게 되지만은 않는 게 몸뚱아리였다. 결국 저녁에 조금 잠을 청하고.


잠들지 않기 위해 밤새 깨어 있다가 플레이를 마치고, 지금 나왔다.


창문에서 햇볕이 들었다. 그가 캡슐 기기 내부에서 뚜껑을 열고 일어나자, 자연스레 광량을 맞추려 원룸 내의 전등이 켜졌고.


첨단, 전자식 전등이었다. 요새 대부분의 가전기기들이 그런 것처럼. AI가 내장되어 있어서, 제냐가 소프트웨어 상에서 ‘적정 광량’을 설정해두면, 딱 그 정도에 알맞은 빛을 냈다.

창문에서 햇볕이 많이 들어올 때는, 실내 광량이 부족하지 않으므로 미약한 빛을 밝히고. 밤 시간이라면 부족분을 채우려 더욱 밝게 빛났고.


“흐음······.”


제냐는, ···아니 김서원은 입맛을 다셨다.


피곤했다.


잠을 거의 자지 않고 게임 내에서 불침번을 서다가··· 전투에 집중을 해서 그런건지. 정신과 신경계를 다루고 있는 시스템이었고. 내부에서 고도의 작업같은 걸 하면, 현실에서 집중력을 쓴 것과 거진 비슷한 피로감이 있을 때가 많았다.


비련의 시나리오 프로그램과 기기를 이용해서 학습을 진행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고 하던데. 설득력이 있는 피로감이었다. 내부에서 하는 정신적 활동이 정말로 ‘유의미한’ 것이라면 게임 바깥에서도 정신적인 피로는 누적되는 게 이치에 맞을 테니까.

운동을 하지 않으면 힘이 들 이유가 없는 것처럼.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게 상식이고. 비련시 온라인의 시스템이 괴랄하게 지어져 있어서, 엉뚱한 데서 반작용을 끌어와 피로감을 주고 있는 게 아니라고 한다면. 내부에서의 지식 습득이나 활동들은 아마 플레이어의 내면에 쌓이는 게 맞을 테였다.


그래서,


현실에서의 김서원이 쌓아야 할 지식은 무엇이던가···.

서원은 오늘 하루의 스케쥴을 머리에 떠올려보았다. 영 떠오르질 않았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예전엔 이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아니, 예전에도 이랬나? 어질거린다.


나이를 먹었다는 말을 하면, 아마 그보다 나이 많은 선배들이 욕지기를 뱉기야 하겠다만. 체감적으로, 갈수록 이전보다 더 쉽게 지치거나 둔해지는 것같은 느낌을 받는 건 사실이었다.

적절한 운동이나 생활 패턴을 만들지 않으면, 20대가 넘어서는 몸이 쉽게 망가지는 걸지도 몰랐다.


10대 때는 끊임없는 활력과 정기가 있어서, 아무리 뛰어다녀도 잘 지칠 줄을 몰랐는데.


아무튼 김서원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머리를 저주하며 근처 바닥을 더듬었다. 캡슐형 기기는 높이가 낮았다. 그대로 상체를 세워 팔을 내리면 방바닥을 만질 수 있었고. 기기 옆에 놔두었던 원룸 리모컨이 있었다.


‘원룸 리모컨’은 방 내부에 있는 여러가지 전자기기를 한 번에 다룰 수 있는 복합 컨트롤러였다. 개인 핸드폰과 연동시켜서 쓸 수도 있었지만. 괜히 용량을 잡아먹는 것 같아서 서원은 따로 리모컨을 두었다.


삑, 하고 손바닥만한 얇은 네모판을 눌렀다. 버튼이 없는 듯 보였던 깔끔한 베이지색의 판 한 구석이 눌리면서 소리가 난다. 네모판에는 ‘위’와 아래가 있었다. ‘위’를 원룸 벽 쪽으로 향하고 버튼을 누르자, 벽면에서 빛이 떠올랐다.

광학 패널이었다. 평소에는 벽으로서만 두고 있지만. 메모장이나, 게시판으로 써먹을 수 있다. 따로 메모리 카드가 있어서 문자와 흑백의 그림이라고 한다면 깨나 방대한 양을 다룰 수 있었다.


가장 마지막에 원룸 메모장에 적어둔 게 뭐였더라··· 벽면에 초록빛의 글씨가 나타난다. 서원이 설정한 색깔이었다. 몇 번 페이지를 넘기자, 스케쥴이 나왔다. 오늘 수업은 오후 2시. 경영학 쪽의 응용학문이었고, 3-4학년이 듣는 과목이었다. 교수님이 제법 빡빡하신 분이라서, 학기가 얼마나 적게 남았든 관계 없이, 칼처럼 수강을 하고 과제를 모두 제출해야만 패스를 주신다.


