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더 마이 브라더.
"중길아! 너?"
"어? 대모님 안녕하세요."
"안녕한 걸 떠나서. 너 왜 여깄어? 내일까지 쉬는 거 아니었니?"
"아. 잠깐 장 대표님이 보자고 하셔서..."
"대표님이 오늘 널 부르셨다고?"
"그건 아니고요... 아침에 나왔다가..."
"아침에 왜?"
"그냥 일 하러..."
"얘. 너 이럼 우리가 욕 먹어. 우리가 무슨 사람 부족해 망해가는 식당도 아니고."
대표님과 면담을 마치고 나오는 길. 건물 앞에서 대모님을 만났다.
주방 이모님들 말대로 이모들 저리가라 할 정도로 혼이 난다.
"죄송합니다... 집에 오니까 몸이 습관적으로 움직였어요."
"죄송한 걸 떠나서. 감정이라는 것도 있잖아..."
"토요일에 나오면 되는 거죠?"
"그래. 제대로 마음 추스르고 나와. 그래야 일도 일 같이할 수 있어."
하루 단위로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을 번갈아 만난다.
학교란 안정적인 환경에선 겪을 수 없는 일들. 앞으로 내가 살아갈 세상도 이런 식으로 변한다는 건가?
"나쁘지 않아. 좋아. 난 좋아."
어차피 하루하루 변해가는 세상이다.
주변이 어떻게 바뀌든, 잃지 말아야 할 건 나 자신과 협상에서 쓰일 내가 지닌 1의 가치.
궁금해진다. 나란 사람은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1의 가치를 보여줄 수 있을까?
모르지. 내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바뀔테니까.
그저 꾸준히 나아간다면. 흔들리지않고 계속해서 가치있는 사람이 된다면.
분명 이럴 때 쓰는 좋은 말이 있을 건데?
뭔가 신념같이 품고 갈 수 있는 그런 멋진 말.
뭐가 있을까? 핸드폰을 꺼내? 아니면 서점을 가볼까?
"그래. 도서관을 가자."
근래 계속 정신없기도 했고 엄마 아프면서 새 책 본지도 오래됐다.
휴가가 주어졌다고 PC방 가서 밤 샐 것도 아니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도서관을 찾았다.
준비할 서류가 있고 인감 때문에 도장도 하나 새로 파야됐지만, 그거야말로 천천히 하고싶어.
서두를 것 없잖아. 괜히 부랴부랴 움직여봐야 유산 받고싶어 환장한 놈밖에 안 되니까.
나의 길을 간다. 언제 어느 때고 내가 중심이다.
그래. 생각났어! 이럴 때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란 말을 쓰는거지.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귀하다라."
좋은 말이다. 이건 이기심이 아니야. 나 혼자 잘났다가 아니라고.
혼자가 된 오늘을 대하는 마인드가 조금 바뀌었다는 거지.
좋은데? 멋진 걸? 깔끔하잖아. 나 언제 이렇게 강해졌지? 어떻게 이 상황을 이렇게 부드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거지?
이제는 의식하지 않아도 정말로 이런 멘탈이 내 기본이 된 것 같다.
스스로도 그게 느껴져. 나는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물론, 모든 변화를 혼자서 이루었다고 말할 순 없다.
계기가 있어. 길조 형을 만났으니까.
그 형이 날 사람많은 한강에서 큰 소리로 꿈을 외치게 만들면서 모든 게 시작됐다.
"자려나?"
아직은 이른 시간. 형네는 새벽까지 영업하니까. 점심쯤 연락 해봐야겠다.
그래. 그러고 보면. 장례식 때도 엄청나게 도와줬잖아. 옆에 있다는 자체가 의지됐다고.
진짜 형한테 맛있는 거 사드려야지. 고마운 걸 잊지않는 사람이 되는 거야.
"어??"
그런 마음을 간직하고 일단은 시민도서관을 찾아왔는데.
지금 세상에서 가장 보고싶은 사람이 한쪽에 떡하니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길조 형한테 다가가 어깨를 톡 두드리며 물었다.
"형? 여기서 뭐하세요?"
"음? 어? 중길아??"
