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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省元) 님의 서재입니다.

이방인온달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드라마

성원(省元)
작품등록일 :
2020.11.28 17:19
최근연재일 :
2022.08.11 00:0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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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3,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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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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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21화 - 지키려는 자와 무너뜨리려는 자.

DUMMY

어두운 적막함 속에서 여러 호롱불만이 조용히 춤을 추는 드넓은 선태왕의 빈소에 태자 고양성과 태자비 명림단, 그리고 공주 고담현이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삐익-


“으아암, 핫?”



빈소의 방석에 앉아 꾸벅 졸고 있던 공주 고담현은 갑작스러운 호각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아이는 곧바로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선태왕의 위패에 다시금 예를 올리려 했다.


평상시에는 울릴 일이 없는 호각 소리가 갑작스레 울린 것은 비상상황을 뜻했기에 고양성은 방석에서 벌떡 일어나 누군가를 기다렸다.


곧 빈소에 눈을 제외한 모든 부위를 검게 가린 한 조의(皂衣)가 들어와 태자 고양성에게 호궤했다.


중리부 소속의 조의는 말없이 서신을 태자에게 건넨 뒤, 바로 예를 올린 후 자리에서 사라졌다.



“맙소사 이런 일이..!”



부왕의 생전에 소노부(消奴部)에 배치했던 첩자 다섯 명의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는 내용의 서신을 읽고 낯빛이 창백해진 고양성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소식이 끊겼다는 것은 잠입한 첩자들이 발각되어 사망했음을 의미했다.


삼국시대에는 고려, 백제, 신라 모두 상인이나 승려 등으로 위장한 많은 첩자들이 첩보 활동에 혈안이었다.


오부의 대가들에게까지 황실의 첩자들이 심어져 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나 황실의 첩자들이 직접적으로 제거된 상황은 쉽사리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 정치적 기반이 모자란 태자에게 있어서 소노부에 잠입한 첩자들이 전멸했다는 것은 고추가(古鄒加) 해위지의 정치적 도전임을 의미했다.


태왕으로 등극하더라도 근왕 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고양성 역시 무늬만 태왕이었던 부왕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태자 고양성이 당장 기댈 곳이라고는 없었다. 문제는 왕비를 배출하는 절노부(絶奴部)도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황실인 계루부와 결혼하는 오부의 세력인 절노부는 그저 태자비 명림단을 앞세워 무사안일만을 택했던 정치집단에 불과했다.


고양성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아내인 명림단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에 가급적이면 혼자의 힘으로 세력을 키워나갈 생각이었다.


문제는 부왕이 서거하자마자 가장 골칫거리인 소노부를 견제할 기본적인 장치들이 사라진 것이었다.



“무슨 큰일이 생겼사옵니까? 태자 전하..”



남편의 안색에서 혼란스러움이 드러나자 아내인 명림단이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서신을 짓이겨 쥐고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한 태자 고양성은 아내에게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생전에 부왕께서 태왕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모른다고 내게 혼을 내신 적이 있었소. 부왕께서 서거하시자마자 시련들이 실타래처럼 엉키니 어디서부터 손봐야 할지 모르겠소. 벌써 겁이 나는구려.”


“태자 전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께오선 곧 천하를 호령할 고려의 태왕이 되실 분이시옵니다. 나약함은 전하와 어울릴 수 없으니 부디 상심을 거두시옵소서.”



고양성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명림단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부왕께서 서부(西部-소노부)에 심어놓았던 첩자들의 연락이 끊겼다고 하오.”


“예!? 설마..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오랫동안을 감시했던 자들이지 않사옵니까.”


“항상 주기적으로 기별을 넣었던 자들이오. 연락이 끊길 리가 없거늘, 근자에 모두 사망한 것이 틀림없소.”


“하오면..”


“곧 있을 즉위식 후에,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생각해봐야겠소.”


“이럴 때 소첩이 전하께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하니 참으로 송구스럽고 애석하옵니다.”



명림단이 고개를 숙이자 남편은 아내의 손을 잡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 말마시오. 부인. 바라 건데 난 그저 부인이 건강하기만 하면 그걸로 족하오. 내 평생에 걸쳐 가장 확고해 마지않은 것이오. 힘겹겠지만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보리다.”



명림단은 둘째 고대원을 생산한 뒤, 원인 모를 병에 걸려 건강이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그녀의 건강 악화는 또다른 커다란 분란의 씨앗이 될 둘째 왕후를 들이게 되는 미래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태자 전하. 소첩 누를 끼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하겠사옵니다.”


“부인이 건강해야 담현과 대원이 무탈하게 자랄 것 아니오.”