쉽게쉽게 넘어갈 수 없는 과목이어서, “킁.” 서원은 괜히 코만 먹었다.


오늘 수업은 ‘정보 마케팅-경영’과 ‘경영 회계 실무 심화’였다. 금방 말한 2시의 빡빡한 수업이 정보 마케팅-경영이었다. 마케팅과 관련된 온갖 소프트웨어, AI가 나오고 사라지고를 반복하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적합한 판매 전략은 무엇인가에 대해 심도 있게 고찰하는 과목이었다.


소프트웨어 개발학과나 수학과에서도 종종 들으러 오는 것이었고. 제법 크기가 큰 중대형 강의실에서 진행이 된다.


과학 기술은 아주 많이 발전을 해서 사실 모든 학생들이 학교에 갈 필요는 없었지만, 아직까지 ‘학교’는 분명 장소로서 기능을 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고 무언가를 배운다는 게, 그리 쓸모있지 않다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있었으니까.


물론 사이버 학교나, 수업 역시 활발하게 진행이 되고는 있었는데. 그래도 아직까지 정식 교육 절차에 따라 진행되는 수업들은, 모두 실제 장소에 출석해서 이수하게 되어 있었다.


‘학교에 걸어가는 것’까지가 교육의 일환이라는 어느 걸출한 교육학자의 이념이 있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오전 수업이 빠듯하게 잡혀있는 날에, 거의 대부분의 대학생은 아마 그 교육학자의 이름을 중얼거릴 테였다. 참으로 대단하신, 위인이셨다.


다행히 오늘 서원은 동양계 그 교육학자의 이름을 중얼거리진 않아도 되었다. 이미 돌아가신 분에게 화를 내봐야 무엇하겠나.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배고프다.


변하는 건 없고, 밥은 먹어야 산다.


서원은 침대처럼 생긴 기계에서 슬며시 일어섰다.


눈이 조금 부어 있었다. 제법 큰 키다. 엉거주춤 기기로부터 일어난 서원은. 찌뿌둥한 기색을 얼굴에서나 자세에서나 감추지 못하고, 움직인다.


봄 날이다. 시간은 돌고, 또 돈다.


비련의 시나리오를 플레이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는데.


체감 상으로는 어마어마한 시간이 지난 것처럼 여겨졌다.


아마 게임 내에서 집중력을 몰아서 사용하다보니까. 같은 시간을 더욱 길게 느끼는 모양이다. ‘달인의 감각’같은 스킬이나, 혹은 시스템 상에서 보정해주는 점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비련의 시나리오는 ‘현실에서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게끔 게임을 운영한다. 지나친 이질감이 운영진들이 경계하는 것이었다.


게임 내에서 플레이어 캐릭터의 신체가 과도하게 변하지 않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 역시 기본적으로 1:1 비율이었다. 여러 특수 요소들에 의해서 게임 내의 시간이 더욱 빨리가는 건 가능하긴 했는데. 여기저기서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지, 서원은 아직 직접 경험한 바가 없었다.


만일 게임 내의 시간을 가속해서, 현실에서 할 일을 훨씬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혁명일 것이다. 아마 ‘시간’을 촉박하게 써야 하는 직업군의 사람들은, 모조리 비련시 온라인의 하드웨어를 사서 내부에 들어간 뒤. 그 안쪽에서 업무를 보리라. 물론 현실에서 육체적인 노동이 필요한 종류가 아니라.


온전히 데이터만을 다루는 분야의 노동들일 경우에 말이다. ‘공부’도 물론 거기에 포함이 될 테였다. 실제로 게임 내에 존재하는 여러 집중력 향상 스킬들의 도움을 얻으며 공부를 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사실 게임 내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일들은, 뇌가 약간은 자는 듯한 상태에서 인식하는 ‘사건’들이라. 게임 내 스킬로 정신력을 보정받는 것이랑. 반쯤 수면 상태인 현실의 뇌랑 상충을 해서 결국 별 효과가 없을 수도 있기는 하다만.


어쨌든 그게 더 공부에 좋을 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으로 그리 하는 수험생들도 더러 있다고 들었다.

만약 게임 내에서 확실하게 ‘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키key를 찾았다고 한다면. 그러면 분명 게임 내에 들어가서 학습을 하던, 업무 자료를 전송해서 안쪽에서 일 처리를 하던, 하는 게 더 효과적이리라.


시간과 공간은 결국 인류가 정복하지 못하는 요소들이었고. 앞으로 과학이 얼마나 더 발전을 해도, 조금이라도 다룰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신비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개중에서 ‘시간’의 흐름에 약간이나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니.


그게 말이 되나?


