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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설란 님의 서재입니다.

족쇄를 벗어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용설란
작품등록일 :
2018.05.04 23:33
최근연재일 :
2018.08.0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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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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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95,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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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03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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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세상의 끝(4)

DUMMY

새하얗던 공간, 그곳에 온갖 종류의 색채가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검붉은 001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통제가 풀렸는지 또렷한 얼굴의 001이.


001.


내 부름에도 그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스며든 약간의 서글픔이, 피로감이, 그리고 환희가 서로 버무려져 하나의 미소를 만들어냈다.


(한스.)

왜.

(널 믿어도 되겠냐.)

난 프렉스를 잡고, 넌 내게 동료들을 다시 만날 기회를 준 거야. 우린 거래를 한 거지.

(...알겠어.)


001은 내 대답을 듣고 가만히 눈을 감으며 내 앞에 섰다. 생각보다 좁은 그의 가슴을 바라보다가 그곳에 손을 찔러 넣었다.

뚝뚝 흘러내리는 검붉은 피가 공간에 스며들며 어지럽게 그저 나열만 되어있던 색깔들을 감쌌다.

그러자 잃어버렸던 반쪽을 되찾은 것처럼, 공간의 모든 색깔들이 서로 얽히며 섞여들었다. 조금씩, 조금씩 짙게.

끝끝내 공간이 완벽한 어둠에 빠지자, 눈앞에 하나의 창이 떴다.


[모든 마수의 권한을 흡수하셨습니다.]


* * *


다시 눈을 뜨자 피투성이가 된 피에르의 시체가 보였다. 형편없이 부서진 몸뚱어리를 보고 누가 황제라고 할까.

잠시 후, 아니나 다를까 앞에 익숙한 창이 나타났다.


[경고! 관리 대상이 사망했습니다. 관리자가 이를 눈치챕니다.]


이전과는 달리 차분한 기분으로 그의 접근을 기다렸다. 곧 허공에 균열이 생기며 체감상 많이 봐온 황금색 눈동자가 나를 주시했다.


(001... 아니, 넌 도대체...)


내게서 느껴지는 모든 마수의 권한에 혼란스러워 하는 프렉스를 보며 그의 힘을 가늠했다. 확실히 약하다. 그가 이딴 짓거리를 시작하기 전에는 이렇지 않았었는데.

기분 나쁘게 날 째려보는 그 동공을 손으로 헤집으며 그가 있는 곳의 위치를 파악했다. 아하, 여기였구만?


(끄아아악!)


우리 둘의 권한이 부딪히며 서로에게 타오를 듯한 고통을 선사했다. 다만 나는 마수를 잡으며 뇌가 녹아내리는 기분을 무려 천 번이나 맛봤고, 그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가 이 행위에 익숙해지기 전에 적당히 손을 빼고 공간을 우그러뜨려 닫았다. 중간에 억지로 어금니를 들이미는 프렉스 때문에 괜히 그의 어금니 하나만 부서졌다.

그것을 인벤토리에 넣고 주위를 둘러봤다. 핏빛으로 물든 옥좌. 떨다 못해 이제는 기절한 병사들.

그것들을 뒤로한 채 왕성을 벗어났다. 다음은 시기를 기다는 것만이 남았다.


* * *


내가 한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에 겁을 먹은 프렉스는 다신 내게 접근하지 않았다. 아마도 시간을 돌리기만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지 않을까?

그것을 위해 프렉스는 휘하의 남은 마수들을 모조리 긁어모아 남은 생명체를 멸절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눈을 피하진 말자. 내가 포기한 것들을 무시하진 말자.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마수들에 대항하기 위해 남은 사람들은 뭉치기 시작했다. 내가 알던 동료들은 연합의 구심점이 되어 영웅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마수는 끊이지 않았고, 이미 모든 초인이 사라져버린 세상에서는 수많은 대형 마수를 잡을 방법이 없었다.

