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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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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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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8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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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 (7)

DUMMY

23화


승아가 저승에서 말했었다.

부여받은 임무가 있을 거라고.

상태창 옆에 있던 임무 목록을 열어 보고 하지운은 정신이 붕괴될 뻔했다.


하지운이 받은 임무는 간단했다.

지극히 단조롭고 명약관화했다.

그냥 누구를 죽이기만 하면 됐다.

목록에 있는 문장들은 전부 형식이 명령형이었다.

그런데 모든 문장들이 목적어의 이름만 다를 뿐, 모든 서술어가 ‘죽이시오’로 끝맺음이 되어 있었다.


처음 목록을 봤을 땐 그 명령형 문장들이 삼백오십육 개가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문장 수가 천구백 개를 돌파했다.

몇 시간 만에 다섯 배가 넘게 늘었다.


‘니미! 주식이 이렇게 올랐으면... 내가 그 고생을 안 해도 됐을 것을...’


하지운은 이 년을 넘게 물린 채 팔지도 못 한 주식을 떠올렸다.

없는 살림에 쥐어짜서 인생 역전을 노렸건만 그렇게 되었다.

공무원 시험으로 전향하게 만든 원흉 중 하나였다.


‘상폐가 먼저 될 줄 알았는데... 내가 먼저 죽다니...’


달리는데 집중하려 했는데 또다시 잡생각에 빠졌다.

그래도 꽤 멀리 왔다.

저 멀리 안개를 두른 킬리산맥의 끝자락이 보인다.


‘그 두 병신이 추적자를 보내지 않아서 수월하게 왔다. 그래도 고맙다고 살려 줄 수는 없지. 대가리수가 이천을 넘은 내 살생부의 첫 줄과 둘째 줄에 떡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게 그 두 놈인데. 다른 놈들은 지들끼리 죽이거나, 늙어 죽도록 기다려 줄 수 있다. 하지만 험프리, 거버스 그 둘은 로저의 몸뚱어리에게 미안해서라도 내가 직접 죽여 줘야지.’


한 차례의 잡생각이 더해지고 나니 킬리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마을 클러필이 보였다.


클러필, 한때는 괴물들이 우글대는 킬리산맥의 입구에서 괴물들의 남하를 틀어막는 최전선의 역할을 하던 요새 도시이다.


이백 년 전 드레이시 가문에 의해 왕국 전역에 괴물의 피를 이용한 강화술이 퍼지고, 킬리산맥으로 통하는 숲들이 개간이 되면서 벨라스터주를 공포에 떨게 하던 킬리산맥의 괴물들이 더 이상 활개를 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산맥 주변은 인간들이 만든 요새들로 둘러싸이고, 툭하면 거대한 괴물 같은 인간들이 산으로 올라와 오히려 괴물들을 사냥하면서 괴물들의 생존권을 위협했다.

인간을 상대로 눈물겨운 투쟁을 이어 가던 킬리산맥의 괴물들은 결국 끝까지 버텨 내지 못하고 대략 삼십 년 전쯤 멸종해 버렸다.


괴물들의 멸종은 클러필 주민들에게 엄청난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었지만, 대신에 엄청난 경제적인 손실도 가져다주었다.

우선 경비 병력의 대부분이 서북부의 대습지 근방의 경계 지역으로 이동했고, 그들의 식솔들도 따라서 이동했다.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던 상인들이 장사를 접어야 했고, 그로 인해 장원 영주의 세수가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자연히 이 지역에 대한 윗분들의 관심도 줄어들게 되었고, 결국 마을의 쇠락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지금 클러필의 꼬라지가 요 모양인 거지. 위치상 교통은 아니고... 경치는 좋은 게 관광 사업이 딱인데! 리조트랑 스키장 지으면 대박 나겠는데... 뭐 나랑 상관없지만.’


마을 외벽은 보수 공사가 아예 되고 있지 않으니, 곳곳이 무너져 돌덩이들이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어린아이들도 다칠 각오만 되어 있으면 넘어 다니는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거기다 경비병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성문 옆에서 드러누워 자고 있는 두 놈이 다였다.


“너와의 동행은 여기까지다. 너도 눈치 챘겠지만 나 또한 쫓기는 처지다. 더 이상은 너를 데리고 갈 수 없다. 여기서부터는 너를 지켜 주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런 곳에 놓고 가니 미안하구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하지운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이제 곧 해가 뜨는 시간이 다가오는데, 한 팔이 없는 거구인 자신이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최대한 빨리 사람이 없는 오지로 숨어들어야 했다.

자신과 같이 있는 것이 이 여인에게 훨씬 더 위험한 일일 수도 있었다.


‘이 동네에선 반역자와 동행하다 같이 잡히면 여자는 무조건 화형이니까.’


