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구 (7)
32화
‘뭐?’
‘너 도대체 설명서는 언제 읽을 거야?’
‘뭔 설명서?’
‘상태창 사용 설명서! 일부러 눈에 가장 잘 띄는 자리에 배치했는데, 넌 어떻게 읽을 생각을 안 하냐?’
‘설명서 스킵은 국룰 아닌가...’
‘국룰 같은 소리 하네. 너 여기가 테마파크로 보여? 정신 차려!’
‘아, 알았어. 읽어 볼 테니까 승질 좀...’
‘그리고 아까 도마뱀하고 싸울 때도, 능력 파악도 안 하고 바로 사용하냐? 피를 한 사발을 토하려고 하는데 내가 얼마나 기겁했는 줄 알아?’
‘아... 그건 나도 이미 많이 반성 중...’
‘일단 설명창 열어.’
대차게 항의하려고 담당자를 소환한 하지운은 본전도 못 찾고 꾸지람만 들었다.
입이 댓 발 나온 채로 설명창을 연 그는 순간 참지 못하고 피식해 버렸다.
‘모자이크... 기능은 뭐니?’
‘이십일 세기 지구에서 넘어 온 참가자들에게 이곳 괴물들의 겉모습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거부감이 매우 많이 드는 모습...이잖아.’
‘그렇긴 하지...’
‘그래서 보기 싫은 부위...를 거르고 볼 수 있도록 제공하는 기능이야.’
‘아아, 네 말대로 설명서를 먼저 읽을걸. 그랬으면 이천 개가 넘는 초록색 괴물 거시기를 안 봐도 되는 건데. 아우, 메스꺼워.’
‘......’
‘야, 근데 기능이 구체적이다. 노 룩 모드도 있네.’
‘어, 정말 보기 싫으면 아예 없는 걸로 인식하도록 만들어 주는 모드야.’
‘그럼 처음부터 없는 상태로 만드시지... 뭐 하러 귀찮게...’
‘뭔 소리야? 괴물들 거기가 없는 상태로 탄생시켰어야 했다는 소리야?’
‘어, 근데 그렇게는 안 되나?’
‘당연하지! 걔들도 엄연한 생명체야. 그렇게 만들면 번식은 뭔 수로 해?’
‘아니면 눈에 잘 안 띌 정도로 작게 만들던지...’
‘너 진짜 악마냐? 이 자식아!’
하지운은 승아의 일갈에 잠시 헛소리를 멈추고 그녀가 진정하길 기다렸다.
‘야! 근데 음악 감상 기능 원래 있는 거였어?’
‘어... 네가 너무 감동을 받길래 말해 주기 뻘쭘하더라고.’
‘별 기능이 다 있네. ASMR은 왜 있는 거야?’
‘모든 참가자가 너처럼 이곳 세상을 쉽게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 해. 처음 넘어와서 적응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을 위한 저승의 따뜻한 배려야.’
‘... 미니맵도 있었네. 이것도 따뜻한 배려야?’
‘물론이지! 아무리 이곳 현지인의 기억을 흡수한다 해도, 이 세계에 처음 떨어진 너희가 바로 적응하는 건 쉽지 않을 거야. 그런 너희를 지도도 없이 보내서, 낯선 곳을 헤매게 할 정도로 저승이 인정머리가 없지는 않아.’
‘아아, 그러니까 쓸데없이 길 찾는 데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능력 키워서 리스트에 있는 놈들 다 때려죽여라? 잡스런 길 찾기, 지도 제작 같은 능력들은 필요 없다는 거네. 전투 능력만 열심히 키우라는 거지? 맞냐?’
‘......’
‘아, 됐어. 그냥 혼자 생각한 거야. 대답 안 해도 돼.’
‘설명서는 이따가 자기 전에 꼼꼼하게 마저 읽어.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았으니까.’
‘더 할 말이 있어? 나 다 혼난 거 아냐?’
승아가 잠시 뜸을 들이다 한숨을 쉬면서 말을 이었다.
‘하아,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계속 고민했어. 될 수 있으면 빨리 말해야 할 것 같은데...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거든.’
‘왜 또? 사람 불안하게... 어제 눈 벌겋게 뜨고 겁줬잖아. 나 정신 잘 차리고 있어!’
‘그런 게 아니고...’
‘그럼 뭔데?’
‘지운아, 난 너를 다 알아.’
‘... 잘 알아가 아니고 다 알아라고?’
‘어, 다 알아. 완벽하게.’
‘네가 뭘 알아? 나도 나를 잘 모르겠는데, 네가 어떻게 나를 완벽하게 알아?’
‘그게... 네가 글 쓴다고 집을 나와 전세 산 적 있잖아. 그때부터 지금 고시원 방까지 칠 년 동안... 나 쭉 너랑 같이 있었어. 같이 산 세월만 따지면 우리 거의 사실혼 관계야.’
‘... 듣고 보니 엄청 설레는 말인데... 곰곰이 생각하니 졸라 무섭다. 웃자고 한 농담치고는 개무서운데...’
‘웃자고 한 말이 섞이기는 했는데... 같이 산 것은 사실이야.’
