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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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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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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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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7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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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256. 리비아 이시기르스는 가볍게 검을 내리긋는다.

DUMMY

*


리비아 이시기르스는 가볍게 검을 내리긋는다.


“후.”


손목, 손아귀, 몸의 중심. 어디에도 힘이 많이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그저 일상 생활에서 가벼이 걸을 때의 자세 그대로 검을 나뭇가지마냥, 들었다가 아래로 떨어뜨린다.


그러나 정확하게 일직선 궤적을 그리는 검극은 무겁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한 완력이 실리지 않은 것같지만. 그건 이시기르스가 그렇게 보이게끔 가장을 한 모습에 불과하다. 관성을 이해하고 있는 운동 선수, 그보다 더 나아가 달인達人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한 번 퉁, 튕기듯 제 몸을 움직였던 리비아는 떨어지는 중력의 흐름에 맡기듯 내려베었고.


깡,


하고 새된 철소리를 들으면서 앞에 있는 백인 사내가 자신의 검으로 막는다.


정확히 말하면 외날검, 도刀였다.


왼 손으로 칼의 무딘 편을 감싸잡아 무게를 견디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一자로 받쳐 올린 검은 리비아의 것을 맞아 그대로 떨어진다. 깡, 하고 요란스럽게 났던 소리가 무색하게도 말이다.


백인 사내, 곱슬머리. 푸른 눈에 갈색과 금색 머리칼을 가진 청년이다. 리비아의 앞에 선 채로, 무릎이 풀썩 꺾였다가 다시 자세를 잡은 이는.


“끙.”


스릉, 하는 예리한 소리를 내며 검이 울었다. 평소 잘 가다듬어 두었던대로, 쇳소리가 악기처럼 난다. 리비아가 들고 있는 건 평소에 애용하는 기형도가 아니었다. 전투에 쓰기 위해 단련하는 도끼같은 물건이었다. 지금은 친구, 토미의 검술을 잠깐 봐주려고 하던 중이라 보조용의 얇은 검을 가져와 손에 들고 있다.


사막의 낮은 뜨겁다. 밤은 지열이 쉽게 날아가버려 극심한 추위를 느낄 수 있는 지형이고.


이시기르 부족의 중앙촌. 족장을 비롯해 주요한 인물들이 거주하고, 가장 큰 마을이라 할 수 있는 곳의 바깥이었다.


리비아 이시기르스는 중앙촌의 서쪽 외곽지에 산다. 가끔 홀로 마을 바깥에 나와 사색을 즐기곤 하는 그였는데. 오늘은 친구와 함께인 셈이다.


공터에는 사람이 없고, 모래 뿐이었다. 토미와 리비아. 하늘. 태양. 모래먼지.


토미가 볼멘 소리를 먼저 했다.


“검으로 자네를 당할 수나 있겠나.”


맞는 이야기였다. 리비아와 토미 졸탄은 애초에 다른 클래스Class였다. 수준으로서의 의미보다는. 직군으로서의 의미가 말이다. 토미는 전투가 벌어지면 원거리에서 지원 공격을 하는 쪽이다. 면전에서 리비아 정도 되는 수준의 검객과 만난다면, 사실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나았다.


리비아 이시기르스면 상대 측에서도 분명 일걸一傑로 취급되며 대장격일 전사일텐데. 아군 측의 방진이 모두 무너지고, 적군의 최고 기력술사와 초상술사가 맞닥뜨린 상황이라면 전황은 최악인 것이리라.

동료 기력술사들이 모조리 죽고 상대의 최고 전력도 깎아내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 자신의 주능력을 보조할 기예를 익혀두어서 나쁠 건 없었다. 리비아에게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하더라도. 위기의 상황에 궁여지책조로 써먹을만한 기술이 있다면 좋은 것 아니겠는가.


특히 타인의 도움이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난전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고 한다면. 더욱 대비가 철저해져야 하리라. 초상술사 클래스라고 해서 언제까지 근접전을 피할 수만도 없다. 그리고 그게, 일반적인 초상술사가 베테랑 워메이지로 바뀌어가는 과정이었다. 정확히.