"아니. 지금 10신데, 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
"뭔 소리냐? 너 그 질문 좀 이상하다??"
"네?"
"새끼. 뭐지? 난 책이랑 안 어울리는 사람이다 이런 뜻인가?"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아침인데."
"아. 그런 거였어?"
어제 가게가 일찍 문을 닫았단다.
형도 오랜만에 아침에 눈 뜬 김에 남는 시간 빈둥거릴바엔 밖으로 나와 도서관을 찾았단다.
"왜요?"
"독서가 취미라."
"형이요???"
"이 새끼 뭐지? 왜? 난 책 보면 안 돼?"
"안 되긴요. 너무 좋죠! 저도 책 좋아해요."
정말 인연이라는 게 있는 걸까? 어떻게 우연이라도 이렇게 만날 수 있지? 그것도 같은 취향으로?
"저 안 그래도 형 생각하고 있었는데."
"왜?"
"그냥 고마운 게 많아서."
"하... 새끼 또 이러네. 됐어. 뭘 그런 걸 일일이 따져."
"뭐 보세요?"
"사나이의 바이블. 영웅문이다."
"아. 무협지죠?"
"뭐냐? 책 좋아한다는 놈이 영웅문을 몰라?"
"전 판타지 쪽 좋아해서."
"이것도 판타지야. 동양 판타지."
서로 너무 반갑고 신기해 떠들다보니 직원분이 쫓아오셨다.
밖으로 나와 외부 공기를 맡자마자 길조 형은 잽싸게 담배를 꺼내 문다.
"후읍. 야 근데 네가 봐도 솔직히 좀 의외긴 했지? 내가 책 좋아한다니까? 그치? 맞지?"
"그렇긴해도. 책은 누구든 좋아할 수 있는 거니까요. 이상하진 않았어요."
"중길아. 형은 다 계획이 있어."
"무슨 계획이요??"
"니가 여자였어 봐. 지금 날 딱 봤어. 어? 저 사람 뭐지? 동네 양아치 같은데 취미가 독서? 은근 지적인 걸? 하지 않겠냐?"
"어... 음..."
"푸하하! 물론 그렇게까지 바라는 건 아니고. 진짜 시간 남을 때 가끔 와서 책도 빌려가고 잡지도 보고 그래. 시간 때우기 이보다 좋은 데가 없으니까."
"하하... 의외성을 파고드는 거네요?"
"그럼 사람은 늘 반전매력이 있어야 한다니까."
난 어떻게 왔냐고 물어보길래, 가게 갔다가 쫓겨났다고 했다.
형도 순간 짤린 거냐고 걱정했는데, 그런 게 아니라 아직은 상중(喪中)이니까. 하루이틀 더 쉬고 오라고 배려받았다고 말했다.
"그래. 우리 회사가 그런 게 좋다니까? 인간미가 있어 사람들이."
"그러니까요. 정말 형한테 너무 감사해요."
"내가 뭘?"
"이런 좋은 회사 소개해주셨으니까."
"아니지 새끼야. 그렇게 볼 게 아니지. 고마운 건 나야."
"형이 왜요??"
"내가 사람 소개해줬는데 니가 씨발 일을 좆같이 했어 봐. 그럼 내 이미지만 씹창나지. 니가 잘 해주고 잘 버텨주니까 내가 고맙지."
"뭔가... 정말 좋은 말은데. 욕이 섞이니까 칭찬인지 아닌지..."
"푸하하! 그러니까 이런 거 이제 그만 따져 뭐 이제와서 우리 사이에."
"네. 맞아요."
잠깐의 정적이 지나가면서 형이 조심스레 묻는다.
"어머니는 잘 끝났어?"
"네."
"어디로 모셨냐?"
"그냥 집에 있어요."
"그래? 그래도 돼?"
"납골이나 이런 건 그때 못 정했거든요."
"아. 대모님이 그런 건 안해주셨어?"
"거기까진 못 해주죠. 사람마다 선택하는 게 있는데."
"그래. 아무튼 고생했다. 씨발 힘들 때 가주지도 못 하고."
"무슨 소리세요. 첫날 와서 그렇게 옆에 있어줬으면서."
