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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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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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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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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9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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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247. 자고로 다 고생하는데 뺑끼치는 새끼가 제일…

DUMMY

*


벨베르 공화국에서는 비상령이 떨어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내려지지 않는다면, 도리어 그게 더 이상한 상황이기도 했다.


무려 북부 국경선의 기지 셋이 동시에 터져나갔지 않은가.

전시 상태에 준하는 일이었고. 이미 침략을 받은 것이라고 여겨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폭발의 원인을 조금도 짐작할 수 없는 탓이었다. 누가, 어떻게 대체.


견고하게 지어지고 지켜지던 기지를 날려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귀신이라도 와서 벨베르의 패망을 예견하려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말이 되지 않았다.


벨베르의 북부 수비대, 사령관을 대리하고 있는 총괄보 ‘마굴라’는 여전히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시 회의에 쓰는 전략실 데스크에 도밍턴의 군간부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북부 국경 수비대에서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는 지휘관들이었다. 그들의 뒤로 보좌관들이 모두 시립해 있었고.


벨베르 공화국의 군인들은 모두 같은 제식의 군복을 입는다. 단결된 결의를 보여주는 복색과, 모임이었다. 하나같이 낯빛들은 좋지 못했다. 그네들이 북부 수비대에 임관하여 경계를 서는 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차라리 전시 상황이라면 미리 짜여진 작전 계획에 따라 움직이면 되리라. 그런데 지금은 대체 뭐란 말이냐.

적도 알 수 없었고. 들려온 보고는 터무니없는 것들 뿐이었다.


기지 요새 세 곳이 대폭발을 일으켰고, 내부는 전소全燒. 생존자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전부 다 죽었거나, 혹은 몇 명 정도만이 수습되어 도시 내 병원에 있으나 의식이 없었다.


보급소도 한 곳이 날아갔고···.


아주 계획적이고, 작정을 한 이의 소행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이’가 누구일까.


벨베르 공화국에 전쟁을 선포하는, 그에 준하는 테러를 범한 인물이 말이다.


귀신의 소행으로 떠넘기고 사건을 종결시키기엔, 그들의 약장에 걸린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벨베르의 적을 타도하라고 부여받은 약장과 휘장들이었고. 이곳에 모인 지휘관들은 적어도 목숨 정도는 걸 수 있는 진지함들이 있었다.


벨베르에 폭발 테러를 일으켜서 이득을 볼 수 있는 게 누구일까. 내부자의 소행이라고 친다면 너무도 터무니없다. 이런 긴 평화기가 지속되고 있는데. 갑자기 반란이란 말인가.

근처 다른 나라들도 그러하듯. 벨베르 역시 안정기가 이어지는 추세였다. 국력이 유실되는 상황이 별로 없었고. 만약 반란을 꿈꾸는 누군가가 일어선다면 그는 최강의 부대를 상대해야 할 테다.


다른 나라들 간의 전쟁이 없었다는 건, 전체적으로 그러한 상황이 동일하다는 말이었다. 병력에도 국력에도 여유가 있다. 이런 시기에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이전까지의 시대보다 더 끔찍한 참상이 벌어질지 몰랐다.

이전의 전쟁들이 대개 평야에서의 회전이 되고. 병사들 간의 싸움이었다면. 오랜 시간 모여온 병력과 각종 기술들은 마치 파도처럼 서로를 밀쳐대면서, 관계 없는 땅까지 집어삼킬 수도 있었다.


초인 병력이라고 불리는 워메이지 전단이나 기사단들의 무리만 하더라도.


그런 대규모 전면전이 이루어지면, 근처 나라에서도 때다 싶어 움직일지 몰랐다. 곧 오랜 시간 이어온 필리아 대륙의 평화기가 깨지는 셈이었고, 중부 지역이 전쟁의 화마로 뒤덮이리라.


가장 최선의 시나리오는, 이것이 아직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적’이 벌인 일이며. 내부적으로 그 ‘적’을 완벽하게 말살하는 것이었다. 외부에서 이상함을 알아채기 전에.


지금의 강대한 벨베르를 상대로 싸움을 건다는 건, 그만한 자신감이 있다는 말이었다.