워메이지들은 전쟁 상황에서 유연하게 움직이기 위해 저마다의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기력술사들의 그것보다는 한참이나 반응이 느리지만은, ’강화술‘을 직접 쓰는 부류도 있었고. 혹은 방어기를 강고하게 가다듬어 상대의 공격을 정면에서 견디는 자도 있다. 그 외에는 자동으로 움직이는 부류의 MP적 생물체를 만들어 자신을 호위하게끔 한다거나.


정말로 생물을 만드는 건 아니었지만. 고도의 AI를 지닌 기계류와 비슷하게는 만들 수 있었다. 초상술로 말이다.


골렘Golem술사, 인형人形술사, 정령精靈술사 따위가 모두 그런 종류들이었다. 매커니즘이 다르고 외관이 다르기는 하지만, 골렘이던 인형이던 정령이던. 초상술사가 벼려낼 수 있는 인공적인 동물들이었다.


정령의 경우에는 자연력의 대변자가 되기도 했다. 불의 정령이니, 물의 정령이니 하는 말이다. 자연계에 스스로 존재하는 혼령 따위의 의미는 아니었고. 마치 MP가 자체적 성질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처럼. 여러 성질값과 형상값을 부여해 만들어내는 기계와 비슷한 물건이었다.


그건 어떤 재료를 사용해 만드는지, 또 누가 만드는지에 따라 모두 개성이 달라지는 종류였고. 각 초상술사마다 고유의 피조물을 갖게 된다.


MP역시 계속해서 사용하다보면 일정한 성질을 가지며 스킬은 아니어도 현상으로 발현되고는 하는데. 그보다 조금 더 고도의 지적 물체를 만들어 병사로 부리는 셈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테이머Tamer 부류와 정 반대에 위치하기도 했다. 테이머는 콘란드 대륙에 실체를 가지고 실존하는 생물을 잡아다 부리는 데 반해서. 저런 인공 생물 술사들은 노 베이스No-base 상태에서 자신이 입맛따라 병사를 만들어내고 있었으니.


인공 생물을 물질계에 소환해서 부리는 데 MP적 비용은 훨씬 많이 들지만, 보다 압도적인 다양성을 가질 수 있었다. 반면 테이머들은 실존하는 생물이다보니 원형이 되는 생물의 모습에서 크게 변할 수 없었고. 대신 곁에 두며 계속 병사를 부리는 데 있어 기본 비용이 달리 들지 않는 식이었고.


토미 졸탄은 베테랑 워메이지라고 스스로 말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고 여겼다. 나름대로의 궁여지책들이 있기는 한데. 동급의 기력술사가 있다고 했을 때. 확실하게 그의 견제를 피하며 이탈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이전에 리비아와 대담을 할 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민감한 사안을 리비아라는 NPC와 나누고 퀘스트를 풀어나가야 하는데. 삐끗하고 오해가 생겨서, 리비아가 그를 적대하게 된다면.

그 좁은 천막집 안에서 과연 살아나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말이다.


토미가 워메이지로 파고 들려고 했던 ’방어기‘는 굳이 따지자면 정령이나 골렘 쪽이었다. 골렘은 실체를 먼저 좋은 재료를 사용해 만들고. 동력원을 MP로써 제공하는 방식의 인공 술사였고. 정령술사는 프로그래밍된 데이터처럼, ’정령‘의 구조를 이루는 술식을 먼저 짠 뒤에. 계속해서 그것을 불러내는 방식이었다.


골렘술사보다 훨씬 더 다양한 장소에서 편하게 정령을 불러 싸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다만 정령의 본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 전부 사용자 본인의 MP이기 때문에 골렘보다 다루는 시간과 위력대비 MP 소모가 큰 편이다.


’스킬‘로써 고정되어 있는 ’정령 술식‘ 데이터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으로. 따로 떨어져 있는 정령의 기억 데이터가 보전되며 학습을 하고, 성장하고, 강력해지게끔 만들어지는 게 보통이었다.