고양성은 졸다가 끝내 방석에 엎어져서 자는 공주 고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비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장녀가 정치적으로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스스로 마지막 궁지에 몰린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해결하되 가족들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작 전부터 궁지에 몰리고 있었기에 착잡할 뿐이었다.



“˚과인(寡人)을 보위할 자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태자 전하. 소첩이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오나 감히 진언 드리건대, 전방을 지키고 있는 ˚고흘(高紇) 장군에게 일단 의지하심이 어떻겠사옵니까.“


”고흘 장군이라..“



고흘은 부왕의 생전, 고구려의 신성과 백암성을 공격했던 돌궐을 물리쳐 이름을 날린 용장이었다.


황부에 역전의 용사로 이름을 떨쳤기에 적합한 인물이었으나 자신을 보위하게 된다면 그가 빠질 전방의 빈자리가 더 큰 문제였다.



”고흘 장군은 최전방을 지키고 있는 장수이기 때문에 도성으로 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소. 흐음.. 일단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합시다. 조부(祖父)를 뵙는다고 따라온 딸아이가 또 저리 피곤해하니 차마 볼 수가 없구려. 부인도 대원이도 그렇고.“



명림단은 남편에게 묵례한 뒤, 아예 엎어져 자는 딸아이를 둘러업고 함께 동궁으로 향했다. 고양성은 마차 창밖으로 내외를 호위하는 유수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공주의 시위인 네가 사내였다면, 진즉 장군으로 승격시켰을 것을.. 유수야. 참으로 안타깝구나.‘



자신을 바라보는 듯 인기척이 느껴진 유수는 창문을 향해 머리를 숙이며 고양성에게 말했다. 그녀 역시 태자의 불편한 심기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터였다.



”태자 전하. 고심하시지 마시고 무엇이든 분부를 내려주시옵소서. 소신은 태자 전하의 수하이옵니다.“



멍하게 유수를 바라보던 고양성은 이내 정신을 차리며 말을 이었다.



”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과인이 동궁으로 복귀하거든 수고스럽지만 전에 내게 청했던 것을 실행토록 하여라.“


”분부 받들겠사옵니다. 태자 전하.“


”서부의 해위지가 본격적으로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중리를 포함한 각 부에 각별히 경계하라고 전하여라. 곧장 대대로 왕산악에게 일러 즉위식에 탈이 없도록 철저히 준비토록 전하라.“


”명심하겠사옵니다. 태자 전하.“



얼마 전의 수색으로 하여금 유수는 부정주 모자(母子)가 살아있을 것이란 확신을 했기에, 계속해서 그들을 찾아보겠다고 태자에게 청했다.


고양성 역시 그들이 살아있을 것이란 희망을 안고 그녀의 청을 승낙했던 터였다.



태자 내외가 동궁으로 복귀하자마자, 대대로를 알현해 태자의 명을 전한 유수는 태자 직속의 친위 기병 30기를 이끌고 안학궁성에서 나와 대지를 달리기 시작했다. 횃불을 든 기병들이 드넓은 대지를 밝히며 달리고 있었다.



***



수수리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입구에서부터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평상시와는 다르게 곳곳에 많은 수의 횃불들이 밝혀 있었고 문지기들이 모두 중무장을 한 상태였다.



”저기, 무슨 일 생긴 거야!? 호권 두령은?“


”수수리! 네가 없는 사이 마을에 큰일이 났어!“


”네가 데려온 남자가 마을 사람 셋을 죽이고 두령의 흑각궁을 훔쳐 달아났어!“



천청병력 같은 말에 수수리는 믿기 어렵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니, 도대체 왜!? 다 죽어가던 사내를 구해줬거늘! 어떻게!? 누가 죽은 거야!?"


“문을 지키던 동료들과 무녀 할멈이 죽었어.. 시신은 모두 장막에 있어.”


“맙소사. 어째서.. 호권 두령은!? 호권은 어디에 있어!?”


“그놈 찾아서 죽인다며 개기지와 열 명의 동료들을 데리고 모두 말을 타고 나갔어.”



가슴이 철렁해진 수수리는 곧장 장막을 향해 달려갔다. 장막 안에는 마을의 어르신들이 시신 셋 앞에서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수수리는 거적에 덮인 시신 셋 중에서 가장 작은 거적을 들치었다. 보랏빛으로 변한 할멈의 시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수수리. 할멈이 돌아가셨다. 마을의 청년 둘도 이렇게 허망하게 떠났구나."


“수수리야.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구나.”


“어떻게 호의를 베푼 사람들에게 이런 천인공노 할 일을 벌일 수가 있단 말이냐!”