전력적으로 밀리지 않는다거나, 혹은 절대로 들키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다거나. 어느 쪽일까. 마굴라는 혀로 입술을 쓸었다. 극도로 화가 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종종 하는 행동이다. 근처에 앉은 연대의 부副장군은 그 모습에 움찔했다. 반사적으로. 그 화가 자신에게 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무리한 바람이었다. 마굴라는 어떻게 해서든, 상황을 타개해야 했으니까. 해법을 찾을 수 있다면, 공화국의 총통總統을 제외하고는 누구라도 물어 뜯을 수 있었다. 단지 부장군 힉센만이 아니라.


“어떤 개같은 종자가 이런 일을 벌였는 지는 몰라도, 반드시 잡아 죽여야 한다.”


마굴라의 말은 그의 성정을 굉장히, 부드럽게 표현한 것이었다. 성정대로 말을 뱉었다간 지면에 다 싣지 못할 만큼의 말이 되었으리라. 긴 전략실 테이블에 앉은 고관들도 느꼈다. 마굴라가 화를 제어하고 있다는 걸.

그 화가 자신들에게 오지 않기를 바라기는 했다. 지금 북부 수비대, 대장군 대리이자 총괄보인 마굴라는 자신마저 감당하기 어려운 화 때문에 도리어 누그러진 톤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화가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마굴라는 그런 성정이다. 군부의 일좌一座로서 여기까지 올라오는데 제법 도움이 된 성격이기도 했고.


“···이를 말씀입니까.”


무거운 분위기에서 간신히 입을 뗀 것은 마굴라의 시선에서 오른쪽 열에 앉은 중간 자리의 지휘관이다. 녹색 머리칼을 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자신이 입은 군복과 계열이 비슷해서 나름 잘 어울리기도 했다. 젊지만 인상이 거칠고, 만만찮은 용모의 사내였다. 피부도 꺼끌한 것이, 고생을 많이 한 티가 난다. 지휘관이면서 저런 용모를 가졌다는 게, 의외로 신뢰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군부에서는 누가 고생을 덜 했느냐보단, 누가 더 헌신적으로 고생을 했느냐를 따지게 되니까. 그런 곳이었다. 전장터를 누벼야 하는 사내들의 조직은.


“내외국 인사들 중에서 짐작이 가는 바가 있나?”


총괄보, 대장 대리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의 민머리 역시 등빛에 반사되어 날카로운 광채를 낸다. 그런 모습을 보고 웃는 티라도 내는 멍청한 작자는 아무도 없었다.


마굴라의 물음은, 이미 현장 정보들로 추리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완벽한 전소다. 기지들의 모습은. 폐허라고 해도 차라리 온건한 꼴일 것이다. 그 참상에 비한다면. 어떤 기폭제를 썼는지. 어떤 폭발물을 이용했는지 짐작도 어려웠다. 단숨에 사람들이 거하는 요새를 날려버릴만한 폭발물이라고 한다면 전쟁사에 있어서도 분명 이름을 남길만한 것이리라.


아니면 현대에 와서 만들어진 물질일지도 모른다. 초상공학은, 고대 제국기 시절 때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가. 제국이 쇠락하면서 잊힌 기술이었다. 첨단 공학의 길을 걸었던 제국이지만, 그 발전이 민간에 전해지지는 않았기에. 황실의 입김이 닿은 곳에서만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제국이 주변국과 국내 제후들의 반란으로 무너지고. 당시의 기술들은 대부분 유실되었다. 현재 타국의 이름으로 선 여러 왕국, 공화국들이 있었다. 천 년 이상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산슈카’의 이름을 달았던 땅들이지만.


그 땅들에는 고댓적, 제국기의 유물들이 더러 남아 있었다. 개중에서 그걸 완벽하게 복원하고 이용에 성공한 곳은 달리 없었다. 철저하게 황실 위주의 비밀 유지가 되었기에. 그 황실이 무너지면서 ‘사슈나 가문’을 비롯한 산슈카의 가문들도 지식 전달이 끊어지고 말았지만.


