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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설란 님의 서재입니다.

족쇄를 벗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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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설란
작품등록일 :
2018.05.04 23:33
최근연재일 :
2018.08.08 19:00
연재수 :
7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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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14
추천수 :
74
글자수 :
395,495

작성
18.07.1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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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6쪽

외전-나탈리(3)

DUMMY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된 거야? 분명 정정하신 분이셨는데.

지금 유일하게 믿을만한 소피는 미안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누워서일까? 유독 촌장님의 얼굴이 쇠약해 보였다.

한스에게 촌장님을 맡기고 서둘러 스벤에게 달려갔다. 워낙 급해서 땅이 마구 파여 나를 본 스벤이 기겁을 했다.


“나, 나탈리 양?”

“소피한테 들으셨나요?”

“뭘 말인가?”

“할, 아니. 촌장님이 쓰러지셨어요.”

“...정말인가?”

“예. 그러니 의사를 불러주시겠어요? 아니면 괜찮은 의사를 소개해주세요.”

“음, 내가 직접 가기엔 느리겠지. 내 아내, 의 전문의 중 하나를 소개해주겠네.”

“미안해요.”

“아니, 일단 사람부터 살려야지. 그는 라스 성에 거주하고 있네.”


그에게서 소개장을 받고 일단 다시 촌장님의 상태를 살피러 돌아갔다. 그러자 촌장님의 집 앞에서 하늘을 보고 있는 한스가 보였다.


“한스? 왜 나와 있어? 촌장님은 어쩌고?”

“피에르가 찾아왔어.”


...에르피. 설마 이럴 때까지 그 짓거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문이 부서져라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자 촌장님에게 뭐라 설득하고 있는 에르피의 모습이 보였다. 그 비릿한 미소가 참기 힘들어 소리를 질렀다.


“피에르!”


무심코 뒤이어 튀어나오려는 소리를 억지로 틀어막았다. 아직 밖에 있는 한스가 혹시나 들을까 봐.


“병자 앞이다. 좀 조용히 하지 그러나? 더욱이나 친할아버지인데.”


다시 한번 열이 뻗치려는 순간, 밖에서 멀어져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런 그의 배려가 가져다주는 편안함이 날 침착하게 만들었다.


“여긴 무슨 일이시죠?”

“무슨 일이긴. 스승님이 병석에 누웠다고 하는데 찾아오는 게 제자의 도리 아니겠나?”


그걸 어떻게 알았지? 분명 급하게 데려오느라 소피와 스벤을 제외한 사람들은 잘 모를 텐데?


“그건 그렇고,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나? 사제지간에 나눌 대화가 있으니.”


여태까지 촌장님을 괴롭혔던 에르피의 제안을 거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자 그가 좀 더 위압적인 태도로 낮게 뇌까렸다.


“내 말이 안 들렸나? 나가라고 했을 텐데, 나탈리 경. 나와 재상이 할 얘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옛 호칭까지 부르며 명령을 내리는 왕자. 그에 내가 입술을 짓이기며 심한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뒤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그만하게. 그 아이를 내보내면 대화를 하지 않겠네.”

“...뭐, 그러시죠. 스승님.”


한쪽 눈썹을 약간 올린 에르피는 우리 둘을 번갈아 가며 보다가 본론을 꺼냈다.


“스승님, 병세는 어떻습니까?”

“어떻고 자시고, 오늘 쓰러졌네. 알 리가 없지.”

“스승님 같은 증세를 알고 있습니다. 앙상해진 손가락, 창백해지는 얼굴, 가끔씩 찾아오는 발작 증세까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독에 걸리신 것 같습니다.”


...중독? 정말로?

에르피의 말에 촌장님을 이모저모 뜯어보았다. 그의 말대로 뼈만 남은 손가락과 하얗게 질린 얼굴이 머릿속을 괴롭혔다.

그런 시선 끄트머리로 에르피와 촌장님이 서로 마주보았다.

묵묵히 쳐다보는 촌장님과 은은하게 미소짓는 에르피. 한참 눈을 맞추던 그들 중 촌장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같잖은 수를 쓰는군.”

“하하하.”

“뭘 원하는 겐가.”

“늘 말씀드렸던 것. 그걸 주십시오.”

“나한테 없다고 분명히 말했지 않은가? 그리고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 넘겨줄 수 없네.”


뭐가 일어나고 있는 거야?

갑작스럽게 변하는 그들의 대화에 머리를 굴리는 나를 배려하지 않은 채, 그들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그것만 있다면 많은 백성이 풍족해질 수 있지 않습니까?”

