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8막 5장 - 고블린의 광산 (3)| Isa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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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 따라와."
붉은 손은 나와 에스나를 광산으로 가는 통로로 안내한다. 뒤에서는 붉은 손의 부족들이 살기를 내뿜으며 걸어온다.
저 정도 살기를 내뿜으면서도 공격은 하지 않는다. 부족장의 명령은 절대적이라는 건가.
"고블린을 믿어도 되는 거 맞습니까?"
에스나는 뒤쪽에 따라오는 고블린들을 바라보며 질문한다.
"걱정마.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대답에 에스나는 작게 한숨만 내쉰다.
"그나저나 붉은 손 질문해도 돼?"
"해라."
앞서 가는 붉은 손이 한마디를 내뱉는다. 붉은 손은 통로 주변을 꼼꼼히 살펴보며 걸어간다. 함정이라도 설치된 건가.
"너는 왜 우리를 적대하지 않는 거야?"
걸어가던 붉은 손이 멈춰 선다.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인간. 무섭다. 강하다. 죽인다. 우리. 죽는다. 인간. 죽인다."
인간에 대한 공포가 기반인 건가. 그렇다면 붉은 손은 나름대로 생존의 방법을 정한 거다. 인간과의 협력이라는 방향으로.
"물음. 없다. 간다."
붉은 손은 다시 통로를 걸어간다. 통로는 엄청 길게 이어진다. 10분 정도를 걸어가니 붉은 손이 걸음을 멈춘다.
"뭐야. 왜 그래?"
"멈춰. 위험."
붉은 손이 앞을 가리킨다. 어둠 너머에 무언가 움직인다. 상당히 많은 숫자. 그것들은 빛의 구체가 내뿜는 광채 앞에 멈춰 선다.
"붉은 손. 무엇."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빛 가운데로 걸어 나온다. 눈이 하나 없는 고블린.
"뒤에. 인간. 무엇?"
붉은 손이 살짝 뒤로 물러선다. 외눈 고블린은 나를 가리킨다.
어둠 속에 있던 것들이 하나씩 빛으로 나온다. 전부 고블린이다. 에스나 뒤에 있는 고블린보다 숫자가 많다.
"인간. 죽인다. 너. 죽인다."
외눈 고블린이 악의와 살기를 내뿜는다. 에스나 뒤에 있던 고블린들은 눈 없는 고블린의 뒤에 있는 고블린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낸다.
... 내가 방금 뭐라고 지껄인 걸까. 고블린이 계속 나오니까 너무 헷갈린다. 붉은 손 부족과 외눈 부족이라고 부르자.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붉은 손 부족이 외눈 부족을 향해 이빨을 드러낸다.
"바위. 비킨다. 나. 간다."
외눈 고블린의 이름은 바위인 거 같다. 그럼 저 뒤의 고블린은 바위 부족이겠네.
아무튼, 지금은 내가 빠져 있을 시간인 것 같다. 살짝 뒤로 물러서 에스나의 옆에 선다.
붉은 손이 낮게 으르렁거린다. 그 소리에 맞추어 붉은 손 부족이 붉은 손의 뒤에 자리를 잡는다. 바위 부족도 바위 뒤에 자리를 잡는다.
"무슨 상황입니까?"
"두 개 부족의 충돌 직전 상황?"
내가 느낀 바로는 그렇다.
붉은 손과 바위는 서로를 노려본다. 두 고블린의 부족도 서로를 노려본다.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
"바위 부족의 고블린을 공격하면 되겠지."
에스나는 고블린들을 바라본다.
"어떤 고블린이 바위 부족입니까?"
그러게. 다 비슷하게 생겨서 구분이 힘드네. 그럴 때는 질문을 해야지.
가장 가까운 고블린의 어깨를 잡는다. 고블린은 나를 바라보며 이빨을 드러낸다.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지 말고. 상황 설명 좀 해줘."
고블린은 잠시 나를 노려보다 입을 연다.
"바위들. 우리 적. 죽인다. 싸운다."
"그건 봐서 알고 있어."
이렇게 험한 분위기인데 적이 아니라고 하면 그게 더 놀랍다.
"도와줄 생각이 있는데 바위와 너희를 어떻게 구분하지?"