어쨌든 당시 휘황찬란했던 초상공학은, 근현대에 와서 콘란드에서 다시 빛을 발하고 있다. 지금의 발전상은 예전과 다르다. 조금 더 민간친화적이고, 다양한 분야에 쓰이고 있었다. 그만큼 상용화가 되어간다는 게, 기술적으로 제반이 단단하고 견고하다는 말도 된다. 제한된 연구 분야에서만 계속해서 맴도는 지식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런 식으로 기술 공학의 저변이 넓어지고, 탄탄해지면 다시 첨단 기술의 개발에 추진력이 되곤 한다. 선순환이었다. 가로막혀, 한 우물에 고여버린 기술은 결국 쉽게 사라지기도 하고. 패퇴하는 것이다. 전해지지 않는 지식이라는 건 궁극적으로는 쓸모 없는 물건이었다.


정당한 절차를 거쳐야 하겠지만. 결국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식 따위도 흘러야만, 퍼져야만 제 역할을 해내는 법이다.


현대, 콘란드는 사람들이 벼려내는 거대한 MP가 득시글대고 있었다. 그 에너지들이 본격적으로 모양을 갖추고, 서로를 향해서 쏘아지게 된다면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날 지도 몰랐다. 아직까지 ‘임계점’에 달하지는 않았고, 또 시간이 조금 남기는 했지만.


‘마굴라’는 자연스럽게 초상술에 대해서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티팩트 폭탄.


초상술사들, 연구자들이 오랜 기간 정밀하게 개발해서 만들어내는 폭발물들이었다. 물질에 MP가 섞여 있고, 여러 종류 스킬들이 뒤섞여 부여된 물건이다. 일반적인 폭탄보다 위력이 굉장한 것은 달리 설명할 부분도 아니다.


그러나 그만큼 다루기 어렵고, 까다롭고. 전략 자원으로서 각국에서 엄중하게 다루어진다. 반출하는 것도 힘들 테고.


그런 물건이 쓰인다면, 그 나라의 ‘워메이지’들이 다른 대상을 적대한다는 의미도 된다. 전쟁으로 발전하기 쉬운 상황이었다.

허나 현재의 기술력, 일반 공학으로 기지를 날려버릴만한 폭탄을 제조하는 건 불가능하다. 단적으로 말해. 어마어마한 양의 화약을 이용한다면 혹 모르겠지만. 그만한 양을 세 기지와 보급 창고 건물 아래에 매설하는 노동을 생각하면,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마굴라는 높은 수준의 초상술을 보유하고 있는 집단들을 떠올린다.


“국내에··· 검은 탑 지부가 있지.”

“···예.”


옆에 서 있던 말리가 답했다. 몇 발짝 떨어져 있다가 가까이 오면서. 부장군은 ‘지휘관’ 중에서 북부3연대장인 마굴라를 보조하는 자였고. 말리는 군사 지휘가 아닌 보좌관으로서의 역할만 하는 직책이었다.

지휘관으로서의 자질보다는, 일반병들 중에서도 명민한 자나 눈치가 빠른 자. 군략에 밝거나 윗사람을 섬기기에 능한 자들을 발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모시는 이에 따라서 실질적인 대우가 달라지기도 한다. 실제 직책으로서는 대개의 지휘관들보다 아래였으나.


“검은 탑의 벨베르 지부에서 이런 일을 벌일 것 같나?”


마굴라가 연대의 부대장을 보며 물었다. 힉센은 고개를 떨떠름하게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들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초국가적 단체인데 굳이 필리아의 공화국에서 일을 벌이지 않을듯 싶습니다. 검은탑의 맹주, 그랜드 마스터가 미쳐버려서 중소국 중 하나를 먹으려는 게 아니라면···.”


그럴 일은 없다. 절대자들 사이에는, 절대자들간의 관계와 규율이 있는 법이었으니까. 그랜드 마스터 하나가 섣불리 움직인다면. 다른 마스터가 반발을 한다. 검은 탑은 분명 강고한 자가 맹주로 있는, 전대륙적 집단이었으나 굳이 벨베르에서 그럴 연유가 부족했다.


“검은 탑 지부의 장이 독단적으로 했을 확률은.”