‘지박령이셨어요? 근데 지박령이 이사도 하세요?’
‘지박령이 따로 있진 않아. 내가 아직 죽은 지 고작 십 년 좀 넘어서 아직 연수 기간이야.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알아 가는 건 저승의 권장 사항이고. 우리가 돌아다니면서 산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그렇게 덜덜 떨지 좀 마!’
‘아, 이건 물속이라 추워서 떠는 거고... 아니! 그러고 보니까 어제 네 벌건 눈만 안 봤어도 이렇게 무섭진 않았지! 다 너 때문이잖아!’
하지운은 속으로 고함을 치다, 갑자기 드는 생각에 승아에게 질문을 하려 했다.
‘네 생각이 맞아. 내가 살아 있는 인간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면, 미끄러지는 네 몸을 잡았겠지. 그 행동 때문에 무슨 대가를 치르게 되든... 그리고 우리가 산 사람에게 해코지를 할 수 있다면, 저승에서 미쳤다고 우리를 이승으로 보내.’
‘그렇겠네... 잠깐! 너 그럼 어디까지 본 거야? 뭘 본 거야? 아니지? 내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지? 넌 지성이 있잖아! 아니지?’
‘......’
‘왜 대답을 못해? 어디까지 봤냐고! 칠 년을 내 옆에 있었다면서! 설마 눈치 없이 아무 때나 옆에 있었던 거는 아니지?’
‘미안해...’
‘미안하다니! 너 그거 범죄야! 너 관음증 있어? 미친 거 아냐?’
‘......’
‘너 왜 대답을 안 해? 진짜 관음증이 있어? 너 변태야?’
‘아 그게... 원래 있던 게 아닌데... 이게... 원래 우리 일이 인간을 관찰하고 알아 가는 거잖아. 그러니까 일종의 직업병이랄까...’
‘으악! 으아아아아악!’
하지운은 실제로 비명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까 봐 물속에 머리를 처박았다.
일이삼사가 기겁을 하면서 알몸으로 뛰어올 것을 상상하니, 그 와중에도 머리를 물속에 박을 생각이 든 것이다.
자신의 허벅지 높이도 안 되는 개울물에 머리를 처박은 하지운은 그 불편한 자세로 한참을 지랄을 했다.
발광을 하다 하다 완전히 진이 다 빠지고 나서야 물 밖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으시네요. 관음증 있는 변태 짐승아 님.’
‘오랜만에 들어 본다. 그 별명... 초등학교 졸업하고 다시는 들을 일 없을 줄 알았는데... 너한테 듣게 되네. 근데... 들어도 할 말이 없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괘씸한 커밍아웃을 하는 거지? 남녀가 바뀌어도 절대 하기 힘든 고백을 왜 하고 있는 거냐고?’
‘... 가식 떨지 말라고.’
‘뭐?’
‘네 본성을 다 아니까 그만 내 눈치 보라고.’
‘내가 뭔 가식을 떨었다고...’
‘무슨 행동을 할 때마다 속으로 나를 이해시키려고, 저놈은 지금 안 죽이면 큰일나느니 하면서 반복해서 생각하고 있잖아. 안 그래?’
‘......’
‘지운이 네가 엄청 좋은 놈이었으면 이런 지옥에 널 집어넣지도 않았어. 차라리 힘들어도 널 보내 줬겠지... 그리고 애초에 너한테 마음 주지도 않았을 거고...’
하지운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동안, 승아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네가 틸다라는 아이를 구해 줄 때도, 끊임없이 나를 의식하면서 대사 하나 몸짓 하나 신경 쓰면서 행동한 걸 내가 몰랐겠어? 네가 한 말들 사실 네 예전 소설 속 주인공 대사를 그대로 읊은 거잖아.’
‘......’
‘정신 차려! 여기 네가 딴 데 정신 팔고 행동해도 될 만큼 녹록한 곳 아냐. 어제 죽은 그 잘난 로저 놈도 올해 고작 스물셋이야! 서른도 안 된 나이에 허무하게 살해당했다고. 어떻게 죽었는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방심하면 소리 없이 죽어 나가는 곳에서, 날 신경 쓰면서 용사 놀이 할 정신이 있니?’
‘내가 그럼 어떻게 할까? 내 본성 밑바닥까지 다 봤다면서. 네가 보든 말든 내 꼴리는 대로 깽판을 칠까?’
‘누가 너더러 아무나 붙잡고 패악질을 하래? 네가 생존하기 위해서 하는 결정이면 날 신경 쓰지 말고 하라고! 난 이미 네가 그럴 놈인 걸 알고 있는데, 굳이 가식 떨 필요가 뭐가 있냐는 말이야!’
‘......’
‘너 네가 왜 로저 놈의 몸을 차지했는지 궁금했지. 네가 딱히 잘한 것도 없는데, 왜 이런 좋은 몸을 받았는지 계속 고민 중이었잖아. 심지어 내가 힘이라도 썼나 생각했지? 내가 뭔 힘이 있냐? 여기에선 막내인데. 네 영혼이 로저의 영혼과 가장 잘 어울렸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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