“피로 얼룩진 풍요가 좋을 것 같은가?”

“우리가 좋다, 싫다로 나뉘는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까? 당장에 죽어갈 백성을 생각해보십시오.”

“연구를 담당한 마법사가 이미 파문당하지 않았는가? 자료가 있다고 한들, 다시 원래 단계까지 가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목숨을 앗아갈 텐가?”

“그럼에도 해야만 합니다. 스승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와 스트라스 왕국간의 정세가 어떠한지. 그 균형의 추를 밀어뜨릴 수는 없습니다.”

“에르피, 늘 말하지 않았더냐. 국가를 운영할 때엔 항상 희생이 따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니 그렇기에 최소한의 선은 넘지 말아야 한다.”

“난 선을 넘은 적이 없습니다.”

“허. 키메라를 제작하기 위해 희생시킨 사람들. 그리고 그렇게 만든 키메라마저 희생시키고 있는 이 파국이 보이지 않느냐?”

“그 일은 그저 사고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키메라를 희생시키는 것이 뭐가 문제가 된단 말입니까? 그들은 감정이 없는 인형에 불과합니다.”

“아니, 그들은 틀림없는 사람이다. 눈을 돌리지 말거라.”

“감정도 없고, 명령 없인 움직이지도 않는 그런 생명체가 사람이란 말입니까? 만약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내겐 그따위 것들보다 백성이 더 중요합니다. 스승님도 그렇지 않습니까?”

“에르피!”

“스승님이야말로 눈을 돌리지 마십시오. 스승님 말대로 결국 피해는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법입니다. 그러니 자료를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간곡한 목소리로 호소하며 고개를 숙이는 에르피의 모습에 촌장님의 눈이 흔들렸다.

그래. 분명 옛날에는 이랬던 것 같아. 서로의 가치관을 내보이는 토론 속에서 흘러나오는 각자의 진심들.

나와 같은 것을 느꼈던 걸까. 촌장님의 눈이 잠깐 어딘가로 향하다 돌아왔다. 그것을 확인한 에르피의 얼굴이 순식간에 비릿한 미소를 품었다.


“하하. 거기 있었군요.”

“자료는 없다고 했네.”


확신이 가득한 에르피의 목소리와 뒤늦게 울리는 촌장님의 목소리. 이미 늦은 것을 깨달은 촌장님의 침음소리를 들으며 에르피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라, 나탈리 경.”

“...안됩니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는가?”

젠장. 어떻게 좀 해주세요, 촌장님.

에르피가 조금씩 다가올수록 내 손이 허리춤의 검집으로 움직였다. 뽑으면 끝이야. 진짜 뽑아야 해? 하지만 막아야 하는데.

느릿한 에르피의 발걸음과는 반대로 내 속이 빠르게 타들어가 절반이 사그라들었을 때, 겨우 촌장님의 입이 열렸다.


“썩 꺼져라, 에르피. 섣불리 다가오면 마도구가 발동해 자료를 파기해 버릴 테니까.”

“흠.”


잠시 손가락을 움직이며 고민을 하던 에르피가 다시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속는 셈 치고 오늘은 넘어가 드리죠.”


그런 뒤 에르피가 경쾌하게 발을 때며 촌장님에게 다가갔다. 절로 손을 움직여 그를 잡으려 했지만, 뒤에서 미약하게 들리는 제지가 나를 막아냈다.

그렇게 아주 가까이 다가간 둘은 한동안 마주 보며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 침묵은 에르피가 촌장님의 입에 무언가를 털어놓음으로써 사라졌다.


“한동안은 괜찮으실 겁니다. 스승님, 다음번엔 꼭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에르피는 등을 돌렸다. 끝까지 느긋하게 움직여 내 긴장을 바짝 가져간 에르피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로 언뜻 한스의 뒷모습이 보이며 내 머리를 조금 식혀주었다. 그러자 억지로 삼키고 있던 질문들이 제멋대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촌장님, 자료가 왜 아직까지 남아있는 거죠?”

“...”

“저는 당연히 진작에 파기한 줄 알았어요. 내 아빠를, 대장을, 그리고 많은 사람을 죽였던 그 미친 결과물 따위는.”

“...”

“결국 촌장님도 그들과 같았던 건가요? 말만 그럴싸하게 하면서 사실은 연구를 계속하려고 한 건가요?”

“...”

“아니, 사실은 다른 걸 묻고 싶어요. 애초에 왜 그런 연구를 시작하신 건가요?”

“...”

“촌장님, 말 좀 해봐요. 도대체 왜 그러신 거예요? 네?”