이를 위해서 마치 서버Server 장치에 메모리나 전력이 필요하듯. 정령술사들은 자신이 다루고 있는 정령들의 수나 위력에 따라 늘 일정분의 MP를 저당 잡히듯 유지하고 보관해야 했다. 총 MP가 30,000인 정령술사가 있다고 했을 때, 그가 3마리의 정령 술식을 완성해 각기 다룬다면.


평상시에도 ’계약 MP‘로 약 3,000정도는 사용하지 못하고 묶이는 양이 생기는 셈이다. 총 MP가 멀쩡히 있어도 가용한 MP의 양은 27,000으로 줄어들게 된다.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보통의 정령술사들은 따로 아티팩트 따위를 만들어서 함께 이용한다. 초상술사는 크든 적든, 아티피서로서의 자질을 조금은 갖는다. 해당하는 아티팩트를 완벽하게 다루기까지 시간과 경험, 노력 따위가 필요해서 굳이 더블 클래스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을 뿐.


보편적으로 플레이어들에게 퍼져 있는 ’정령술사‘들의 육성 방식은, 초상술사로서의 능력을 메인에 두고. 아티피서로서의 능력을 보조로 가져서.

정령 술식을 완성해, 그것을 따로 아티팩트에 기록하여 들고 다니는 방법이었다. 아티팩트의 설계에 배터리 부분을 넣는다면, 본인의 MP를 주입해두어 ’계약 MP'를 충당할 수도 있고. 아티피서로서 역량이 늘어난다면 오히려 순수하게 초상술사로서만 정령을 다루는 때보다 위력이 좋아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술식으로 완성하여 키우는 ‘정령’의 위력이 강해질수록 아티팩트 역시 강화를 시켜야 할 테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모든 플레이어들은 아티팩트를 사용하고. 레벨이 오를 때마다 장비의 강화를 하니까. 고정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값이 따로 들지도 않는 셈이다.


‘골렘’의 경우에는 조금 더 거대한 부분을 아티팩트로서 다루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플레이어 정령술사들이 보통 펜던트, 손아귀에 들어올만한 보석 하나로 정령 한 마리를 다룰 때. 골렘술사들은 적어도 사람만한 크기의 물질을 골렘의 껍데기로서 데리고 다니거나 들고 다녔으니까.


골렘 역시 초소형으로 만들 수 있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소환식을 이용해 정령술사들마냥 작은 크기의 아티팩트만을 핵심 부품으로 쓸 때도 있었다.

본인의 MP를 많이 소모한다면, 장소와 관계없이 정령마냥 골렘을 부를 수도 있을 테였고. 정령을 부를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MP가 들겠지만. 정령은 대개 유동체로 이루어지는 반면 골렘들은 훨씬 더 밀도가 높은, 일반 고체 물질 등으로 만들어지기에.


혹은 중심 엔진 부품만 가지고 다니면서. 그 외의 골렘의 하드웨어가 될만한 재료들은 현장에서 찾는 부류도 있었다. ‘우드 골렘’의 핵심 부품, 심장부를 들고 다니다가. 골렘술을 발동하면 주변의 나무들을 끌어모아 즉석에서 골렘의 몸뚱이를 완성하는 방식이다. 이쪽은 이미 존재하는 소재를 가져와 연결시키고, 또 그 위에 강화술을 덧대는 만큼의 MP만 소모하면 될 테였다.


여러 방식의 초상술사들이 있었다. 기력술사들이나 아티피서들은 가지고 다니는 도구, 아이템, 주 무기 따위로 그 특성이 제한되곤 하는 반면에. 초상술사들은 ‘상상력’만 있다고 한다면 정말로 천차만별인 전투 스타일을 확립할 수 있었다.


토미 졸탄은, 여태까지의 싸움에서는 본격적으로 드러낼 일은 없었지만. 사막 부족들을 전전하며 모험을 하는 동안 정령 술식을 몇 종류 완성해 두었었다. 본격적으로 계약을 시작해서 MP를 저당잡힌 건 아니고. 그저 개인적으로 스킬만 완성하고 배워둔 상태이다.


골렘술에도 역시 관심이 있어서, 관련한 스킬을 익혀두고, 핵심 부품인 심장부, 골렘 하트 정도는 만들어 두었고. 그도 역시 제대로 전투에서 발휘한 적은 없었다.