분명 초반에는 수월하게 잡을 수 있었다. 다만 식사는커녕 수면을 취할 시간도 없이 몰아붙이는 마수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거기에 아직 채 회복되지 않은 식량 사정이 겹쳐 연합을 괴롭혀댔다. 야금야금 잡아먹히는 연합은 점점 초췌해져갔다.

그들은 가끔 나를 애타게 찾았다. 한스가 있었더라면. 그들이 동료를 잃을 때마다 종종 중얼거리던 대사였다.

그것에 대한 대응으로 나는 그저 웃었다. 이미 줄리엣이 죽었을 때부터 망가졌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웃는 것뿐이었으니까.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연합은 마침내 최후의 승부수를 띄웠다. 우연히 알아낸 마수의 근원을 토벌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마수의 근원이란 프렉스였다.

그리고 오늘, 프렉스를 토벌하기 위한 결사대가 은밀하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계속해서 몰려드는 마수들은 정말로 지독했다. 생존의 본능이 사라지라도 한 듯이 다리가 잘리더라도 그것을 질질 끌면서 기어이 사람들을 물어뜯었다.

프렉스는 각 대륙의 사이에 위치한 꽤 큰 섬에 자리 잡고 있었고, 지금 결사대는 배를 띄우기 위한 선착장을 뚫으려 무던히 노력하고 있었다.


“가십시오!”


연합은 최대한의 승산을 잡기 위해 결사대를 추려 선착장으로 보냈다. 그들이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 다른 이가 마수의 대가리에 머리를 들이밀었으며, 혹여나 발목이라도 잡힐까 싶으면 제 몸에 폭탄을 부착해 망설임 없이 마수에게 돌진했다.

그런 행동의 바탕에는 그들의 가족을 보호하는 요새가 있었다. 나날이 부서져 가는 요새는 이제 보수조차 힘들 정도였고, 따라서 결사대의 실패는 곧 인류의 절멸이었다.


-크아아아!


비행형 마수 여럿이 직접 데려온 대형 마수가 하늘에서 추락하며 결사대를 향해 몸뚱이를 내밀었다. 그에 테레지아가 나서려고 하자 옆에 있던 알마가 그녀를 제지했다.


“테레지아. 마나를 보존해야지.”

“아, 네.”


분한 표정을 지은 테레지아는 끝내 물러섰다. 그녀를 대신해 아인들이 나서 결사대의 앞에 마법으로 방어막을 형성했다.


-커헉.


마수와 부딪힌 방어막을 유지하기 위해 마법이 가열되었고, 때문에 아인들의 입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결사대는 쓰러진 아인을 내버려 두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옆에서 덤비는 마수를 마법으로 꿰뚫은 사니스의 뺨에 피가 튀었고, 그것이 흘러내려 그녀의 마음을 대변해주었다.


-조금만 더 가면 배가 있다!


외팔로 휘두른 셰일의 무기가 마수의 머리를 두 조각으로 쪼갰다. 그의 빈틈을 치고 들어오는 작은 마수에게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알티가 검을 쑤셔 박았다.

새하얀 그녀의 꼬리가 시뻘겋게 물들고 나서야 그들은 겨우 바다에 배를 띄울 수 있었다. 즉석에서 조립되는 알마의 배를 결사대가 초조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막아, 이 새끼들아! 가족을 지키고 싶으면 막으라고!”

“으아아악!”


얼굴에 튀는 피가 마수의 것인지, 아니면 옆에 함께 있던 동료의 것인지도 분간이 안 가는 난전 속에서 사람들은 악을 질러댔다.

죽어도 같이 죽겠다. 절대 그들에게 다가서게 하지 않겠다. 반드시, 반드시 내 가족을 지키고 말겠다.

실제로 일이 거행되기 전날에 그들이 술잔을 들며 다짐했던 각오였다. 그것을 보다가 어느새 조립된 배에 올라탔다.

덤으로 날아오는 마수를 몰래 쏘아 죽이며.


* * *


“기적 같아요.”


얼떨떨한 테레지아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찾고 있던 사니스가 고개를 돌렸다.


