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난 불안정! 넌 어째서 안정?*
일년에 딱 한 번 꽃은 핀다.
그림: 제노마이어. 황제.
=
물론 그 전에 마티는 나를 한쪽 방으로 슬쩍 밀어 넣고는 바로 문을 잠가버렸다.
그럼에도 난 내가 ‘감금당했구나!’라는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워낙 절친이고 이거 장난치는 건가~ 하고 처음 생각했고, 바로 내 핸드폰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미안. 아로. 나도 곧 들어갈 거야. 잠깐 기다려. 오늘 맥주가 떨어져서···. 사와야겠어. 슈퍼에.”
활기참이 떨어진 마티의 말투에 아로도 기운이 푹 꺼지는 듯 했지만, 뭐 저러다 말겠지 싶었다. 원래 마티란 놈이 머리 많이 쓰고 그런 놈은 절대로 아니니까.
요즘 상태가 조금 나빠 보여도 아주 잠시 그러고 말겠거니 했다. 삼재라도 걸렸나 싶다고 할까? 그런 거 자신은 절대로 안 믿지만. 그런 불확실한 것들은 더 더욱 믿기 싫었다.
“응. 마티. 그럼 얼른 사와. 안주로 내가 좋아하는 버터발린 오징어도 사오고. 아몬드랑 땅콩, 그리고 귤도 잔뜩 사와. 요즘 비타민 부족인지 안 그래도 건성피부가 다 말라간다고.”
“그래. 알았어. 너···. 어디 가면 안 돼. 하긴 뭐- 가고 싶어도 갈 수도 없을 테지만. 후훗.”
지금 전화를 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짧은 앞머리를 슬쩍 만지작거리고 있던, 마티의 그 뒷말이 점점 작아져가는 혼잣말과 같은 것이라 그것까진 잘 들을 수 없었던 아로였다.
“마티. 지금 ···뭐라고? 잘 못 들었는데.”
“아냐. 별 거 아냐. 금방 갔다 올 테니까. 기다리라고.”
아로는 자신이 입고 있던 양복이 구겨지든 말든, 바로 옆에 놓여있던 잘 개어놓은 이불 위로 널브러지듯 등을 기댄 채 편한 자세 그대로, 20여분 정도 핸드폰으로 어느 아이돌그룹의 신곡을 느긋하게 감상 중이었다.
“음.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네. 이 녀석들? 스타일은 몇 프로(%) 부족하지만. 이 녀석들은 다 살아남을지도 모르겠네. 그 험한 연예계 바닥에서···. 그러니깐 재밌는 거지만. 나 역시···.”
그러고 보니 자신이 이곳에서 머물다가 다른 곳으로 이사한지도 보름정도 되었다. 요 근래 일주일 정도는 W연예기획사의 새 프로젝트가 너무 낯설고 바빠서 그의 전화나 메시지를 거의 무시하다시피 했었다.
자신은 보수도 낮은 아르바이트생에 불과하니까 다른 녀석들보다 더욱 열심히 일해야 했다.
일하다 보면 그런 것들 죄다 잊어버리는 것도 보통이고 일반적인 일이니까. 같이 한집에서 살 때는 마티가 이렇게나 문자와 전화가 많이 하던 사람이 전혀 아니었는데, 자신이 이사하고 나서는 왠지 그 말수가 많아진 건가-했던 아로였다.
그러니까 마티가 전화와 메시지를 보내온 결론은, ‘만나서 밥 먹고 술 먹자!’는 거였고, 이리저리 일에 치이다보니 오늘에야 만나게 된 거였다.
오랜만에 얼굴이나 비출까? 란 가벼운 기분도 있었고, 자신이 고민을 토로할 때 그가 들어줬듯이 정말 심각한 고민이라도 생겨서 자신에게 상담이라도 받아보려는 건가-했던 거였다.
그쯤 갑자기 이 방의 문이 웬일인지 딸깍(?)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고, 술과 안주가 도착했고, 덩달아 마티도 도착했다.
“와. 더워.”
마침 그 마티는 아까 ‘슈퍼’까지 뛰어서 갔다 왔다-면서 땀에 젖은 윗옷을 시원하게 벗어제끼며 내게 들으란 들이 크게 말했다.
평소 ‘헬스장 죽돌이’였던 그답게 구릿빛 근육이 드러났고 아래론 데이트용으로 비싸게 주고 샀다던 예전에 자신에게도 자랑했던 그 아티스트 패션 바지(명품)를 입고 있었다.