여러모로 살 길은 계속 찾는 중이었다. 방법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니.

그의 친구, NPC. 이시기르 부족의 차기 대전사인 리비아는 직접 그냥 검을 휘두르는 게 낫지 않은가, 하면서 검술을 알려주고 있었고.


초상술사들 중에서 근접전을 직접 무기 들고 벌이는 자들도 많기는 했다. 그런 이들은 운동 신경이 좋은 부류이다. 기력술사와의 더블 클래스를 할 수도 있는 이들. 토미는 스스로 알기로, 운동 능력이 그리 좋지 못했다. 현실에서도.


리비아의 말에 따라 하고는 있지만. 영 손에 맞는 무기를 든 느낌은 아니었다.


“당하지 못하면 죽을 뿐이지.”

“말을 참 예쁘게 해주는군.”

“아아니··· 자네가 당장 죽는다는 말은 아니지만···.”


허허허. 리비아는 너털 웃음을 터뜨렸고.

토미는 그 모습이 넉살 좋다고 여겨졌다. 세상에 있는 여러 인공지능들 중에서. ‘넉살좋은’ 성격을 구현하는 기술력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인공지능 기술 역시 눈부신 기술 발전이 있어왔지만. 이것 하나만 하더라도 상당히 상위에 있는 기술력이라고 생각했다. 토미는.


“원로분들은 좀 어떻던가.”


토미가 물었다.


“별반 다름 없으시지들.”


리비아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이 자유자재로 휘었다. 단단한 철검이 구부러졌다는 말은 아니다. 마치 휘는 것처럼, 리비아의 팔의 흔들림에 따라 곡선을 그렸다.

허공에서 유연하게 구부러지는 궤적을 긋는 작은 철검이다. 리비아가 들고 있는 건 별다른 무기가 아니었다.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종류다. 아마 마을의 무기고에 가면 수북하게 쌓여있는 것들과 그리 다름없는 종류.


그러나 장인의 손에 들린다면 기이한 흔들거림을 보이곤 한다. 유연하다. 유려하다. 가장 굳센 것으로 지어진 게 한 개의 벼려진 칼이었지만. 리비아의 손에서는 마치 물을 표현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극한의 부드러움을 묘사할 수 있는 리비아 이시기르스는, 필요하다면 다시 극한의 강직함 역시 표현할 수 있으리라. 전쟁터에서 그 강직함은, 곧 막아서는 모든 걸 베어 죽이는 힘일 것이다.

실제로 이시기르스가 그렇게 적들을 베며 전진하는 모습을 많이 보기도 했고.


몇 걸음 떨어져서 장난을 치듯, 검을 다루는 리비아. 그 앞에 선 토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한다.


“다름 없으시다는 건. 어떤 의미로인가. 안 좋은?”

“그렇지.”


리비아가 고갤 끄덕거렸다.


“그렇잖아도 최근에 좀 이상하기는 했거든. 자네 말을 들은 이후로 다른 낌새가 더 없는지, 각별히 주시하기도 했는데···. 단체로 이상한 물이라도 든 건지.”


쯧.


리비아는 혀를 찼다.


이시기르 족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아마 사막 부족들 대부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부족들이지만 결국 뿌리는 크게 봤을 때 한 줄기였기에. 큰 관점에서 삶의 양식이나 문화 따위는 대동소이하다.

원로들에 대한 이야기를 젊은이가 꺼내면서 그토록 불경한 제스처를 취하는 건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사안에 따라서, 그게 자연스러운 상황조차 있긴 하다.


리비아 이시기르스는 대전사는 아니었지만, 이대로 나이를 먹으면 대전사가 될 게 분명한 인간이다. 이시기르 족의 여러 청년들. 젊은 전사들 사이에서도 주장의 역할을 이미 하고 있었고. 아마 마을이 위기에 처한다면 가장 앞서서 전투를 치러야 할 인간이기도 하다.

충분히 마을의 향방에 관하여 의견을 내봄직한 위치에 있었다. 아직까지는, 조금 수그려야 하는 나이였고 참아야 하는 상황이 많았지만.


