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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설란 님의 서재입니다.

족쇄를 벗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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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설란
작품등록일 :
2018.05.04 23:33
최근연재일 :
2018.08.0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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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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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글자수 :
395,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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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6.2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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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준비

DUMMY


그 모든 것을 보면서도 난 어떠한 감흥을 얻지 못했다. 그건 기억들이 영화를 보듯이 주욱 흘러갔기 때문이리라.

아니, 난 그것보단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항상 만지던 목걸이가, 달밤에 묵묵히 울리던 그녀의 노래가, 어느 날에 빛났던 머리핀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어때, 이제 알겠어?)

잘 알겠다.

(설마설마했지만, 정말로 남의 권한을 뺏을 줄은 몰랐어. 덕분에 프렉스 그 새끼한테 거하게 한 방 먹일 수 있겠네.)

정말로 세상이 다시 돌아간다고?

(오, 제기랄.)


내게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한껏 과장된 미소를 짓던 ‘나’가 힘을 약간 주며 내게 말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어.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불가능하다고?

(넌 무수한 세월 속에서 겨우 튀어나온 돌연변이야. 그때야 바쁘니 그랬겠지만, 프렉스가 널 자세히 보기 시작하면 금방 들통 날 정도로 특이하단 소리라고. 그러니 이번 세상이 끝나기 전에 끝을 봐야해.)

그렇게 끝을 보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데?

(...)


모른다 이 말이냐? 하하.

서로 아무런 말이 없이 쳐다만 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나’의 표정에 불안함이 더해져 갔다. 그런 ‘나’는 나에게 상냥하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지금부터라도 시작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살릴 수 있어. 하지만 지금 끝을 보더라도 다시 시간이 돌아가면 프렉스도 살아날 거야. 그리고 이미 한번 써먹은 전략은 안 통하겠지. 그러니 이번에 잡아야만 해.)


그는 어떻게든 내 마음을 돌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살릴 수 있다는 사람들 안에는 그들이 빠져있었고, 내겐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결국 침묵을 지키는 나에게 ‘나’가 일갈을 가했다.


(한스, 애새끼처럼 굴지 말고 현실을 봐! 네가, 내가 프렉스를 막지 못하면 이 세상은 영원히 사람들을 잡아먹을 거다! 그걸 원하는 거냐? 사람들이 계속 죽기를 바라는 거냐고!)


제법 매서운 목소리에는 그의 기억에서 보았던 미약한 권한의 힘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기억을 본 나도 권한을 다룰 수 있었다.

어느새 ‘나’를 감싸던 마기는 다시 내 곁에 머물렀다. 그 외에도 가온이 보았다던 시스템이 눈앞에 확실히 보였다.

예전처럼 정보창만을 보는 것이 아닌, 거의 모든 창이 열려 앞에서 난잡하게 교차하고 있어 그것을 손을 휘저어 치워버렸다.


(한스?)

그래, 난 한스다. 그리고 넌 001이고. 너의 기억이 포함되었다고 해서, 내가 네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안 그래?

(한스!)


노한 함성을 뒤로한 채 새하얀 공간을 가르자 원래 있었던 드코 산맥이 보였다. 그대로 나가려다가 급히 몸을 틀자 날카로운 001의 손이 내가 있던 곳을 찔렀다.

그 팔을 잡고 왼쪽 팔꿈치로 001의 복부를 가격하자 이전과 달리 그의 몸이 움푹 들어갔다. 뚝뚝 떨어지는 검붉은 피와 함께 날아드는 그의 꼬리를 붙잡아 뒤로 업어 내리쳤다.


(으윽.)

걱정 마. 프렉스한테는 나도 볼일이 있으니까. 대신 내 방식대로 처리하지.

(...그게 될 거라고 보는 거냐?)

적어도 네 꼭두각시는 안 되겠지.


오랜만에 설레는 가슴을 부여잡고 드코 산맥으로 나왔다. 모처럼, 정말로 모처럼 진심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 * *


그곳에 들어가고 난 뒤의 하늘은 참으로 맑았다. 덩달아 내 머리도 상쾌해졌다. 이전에는 어떻게 지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거칠게만 쓰다듬었던 목걸이도 지금은 부드럽게 만져졌다. 자꾸만 붕 뜨는 마음이 나를 미소짓게 만들었다.

후우. 후. 흐. 흐흐. 하하하.

한동안 너털웃음을 하고 난 뒤에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그래,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지. 그만큼 시련이 있으니까.

생각해 보면 여태까지 왜 그랬나 싶었던 행동들이 몇 개 있었다. 아마 001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나에게 무슨 짓을 하지 않았을까.