“뭐가 말인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요. 매일 죽을 위기가 왔었는데, 심지어 배에 크게 구멍까지 났었는데 살아났잖아요.”

“나도 얼떨떨하군.”


테레지아는 자신의 배를 만지작거렸고, 사니스는 왼뺨을 쓰다듬었다. 각자 한줄기의 흉터가 남아 그때의 일을 증명하고 있었다.

중앙에 뜬 태양과 푸르른 바다를 보던 테레지아의 입에서 한마디 말이 흘러나왔다.


“한스는 어디 있을까요. 앗, 미안해요.”


그들 사이에서 어느새 금기시되어있는 단어가 바로 한스였다. 그 이유야 당연히...


“형님?!”


씻어도 다 닦이지 않은 탓에 군데군데 붉은 반점이 생겨나 있는 알티가 안쪽에서 튕기듯 빠져나왔다. 휙휙 고개를 돌리던 알티는 이내 실망한 표정으로 배에 기대앉았다.

그녀를 뒤따라 나온 셰일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나란히 앉았다. 하지만 그의 꼬리도 축 처져 있어 차마 감추지 못한 감정이 드러났다.


“나쁜 새끼.”


테레지아의 입에서 돌연히 거친 말이 내뱉어졌다. 늘 얌전하던 그녀가 던진 뜻밖의 언사에 모두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렇지 않아요? 우린 이렇게 생사를 건 싸움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사라져버려선 나타나지도 않고 말이에요.”

“맞다, 너무한 놈이지.”

“놈이 아니고 새끼에요, 새끼. 나쁜 새끼.”


이건 뒷담일까, 앞담일까.

그것을 고민하고 있는 동안 셰일이 입을 열었다.


“한스는, 그는... 나를 일깨워준 사람이었다. 내 동료들을 구해준 사람이었고, 우리에게 터전을 준 사람이었다.”

“형님은 대단해! 내게 웃음을 준 사람이야. 그러니까 욕은 하지 마.”


기묘하게 변한 분위기에 테레지아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뭐에요. 지금 나만 나쁜 사람 만드는 거예요?”

“게다가 형님은 나랑 백년가약도 맺은 사람이야!”

“어?”

“뭐?!”


흡. 하마터면 육성이 터질 뻔했다.

진지한 알티의 눈을 보니 거짓이 담겨 있진 않았다. 근데 알티 씨? 전혀 사실무근인대 말이죠?

잠시 동공 지진을 일으키던 셰일이 이내 침착하게 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래. 그놈이라면 인정...할 만하다. 그리고 알티, 너도 어느새 늙었으니까 빨리 결혼하는 게 좋겠지.”

“셰일! 아직 안 늙었어! 팔팔해! 팔팔하다니까?”


알티가 자신의 몸을 셰일에게 들이밀며 젊음을 주장했다. 뭐, 여기선 제일 어리니까 상대적 젊은이라고 쳐줄 순 있겠지. 아마.

나이로 치면 따라갈 자가 없는 사니스가 불편한 듯 헛기침을 돌리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테레지아, 슬슬 햇빛을 피해야 할 때 되지 않았나?”

“흐음.”


붉은 눈으로 흥미롭게 알티를 쳐다보던 테레지아에게 사니스가 재차 질문을 던지자 그녀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살날 얼마 안 남았는데 뭐 하러요. 그냥 예쁜 해 계속 보게 해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지난번에도 쓰러졌던 것 같은데.”


슥 시선을 돌리며 어물쩍 그녀의 질문을 넘기는 테레지아와 이제 막 갑판으로 나온 알마의 눈이 마주쳤다.

도움의 뜻을 담은 테레지아의 눈빛을 무시하며 알마가 제 할 말을 던졌다.


“식량이 떨어졌다.”

“그럼 어쩌지?”

“어쩌긴 굶어야지.”

“아...”


모두가 안타까움의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다 한층 더 처지는 알티의 귀가 돌연 쫑긋 솟아났다.


“어, 저거!”


알티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수면 밑으로 여러 그림자가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다. 그것도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아주 빠르게 배를 향해서 말이다.