계급장을 떼어놓고 본다면 마을의 일에 예민하게 구는게 자연스러운 위치다.


마을의 일은 그의 일이다. 이시기르 부족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일이긴 하지만. 그로서는 조금 더.

리비아 이시기르스는 왜냐면, 마을이 큰 위기에 처한다면 가장 앞서서 몸을 던져 죽을 생각이었으므로. 자신의 목숨과도 관련이 있는 일이라면 더욱 깐깐하게 참견을 하는 게 맞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런 그의 눈으로 바라볼 때. 명백하게 원로들은 이상했다. 약 삼십 여 명 정도 ‘원로’라고 불릴만한 마을의 노인들이 있었다. 이전 세대나 전전 세대에 한 자리를 맡았던 중역들로. 당시의 경험을 가지고 마을을 이끄는 수장들에게 조언을 건네는 역할이었다.


이시기르 족의 족장은 호걸이었고, 이시기르스 역시 존경하는 인물이다. 그의 아들들, 후계자들도 나름대로 믿음직한 자들이었고.

결국 이시기르 족의 전사단戰士團은 족장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게 될 터인데. 그 명령과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원로들의 입김은 전사들에게 있어서도 민감한 점이 된다. 족장은 현명하고 경험이 많아도 한 명의 사람이었고, 그도.

주변에서 원로들이 잘못된 정보를 많이 불어넣는다면 착오가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시기르 족의 족장, ‘카우 데 이시기르’는 전쟁을 원하는 부류의 인물은 아니었다. 물론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어야 하는 곳이 이 사막 한복판에서의 삶이기는 하다만.

얻기 위한 전쟁은 무엇보다도 신중해야 할 일이다. 세력이 적은 부족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을 칠 때 뒤가 텅 빈다면 결국 이시기르보다 약한 부족에게도 잡아 먹힐 수 있었다.


파편화되어 살아가는 부족 시대의 삶이었다. 지금 사막 민족들의 삶은. 누가 뒤를 노릴 지 몰랐고, 무엇보다도 치밀하게 전략을 짜고, 움직여야 했다.


천 단위가 되는 부족민들의 명운이 족장에게 달려 있다.


원로들은 노망이라도 든 것인지. 어디서 헛바람이라도 든 것인지. 계속해서 전쟁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만큼 덧없는 것이 어디있는가. 실제로 싸우는 건 아래에 있는 젊은 계층이었는데. 원로들의 전략이 언제나 모두 맞다고 한다면 따를 의향은 있겠는데.


이시기르스가 봤던 원로들의 눈빛은, 정광이 흐른다기보단 무엇으로 인해 조금 흐려져있는 상황이었다. 표정을 보면 안다. 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그 행동을 하고, 말을 하는지 말이다. 욕심, 야욕으로 인해서 섣부르게 움직이고자 하는 건 최악의 경우였다.


이미 다 늙어빠진 노친네들이었는데. 아직도 다 꺼지지 않은 불씨가 그 속에 있었던가.


그 불씨만큼은 공감을 한다지만. 마을을 위한 선택이 아니게 된다면.


가장 극심한 상황을 가정했을 때, 이시기르스는 기꺼이 원로들을 죽일 각오 또한 되어 있었다. 만일 그렇게 해서 쓸데없는 전쟁이 없어지고, 이시기르 부족이 훨씬 더 오래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면 말이다.


사람의 목숨에 걸린 일이다. 이시기르스로서도 완벽하게 자신만이 맞다고, 단언하기 어려운 면이 있기는 했는데.


“복면, 두건을 쓴 놈들은 어떻던가.”

“그 미친 새끼들···.”


리비아가 토미의 물음에 답했다.


“이후로도 원로장將 어르신의 집에 계속 들락날락 하더군. 내가 본 것만 해도 손가락으로 세기 어려워···.”


리비아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와 동시에, 물흐르듯 계속해서 흐르던 그의 검날도 중력의 방향대로 툭, 떨어졌다. 리비아의 팔이 떨어지며 검극이 모래에 닿았다. 퍼석, 하면서 모래 바닥의 표면을 긁었고. 작게 먼지가 인다.