뭔 단조로운 모자이크 같은 그래픽이 무채색에 약간의 포인트만 덧대어 우아하게 춤추고 있는 거랄까. 그다지 근육파인 그와 어울리는 구색은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아까 봤던 파릇한 10대 소년들로 구성된 그 남자아이돌에게 더 어울리는 핏이 살아있는 바지였다.
그땐 그냥 이왕 비싸게 주고 산 거 의리상 그냥 괜찮다고 해줬던 게 기억난다.
비록 지금은 알바생에 불과한 자신이지만, 이 연예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의상 공부는 필수였으니까. 일찌감치 명품이나 명품은 아니지만 간지 나는 것들에 대해선 바로 눈을 떠야하는 거였다.
그런데···.
그 ‘슈퍼까지’라면 보통 뛰어서 5분 아니었나? 나한테 무슨 어려운 부탁을 하려고?
지금껏 그는 동네 이곳저곳을 기웃대다가 일부러 슈퍼에서 집까지 오는 제일 긴 코스를 선택한 게 아닐까 하고 그거라면 대충 20분 정도 걸릴 테니까 하고 슬그머니 추측해보았다.
뭔가 중요한 말이 있다는 듯 바로 말을 보태지 못하고서 잠시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며 고민하던 마티가, 언젠가 자기가 술 먹고 떠들었던 그 여자 이야기를 기억하느냐면서, 그것에 내가 순순히 ‘응. 기억하지.’라고 말하자,
이제야 그는 진지한 눈빛을 하곤 자릴 잡고 앉아서 주섬주섬 말문을 열기에 이르렀다. 그 옆에서 나도 나름 안주와 술을 챙기고 앉아서 그의 말을 들을 준비를 했다.
그 후 마티는 혼자서 다 떠드는 수준으로 여기가 그의 발언대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래. 나도 알아. 그 여자··· 내가 먼저 찼어. 근데 며칠 후에 그냥 교통사고로 죽다니. 꼭 내가 그런 거 같잖아? 그래도 떠난 여자라 한 치도 미련 없었다고 쭉 생각해왔어. 그 여자가 먼저 날 두고 딴 놈이랑 바람피웠으니까. 오만정이 뚝 떨어졌었다고.
정말 웃긴 여자였어. 다시는 안 만나고 싶었다니까. 그 후로 난 예쁜 새 여자 친구를 만나게 됐고 우린 취미도 딱 맞아서 무척이나 잘 지내고 있었다고. 행복했다고. 우린 결혼까지 약속하는 사이가 됐다고.”
“어···, 그거 늘 하던 이야기네? 서론 너무 길어. 마티. 지겹다고.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 주지 않을래? 나도 조금만 마시고 갈 거거든. 오늘도 겨우 시간 낸 거라고. 내일까지 마감인 숙제가 잔뜩 있어.”
그저 자리에 앉아서 방금 딴 맥주 캔의 맥주를 꿀꺽꿀꺽 시원하게 삼켜대고 있는 아로, 마티와는 달리 전혀 심각하지 않았던 그, 손목시계까지 봐대며 시간을 재촉했다.
내가 그랬던 건 그냥 괜히 그래본 거였다. 이래야 마티가 서둘러 본론을 끄집어내지 않을까. 더는 아까운 시간을 좀 먹지 말아달라는 뜻에서 그랬던 건데.
근데, 지금 저 녀석은 의외로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눈을 부릅뜬 채 괜히 움켜쥔 자기 주먹을 방바닥에 쾅-하고 내리치고 있었다.
“그래도 들어보라고. 아로! 중요한 거란 말이야! 내 말에 제발 좀 집중해!”
“다 듣고 있다고. 진정 좀 해. 괜히 신경질은.”
“응···. 아로. 알았어. 본론 이야기 할 거야. 그렇지. 그 ‘문제’는··· 여기서 부터였어. 네가 내 앞에 나타나고 네가 여기서 지내고부터! 처음엔 나도··· 이런 행패나 부리는 못난 놈 따위가··· 아니었어.
오히려 나 스스로를 훌륭하다고 멋진 놈이라고 생각해왔지. 너한텐 말한 적 없지만, 의외로 난 자의식과잉이었다고. 세상사는 것도 다 만만했지. 다른 어떤 녀석들보다 잘나가고 있다고 자부해왔다고.
그런데 언젠가부터···였어! 그 언젠가부터···! 젠장! 네가 망할 그 ‘여자’로 보였어. 아니 그 여자가 너야. 바로 너였다고!! 하하!”
이때까지만 해도 마티의 그 말들이 오랜만에 만나준 자신을 겨냥한 그의 못된 장난이라고, 농담이 살짝 지나친 거라고만 생각했던 아로였다.