김서원은 문득 원룸 방 안을 휘젓고 돌아다니다 생각을 했다. 어떤 작동 원리로 이 게임이 돌아가는 지는 알 수 없었는데. 정말로 그렇게 현실의 시간을 훨씬 아끼는 일이 게임 하나로 인해 가능할까.

그렇다면 그게 과연, 더 이상 ‘게임Game'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언가일까?


이미 게임을 넘어선 어떤 것이 아닌가.


서원은 가상현실 게임류에 대해서 빠삭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대강 현재 시대의 과학력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물론 평범한 한국의 대학생일 뿐이었고. 진짜 과학력 개발의 선두에 선 이들이 감추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적어도 ‘대중적으로’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지점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은 아마 세계를 뒤흔들 물건이 될 테였다.

그게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이라는 이름인 지도 알 수 없었지만.

물론 방금까지 일련의 사고 흐름이 전부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서의 일이었다. 정말로 초월적인 과학 기술력을 보유한 곳이, 비련시 온라인의 개발사 태Tae迨라고 한다면. 단지 여태껏 없었던 수준의 그래픽과 감각 구현 기술만이 아니라.


사람의 신경 계통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조종해서, 내면적인 시간의 흐름까지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는 곳이 거기라고 한다면.


김서원은 시대의 변혁점에 직접적으로 참가하고 있는 셈이었고. 아직까지 게임의 이름으로 불릴뿐인 저 기술력은, 머지않아 진짜, 다른 이름으로 나타나서 세상을 본격적으로 놀라게 할 것이었다.


띠링.


“······.”


김서원은 속으로 이런저런 상념과 사고를 하면서, 몸은 부지런히 움직여, 한쪽 벽 면의 냉장고를 열었다.


반가운 소리와 함께 냉장고 문이 열렸고. 내부에 있는 음식들이 보였다. 레토르트, 냉동 식품은 더 이상 먹기가 싫었고 또 힘들었다.


세계의 변혁점 근처에서 그것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던 아니던.


일단 밥은 먹어야 했다. 세계도 밥을 먹고 살아갈 때 목격할 수 있는 거고, 또 일꾼으로서 움직일 수 있는 법이었으니.


얼마 전에 사두었던 밀키트meal-kit가 하나 보였다. 대충 냄비에 때려넣고 끓이고, 전자레인지에 달구면 되는 간단한 물건이었다. 그 다음에 접시에 대강 담으면 된다. 냉동 식품보다는, 냉장 재료가 훨씬 먹을만했다. 현대의 기술력은 냉동 식품을 거의 일반 식품처럼 만드는 데 성공을 하긴 했지만.


기술력의 발전도 자취인人의 귀차니즘을 이기지는 못했다. 설명서 따위는 보지도 않는 1인 가구의 소비자들은 대충 조리를 하거나 했고. 거기서 오는 여러가지 차이 때문에, 냉동 식품은 가끔 완제품으로 먹을 때 퀄리티가 떨어지곤 했다.


다시 말하면 조리법에 따라서 맛이 크게 변하는 물건인 셈이었고. 아직도 냉동식품 기술이 ‘완벽’하진 않다는 말이기도 했다.


아무튼.


김서원은 주사위처럼 썰린 스테이크 고기와, 야채 볶음. 그리고 맨밥과 고기국물 스프를 꺼내어 바로 옆 주방칸에서 조리를 하기 시작했다. 알뜰하게 이것저것이 들어가 있는 원룸이었다. 냉장고에서 물건을 꺼내어 바로 주방대에 올려놓았고, 전기식 레인지의 위에 냄비를 찾아다 올린다.


덜그럭거리면서 조리를 시작한다.


피곤하다. 졸리고.


게임은 제법 재미가 있었고.


이따금씩 드는 생각으로는, 저건 게임 이상의 무언가가 될 지도 몰랐다.


물론 김서원이 모든 걸 아는 게 아니었으므로. 그냥 개인의 추측이나 망상에 불과하며. 취미로 게임에 시간을 쏟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그 ‘몰입감’이 좋았다. 사내라는 동물들은, 무엇에라도 집중을 하면 일단 좋은 면이 있었다. 거기에 그 대상이 범죄적이라거나, 불건전한 무엇만 아니라고 한다면.


그런 고도의 집중력을 통해서 또 살아갈 힘을 얻어낼 수가 있었다.


여러가지 신경쓸 게 많은 인생이었다.


김서원은 가끔 제냐이고 싶은 것이었다.


자신의 인생에 져야 하는 짐이,


남들보다 더 많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딱 남들만큼, 혹은 그 언저리만 된다고 하더라도.


때로 체감적으로 인생의 짐이 너무 무거울 때가 있지 않은가.