“가마쉬는 야욕이 없는 자입니다. 지금의 벨베르에 만족하고 있고요···. 주기적으로 초상술부部의 차관과 연락을 하고 지내는 호인입니다···.”


부장군이 꼬박꼬박 대답을 했다. 마굴라는 표정은 풀지 않았지만. 한 켠으로는 쓸만한 자라고 생각했다. 힉센을. 마굴라의 시선에서 보자면 왼쪽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은 이다. 부장군으로 발탁이 되고, 여태까지 버틴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지휘관 중에서 마굴라의 보조를 가장 잘 맞추는 놈이기도 했다.


피부가 구릿빛이었고, 회색 머리칼을 하고 있다. 세시앙인(동아시아인의 외모를 가진 이들을 콘란드 내에서 부르는 말)의 이목구비를 한, 중년 정도의 건장한 사내였고. 힉센은.


“숨겨진 동기가 있을 수도 있잖은가.”

“다른 이를 찾는 게 나을 정도입니다. 절대로 아니라고는 말씀 못드리겠지만···.

국내에는 대형 초상술사 길드가 세 곳이 있고···. 연금술사 길드가 있습니다. 모험가나 용병 길드는 연합하여 움직일 정도로 조직력이 좋은 곳이 아니고···.

국내 군간부나 정치 인사들 중에서 반란을 꾀할만한 자는··· 더군다나 이렇게 직접적으로 움직일 자는 달리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마무리로 죄송하다는 표정까지 지어보였다. 힉센은. 자신의 보고가 나름대로 깔끔했다고 여겼다. 마굴라는 이를 갈았다.


“모른다는 이야기로군.”

“······예.”

“벨베르-산슈카 경계에서 일이 터졌으니 결국은 산슈카 놈들 짓이 아니겠습니까?”


중간 자리에 앉아 있던 지휘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꺼끌한 피부. 담대하게 입을 열었던 녹색빛 머리의 지휘관이 말한다. 이름은 소르펜이었다.


“······.”


마굴라는 한 텀을 쉬고 고갤 끄덕거린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연스런 추론이기는 하지.”


최악의 상황이겠지만.


결국 내부에서 범인을 색출해 조지는 것이 간단한 처리였다. 외교적 문제로 간다면, 정말로 ‘전쟁’이다. 평화기간 오래 국력을 유지한 각국들이다. 군부 고위층에 있는 입장으로서. 그런 사태의 문제점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까딱하면 산슈카 남부와 벨베르 북부가 쓸려나갈 수 있었다.


시민들의 대피 문제부터가 골치를 썩였다. 마굴라는 이마를 매만지며 말한다.


“산슈카의 누가, 왜.”


그의 물음은 단순하고, 핵심적인 것이다. 누가, 왜.


왕이 그랬을까?


힉센이 말한다.


“벨케임 사슈나 7세는 그럴 인물이···.”

“아니지. 나도 알아.”


마굴라도 힉센의 의견에는 동감을 한다. 벨케임 사슈나 7세는 그럴 작자가 아니었다. 타국의 군인에게 그런 평가를 받는 왕이 흔하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그는 가급적이면 전쟁을 피하려 하는 자이고, 전쟁의 화마를 ‘싫어’하는 자였다.


침략 전쟁이라도 발발한다면 그 호인도 움직이겠지만. 먼저 어디를 건드릴 품성은 아니었다. 그렇게 건드렸을 때, 산슈카가 과연 무사할 수 있는가도 큰 몫을 차지했다. 이 중부 대륙에서, 혹은 콘란드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고국古國의 이름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기나긴 역사적 명맥을 이어오는 왕의 부담감은 그런 것이리라. 자신의 대에서 수백 세대를 잇는 가계의 흐름이 끊어진다?

두고두고, 이 대륙 역사의 말미末尾에까지 회자될 일이었다.


“벨케임 왕은 도박수를 싫어하지. 여태껏 어떤 외교에서도 그런 수를 내보인 적이 없었고···.”


그렇다면, 산슈카가 아닌 타국의 일일까.