“나리, 무슨 말씀이십니까? 살려주시고, 오라비의 복수까지 해 주신 분께서 미안하시다니요? 제가 못 배워 먹은 천한 년이라 해도 그 정도 도리도 모르지는 않사옵니다.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이 먼 곳까지 데려와 주신 것만으로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은혜를 입은 것이옵니다.”

“그리 생각한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꼭 살아남아라. 혹시 아느냐? 내가 나중에 네 도움을 받는 날이 올지. 그때 가서 날 외면하지나 말거라. 그리고 이건 얼마 안 되니 그냥 받아 두거라.”


이 곳의 물가에 대해 무지한 것은 하지운이나 로저나 마찬가지였다.

로저는 브리갠트 왕국 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부호의 후계자였다.

지금은 실시간으로 망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 평생 스스로 계산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는 놈이다.

하지운이야 이곳 사람이 된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했고.


그래서 대충 이 정도면 적당하겠거니 하고 금화 열 닢을 건넸다.

귀족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 또한 불경한 짓이라, 고개를 조아리고 동전을 받은 여인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경악을 했다.


“나리, 혹시 하인들을 시키지 않으시고 직접 여관비라도 치러 보신 적이 있으시옵니까?”

“... 없네. 혹시 부족한가?”

“나리! 이 돈이면 저와 제 죽은 오라비가 삼 년은 놀고먹었을 돈이옵니다. 쫓기신다는 분이 어찌 이리 돈을 함부로 하시는 겁니까? 제 걱정은 마시고 이 돈은 나리께서 긴히 쓰십시오. 제가 그리도 염치없는 년으로 보이십니까? 저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꼭 은인께 제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곧 날이 밝아요! 어서 피하시어요!”

“너 정말 강한 아이... 아니... 여인이구나. 이 돈은 반드시 주고 가야겠다. 그냥 주는 게 아니다. 너에 대한 투자라고 하자. 네가 자리를 잡고 살 만해지면 찾아가겠다. 그때 금화 한 닢을 더 붙여서 갚아라! 그러면 불만 없겠지? 아니... 이자가 너무 센가?”


여인이 바닥에 몸을 던지듯이 엎드려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이 은혜는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갚겠습니다! 제가 은인의 은혜를 잊는다면 돼지머리 괴물만도 못한 짐승입니다!”

“솔직히... 잊어도 된다. 그럼 난 가마. 잘 살아라.”

“나리! 천한 년이 무례한 줄 알면서도 부탁드리옵니다. 가시기 전에 한 말씀만 더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괜찮다. 말해 보거라.”

“존함을 알려 주십시오. 은혜를 입고 은인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살 수는 없사옵니다. 혹여나 잡히더라도 절대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제 눈알이 뽑히고 팔다리가 잘려도 절대 은인을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나는 하... 로저 드레이시다. 웨스털랜드의 백작인 로저 드레이시가 맞다.”


그의 말에 여인이 움찔했다.

그녀도 로저 놈의 악명은 익히 들은 모양이다.


“내 흉측한 명성은 익히 들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내가 이 손으로 목숨을 구해 준 첫 번째이자 유일한 이가 너다. 그러니 꼭 살아남아 다오.”


그 말을 남기고 하지운은 몸을 돌렸다.


“나리! 제 이름은 틸다! 틸다입니다!”


하지운은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고개만 끄덕인 후 멀어져 갔다.

하지운이 멀어져 가는 동안 그녀는 내내 무릎을 꿇은 채 하염없이 그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절을 올린 후 눈물을 닦으며 일어섰다.


클러필에 들어와 있던 하지운은 빠르게 마을 중심지로 향했다.

클러필이 아무리 깡촌이 되었다 해도 다른 것은 몰라도 대장간은 반드시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가 향하는 최종 목적지에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대장간을 들러야 했다.


‘있네! 거기다 크네! 하긴 삼십 년 전까지는 대장간이 엄청 잘됐겠지.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니.’


대장간 안에 사람의 기척이 있다.

비교적 일찍 일을 시작하는 직업이 대장장이라 하지만, 이 시간이면 대장간 뒤에 붙어 있는 거처에서 자고 있을 줄 알았다.

아직 새벽인데 일찍도 일어난 모양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얼굴 가득 주름이 진 노인이 화로의 불을 살피다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나리. 무얼 찾으십니까?”

“사슬 달린 쇠말뚝이 있는가? 있는 대로 주게.”

“만들어 놓은 것은 열 개밖에 없지만 원하시면 최대한 빨리 만들어서 바치겠사옵니다. 얼마나 급히 필요하시옵니까?”


다행이란 생각에 하지운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있을 것이라 생각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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