"인간. 무식하다. 냄새."
냄새로 구분하는 건가. 나는 냄새 같은 거 못 맡는데.
"뭐라고 합니까?"
"냄새로 구분하면 된대."
에스나의 입에서 한숨이 나온다.
"그냥 적당히 너를 공격하는 고블린을 죽이면 되지 않을까?"
"너무 적당한 거 아닙니까?"
하지만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는걸.
"바위. 비켜라."
"붉은 손. 인간. 줘라."
붉은 손과 바위는 목소리를 높이며 소리 지른다. 싸움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이다. 나와 대화를 나누었던 고블린도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허리춤에 메고 있던 볼타의 단궁을 꺼내 든다. 에스나에게도 눈짓으로 신호를 준다. 에스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검과 방패를 단단히 쥔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일단 싸우고 보자."
붉은 손은 친인간파다. 일단은 협상이 가능한 존재고.
"알겠습니다. 전투가 시작되면 앞으로 뛰쳐나가겠습니다."
"최대한 엄호해줄게."
에스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러는 동안 붉은 손과 바위의 언성은 높아져 간다.
"너! 죽인다!"
시작은 바위였다. 갑작스레 붉은 손에게 달려들어 손을 휘두른다. 붉은 손은 뒤로 크게 뛰어오르며 바위의 공격을 피한다.
"공격! 죽인다!"
붉은 손이 소리친다. 붉은 손 부족이 괴성을 내지르며 바위 부족에게 달려든다.
"돌격하겠습니다."
한 마디 말을 남기고 에스나가 앞으로 달려나간다. 엄청난 수의 고블린들이 에스나의 앞길을 막는다.
에스나는 허리 높이 정도의 고블린들을 성큼성큼 지나간다. 순식간에 백여 마리의 고블린을 지나 바위 부족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이렇게 되면 나도 놀 수야 없지.
단궁을 들어서 바위 부족 고블린들을 겨냥한다. 수가 많아서 대충 쏴도 맞을 거다.
오른손으로 존재하지 않는 시위를 당긴다. 활이 구부러지며 보이지 않는 화살을 쏠 준비를 한다.
시위를 놓는다. 화살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다. 에스나에게 달려들던 고블린 하나가 쓰러진다.
다시 시위를 당긴다. 시위를 놓는다. 당긴다. 놓는다. 일련의 과정을 반복한다.
보이지 않는 화살이 수도 없이 날아간다. 전부 빠짐없이 고블린의 머리를 꿰뚫는다.
고블린과 고블린이 서로를 죽인다. 에스나가 검으로 고블린을 자른다. 내가 쏜 화살이 고블린을 뚫는다.
재미없다. 안전한 곳에서 화살만 쏘아대는 건 재미없다. 불꽃도 휘두르고 얼음도 쏴 재끼는 게 내 취향에 어울린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마법을 쓰지 못하는 마법사는 뒤에서 화살이나 날려야지. 한숨을 쉬며 당겨 놓은 시위를 놓는다.
"도망! 도망!"
바위가 소리친다. 바위 부족이 몸을 돌려 통로 저편의 어둠 속으로 달려간다. 도망가는 고블린들의 등을 노리고 시위를 당기고 놓는다.
"승리!"
붉은 손 부족이 팔을 들어 올리며 소리친다. 에스나와 붉은 손은 즐거워하는 고블린들을 지나쳐 내 앞으로 온다.
"통로가 좁아서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에스나는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는 잘 싸우더만.
"인간. 감사."
붉은 손은 나를 바라보며 감사를 표한다. 약간 기분이 묘하다. 이간이 아닌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듣다니.
"인사는 됐고. 계속 가기나 하자고. 대족장이나 만나러 가자고."
"알겠다. 간다."
붉은 손이 자기 부족원들에게 손짓한다. 붉은 손 부족은 순식간에 나와 에스나 뒤에 자리를 잡는다.
부족원이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한 붉은 손은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한다.
"붉은 손. 아까 바위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줄래?"
어두운 통로를 걸어가는 붉은 손에게 묻는다. 물어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붉은 손은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바위. 붉은 손. 싸운다. 바위. 대족장. 붉은 손. 대족장. 아니다."