“저거 먹을 수 있는 마수 아니에요?”

“진짜다.”

“뭐해, 잡아!”


우당탕 소리를 내며 활발해진 그들을 보다가 잠시 돛에 몸을 기대었다.


* * *


세상 중간에 위치한 하나의 섬. 그곳에 결사대 중 살아남은 인원들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땅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수들이 반갑게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쿨럭.”


그런 마수를 피하기 위해 테레지아가 연속으로 마법을 사용했다. 이제 정말로 코앞에 다가와서인지, 그녀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피를 쏟아내며 골골거리는 그녀를 셰일이 업고 달렸다. 아직까진 의식이 있는 그녀는 쓸모가 남았기 때문이었다.

많은 곤혹을 함께 헤쳐 나온 결사대는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였다. 든든한 알마를 선봉으로, 우측을 알티가 맡고 좌측을 사니스가 맡아 하나의 창이 되어 마수들을 뚫어냈다.

간혹 뒤에서 물고 늘어지는 마수는 셰일이 요령껏 떼어놓았다. 그럴 때엔 테레지아 또한 있는 힘껏 셰일의 몸을 붙잡아야 했다.

한 마디 대화도 없이 마수를 베고, 터트리고, 발로 차며 나아가던 그들은 점점 속도가 느려졌다.

그들의 표정이 갈수록 어두워질 때, 선두의 알마가 조용히 신호를 주었다. 마갑이 내구도 한계에 도달했다는 신호였다.

신호를 보자마자 남은 이들이 공격을 포기하고 중간으로 뭉쳤다. 그리고 알마의 마갑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최후의 발악을 시작했다.


-쿵. 쿵. 쿵.


여지껏 내던 속도의 두, 세 배의 속도를 내며 마갑이 돌진하자 앞에 있던 모든 마수가 휩쓸려 날아갔다. 그런 그가 지나간 땅바닥에는 피와 열기가 버무려져 붉은 카펫을 형성했다.

남은 이들은 그저 있는 힘껏 그 카펫 위를 달리기만 하면 되었다. 다만 진작에 떨어진 체력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을 뿐이었다.

점점 그들의 표정에 악이 담겨져 갈 때, 다시금 선두의 알마가 손을 움직여 신호를 주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마지막이라는 신호였다.

그것을 보자마자 테레지아가 마지막 마법을 발동했다. 그들이 공간을 뛰어넘어 사라지자마자, 알마의 마갑이 커다란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

그 폭발이 알마를 집어삼키기 전에, 그를 마갑에서 꺼내어 폭발에서 보호했다. 질끈 눈을 감은 알마의 잔뜩 화상 입은 얼굴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넌...”

“이제 조금입니다.”

“하.”


* * *


“저 앞이다!”


테레지아는 진작에 탈락한 지 오래였고 사니스도 조금 버거운 얼굴이었지만, 셰일과 알티는 아직 거뜬했다. 남들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정도라면, 그들은 손 하나는 움직일 수 있을 체력이 남아있었다.

결국 결사대는 꼴사납게 걷듯이 뛰고 있었다. 옆에서 대신 뛰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끝내 그들은 프렉스의 앞까지 도달했다. 순백의 드래곤은 약간 안달 난 얼굴로 눈앞의 기계에 집중하고 있었다.

잠시 그의 기백에 몸을 못 가누던 알티가 자기 뺨을 때려 입에서 피를 빼내더니, 품에서 하나의 마도구를 꺼냈다.

그를 제지하며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넣어둬라. 알티.

-형...님...?


자폭 도구를 빼앗아 인벤토리로 넣으며 우리에게 관심도 주지 않는 프렉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뒤에서 묵직한 풀스윙이 날아들었다.


-형니이이이이님!


어우. 야. 좀 세다?

슬쩍 뒤를 보자 사니스와 셰일도 몇 마디 가득 해줄 얼굴 같아서 호세의 마도구를 개조해서 만든 가면을 벗었다.


-큭.


음. 좋아. 조용해졌다. 알티빼고.