에밀에게 배운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니 어느새 라스 성이 보였다. 전쟁이 끝난지도 꽤 지났으니, 정세가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검문에서 자연스럽게 용병증을 꺼내려다, 아르키 용병 길드 자체가 내게 몰락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분증 주시겠습니까?”

“아, 예. 여기 있습니다.”

“어... 죄송합니다만 이 용병증은 쓸 수 없습니다. 무리한 명령을 내린 아르키 길드가 전쟁에서 몰락한 뒤로 아르키 길드의 용병증은 효력을 잃어버렸거든요.”

“그렇습니까?”


또 브로커를 통해 몰래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뒤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형님!”


* * *


우연히 만난 닐스의 보증으로 겨우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들어오면서 언뜻 본 경비대장을 보니 보증이 없어도 들어올 수는 있을 것 같았다만, 뭐 편한 게 좋으니까.


“형님, 이제 여기서 사시는 겁니까?”


그새 무럭무럭 자라 변성기가 온 닐스를 보니 전쟁 이후로 시간이 꽤 흐른 것이 실감 났다. 그에게 뭐라고 답해줄까 잠깐 고민하다가 가볍게 응대해주었다.


“아니, 그래도 잠시간 여기서 머무를 것 같다.”

“오오! 가우스 형이 좋아하겠네요.”

“요새 사업은 어때?”

“사실 그렇게 좋지는 않아요. 아무래도 기근이다 보니 주조는 좀 힘들거든요. 그래도 이제 옛 스트라스 땅이랑 교역로를 마음껏 만들 수 있으니 이제 나아질 것 같아요. 마법사들이 땅을 많이 복원 중이더라고요.”

“그래?”


문득 어차피 그들이 죽어봤자 상관없다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억지로 머리를 휘저어 털어냈다.


“형님?”

“일단 신분증부터 만들러 가야겠다.”

“아, 그곳 말씀이시죠?”

“너희도 회원이 됐냐?”

“예, 형님의 추천장이랑, 가우스 형의 주조 솜씨를 보고 겨우 회원으로 넣어주더라고요.”

“그럼 갔다 오마.”

“네! 나중에 꼭 찾아오세요!”


씩씩하게 답하는 닐스가 능숙한 발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테네벨로 향하자 그전과 다름없는 건물 안에서 늘 보았던 프랑코가 날 맞이해주었다.


“정말로 오랜만이시군요. 한스 님.”

“오랜만입니다. 프랑코.”

“이젠 정말로 영웅이 되셨습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영웅. 적어도 스트라스군에겐 악마가 아니었나?


“프랑코. 새로운 신분증, 그리고 정보가 필요합니다. 요새 시세가 얼만지는 모르겠군요.”


동료들에게 억지로 넘겨받은 돈 중 일부를 주자 프랑코가 충분하다는 듯 웃으며 친절하게 모든 것을 준비해주었다.


“일단 신분증은 내일 오시면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정보는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음. 원래는 호세를 만날 생각이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지금 돌아가는 정세. 그리고 녹스와 같은 초대형 마수에 대해서 알려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유래 없던 대륙 통일이 코앞인 현재, 데쿠스 왕국은 아인들에게 타토르를 넘겨주었습니다. 당연히 말이 많았습니다만, 왕가에서 한스 님의 활약이 촬영된 마도구를 보여준 뒤로는 이견이 쏙 사라졌습니다.”


그런 건 언제 찍은 거지?


“그리고 댐이 터진 여파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데쿠스 왕국에서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호세 각하를 비롯한 마법사를 총동원하고, 대륙을 모두 잇는 교역로를 뚫으려고 하고 있죠.”

“옛 스트라스 왕국은 누가 다스립니까?”

“오귀스트 각하를 비롯해 각하 밑의 귀족들이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전공이 워낙 커서 말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이제 마수에 대해서 알려주시겠습니까?”

“마수. 마수 말이죠.”


돌연 프랑코가 심각한 표정으로 여러 문서를 뒤지더니 그것들을 나에게 보여주며 설명을 했다.


“우선 최근 각지에서 나타나는 마수의 목록입니다. 데쿠스 위쪽 바다 근처에서 출몰하는 상어를 닮은 거대한 마수, 폰터스. 그리고 데쿠스 오른쪽 지방에 출몰하는 비행형 마수, 일라. 그 외에도 다른 지역에서 마수가 나타난다는 모양입니다만, 저희의 능력 부족으로 진상은 규명하지 못했습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수가 활동하는 동안 그들을 잡는 용병은 없었습니까?”