“...”

“뭐야, 자잖아. 하.”


고르게 흘러나오는 촌장님의 숨소리가 약간 급하던 내 목소리를 모두 묻어버렸다. 덤으로 내 질문 또한.

그래. 일단은, 일다은 의사부터 불러오자. 촌장님을 살려야 하니까.


* * *


스벤이 소개해준 의사를 겨우 불러왔지만 그도 신통치 않았다. 독이 있다고 말을 해봤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그리고 조금씩 쇠약해져 가는 촌장님의 모습이 결국 날 에르피의 앞으로 이끌었다.


“뭐 하는 짓인가?”

“약을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아, 그런 거였군.”


날 놀리듯이 한참을 고민하는 척하던 에르피는 진지하게 내게 제안했다.


“자료를 가져와라. 그럼 약을 주도록 하지.”


소중한 사람들을 죽인 그 자료를 내 손으로 직접 바치라고? 그것도 원수의 손에?

잔뜩 찡그려진 내 얼굴을 본 에르피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건넸다.


“왜 그러나? 그게 너의 부친을 죽여서? 아니면 자랑스러운 기사단장을 죽여서?”

“...”

“그건 안타까운 사고였을 뿐이다. 그 점은 나도 유감을 표하지. 전에도 한 번 했지만 말이다.”

“...”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 아직 살아있는 자들을 먼저 챙겨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자료를 주면 약을 주겠다.”

“...”

“그렇게 하면 이미 간 그들도 하늘에서 기뻐해 주지 않겠나? 하하하.”“그만하십시오. 죽여버리기 전에.”

“허.”


실제로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둘 다 깊숙이 이해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목을 베려고 하면 저 멀리서 감시하고 있는 이들이 당장에 달려오겠지.

그리고 에르피의 몸에 빙빙 둘러진 마도구가 그의 목숨을 붙들고 있는 동안 나를 제압하고, 마을을 불 지르며 자료를 가져가버리고.

그러니 이것은 그저 협박이었다. 아무런 힘이 없는.

하지만 그는 그런 미약한 협박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뭔가 착각을 하는군. 나탈리.”

“무슨 말입니까.”

“분명 그들이 죽은 것은 사고였지만, 그게 책임자의 승인 없이 이뤄질 수 있을 거라고 보는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즉, 스승님의 허가 하에 이뤄진 실험이었단 소리다. 스승님도 모두 숙지하고 그것이 문제없다고 판단하셨단 소리기도 하지. 그런데 왜 그렇게 질색을 하시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안 그렇나, 나탈리?”

“무슨...”

“심지어 너는 모든 잘못을 내게 뒤집어씌우고 있더군. 내가 무슨 힘이 있었겠나? 난 그저 보조를 맡았을 뿐인데.”

“...”

“하하. 어쨌든 생각이 바뀌면 자료를 가져와라. 그러면 그렇게 좋아하는 할아버지를 살릴 약을 줄 테니.”


어깨를 툭툭 치고 사라지는 에르피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정말로 그런 걸까. 아니면 나를 속이려고 이간질을 하는 걸까. 하지만 이간질이라면 촌장님이 연구 자료를 남겨놓은 이유는 뭐야.

그가 촌장님에게 독을 먹였다는 의문이 덮어질 정도로 마음이 복잡해졌다.

진짠지 확인을 해야 하는데. 그런데 사실이면 어떡하지?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 * *


깊은 고민에 빠져있는 와중에도 일상은 계속해서 날 찾아왔다.

아침, 대련.

점심, 순찰.

저녁, 잠.

돌아가는 쳇바퀴 안에 갇힌 나. 그리고 그와 함께 뱅뱅 돌아가는 머릿속의 생각들.

사실을 알고 싶어. 누가 가족과 대장을 죽였는지, 아니면 진짜 사고에 불과했는지. 그리고 누가 연관되어 있는지.

아니, 알고 싶지 않아. 모르는 척하자. 모든 잘못은 에르피가 했을 뿐이고, 촌장님은 뭔가 착오가 있었던 거야. 그냥 넘어가자, 그냥.

하지만 그러면 이 속에서 타오르는 불은 어떡해?

한스와 함께 지내며 조금씩 꺼져가던 그것이 다시 불타올랐다. 이미 직면을 해버리니, 전처럼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수 없었다.

무서워. 할아버지가 아빠와 대장을 죽였을까 봐. 그럼 난 할아버지를 죽여야만 하는 거야?

그때 누군가가 양어깨를 붙잡았다.