토미의 눈에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한낮에 사담처럼 나누기에는 조금 무거운 내용이었다. 사실은 단서도 적었고. 정확하게 물증을 잡아낸 것은 없잖은가.

리비아가 마을 회의 따위에 참여를 했을 때, 묘하게 타부족을 노리는 듯한 발언을 하는 중역들이 많아진 것 뿐이었다. 원로들이 간혹 툭툭, 던지는 의견에도 그런 내용이 있었고. 가장 좋지 못한 건 족장 카우 데 역시 그 말에 혹하는 듯 보인다는 점이었다.


발롭 부족은 싸워도 좋은 상대가 아니었다. 전투라는 건 무수한 변수가 있는 일이었으므로. 보다 약자를 잡아먹는 일이라고 해도. 하늘에 계신 주主께서 허락치 않으신다면 크게 당할 수도 있는 법이었다.

그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한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명예도 명분도 대의도 없이, 그들보다 물리적으로도 더 크고 강성한 부족을 상대한다?


미친 짓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회의장에서 리비아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과 기색을 살폈다. 거기서 리비아가 더욱 마음이 굳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이들의 표정에서, 리비아가 느끼는만큼 불안감을 표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으니까.

다들 정신이 나가버리기라도 한 것인지. 아니면 그 몰래 따로 회의장이 있어서 다른 전략 회의를 나누고 있기라도 한 것인지.


수상쩍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딱히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있던 나날들이었다. 막연한 의심을 더욱 굳혀준 건 토미였고.

‘이상한 외부인’에 대해서 인식을 시켜준 것 역시 토미 졸탄이다.


리비아는 눈 앞에 있는 토미를 바라보았다. 곱슬머리, 푸른 눈. 사막에 어울리지 않는 흰 피부. 깔끔한 인상의 사내였다. 일부러 웃기는 표정을 짓지 않고, 진지하게 있는다고 하면 도리어 미남, 호남 소리를 들을만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성격이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타지에서 누군가를 방심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구는 게 습관이라도 된 건지. 늘 어설퍼 보이는 표정을 지으면서 리비아의 짜증을 돋구는 놈이다.


토미 졸탄.


이시기르 족의 친구. 동맹. 뛰어난 초상술사. 마스터 마기아.

화신 사막에서 누구보다도 귀한 존재. 원소술사. 전쟁의 지휘자. 믿음직한 후방의 지원자.


그를 부를 수 있는 말은 여럿이 있다.


그러나 그를 완벽하게 믿을 수는 있는가?


만일 토미 졸탄의 말에 의해서, 리비아 이시기르스 자신의 생각이 유도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유도된 생각으로 판단을 그르쳐서, 마을에 해가 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라면.


그런 가능성도 생각은 한다. 리비아도 멍청이는 아니니까. 오로지 타인에 의해서 움직이는 바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후의 행동은 단순할 것이다. 그는 토미 졸탄을 죽일 테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전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가가 중요하다. 리비아에게 있어 이시기르 족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자신의 목숨은 도리어 가볍다.


마을의 생生을 위하야 얼마든지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마을의 어린 것들이 잘 자랄 수 있는 미래를 위해서 검을 들 것이었다.


구도는 단순하다.


갑작스레 마을 근처에서 보이기 시작하는 검은 두건, 복면을 쓴 이방인 무리. 토미 졸탄과 비슷한 외견의, 흰 피부의 인간들.


원로나 중역들의 기색이 이상한 점.

그리고 그들을 같이 견제하자고 말하는, 조금 더 믿음직한 이방인 토미 졸탄.


리비아는 흐린 눈으로 토미 졸탄을 바라보다가, 눈을 깜빡였다.


토미의 시선에서 보자면. 까무잡잡한 피부의 미남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다가, 눈을 깜빡인 참이었다.

안색이, 눈매가, 이목구비가. 굉장히 날카로운 편이다. 리비아 이시기르스라면. 아마 그가 NPC가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현실의 인물이었다면 모델 따위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 정도였다.


그런 작자가 칼을 손에 들고 있다. 외모보다도 더욱 날카로운 면이 있는 검예와 절기들을 구사하는, 검의 달인이다.


리비아의 입이 열렸다.


