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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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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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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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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60,354

작성
23.06.18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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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정착 (1)

DUMMY

17화


“끄어어억!”


눈이 떠졌다.

입으로 공기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면서 혈관을 통해 온몸에 피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움직여봤다.

반복해서 시도했더니 움직인다.

몸의 다른 부분들도 조심스럽게 움직여 봤다.

조금 뻑뻑한 느낌이 있지만 움직인다.


‘더럽게 춥다 했더니 가슴 아래는 전부 물속에 처박혀 있었네.’


물 밖으로 기어오르려는데 뭔가 굉장히 허전하다.


‘왼팔이 없다...’


오른손을 진흙 바닥에 꽂아 넣고 용을 썼다.

몸을 꿈틀거리며 겨우 물 밖으로 상체를 끄집어낸 후, 몸을 뒤집어 바닥에 등을 대고 군대 훈련소에서 철조망 통과했던 것을 떠올렸다.

열심히 등을 움직여서 젖지 않은 땅까지 기를 쓰고 올라갔다.


바닥에 등을 대고 움직이니 보이는 것은 해가 지는 불그스름한 하늘 밖에 없었다.

계속 돌맹이에 머리를 부딪치고, 등과 엉덩이를 뾰족한 돌조각에 긁혔지만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온 몸이 덜덜 떨려서 저체온증으로 죽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자잘한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물론 엎드려서 기어도 되지만, 얼굴을 바닥에 붙인 채 기려니 입으로 진흙이 계속 들어와 견딜 수가 없었다.


겨우 마른 땅을 찾아 누워서 숨을 고르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갑자기 누군가의 기억이 머리통에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픈 와중에 기억 속 내용들 때문에 헛구역질까지 올라왔다.

돌아누워서 한참을 게워낸 후 다시 바닥에 뒤통수를 붙이고 숨을 몰아셨다.


‘나는 하지운인가? 로저 드...뭐시기...인가?’


어떤 방식으로 다른 세상에서 또 다른 삶을 살게 될까 궁금했는데, 굉장히 편리한 방식으로 환생했다.


‘저승에 계신 분들이 퓨전 판타지 소설 좀 보셨나 보네. 원래 이 설정이 환생자가 적응하기 제일 편한 설정이지. 뭔가를 아시는 분들이군!’


제발 이세계의 또 다른 엄마의 뱃속에서 시작하는 설정만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최상의 조건으로 환생했다.


‘다 큰 성인남자가 젊은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출산하는 장면까지를 실시간으로 다 보는 게 할 짓이야? 아우, 생각만 해도 손발이...’


몸에 힘이 들어오고 정신도 어느 정도 맑아지자 하지운은 말 같지도 않은 생각들을 떠올리며 정신 승리를 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면 외팔이 쾌락 살육마의 몸속에 정착했다는 사실 때문에 미쳐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래서 임...승아... 그 애 맞겠지... 어쨌든 그 애가 눈까지 벌겋게 해갖고는 나더러 정신 챙기라고 그렇게 갈궜던 거구나... 이런 미친 새끼랑 정신이 뒤섞이게 생겼으니, 잡아먹히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지.’


환생하기 전, 그녀에게 무섭게 갈굼 당한 직후에는 무슨 충고를 이렇게 우악스럽게 하나 싶어서 원망스럽기도 했다.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 그녀 앞에서 울면서 바지에 똥오줌을 지릴 뻔했으니 화나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이런 정신 나간 새끼 몸에 들어왔다는 걸 깨닫고 나니 원망스럽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똥을 쌌어도 그 애가 겁준 거에 대해서는 뭐라 할 상황이 아니네.’


로저 드레이시, 이 또라이 새끼의 기억이 강제로 그의 머릿속에 뒤섞이는 과정은 흡사 컴퓨터 프로그램의 업데이트 장면을 연상시켰다.


‘수천 테라 분량의 스너프 필름을 초고속으로 다운받은 상황이라고 해야겠지...’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 메스꺼운 기억들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물통에 빨간 물감이 가득 묻은 붓을 집어넣고 천천히 저은 것처럼, 로저 드레이시의 영혼의 파편들이 하지운의 영혼에 스멀스멀 스며드는 것이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진짜 미치겠는 건 이 상황이 전혀 무섭지가 않다는 거야...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침착한 용자였다고...’


하지운은 가죽 갑옷과 부츠를 벗어 대충 물기만 털어 낸 후 다시 입었다.

그러고는 오른팔로 땅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현기증 때문에 쓰러질 것 같았지만 두 다리에 힘을 꽉 주고 버텼다.

왼팔이 없으니 중심이 잘 안 잡힐 것을 감안해 천천히 걸어 봤다.


‘뭐야, 이 새끼? 아까 절벽 위에서 중심 안 잡혀서 고생하지 않았었나? 생각보다 멀쩡하게 잘 움직이네.’


하지운은 인성 쓰레기한테 물들어 버릴까 걱정하다가, 막상 로저 놈의 몸뚱어리의 성능을 실감하자 희망이 물밀듯 밀려들어 옴을 느꼈다.

진심이 담긴 정신 승리가 가능해진 것이다.


‘승아 말대로 내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행동 제대로 하면 되는 거지 뭘 그렇게 걱정해! 어차피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상황인데.’


천천히 걸으면서 자신의 새로운 몸을 자세히 뜯어봤다.