"..."
"전 진짜 형한테 너무 고마운 게 많아요."
"아 됐다고. 새끼 닭살돋게 진짜."
가만보면 길조 형은 칭찬에 면역력이 없는 것 같다.
신기하다. 난 칭찬 들으면 좋던데.
"형?"
"어."
"뭐 드시고 싶은 거 없으세요?"
"왜? 니가 사주냐?"
"네. 저 형 맛있는 거 사드리고 싶어요."
"그럼 그때 한강가서 라면이나 먹을까?"
"아. 그런 거 말고요. 더 비싸고 좋은 거."
"야 이 미친. 라면이 씨발 4000원이 넘는데 그거보다 더 좋은 게 어딨다고?"
"하하... 아니 그래도 그건 평상시에도 먹을 수 있는 거니까."
그런 거 말고 더 좋은 거. 더 맛있는 거. 진짜 먹는 사람이 기분 좋고 기쁠 수 있는 그런 메뉴를 골라줬으면 싶은데.
"저 월급 받았잖아요. 돈 있으니까."
"됐어. 먹을 거면 한강가서 라면이나 먹어."
"아 형... 진짜 서운하게..."
"왜? 아니. 나도 그런 거 한번 먹어보고 싶어서 그래."
"네?"
"넌 한강에서 라면 먹어봤냐?"
"어... 아니요?"
"나도 한번도 그런 적이 없어."
이건 또 무슨 소리람?
"한번도요?"
"어. 한강. 옛날에 친구들 있을 때 가서 겉멋에 소주나 몇 병 까고 그랬지. 그런 거 해본 적이 없어."
의외성이라는 건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다.
길조 형이 도서관에 있는 게 의외스러운 게 아니라 형이 그런 경험이 없었다는 게.
"진짜요?"
"왜 안 믿지? 은근 그런 사람 많을 걸?"
"아니. 그래도... 형은 오토바이도 있고."
"..."
그러고보니까. 난 이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다.
그냥 갑자기 지나가다 만나게 되면서 내 인생에 불쑥 들어온 사람.
감당할 수 없는 친절과 뜨거운 마음을 가진 신기한 이름을 가진 형.
그 정도가 내가 아는 김길조란 사람이지 그 외는...
"오토바이만 있지. 갈 시간도... 갈 사람도 없어. 나도."
처음으로 형한테서 인생의 그림자 같은 게 느껴졌다.
진짜 한강에서 라면을 먹어보고 싶었나보나. 그러고보니까 그날도 가격에 진짜 깜짝 놀라서...
"그럼 지금 한강 가실래요?"
"미쳤냐? 이 낮에?"
"하지만 형은 밤에 일 하시잖아요."
"그러니까 갈 수 없는 거지."
"아... 죄송해요."
"됐어. 또 뭐가 죄송해. 그냥 내 인생이 그런 건데."
반성하게 된다. 대체 지금까지 난 뭘 한 거지?
길조 형은 위태롭게 버티던 내 인생을 우뚝 설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다.
날 강하게 만들어줬고. 좋은 사람들을 소개해 줬고. 어제 대한그룹 본사에서도 형 생각이 났었어. 고마웠었다고.
근데 난 이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게 정말 하나도 없다.
"형 진짜... 죄송해요."
"아. 새끼 진짜..."
"전 형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하하! 와... 미치겠네..."
길조 형이 담배를 바꿔 물며 말했다.
"중길아. 한강에서 라면 못 먹어봤다는 게 그렇게 이상하냐?"
"네? 아니요. 꼭 그렇다기 보다는... 그냥 형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없으니까."
"그냥 별로 얘기할 게 없어. 나는."
"네..."
"진짜야. 난 별로 자랑할 것도 없고. 드러낼 것도 없는 사람이라."
눈앞에 흰 연기가 꼬불꼬불 신기한 도형을 그리며 흩어져간다. 조용히 형이 입을 열때까지 기다렸다.
"난 보육원 출신이라."
"..."
"그래서 별로 내 얘기 잘 안 해."
아는 건 없어도 늘 궁금하긴 했었다.