이번엔 엉겨 붙지 않고 자신의 울분을 열심히 해소하고 있는 알티의 팔을 잡아 뒤로 물리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다짜고짜 날아오는 번개를 후려쳐 되돌려주며 프렉스에게 달려갔다. 공포와 분노가 적당히 섞인 그의 한쪽 눈동자가 눈에 띄었다. 다른 눈동자는 눈을 감고 있었으니까.


(001!)


그의 인사에 대답해주기보단 땅에서 송곳을 솟아 보냈다. 몸을 옥죄는 그것을 한번 털어서 떨쳐낸 프렉스가 날개를 펴며 우렁찬 괴성을 내질렀다.

사니스에게 시선을 주자 그녀가 눈치껏 나머지 둘을 데리고 밖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잠시 후, 프렉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가 한 번 날개를 펄럭이자 돌풍이 불었다. 그가 두 번 날개를 펄럭이자 돌풍은 얼음을 머금었고, 그가 세 번 날개를 펄럭이자 공간이 얼어붙었다.

점차 느려지는 몸을 억지로 깨부수며 발을 움직였다. 날아드는 얼음 조각은 바람을 비틀어 피했고, 그와 동시에 불을 생성해 수증기를 만들어냈다.

그를 이용해 한 발자국. 겨우 그 정도만 내디뎠을 뿐인데 수증기는 프렉스의 손짓 하나에 날아가 버렸다.

다음으로 프렉스는 내가 했던 것처럼 땅으로 날 집어삼켰다. 손으로 그걸 깨부수고 발을 빼는 순간 쏘아진 날카로운 마법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허허. 확실히 강하다. 예전보다 약해졌는데도 내가 죽어나갈 정도니까 말이다. 그래도 상관없지. 난 계속해서 부활하니까.

한 걸음과 한 목숨, 가끔은 반걸음과 한 목숨을 교환했다. 프렉스가 보내는 권한과 반대 속성의 권한을 보내 그것을 중화시키고, 끈질기게 달라붙는 날 보며 그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래, 질린 표정. 어느새 그는 내게서 공포심보단 지겨움을 느끼고 있었다. 오히려 그것이 좋았다. 방심하고 있다는 증거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임으로.

이제 우리는 뱀과 개구리의 싸움으로 변해있었다. 나는 죽어가면서 조금씩 몸을 움직이고, 프렉스는 그런 나를 피해가며 천천히 요리했다.

조금 더, 조금 더.

마침내 그의 방심으로 나와 그의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졌을 때, 프렉스가 입을 열었다.


(하. 겨우 이 정도 힘으로 내게 대항하려 했단 말이냐? 우습구나. 아주 우스워.)

(...)

(네가 예전부터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것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겨우 이것뿐이더냐?)

(...)

(지금이라도 돌아온다면 너의 치기 어린 반항을 눈감아주겠다. 어떠냐.)


헛소리를 지껄이는 그에게 인벤토리에서 모종의 선물을 꺼냈다. 정확하겐 내건 아니고, 알마의 것이지만.


-콰아앙!


폭발과 함께 강렬한 빛이 일어나 프렉스의 시야를 좀먹었다. 그 틈에 팔을 촉수로 바꿔 기계를 내 손으로 데려왔다.

딱 알맞은 거리에 있던 기계가 내 품으로 다가오자마자 그것을 기동시켰다. 이미 들어가 있는 프렉스의 권한을 흡수해 내 것으로 변환한 뒤, 모든 주체를 나로 바꿔버렸다.


(무슨...!)


경악하는 그의 표정을 보며 깔깔거리다 조용히 중지를 세웠다. 다른 손에 쥐어진 기계에서 무수히 많은 생명이 잠들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점점 되돌아가는 주변 풍경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 마지막으로 한 마디 정도는 해줘야지.


(형 먼저 갈게, 이 새끼야!)


작가의말

이걸로 1부가 끝났습니다! 여태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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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세상의 끝 18.06.29 76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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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이야기의 시작 18.06.24 88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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