평범한 삶도, 평범한 만큼 쉽지 않은 법이었다.


누군가의 삶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었으니까. 그 무게는 스스로 고스란히 짊어져야만 한다.


가끔 게임 속에서, 아예 다른 환경을 누비며 전투를 하고 모험을 할 때.


현실에선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몰입감이나 고양감을 느끼기도 했다.


공부도 마저 바짝 해야 했고. 또 취업, 진로에 대해서도 결정을 해야 하는 시기이기는 했다만.


그런 복잡한 것들을 눈 앞에 두고 있으면 더욱 힘이 나질 않았다. 때로는, 도망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그게 비겁하지만 않다고 한다면 말이다.


혹은, 비겁하더라도 좋을지 몰랐고.


비겁한 도망에 ‘좋은’ 게 어디 있겠냐만은.


때로 사람은 누구나 나약해서, 어디로든 도망칠 곳이 한 구석 즈음은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건 완벽한 회피라기보다는 잠깐의 쉼일 테였다.


어차피 인생에 있어서 정말로 다 버리고 도망가는 일 따윈 불가능하다는 걸,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누구나 알게 된다.

현실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바뀌어지지 않는 것이었고. 사람은 자신이 한 선택에 결국 선택을 져야만 했다.


함부로 내뱉은 말을 담을 수도 없고.

어제의 시간은, 거짓말을 해서 없는 셈 친다고 하더라도. 하늘이 보고 있었기에 없던 게 될 수는 없었고.


성별과는 관계가 없는 문제였지만. 아무튼 사내로서 서원은, 누구보다 더 책임을 지며 살아가야 했고.


그를 목조르는 인생의 질고는, ······.


당장은 없었지만.


때론 이유 없이도 힘든 일이 많은 게 현대인의 삶이다.


부그르르르르.


스테인리스 냄비에 물을 조금 담았고. 거기에 스프를 풀어 넣은 뒤 끓이고 있었다. 야채 재료 따위를 넣고서 푹 익힌다. 증발되는 물 분량만큼 약간 더 넣은 셈이었고. 조금 짠 기가 있어서 싱겁게 먹는 서원은 거기에 조금 더 더하는 걸 좋아했다.


그와 동시에 다른 용기를 꺼내어 고기와 볶은 야채, 밥 따위를 담고.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형광등 불빛은 어둔 구석 없이, 원룸 방 안을 골고루 비추고 있었다.


“······.”


자신의 삶도 이만큼 밝았으면.


헛소리같은 생각을 서원은 문득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힘들 게 없고, 풍요로운 삶이었다. 현대인, 한국 정도 되는 선진국에서 나고 자라는 이의 삶이라는 건.

그러나 그런 속편한 말들 외에도.

사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질고라는 게. 각자 인생의 분량만큼, 말할 수 없어도 있는 법이었고.


떠올리기 싫은 고민들이나 감정들을 뒤로한 채. 조금 무표정한 얼굴로, 서원은 조리를 마저 했다.


대충 먹고, 조금 더 잘 셈이었다.


불은 다 끄고.


오늘은 ‘장경백’ 선생에게 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등교하는 것’ ‘몸을 움직이고’ ‘인생의 습관을 만드는 것’까지가 교육이라며 전 세계에 설파를 한, 걸출한 학자에게 말이다.


20세기 중반 무렵에 태어나, 21세기 초중반까지 사시며 후발 선진국들의 교육 체계 정립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었으며.

‘한국’의 교육적 열정 따위는 그 외에도 나름대로 유명했던 터라. 이미 선도국이었던 다른 유럽-미국 등지의 교육 정책에서도 그의 영향을 받은 모습들을 나중에 찾아볼 수 있었다.


인적 자원의 생산에 사활을 걸어야 했던 나라가 한국이었고. 또 그것밖에 없었던 곳이라서.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고생을 했던 이들도 많기야 했지만.

어쨌든.


장경백 선생의 철학 자체가 틀린 건 아니었다. 실무 교육 현장에서 여러가지 오도誤導가 있었을 뿐이었지.

그는 걸물이었지만 세계 유일의 교육학자도 아니었고. 현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는 더욱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킁.”


서원은 괜히 코를 훔쳤다.


음.


방이 추운 건 아니었는데.


바깥에 돌아다니다가, 감기 기운이라도 생겼는가···.


서원은 홀로 있는 방 안에서, 뚱한 표정으로 조리를 마무리한다.


*

dan-farrell-AZoKdZ5xl7o-unsplash.jpg


작가의말

쉬엄쉬엄 걷는 건 참 중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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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 262. 알현 24.04.10 14 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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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252. 이시기르스 24.04.02 15 1 17쪽
252 251. 리비아 24.04.01 15 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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