’부상자를 처음 봤을 때, 상황을 모르니만큼 고민하지 말고 그냥 지나쳤어야 했다. 멍청한 선택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라는 죄책감이 수수리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살가죽만 남은 앙상하고 차디찬 할멈의 거친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데려오지만 않았어도 마을에 이런 변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그저 잘못만을 빌고 있었다.



***



활과 검으로 무장한 호권 일행의 말발굽 소리가 산길의 지면을 세차게 두드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수수리! 거봐! 무턱대고 병신같이 들이다가 이 꼬라지가 난 거라고!”


“개기지 말이 맞아! 뭔 놈인지도 모르고 데리고 온 놈한테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개기지의 투덜거림에 호권은 말고삐만 세게 쥘 뿐이었다. 마을의 동료들을 잃은 슬픔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멀리는 못 갔을 거다. 모두 조심하고 둘이서 한 조가 돼어 주변을 샅샅이 뒤져. 발견하는 즉시 사살해!”



다섯 개의 횃불이 숲속에 넘실거렸다. 황영은 저 멀리 넘실거리는 횃불들을 보고 자세를 숙이고 있었다.



“휴우. 빨리도 쫓아왔군. 하.. 나도 말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쯧쯧..”



황영은 자세를 숙이고 호권 일행의 반대 방향으로 달아났다. 한참을 쉬지 않고 달아나고 있었을 때 저만치에서 상단으로 보이는 무리가 지나가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는 큰 나무에 몸을 숨겨 상단 무리를 바라보았다. 마차와 수레바퀴 소리가 숲속의 적막함을 두들기고 있었다. 규모가 큰 상단의 기병들은 일정 간격으로 마차를 호위하며 이동하고 있었다.



“어떤 자들이지.. 머릿수가 엄청난 것을 보니 보통 상단은 아닌 것 같은데.. 엇?”


-팍-


몸을 숨긴 나무에 갑자기 화살이 날아 들어와 박혔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몸을 틀었을 때 붉은색 도복을 입은 자들이 활을 겨누며 다가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노예상단이었군!”



황영 역시 즉시 반격하기 위해 나무에 박힌 화살을 뽑아 흑각궁의 활시위를 당겼다. 적들은 횃불을 들고 있었기에 황영의 입장에서는 그저 보기 좋은 표적일 뿐이었다.


-퓽!-


흑각궁의 활시위에 날아간 화살은 곧 자신을 겨눴던 적의 머리를 꿰뚫었다. 사망자가 발생하자 곧 호각 소리가 울렸다.


-삐이이익! 삐이익!-


멀리서 희미하게 호각 소리를 들은 호권일행은 곧장 소리가 난 지역으로 달렸다. 마차 역시 호각 소리에 그대로 멈춰 섰다.


마차 안의 어린 소녀는 갑작스레 숲속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함께 타고 있던 정하시는 소녀를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놀랄 것 없어요. 방금 들은 음색의 호각 소리는 우리 상단에서 노예 거리를 사냥할 때 내는 소리랍니다. 곧 포획한 사냥감을 볼 수 있을 거예요.”



한편 호권 일행이 호각 소리 부근에 다다랐을 무렵, 시력이 좋은 일행 중 한 명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두, 두령! 맙소사! 정하시 상단이야!”


“제길! 어쩌다가 저년이 여기까지!? 빌어먹을!”



저 멀리 보이는 마차는 붉은색 천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주변을 호위하는 수십의 완전무장한 기병 모두 붉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고작 열 명으로 어떻게 대적할 상황조차 되지 않았거니와 확인한 마차는 정하시의 마차가 분명했기에 무조건 멀리 달아나야 했다.



“두령! 우리 여기 있으면 안 돼! 어디서 화살이 날아올지 모른다고!”


“제길.. 할멈을 죽인 그놈을 반드시 잡아서 죽였어야 했는데!”


“정하시 상단이 왜 이 부근에서 얼쩡대지? 두령. 설마 그놈! 정하시 일당과 무슨 관계가 있는 놈은 아니었을까?”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모두 후퇴하자. 마을이 발각돼서는 안 되니까 돌아서 가야겠어!”



호권의 일행들은 서둘러 말고삐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차를 호위하는 재이는 저 멀리 달아나는 말발굽 소리 방향을 지켜보고 있었다.



“재이님. 그냥 도망치게 둬도 되겠습니까?”



그의 옆에 있던 부관이 재이에게 물었다. 재이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곧장 달아나는 것을 보아하니 별 볼 일 없는 산적들 같은데 그냥 두어라. 그나저나 호각 소리를 울리게 한 놈은 꼭 잡아야겠지.”



황영은 정하시 상단의 포위망에 걸려 점차 달아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운 좋게 살아나나 싶었는데 빌어먹을! 여기서 죽을 수는 없는데!”