고블린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기 쉬워졌다. 외국어란 느낌으로 들으니 대충 문맥이 이해된다.
붉은 손 부족과 바위 부족은 계속해서 싸워왔단다. 바위 부족은 대족장파, 붉은 손 부족은 반대족장파. 즉, 정치문제란 거다.
고블린의 정치문제에 끼여버리다니. 참 곤란한 상황이네.
"붉은 손. 대족장이랑 사이가 안 좋은 거야?"
붉은 손은 코웃음을 친다. 고블린의 구강구조로 가능한 일이구나.
"대족장. 대족장. 아니다. 대족장. 다른 고불린."
이해 못 하겠다. 고블린 말은 어렵구나.
"대족장. 대족장. 죽인다. 대족장. 대족장."
어떻게 한 문장에 대족장이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나타나는 거지?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생각하자. 저 문장을 이해해보자. 머리를 열심히 굴리면 어떻게든 되겠지.
죽인다. 이런 단어가 나왔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였다는 거다. 앞에 나온 단어는 대족장과 대족장. 대족장이 대족장을 죽였다는 거다.
무슨 헛소리일까. 대족장이 대족장을 죽인다니. 자살이라도 한 걸까. 붉은 손을 따라 걸어가며 계속 생각한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에스나의 질문에 생각에서 겨우 벗어난다.
"고블린이 한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까?"
"어려워. 한 번 들어볼래?"
에스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대족장. 대족장. 아니다. 대족장. 다른 고불린."
"에?"
"이해하기 어렵지?"
"문장이 없는 겁니까?"
"그런 거 같아. 다음 문장도 있어. 대족장. 대족장. 죽인다. 대족장. 대족장."
"너무 어렵군요."
에스나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꼭 해석해야 합니까?"
"모르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같이 고민을 해 봅시다."
에스나는 그 말을 하고 붉은 손을 따라 걸어간다. 통로는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가끔 갈림길이 나오지만, 붉은 손은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대족장이란 단어가 다른 사람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대족장이 대족장이였던 고블린을 죽였다. 이렇게 이해하면 쉬울 거 같습니다."
"뒷말은 대족장이 대족장이 된 거고?"
에스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에스나의 말을 들으니 해석할 수 있어졌다.
지금의 대족장은 정상적인 대족장이 아니다. 원래 대족장은 다른 고블린이었다. 지금 대족장이 이전 대족장을 죽였다. 그래서 지금 대족장이 대족장이 된거다.
"그럼 붉은 손은 옛 대족장을 섬기던 고블린이야?"
"그렇다. 대족장. 강하다. 대족장. 비겁하다. 나쁘다."
옛 대족장은 강하고, 지금 대족장은 비겁하고 나쁘다는 거군. 나를 도와주는 것도 지금 대족장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일 수 있다.
붉은 손은 인간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다.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다. 만약 수가 틀리면 우리가 대족장을 죽이려고 생각하는 것도 알고 있겠지.
영악하다. 인간 만큼이나 영악하다. 인간의 힘을 빌려서 대족장의 목을 칠 생각이다.
이용당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살짝 놀아줘도 되겠지.
"여기."
앞서가던 붉은 손이 멈춰 선다. 그 앞에는 구멍 너머로 공동이 펼쳐져 있다.
"인간. 여기. 나왔다."
인간이 이 벽을 뚫고 고블린과 만났다는 거다. 살짝 앞으로 다가간다. 거대한 공간은 고블린들로 가득하다.
"도대체 저게 다 얼마냐."
현기증이 날 정도로 엄청난 숫자다.
"많다. 고블린. 부족. 많다."
숫자라는 개념은 없는 건가.
"못해도 수천은 되어 보입니다."
"그러게. 고블린 왕국이라도 불러도 되겠어."
저 숫자의 고블린들은 어떻게 먹고 사는 걸까.
"저기. 대족장."
붉은 손이 넓은 공간의 한쪽을 가리킨다. 멀어서 잘 안 보인다.
"고블린 하나가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에스나가 설명한다. 너는 보이는구나.
"좋아. 그럼 대족장을 만나러 가볼까?"
빨리 처리하고 나가자. 여긴 너무 습하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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