“한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의 검은 눈이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에 살짝 몸이 떨렸다.


“디에고. 병문안 가지 않을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가야 하는 걸까? 말아야 하는 걸까.


“나탈리.”


계속해서 흔들리는 마음을 묵직한 기둥이 파고들었다. 곧 진중한 목소리가 추가로 내게 날아들었다.


“디에고의 손녀.”

“안가면 분명 후회할 거야.”


그래, 이미 시간이 없어.

점점 쇠약해지는 할아버지의 마지막은 손녀로서 꼭 봐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 사이의 일도 정리해야만 하고.


“알았어. 가자.”


* * *


등을 떠밀리며 할아버지의 앞에 섰을 때, 생각보다 허약해진 그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뒤에서 닫히는 문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입을 떼었다.


“할아버지.”

“...왜 그러느냐.”

“왜 그런 일을 하신 건가요.”


약간 커진 눈으로 날 쳐다보던 할아버지는 천천히 한군데를 가리켰다.


“가져오거라.”


그의 지시대로 문을 열자 정말로 연구 자료와 샘플이 들어있었다. 떨리는 손을 억누르며 그것을 들어 그에게 돌아갔다.

한동안 그것을 노려보던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그걸 처분해다오. 그리고 에르피를 조심하거라.”

“네?”

“그리고. 이런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느냐?”

“그렇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러시면...”


불편한 마음을 참고 할아버지를 쳐다봤을 때, 숨을 집어 삼켜버렸다. 눈의 초점이 풀리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그는 억지로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에르피를 조심하거라. 그리고 미안하구나.”

“할아버지..?”

“미안하구나. 미안해. 미안하다. 미안...”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았던 할아버지의 사과는 갑자기 끊겨버렸다. 더불어 그의 숨 또한 급격히 멈춰버렸다.

너무나 급하게 일어나버린 일들에 눈을 몇 번 감았다 떠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현실감은 찾아오지 않아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자료를 품에 넣고 문을 열어 기다리고 있는 한스에게 말을 건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 * *


여러 곳에서 찾아온 이들로 인한 기만으로 가득 찬 장례식이 끝났다. 그리고 에르피 또한 볼일이 끝난다는 듯이 돌아갔다.

한심하네.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어떤 복수도 달성하지 못한 내게 모멸감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무능했구나.

저 멀리 보이는 구름에 잠긴 달에 녹아있는 추억들이 날 괴롭혔다. 하긴, 당연하겠네. 매일 뜨는 게 달이고, 그중에 대부분을 그들과 보냈었으니까.

그렇게 끈이 터져 움직이지 못하는 내 뒤로 터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한스?”

“안녕, 대장.”

“여기서 뭐 해?”

“달이 예뻐서 걷고 있었어.”


능청스럽긴.

하지만 그를 억지로 옆자리에 앉혔다. 지금은 그의 분위기, 편안함, 체온이 필요했으니까.


“울어도 돼.”


그런 내 바람대로 나를 끌어안은 한스가 부드럽게 내 귀에 속삭여주었다. 이건 반칙이잖아.

억지로 닫아놓았던 마음의 문이 금세 열려버렸다.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슬픔, 자신을 향한 끝없던 모멸감을 톡톡 털어내 주는 그의 손에 절로 눈물이 흘렀다.

고마워.


* * *


정말로 실컷 울었네. 이만큼 운 건 대장이 죽고 난 뒤로 처음이야.

한결 개운해진 기분으로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대장은 그 얘기를 하고 싶어?”

“...아니.”

“그럼 됐어.”


평소라면 배려였다고 생각했겠지만, 어쩐지 이럴 때에도 거리를 벌린다고 생각해버리는 건 왜일까.

그런 내 얼굴을 본 한스가 추가로 설명을 덧붙였다.


“서로 믿고 의지하는 관계잖아. 이것만으로도 괜찮지 않을까? 그 얘기는 나중에 마음의 정리가 끝나면 해줘.”


담담한 그의 목소리에서 깊은 신뢰가 묻어났다. 굳건한 그의 믿음을 보니 여태 고민했던 것이 어쩐지 쓸모없어 보였다.

그래, 나한텐 한스가, 그리고 이 마을 사람들이 아직 남아있어. 아직 포기하긴 이르지. 우선 스벤에게 도움을 청하자. 그리고 아직까지 남아있는 옛 인연들한테도 부탁을 하고.

추운 밤을 따스하게 지켜주는 그의 온기를 느끼며, 무너져 내렸던 각오를 다시 잡아 세웠다. 그런 나를 환한 달빛이 비춰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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