그는 나무 사이사이로 몸을 피하면서 달아나려고 애를 썼으나 갑자기 나무 위에서 떨어진 그물망들이 그의 몸을 덮쳤다. 그물은 연이어 여러 개가 날아들었다.



“우아악! 제기랄!”



붉은색 도복을 입은 여섯 명의 사내들이 그물에 덮여 발버둥 치는 황영에게 다가왔다.



“여기 무장한 고려인 한 놈을 잡았습니다!”


“으윽. 어쩌다가 이런 노예상단에게..”



그물에 낚여 한탄하고 있을 때, 거대한 덩치의 재이가 앞에 나타나 황영을 내리깔며 바라보았다. 황영 역시 오른쪽 뺨에 깊은 상처가 있는 재이를 응시했다.



“감히 우리 상단의 일원을 활로 쏴 죽이다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와 춤을 추는 놈이군. 어디 소속이길래 우리 상단을 염탐한 것이냐?”



붉은 도복을 입은 사내들은 두건으로 안면을 가리고 있었다. 보통내기의 자들이 아니었기에 안면을 가리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큰 덩치의 사내는 대놓고 얼굴의 상처를 드러내고 있었다.



“염탐이라니! 나는 그저 내 갈 길을 가려던 것일 뿐이다. 헌데 너희가 먼저 공격하지 않았느냐?”


“혓바닥이 긴 놈이로군. 제대로 공격했다면 네놈 머리통부터 날아갔을 것이야. 일부러 맞추지 않았거늘 네놈은 반격하면서 우리 일행을 죽이지 않았느냐?”


“먼저 공격한 네놈들의 잘못 아니더냐!?”


“고려에서 법이 엄격하다는 것은 네놈도 잘 알겠지. 우리 일행을 죽였으니 네놈은 이제 고려의 법대로 똑같이 죽거나 우리 상단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하하! 오른쪽 턱주가리에 상처를 입은 네놈은 정신이 맛이 간 놈이구나! 그깟 노예상단 따위가 감히 나를 어찌하려고!?”


“그깟?”



황영은 비아냥대며 덩치의 사내를 무시했다. 속으로는 당혹스러움을 감추기 위한 처세였지만 오히려 긁어 부스럼이 된 꼴이었다.


험상궂은 재이의 차가운 표정은 전혀 변함이 없었고 오히려 미간이 일그러지며 황영을 노려보았다.


재이는 곧 횃불을 황영 가까이에 비추었다. 그는 황영이 들고 있던 흑각궁을 보고는 놀라며 말을 이었다.



“젊은 놈이 흑각궁을 지니고 있다니 고려 황실과 연관된 놈이로구나. 흥미로운 놈이 걸려들었군.”


“내가 누군지 알면 네놈들 오금이 저려서 아마도..”



황영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먼저 올라간 재이의 투박한 손바닥이 황영의 턱주가리를 갈겼다. 재이의 매운 한방을 맞은 황영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이놈을 끌고 가 감옥 마차에 가두어라.”



재이의 명령에 상단의 부하들은 황영을 감옥 마차에 가두고 털가죽으로 덮어두었다. 재이는 곧 흑각궁을 들고 마차로 향했다.



“주인님. 재미있는 놈을 잡은 것 같습니다. 흑각궁을 지닌 자입니다.”



흑각궁이라는 말에 마차의 창문이 열렸다. 정하시는 웃음을 띠며 재이가 들고 있는 흑각궁을 바라보았다.



“하하, 흑각궁이라니요? 대체 어떤 자이기에 이런 흥미로운 상황이 일어났단 말인가요!”



재이에게서 흑각궁을 건네받은 붉은 너울 이면의 정하시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대지를 흔드는 말발굽 소리에 그녀와 재이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나리! 전방에 고려 군사들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니 당황하지 마세요. 다들 각자 위치를 지키도록 하세요.”



부정주 모자(母子)를 찾기 위해 수색하던 유수의 군사들은 우연히 정하시의 상단과 마주하게 되었다.


황실을 지키려는 여성과 무너뜨리려는 여성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작가의말

˚과인(寡人) : 왕이 되는 자가 자신을 낮추어 부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짐(朕)과 차이점이 있다면 왕은 과인, 짐은 황제가 썼던 인칭대명사인데 고구려에서는 태왕(太王)을 일반적인 왕 이상의 존재로 여겼기에 태왕 역시 짐이라는 존칭을 썼을 것입니다.


˚고흘(高紇) : (? ~ ?) 고구려의 장군인 고흘은 양원왕 7년에 돌궐의 군대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1만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돌궐의 침입을 격퇴한 장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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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8화 - 떠나는 하사안. +6 20.12.19 302 11 16쪽
18 17화 - 정하시 일당과의 만남. +4 20.12.18 313 13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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