“흠.”


작은 한숨을 먼저 쉬었고.


모래 바람은 언제나 입, 콧 속으로 들어와서 불편하게 한다. 토미도 년 단위로 사막을 떠돌면서, 이제는 익숙해졌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이 뛰어난 점이 그것이었다. 여행의 즐거움만이 아니라, 불편함까지도 상기 시켜주는 완벽한 오감 체현의 시스템 말이다.


아주 높은 산악 지형을 올라서 좋은 경치를 보고자 한다면. 그 과정에서 지루한 등산과 땀, 햇빛, 먼지. 피부에 달라붙는 온갖 것들로 짜증스러운 기분이 들곤 하는 것마저 구현을 해낸다.

사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마 설국雪國 지형을 가더라도 그 나름의 고충이 있겠지. 그러나 진정으로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현실에서 느낄 수 있는 그 질고들마저도 여행의 사랑스러움으로 느끼곤 했다.


토미 졸탄도 그런 부류였다. 그래서 모든 질감과 감각들이 만족스러웠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마음을 잘 먹으면 된다. 생생하게 다가오는 오감의 온갖 것들이. 몸에 해로운 악성의 물질만 아니라고 한다면야. 건강한 몸뚱아리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시간은 완벽한 신의 축복과도 같았다.


토미는 어떤 표정을 지금 자신이 짓고 있는가, 잘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게임 내에서는 그런 생각을 잘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완벽하게 이야기에 빠져들어서, 그 안에서 자연스레 반응할 뿐이었다.


현실에서도 그렇게 구는 순간이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일을 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친척들을 뵙고. 주변 이웃들과 교류하면서 말이다.


일부러 극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 작품이라는 건 그런 매력이 있었다. 현실과 다른. 도리어 그래서 더, 현실을 상기시켜주는. 특별한 경험을 관찰자에게 선사하는 말이다.


바람이 분다. 사막에 살고 있는 어느 새가 멀리서 우는 것도 같았고. 심심찮게 소리와 경치를 채워주는 온갖 주변 환경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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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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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268. 견제 24.04.16 14 1 26쪽
268 267. 썬더 울프. 사막의 밤. 24.04.14 15 1 18쪽
267 266. 케이실라Keiseila 24.04.13 15 1 15쪽
266 265. 외유外遊 24.04.12 13 1 21쪽
265 264. 처량한 포로 24.04.12 12 1 30쪽
264 263. 세부 내용 24.04.10 22 1 13쪽
263 262. 알현 24.04.10 13 1 19쪽
262 261. 사절단의 여정 24.04.10 17 1 19쪽
261 260. 비슷한 아이디어 24.04.10 11 1 19쪽
260 259. '그 망할 새끼' That shit 24.04.09 14 1 23쪽
259 258. 잠입 24.04.09 9 1 15쪽
258 257. 납치 24.04.08 11 1 10쪽
» 256. 리비아 이시기르스는 가볍게 검을 내리긋는다. 24.04.07 11 1 24쪽
256 255. 이쿠죠いくぞ 24.04.04 16 1 30쪽
255 254. 사막벌레 24.04.03 14 1 14쪽
254 253. 부족의 명운 24.04.02 15 1 24쪽
253 252. 이시기르스 24.04.02 13 1 17쪽
252 251. 리비아 24.04.01 13 1 19쪽
251 250. 사절단 24.03.31 17 1 15쪽
250 249. 에드버그 24.03.30 13 1 15쪽
249 248. 사담私談 24.03.30 15 1 14쪽
248 247. 자고로 다 고생하는데 뺑끼치는 새끼가 제일… 24.03.29 13 1 23쪽
247 246. 살리기 24.03.29 12 1 12쪽
246 245. 상처 24.03.29 9 1 9쪽
245 244. 전조없는 비수 24.03.29 11 1 22쪽
244 243. 셰프 L 24.03.29 12 1 14쪽
243 242. 합류 24.03.28 13 1 24쪽
242 241. 하울Howl 24.03.28 11 1 16쪽
241 240. 지팡이 하나 24.03.27 10 1 19쪽
240 239. 치즈 케잌 24.03.26 10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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