길조 형은 대체 어떻게 자랐길래 이렇게 심장이 뜨거운 걸까? 내 일 아닌 남의 일에 어떻게 저렇게 나설 수 있는 걸까?
나는 히어로다. 꿈을 가져라. 태어난 의미를 찾아라. 같은 말은 보통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말이니까. 그것도 처음 만난 사람한테.
"어... 어..."
"너 또 괜히 보육원이란 단어에 반응하지 마라. 그럼 여기서 분위기 더 좆같아진다."
"죄... 죄송해요."
"죄송할 건 없어. 그냥 태어나보니까 그랬던 거라. 별 생각도 없고."
또 후우~ 흰 연기를 뿜어내며 말하는 길조 형. 목소리가 탁하게 들린 건 담배 때문이겠지?
"말 그대로 별로 자랑할 내용도 아니니까 내 얘기 잘 안 하는 편이야."
"근데 어떻게 그렇게 사람들 일에 적극적이세요?"
"먼저 얘기했잖아. 위대한 사람은 다들 험난한 과거가 있다고."
"..."
"언젠가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움직이기 시작했어. 그냥. 아무 이유없이."
"누가 시키거나 한 게 아니라요?"
"하하! 미쳤냐? 야! 너 빨리 가서 남들 도와!!! 누가 이래. 이런 건 자발적으로 움직여야지."
"우와."
"물론, 나도 계기는 있지. 아 씨 이래선 안 되겠다. 이러지말고 좀 다르게 살아보자 같은 거."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하하! 새끼. 그렇게 궁금하냐?"
"들어보고 싶어요."
"신기하네. 원래 나 내 얘기 진짜 쪽팔려서 잘 안 하는데."
그렇게 진짜 김길조란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형은 보육원 출신이란 이유 하나로 학교 다닐 땐 심하고 괴로운 경험을 했었단다.
"소위말하는 왕따였지."
"..."
"그땐 좀 무서웠어. 걔네들이. 그래서 일단 학교 관두고. 세상으로 나왔는데."
"어..."
"왜?"
"아. 아니요."
실수할 뻔했다. 내가 학교를 나온 일과 형이 학교를 나온 일은 같은 게 아닌데, 괜히 동질감 느끼고 싶어서...
"너무 화가 나더라고 하루는."
"화나죠. 진짜. 애들 왜 괴롭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씹쌔끼들. 좆같아서 그냥 다 갖다 묻어버리고 불질러버릴까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었는데."
"네..."
"존나 뭐라고 해야되지 그걸? 마치 우주에서 무언가가 나한테 메시지를 던지는 거 같은 거야."
"어떤 메시지요?"
"아직은 아니다. 영웅은 인내심이 강해야 한다. 뭐 그런 거."
"오. 히어로 각성."
"그러니까. 나도 뭔가 그냥 내 안의 소리라는 건 아는데. 진짜 그랬어. 복수는 언제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위대해지는 경험은 아무 때나 할 수 없다. 그러니. 나는 이제부터 위대한 사람이 된다. 히어로가 되자. 그게 누구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 그렇게 시작 된 거야."
이 사람과 있으면 가슴이 뜨거워져. 뭔가 유치한 걸 알지만, 같이 어울리고 싶어진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싶다 생각했던 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
아픔과 슬픔을 극복한 경험이 나를 매혹시켰던 거다.
그래서 말했다.
"형. 저도 어제 히어로 됐어요!!"
"니가 어떻게?"
"저도 어제 각성했어요. 그래. 나도 이제부터 히어로다 하면서!!"
"하하! 야 꺼져. 웃기지 마!"
"아. 왜요!! 제가 한다니까요!!"
"들어보자. 니가 누굴 도와줬는데?"
"어... 누굴 도와준 건 아니고. 근데 빌런을 만나서."
"야 이 씨!! 빌런 하나 둘 만났다고 아무나 히어로가 되는 줄 알어!! 히어로는."
존나 정의로워야 한단다. 다른 무엇보다 정의감이 넘쳐흘러 지구를 사랑해야 한단다.
"니 꿈은 정복자잖아."
"어..."
"니가 빌런이지 새끼야 크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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