동북부로 올라가면 이슈칼이 있다. 서부로 가면 화신 사막이 있고. 산슈카를 지나면, 안단이 있다. 하나같이 이 북부 국경선을 노리기에는 지형적으로 불리한 입장들이다. 화신 사막에는 인물이 없었고.


부족 간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나라가 되지 못한 땅이었다. 사람이 살기에도 척박한 곳이었고. 이렇다할 기술력이나, 대단한 초능력자도 나오지 못했다. 그곳에서 장대한 대계大計를 꾸미고 벨베르를 도모하려고 한다는 건, 농담 수준의 시나리오였다.


“······.”


마굴라는 입을 다물었다.


지휘관들도 어떤 추측을 섣불리 내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추리의 시간이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모른다.


이미 세 개 기지가 날아갔다는 소식은, 중앙에까지 보고가 되었다. 아직 특령은 내려오지 않았지만. 북부 사령관 대리로서 해야 하는 일을 계속해서 해야 하리라.


사령관, ‘비엘론’은 국내 정반대 지역에 들렀다가, 공화국 수도를 들러 일을 보고 이곳 북부로 올 예정이다. 아마 다음에 사고 소식이 추가되면, 정부 소속 초상술사를 닦달이라도 해서 날아올지 모른다.


“지정학적으로는-”


마굴라가 무거운 표정으로 말한다.


“산슈카가 유일하긴 하군.”


상상하기 싫지만 말이다.


“그러나 왕은 아니고.”


벨케임 사슈나 7세. 그는 평화를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사슈나 가와 산슈카의 역사를 지키고자 하는 사상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고.

자유 연맹의 운영에 가장 도움이 되는 쪽으로 정치적 선택을 해 온 왕이기도 했다. 그는 이웃국가들, 인접국가들과 가급적 지금의 상태를 오래 유지하고자 한다.


“강력한 초상술사 집단을 운용할 수 있는 누군가.”


산슈카의 왕실 초상술사장이 미쳐버렸을까. 사르삿에 주둔하고 있는 전술사단이 돌아버려서 독단적으로 움직였을까.


“왕정은 절대적이지만 귀족들은 그렇지 못하지.”


마굴라가 말을 덧붙였다.


그건, 우스운 내용이었다 사실.


공화국共和國이라 이름하는 나라는 사실, 하나의 체제 안에 각 인사들의 의견이 잘 모아지고 있었다. 벨베르는 산슈카보다도 영토가 작다. 그러나 나름대로 비옥했고, 또 사람이 쓰지 못하는 부분이 보다 적었다. 산슈카 국토를 채우고 있는 황야나, 데슈칸 산맥, 검은 숲 따위의 마경魔境같은 건 인접국에게도 악명이 자자한 지역이었는데.


벨베르는 상대적으로 그런 몬스터 지대가 적은 편이었다. 고강한 초상술사들, 연구회에서 만들어내는 제식 ‘아티팩트’들이 있었고. 초상술이나 기력술을 단련한 엘리트 병력 또한 타국의 것을 막을 정도는 있었다.


전군이 ‘아티피서Artificer’가 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일반병에 비하면 한참 높은 기능을 보이는 정예병들이 정규군으로 많은 수를 채우고 있었다.


전략적 움직임 하에, 적은 산지와 많은 평지 내의 몬스터들을 대다수 토벌하기에 성공한다. 필리아 대륙, 중부 대륙에서 스타트를 하는 플레이어들은 ‘벨베르’를 ‘쉬운 시작점’으로 고르곤 했다.

산슈카보다도 더 말이다.


초보자 존을 넘는다면, 그 이후의 이렇다할 사냥지가 없었다. 도시 문명과 문화가 잘 개발된 곳이었고. ‘전투직’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그리 좋지 못한 곳이었지만. 안정적인 생활과 다양한 플레이가 가능한 지역이었다.


전근대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왕정이나, 황실 하의 나라에서 정치적 롤플레잉을 하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는 일이었지만. 이런 근현대의 색채를 담은 공화국 따위에서 정치 플레이를 하는 것도 분명 매력이 있었다.