잘린 왼팔의 절단면은 벌써 살이 아물어 있었다.

심지어 배와 허벅지에 박혔던 검 네 자루도 사라졌고, 뚫린 상처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회복력이 미친 듯이 좋은 건가? 그건 아니겠지. 회복력이 좋다고 박혀 있던 검까지 밀어내는 건 말이 안 되니까. 그리고 이렇게 빨리 상처가 아물 수가 있나? 그것도 이런 치명상이... 어쨌든 아직도 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만...’


옆에 흐르고 있는 강물에 하지운 자신의 몸을 비춰 봤다.


‘잘 생겼네! 몸도 좋다! 이런 몸으로 사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팔이 한쪽 없는 상태로 깨어난 것치고는 굉장히 긍정적인 정신 상태였다.


‘굉장하구나! 덩치에 걸맞은 굉장히 바람직한 비율이다. 왠지 살아 볼 만한 인생이 될 것 같구나! 기왕 이렇게 된 거 힘내서 잘 살아 보자!’


방금 물을 털 때도 얼핏 봤지만, 이번에는 바지춤을 풀고 제대로 들여다보았다.

하지운의 정신이 더욱 맑고 활기차졌다.


‘이 정도 걸었으면 준비 운동은 된 것 같고. 이젠 뛰자! 생각도 졸라게 뛰면서 하자!’


급류가 끝나고 강과 만나는 지점에서 운 좋게 강가에 걸려 있었다.

절벽과 거리가 꽤 될 테지만 험프리같이 교활한 놈이 시체를 확인하지 않을 리가 없다.

여기서 더 이상 시간을 보내다가는 놈이 보낸 추적자들과 또다시 드잡이 질을 해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은 절대 안 돼! 아직 이 몸에 완전히 적응한 것도 아닌데 팔도 한쪽 없는 상태로 싸우는 건 절대 안 돼!’


처음 강에서 기어 나오면서 헤집어 놓은 바닥이나, 로저의 기억을 흡수하고 게워낸 토사물이 신경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팔도 하나밖에 없는 마당에 흔적 지운다고 시간을 낭비하느니 그냥 일단 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흔적을 깔끔하게 지울 자신도 없었다.

하지운 자신이나 로저나 이런 분야에 대한 지식은 일천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야 그렇다 쳐도... 어떻게 된 게 로저 이놈은... 때려죽이는 것 말고 딱히 할 줄 아는 것이 없냐.’


급하게 달리기 시작하니 역시 몸이 옆으로 기우뚱하는 느낌이 안들 수가 없었다.

어지러워서 멀미가 날 것 같았지만 살려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억지로라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내세울 것이 몸뚱어리밖에 없었던 놈이다. 이 몸이라면 금세 적응할 거다.’


과연 시간이 약간 지나자 갈지자로 달리던 몸이 점점 중심을 잡아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하지운은 심장이 터져라 달리기 시작했다.

중심 잡는데 방해되어 오른팔도 몸에 붙이고 뛰고 있었지만, 팔을 흔들지도 않고 달리는 데도 속도가 어마무시했다.

제대로 달리기 시작하니 무슨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었다.


‘팔만 원상 복구하면 무쌍 찍겠는데!’


뭐빠지게 달리면서 하지운은 자신이 뒤집어쓴 로저라는 놈과 이 브리갠트라는 곳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 자신이 달리고 있는 이 크레인 강가의 언덕은 꽤 익숙한 곳이라 딴 생각을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크레인강은 앨커스터주 동부에 흐르는 강으로, 동쪽의 베이퍼드주, 월링퍼드주와의 경계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는 강이다.

재수가 좋게도 그가 깨어났을 때는 앨커스터 쪽 강가에 걸려있었다.


앨커스터주와 월링퍼드주 사이에는 다리가 꼴랑 두 개밖에 없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다리들에는 양쪽으로 경비병도 배치되어 있다.

지구의 중세 유럽처럼 이곳도 다리 통행세는 철저하게 받고 있었다.

현재 하지운의 몸 상태로 경비병들을 죽이고 난리 법석을 떨며 다리를 건너는 건, 너무 무모해 보이는 짓이었다.


‘월링퍼드 쪽에서 깨어나지 않은 게 어디냐. 시작부터 지지칠 뻔 했네.’


사실 하지운이 목표로 잡은 도피처를 생각해 보면, 월링퍼드에서 깨어났다 해도 굳이 다리를 건널 필요는 없다.

월링퍼드주에서 북서쪽으로 쭉 직진하면 된다.

그 중간에 마법사 거버스의 본거지인 베이퍼드주만 없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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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복구 (11) 23.07.03 174 2 9쪽
36 복구 (10) 23.07.01 177 3 11쪽
35 복구 (9) 23.06.29 175 2 9쪽
34 복구 (8) 23.06.27 184 3 10쪽
33 복구 (7) 23.06.27 185 4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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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복구 (4) 23.06.18 199 3 9쪽
29 복구 (3) 23.06.18 192 4 9쪽
28 복구 (2) 23.06.18 201 3 9쪽
27 복구 (1) 23.06.18 214 4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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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정착 (7) 23.06.18 211 3 9쪽
23 정착 (6) 23.06.18 213 3 9쪽
22 정착 (5) 23.06.18 222 4 9쪽
21 정착 (4) 23.06.18 232 4 9쪽
20 정착 (3) 23.06.18 241 4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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