“아르키 길드가 와해된 이후에 각 지역에서 소규모 용병 길드가 생겨났습니다. 주로 아르키 길드에서 있던 용병들이 대장이 되었죠. 하지만 녹스의 경우처럼 일반적인 용병이 그들을 잡기엔 매우 힘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략의 정보를 파악한 뒤 자리에서 일어서는 나에게 프랑코가 흐뭇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저희 테네벨이 이번에 전 대륙으로 구역을 넓히려고 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지역의 정보도 다룰 테니 그때도 꼭 찾아주십시오.”

“알겠습니다.”


* * *


테네벨을 빠져나와 가우스가 사업을 차렸다는 곳으로 향했다. 꽤나 번듯해 보이는 건물 내부로 바쁘게 움직이던 사람들은 날 보자 하나같이 수직 인사를 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가우스가 앞의 사람들과 똑같은 인사를 하며 날 맞이했다.


“형님! 오랜만입니다!”


그러고 보니 알티랑 어떻게 헤어졌더라. 뭔가 울고불고 난리 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오랜만이다.”

“형님, 앉으시죠. 제가 푸짐하게 준비해 놨습니다. 술은 안 드셔도 음식이라도 좀 드십시오.”


가우스의 말대로 식탁에는 정겨운 데쿠스의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상석에 앉으며 주위의 사람들을 빨리 앉히고 식사를 시작했다.


“가우스, 좀 물어볼 게 있다.”

“예,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우리가 만나기 전엔 뭘 했었지?”

“음... 형님을 만나기 전 말입니까?”

“그래.”


묻기엔 조금 힘든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꼭 물어봐야만 했다. 001의 제안을 뿌리친 나는 그처럼 도박을 해야 했고, 그것을 위해 많은 정보가 필요했으니까.

껄끄러운 질문임에도 가우스는 아주 스스럼없이 내 말에 답해주었다.


“형님을 만나기 전에도 전 그곳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 새끼들에게 맞기도 하고, 제 친구들도 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형님을 만났던 그 날은 아직까지도 잊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말하던 천사가 제게 보였거든요.”


잘도 그런 오글거리는 얘기를 하는구나.

문제는 그런 그의 주위 사람들도 하나같이 감동받은 얼굴로 날 쳐다본다는 거였다. 으악.


“그럼 계속 거기 있었다는 소리지?”

“예. 그곳이 제 고향...같은 곳이죠. 엿 같기도 하고요. 하하.”

“피터, 너는?”

“형, 형님. 제 이름을...!”

“그래, 그래. 그래서, 너도 거기서 자랐다고?”

“예. 저뿐만 아니라 다들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우리 닐스도 말이죠.”

“그래? 고맙다.”


좋은 정보를 얻었다. 그 뒤로는 편안하게 음식을 맛봤다. 주어진 두 번째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하며.


“형님, 이제 여기서 계속 머무시는 겁니까?”

“닐스한테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내일 바로 떠나야 할 것 같다.”

“그렇습니까...”


눈에 띄게 시무룩해지는 사람들을 보며 얼굴에 약간 미소가 지어졌다. 그들의 호의가 느껴졌기에. 그리고 결국 난 그들을 한번 버리고 다시 만날 것이기에.


“가우스, 다음에 만날 때엔 네 술맛을 꼭 보겠다.”

“정말입니까?!”

“그래, 약속할게.”

“진짜죠? 약속입니다? 이거 한번 맛보시면 아마 다른 술은 입에도 못 대실 겁니다. 진짜로요!”

“그래.”


내가 예전에 그의 술을 강하게 거부했던 만큼, 그가 격하게 기뻐하는 것이 보였다. 그가 술을 연거푸 들이키는 것을 보며, 앞의 음식을 입에다 가져갔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으며 길을 나섰다. 그럼에도 내 앞에는 한 명의 소년이 있었다.


“가시려고요?”

“그래. 다음에 보자.”

“...정말로 볼 수 있는 건가요?”

“...아마.”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발을 옮겼다. 그런 내 뒤로 자그마한 소리가 들렸다.


“형님, 다음엔 꼭 제 술도 먹어주세요.”

“...물론이지.”


입안에 은근하게 퍼지는 씁쓸한 그 맛을 만끽하며 테네벨로 가서 신분증을 받았다. 그리고 나오면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의외로 내가 아는 얼굴이 많다는 사실에 다시 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푸르르던 하늘에 한 점의 구름이 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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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세상의 끝(3) 18.07.01 57 0 14쪽
53 세상의 끝(2) 18.06.30 72 1 13쪽
52 세상의 끝 18.06.29 76 0 13쪽
» 준비 18.06.28 72 0 13쪽
50 이야기의 시작(2) 18.06.27 84 0 13쪽
49 이야기의 시작 18.06.24 88 0 14쪽
48 '나' 18.06.23 115 0 15쪽
47 전쟁(3) 18.06.22 80 0 12쪽
46 전쟁(2) 18.06.21 85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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