벨베르에는 군인, 모험가, 제작계열의 장공인들, 정치가, 여러 방면의 클래스를 선택한 플레이어들이 넓게 포진되어 있었다. 아직 공화국의 최상위권에 올라온 자들은 없었지만. 그래도 서비스한 지 4년간, 제법 요직에까지 들어간 자들이 많다.


애초에 벨베르는 제국의 통치에 반발하며 만들어진 나라였고. 각 지방과 나라에서 모인 이들이 힘을 합쳐 세운 곳이었다. 누구 하나가 대표자로 나서기가 애매한 상황이었고, 덕택에 ‘합의’라는 걸 최대한 발전시켜온 집단이다.


지난 오랜 시간동안 산슈카가 왕정 체제만을 가지고 흘러올 때. 벨베르는 정치 체제적으로 계속해서 변화하고, 진화를 거듭해왔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런 체제의 힘이라는 게 나름대로 주효하고, 또 강력했다. 잘 닦인 길 위에서 타는 마차처럼. 국력이 유실되는 일이 많지 않았다. 벨베르 공화국 내에서 또 비리 따위를 저지르는 관리, 상인들이 나올 수 있었지만.

나라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았고. 군기가 세고, 국민성이 엄한 부분이 있었다. 단일화된 정부의 감시망을 쉽게 피할 수 있을 정도로 국토가 복잡하지도 않았고.


토의 중에 지휘관들이 ‘국내 인사’들 중에서는 범인을 찾기 힘들 것이라 여긴 연유도 거기에서 기인한다.

그만한 실력이나, 꿍꿍이, 자원을 숨기고 있었다면 아마 반드시 들통이 났으리라.


어쨌건 공화국은 일원화되어 가고 있었다. 반면 왕정 체제를 확립한 산슈카에는 빈 구간이 많다. 각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영주들은, 지역의 맹주나 제후국의 왕처럼 군다. 정말 제국이 아닌 이상에야 대놓고 그리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마음가짐이나, 영지 내의 작은 일들을 처리할 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하고자 한다면, 어떤 실력을 키우고 또 중앙의 눈을 피해 감추는 일 역시 가능은 하리라. 벨베르의 사정보다는 훨씬 더 쉽게.


분할된 왕정과 단일화된 공화국.


우스운 말이었지만, 아무튼.


“산슈카의 초상술사 집단을 보유한 이가···.”


마굴라가 운을 띄웠다. 말리가 답했다. 전략 테이블에 앉은 모두가 들을 수 있을만한 음량이었다.


“알사드 대공가의 프린스 알사드···. 대장군과, 변경백. 신진파의 수장인 벤케인 후작···. 산슈카 내 초상술사 길드와 연금술사 길드가 있습니다···.”


길드의 설립과 유지는 제법 자유로운 것이었다. ‘검은 탑’ 역시 길드의 범주에 속하며, 그건 전대륙적 규모의 초상술사 집단이다. 그러나 각국 내에서만 활동하는, 일개 지방이나 왕국적 규모의 길드들 역시 많이 있었다.


모험가 길드나 용병 길드의 경우에는, 전대륙적 조직 체제가 워낙 잘 잡혀 있고 쓸모있는 것이라 새롭게 만들어지지 않는 경향이 있었지만. 다른 직업군은 종종 새롭게 만들어지고, 없어지고를 반복한다.


산슈카 내 초상술사, 연금술사 길드 중에서 가장 대형인 집단 한 곳씩을 말리는 가리키고 있었다.


“가장 의심스러운 자는?”


마굴라가 눈빛을 번뜩였다. 먹잇감을 잡아 먹으려는 맹수의 그것처럼도 보였다. 마음은, 그보다도 더욱 극심하게 흉포했다. 벨베르를 침략한 적에 대해서라면 마굴라는 짐승보다도 더 거칠게 굴 자신이 있다.


테이블에 앉은 지휘관들이 제각기,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대장군보다는 변경백이 독자적으로 일을 벌이기에···.”

“벤케인 후작 역시 야욕이 심한 인물입니다··· 역사적 고국인 산슈카에 불만을 갖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려 무리한 수작을···.”