그렇게도 마티가 자신을 향해 심각하게 말하고 소리도 고래고래 질렀지만, 한편으로 저런 말을 하고 있는 절친의 말을 전혀 믿고 싶지 않은 자신에게 밀린 탓이라 그런 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워낙 연예계 바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물고 뜯고 싸우는 꼴을 많이 봐서인가? 익숙해져서인가? 어느덧? 저런 마티 모습이 모두 거짓된 연극처럼 여겨졌다.
마치 상대방의 따귀를 심하게 때린 뒤 괜히 ‘아 죄송해요. 제가 감정이 안 잡혀서. 감독님? 한 번 더 가죠. 부탁드려요.’라는 여배우와 앞서 뺨 맞은 남배우는 ‘왜··· 좋지 않았어? 왜 더 간다는 건데? 으아! 진짜! 후으으.’라고 했고,
다시 여배우는 ‘에이 부탁해용. 넵? 네에? 앙 대요? 넵?’라며 이쁜 얼굴을 들이대며 볼을 부풀리며 혀 꼬부라진 소릴 했고 그것에 맘이 스륵 풀려버린 남배우는 작게 웃어주며 ‘그럼 이번 한번만이야. 이제 더는 NG 안 돼. 알겠어? 연기 욕심도 어지간히 해.’라고 건네고 있는 그런 모습이 연상된다.
이런. 이런. 마티는 연기분야로는 못 갈 거야. 상은 꿈도 못 꾸겠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티는 요즘 꽤 잘나가는 신인 가수였다. 트로트 세계를 뒤흔들 ‘태풍’의 신예로 그렇게 불리면서. 외모보단 실력이 으뜸인 자칭 미남 절친이었다.
허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 트로트 분야에 ‘미남’의 의미는 어르신들에게 신뢰받는 인상을 풍기는 다소 참한 인상으로 옛날 어느 동네 도련님 같이 고지식하고 예의발라 보이는 것으로도 충분히 먹고 들어간다는 것으로, 외모빨로 피 튀기는 아이돌 세계에선 발도 못 붙일 그런 류의 괄호 안에만 적당히 들어가므로 마티는 절대 미남 발꿈치도 못 간다는 게 내 생각이다.
굳이 말하자면 동네잔치에 나오는 순박해 보이는 호감형, 뭐 그런 것들보다 이대로라면 그의 노래 실력은 점점 더 좋아질 것이란 건 안다. 노력형이니까. 저 녀석은.
지금 마티가 심각해 보이는 건 정말인데 자신은 직업놀이에 푹 빠진 채로 이럼 안 된다고 생각하며, 그럼에도 아직도 완전히 그런 말들을 믿지 못하는 자신과 조금 갈등하며, 그러다 그냥 이기적인 자신이 좋기에 마티를 향해 자신도 조금만 투덜거려 주기로 결정했다.
“그럴 리가-. 말도 안 돼. 전부 네 착각이겠지. 그딴 거 집어쳐. 마티. 넌 항상 술 취하면 그런 식이었거든? 네 예전 여자 친구랑 내가 어딘가가 닮았다면서···. 이제 그런 못된 장난 그만 둬줄래? 부탁이야. 나도 솔직히 말해 그딴 소리 들기 싫다고.”
그때, 탁-하고 앉아있던 자기 무릎을 쳐대던 마티, 그러면서도 아로에게서 그녀를 보고 있는 그런 허상 속에 마구 휘둘려지고 있는 자신을, 도무지 어떤 방식으로든 안정화 시킬 수 없어서 그게 분해서 화가 나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 댔다.
우지끈.
이내 다 마신 알루미늄 재질 맥주 캔이 그의 손아귀 안에서 힘없이 찌그러져갔다.
“나도··· 안다고. 네가 그 여자일 리가 없다는 것도. 하지만 그래도 널 그 여자로 생각하고 만다니, 이건 정말 이상한 생각이지. 나도 고민이라면 지겨울 정도로 해봤어. 몰래 찾아간 의사에게서 처방받은 약물로도 이건 도무지 고쳐지지가 않았어.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더 미칠 것만 같은 나날만 계속 됐어. 네가 그 여자로 보인다고 해도 난 남자는 딱 질색이라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겠지. 그런데 난 확실히 미쳐가고 있었어. 널 ‘필요’로 하고 있었어.”
“어디 아픈 거야? 약이 정말 안 맞아? 마티? 괜찮아? 그럼 그 병원 말고 다른 데 가보는 게 어때? 내가 한번 알아봐줄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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