“산슈카 내 초상술사 길드 또한 의심스럽습니다···. 결국 제어되지 않은 술사 집단은 방만한 사이코패스들일 확률이···.”

“그렇게 따지면 연금술사 길드가 더 의혹이···. 그들은 폐쇄적이며 폭발물, 전략 물자 따위를 얼마든지 만들어낼 여력이 있으니까···.”


여러 사람들의 생각이 난립했다.


마굴라는 테이블의 가장 끄트머리에 앉은, 비교적 젊은 지휘관에게 물었다. 30대 정도로 보이는 얼굴이다. ‘고생’을 연차에 포함시키자면. 그것도 상대적으로 덜한 듯 싶었고.


물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지휘관들은 모두, 모의적으로는 지옥을 경험한 전사들이었다. 벨베르의 지휘관 자격을 아무나 얻는 건 아니었으니까.


“······.”


마굴라의 질문에도 말석에 앉은, 제뉴엘은 조금 대답을 뜸들였다. 고심하다가 그가 말한다. 마굴라는 그 정도는 기다려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프린스 알사드, ······가 의심스럽습니다. ······.”


다른 이들에게서는 듣지 못한 대답이었다. 지휘관들도 조금 뜬금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마굴라가 이유마저 물었다.


“왜지. 알사드 대공은 역사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는 가문의 적자이며 지금도······.”


마굴라가 거기까지 말하고 멎는다. 마침 다른 자들의 말소리도 줄어든 시점이었다.


“······‘게으른 대공.’”


청발, 백인. 낮지만 분명한 어조로 제뉴엘이 말한다. 삼백인장직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 북부 수비대에서.


“······게으른 새끼가 세상에서 가장 못믿을 놈 아닙니까. 무슨 수작을 꾸미고 있을지 모르고.”

“허.”


제뉴엘은, 지난 시간 동안 군생활에서 겪은 바를 덤덤하게 말했다. 확실히, 사내들의 조직에서 나올법한 이야기이기는 했다.


마굴라는 뭔가를 깨우친 표정으로, 고개를 조용히 끄덕거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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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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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268. 견제 24.04.16 14 1 26쪽
268 267. 썬더 울프. 사막의 밤. 24.04.14 16 1 18쪽
267 266. 케이실라Keiseila 24.04.13 15 1 15쪽
266 265. 외유外遊 24.04.12 13 1 21쪽
265 264. 처량한 포로 24.04.12 13 1 30쪽
264 263. 세부 내용 24.04.10 23 1 13쪽
263 262. 알현 24.04.10 13 1 19쪽
262 261. 사절단의 여정 24.04.10 18 1 19쪽
261 260. 비슷한 아이디어 24.04.10 11 1 19쪽
260 259. '그 망할 새끼' That shit 24.04.09 14 1 23쪽
259 258. 잠입 24.04.09 10 1 15쪽
258 257. 납치 24.04.08 11 1 10쪽
257 256. 리비아 이시기르스는 가볍게 검을 내리긋는다. 24.04.07 11 1 24쪽
256 255. 이쿠죠いくぞ 24.04.04 16 1 30쪽
255 254. 사막벌레 24.04.03 14 1 14쪽
254 253. 부족의 명운 24.04.02 15 1 24쪽
253 252. 이시기르스 24.04.02 14 1 17쪽
252 251. 리비아 24.04.01 14 1 19쪽
251 250. 사절단 24.03.31 17 1 15쪽
250 249. 에드버그 24.03.30 14 1 15쪽
249 248. 사담私談 24.03.30 16 1 14쪽
» 247. 자고로 다 고생하는데 뺑끼치는 새끼가 제일… 24.03.29 14 1 23쪽
247 246. 살리기 24.03.29 13 1 12쪽
246 245. 상처 24.03.29 10 1 9쪽
245 244. 전조없는 비수 24.03.29 11 1 22쪽
244 243. 셰프 L 24.03.29 12 1 14쪽
243 242. 합류 24.03.28 13 1 24쪽
242 241. 하울Howl 24.03.28 12 1 16쪽
241 240. 지팡이 하나 24.03.27 10 1 19쪽
240 239. 치즈 케잌 24.03.26 10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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